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02
성명
한자 唐繼堯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대통령장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사 교관 양성을 위하여 30∼50명의 한인 청년들이 중국(中國) 운남성(雲南省) 곤명(昆明)운남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에 입학하여 수업 받게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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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탕지야오(唐繼堯)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면서 한국의 독립과 국권 회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특히 “한국인민(韓國人民)은 망국지민(亡國之民)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한국을 위하여 최소한도 2개 사단의 군관 인재를 양성하고 귀국 혁명을 원조할 것을 맹서”하기도 했다.

1924년에는 약 30명의 한인이 군사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하고 편의를 제공하였다. 1925년에도 육군강무당 제19기생과 신규 비행대에 한인이 입학 할 수 있도록 다방면으로 힘쓰기도 했다.

육군강무당은 탕지야오가 1909년 쿤밍(昆明)에 설립한 군사학교였다. 탕지야오는 일찍이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인물로 근대 군사교육을 받았으며 일본과 한국 모두에 연관이 있는 인물이었다. 육군강무당은 중국 근현대 주요 군사지도자를 배출하였다. 대표적인 인사로 주더(朱德)와 펑더화이(彭德懷)가 있다. 한인 독립운동가들 역시 육군강무당에서 훈련을 받고 무장독립투쟁에 헌신하였다. 이범석(李範奭)을 비롯하여 이준식(李俊植)·김관오(金冠五) 등이 모두 육군강무당 출신이었다.

일본 관헌은 탕지야오의 한국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명하고, 한국인 학생들이 강무학교에 수학할 수 없도록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탕지야오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우의를 저버리지 않고 한인 청년들이 군사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호법정부승인(中國護法政府承認) 한국임시정부(韓國臨時政府) 시말실기(始末實記)(민석린, 1942)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지나각지(在支那各地) (3), (4)
  • 운남육군강무당(雲南陸軍講武堂)과 한국민족해방운동(서만민⋅장자건, 2005)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탕지야오(당계요) 당계요 중국 윈난성(雲南省) 후이저현(會澤縣) -
본문
1883년 8월 14일 중국 윈난성(雲南省) 후이저현(會澤縣)에서 태어난 중국인이다. 6세 때 사숙(私塾)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904년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쿄(東京) 신부(振武)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8월, 쑨원(孫文)이 도쿄에서 조직한 동맹회에 가입하였고, 몇몇 사람과 함께 육군단(陸軍團)과 무학사(武學社)를 조직했다. 그해 11월 일본정부가 한중유학생들을 단속하는 규칙을 제정하자 다수의 중국유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는 취지로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였다. 여기에 동조하지 않고 1906년 신부학교를 졸업한 후 가나자와(金澤)의 제9사단 포병연대 견습생을 거쳐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8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6기로 졸업하고, 이듬해 귀국하여 윈난독련공소(雲南督練公所) 제조(提調), 강무당(講武堂) 교관 ・ 감독, 신군(新軍) 제19진 참모관, 74표(標) 제1영(營) 관대(管帶) 등을 역임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윈난의 동맹회원들은 리홍시양(李鴻祥)과 그의 집에서 비밀 회합을 갖고 호응할 준비를 하였다. 10월 30일 차이어(蔡鍔) ・ 리건위안(李根源)과 함께 윈난 독서(督署)를 공격하고, 이튿날 쿤밍(昆明) 봉기에 성공하여 성 전체를 광복하였다. 이후 대한운남군도독부(大漢雲南軍都督府)가 조직되어 군정부 ・ 참모부 양부의 차장에 임명되었다. 1912년 1월 북벌군사령으로 전군(滇軍)을 이끌고 출병하여 1912년 3월 초, 구이양(貴陽)을 점령하고 구이저우성(貴州省) 임시도독이 되었으며, 5월 구이저우성 도독에 정식 임명되었다. 1913년 위안스카이(袁世凱)에 반대하는 제2차 혁명이 폭발하였다. 그해 7월, 장시성(江西省)의 리러쥔(李熱鈞)이 가장 먼저 독립을 선포하였고, 8월에 쓰촨군(四川軍) 제5사 사단장 겸 충칭진수사(重慶鎭守使) 슝커우(熊克武)가 호응하였다. 이 때 전검연군(滇黔聯軍) 사령관에 임명되어 슝커우를 평정하는 공을 세우게 되었다. 1913년 10월, 윈난도독 겸 민정장으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양춘쿠이(楊春魁)가 다리(大理)를 점령한 사건이 발생하자 곧바로 진압하였다. 1914년 개무장군(開武將軍) 겸 윈난 순안사(巡按使)에 임명되었고, 얼마 후 독리군무(督理軍務)가 되었다. 1915년 10월 위안스카이로부터 일등개무후(一等開武侯)의 작위와 함께 매월 3만원의 보조금을 받았다. 이렇듯 위안스카이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지만 제제운동(帝制運動)이 시작되고 전국적으로 반원운동(反袁運動)이 거세지자 여기에 가담하였다. 1915년 12월 쿤밍으로 돌아온 차이어와 함께 반원호국(反袁護國)전쟁을 일으켜 윈난독립을 선포하고 토원(討袁)을 위한 호국군을 조직하였다. 본래 토원운동은 쑨원이 시작한 것으로 호국전쟁과 성격이 같았기 때문에 혁명파에게도 큰 힘이 되었다. 호국운동은 빠르게 발전하여 1916년 3월 22일 위안스카이가 제제를 취소하였다. 5월 8일 윈난 ・ 구이저우 ・ 광둥 ・ 광시 ・ 저장 다섯 성이 연합으로 광둥 자오칭(肇慶)에서 군무원을 조직하였는데 무군장(撫軍長)을 맡아 군국업무를 감독 조종하였다. 그해 7월 위안스카이가 사망한 후 첸춘쉔(岑春煊) ・ 량치차오(梁啓超) 등과 함께 리위안훙의 총통 계승과 국회 회복을 조건으로 군무원의 철폐를 선언했다. 이후 북양군벌 돤치루이(段祺瑞)가 임시약법을 파괴하면서 호법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호국군은 3개군에서 8개 군으로 확대되어 쓰촨까지 세력이 미치었다. 1911년 신해혁명부터 1916년 호국전쟁까지는 서남군벌의 잉태기라 할 수 있다. 호국전쟁 이후 전계(滇係)와 계계(桂係)를 중심으로 서남군벌이 정식 형성되었는데, 서남이란 윈난 ・ 광시(廣西) ・ 구이저우 일대를 가리킨다. 윈난이 전(滇)으로 약칭되고 윈난군벌이었기에 ‘전계’라고 불렸으며, 광시에 기반을 둔 계계의 루룽팅(陸榮廷)과 함께 호법운동에 참여했다. 1917년 8월 25일 광저우의 비상국회에서 군정부가 수립되어 쑨원을 대원수로 뽑고, 루룽팅과 함께 원수로 선임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18년 5월 18일, 광저우 비상국회는 서남군벌과 정학계(政學系)의 지지에 힘입어 대원수제를 총재제로 바꾸었다. 이때 루룽팅 ・ 쑨원 ・ 첸춘쉔 등 7인과 함께 총재로 선출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서남군벌은 반원운동을 계기로 혁명파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자신들의 세력을 키우는데 급급할 뿐이었다. 1918년 5월 충칭에서 쓰촨 ・ 윈난 ・ 구이저우 ・ 후베이 ・ 허난 5성 연합군회의를 소집하고 5성의 정국연군총사령(靖國聯軍總司令)에 취임했으며, 산시 ・ 후난 ・ 푸젠 등의 일부 군 수뇌들이 호응하자 다시 쓰촨 ・ 윈난 ・ 구이저우 ・ 후베이 ・ 후난 ・ 산시 ・ 허난 ・ 푸젠 8성연군총사령이 되었다. 1919년 11월 23일 남북화의가 진행되자 직계군벌 우페이푸(吳佩孚)와 군사밀약을 맺었고, 광둥 ・ 후난 ・ 광시 ・ 쓰촨 군벌 대표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0년 6월 1일, 폐독재병(廢督裁兵)의 여론이 거세어지자 독군 폐지를 선언한 후 폐관자치(閉關自治)를 선언했다. 그해 발생한 전천(滇川)전쟁에서 패하여 1921년 2월까지 사직을 압박받자 전월(滇越)철도를 이용하여 홍콩으로 피신하였다. 1922년 봄, 쑨원과 북벌을 준비하고 있던 광시 ・ 윈난 주둔군을 거액에 매수하여 윈난으로 되돌아왔다. 또한 윈난 남부의 비적(匪賊) 우쉬에셴(吳學顯)을 매수함으로써 3월에 윈난의 군정대권을 다시 장악하고, 연성자치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8월 1일 성정부를 개조하여 민치를 실행하고 「윈난성정부 임시조직대강」을 반포하였으며 윈난성장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윈난군을 5개의 건국군으로 확대 편성하고 스스로 쓰촨 ・ 윈난 ・ 구이저우 ・ 후베이 ・ 장시 ・ 허난 ・ 산시 7성의 건국연군총사령이라 불렀다. 1923년 2월, 쑨원이 광저우로 돌아와 대원수부를 세우고, 9월 북벌 참가를 촉구하며 부원수로 추천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1924년 11월, 쑨원의 북상을 기회로 광둥군벌 천중밍(陳炯明)이 광저우로 진공하자 3만여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광시성 난닝(南寧)을 점령하였다. 1925년 3월 12일, 쑨원이 베이징에서 사망한 후 3월 18일 윈난에서 부원수직에 취임한다고 통보하였다. 광저우정부가 이를 질책하며 토벌에 나서자 5월 홍콩대표와 비밀리에 광저우정부의 전복을 모의하였다. 6월 광저우정부가 먼저 광둥에 있던 윈난 ・ 광시군 수만 명을 괴멸시키고 8월에는 난닝 ・ 류저우의 윈난군까지 패퇴시켰다. 윈난은 해마다 계속된 전쟁으로 가렴잡세와 지폐 남발이 끊이지 않아 1926년 8월, 곳곳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북벌군이 연승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우페이푸 ・ 쑨촨팡(孫傳芳)과 연대하여 ‘반공과 공산당 토벌’을 내세운 민치당(民治黨)을 조직하였다. 1927년 북벌군이 중국의 절반을 석권하면서 전계의 군벌통치도 붕괴되었다. 그의 부하였던 롱윈(龍雲) ・ 후뤄위(胡若愚) 등 4인이 2월 6일 독재와 전제를 비난하며 군사정변을 일으킨 것이다. 이후 민치당이 해산되고 유명무실한 성무위원회 총재에 추대되었다가 1927년 5월 23일 쿤밍에서 병사하였다. 중화민국 초기의 정치는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신해혁명 이후 보수세력의 집권, 특히 군벌들의 할거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군벌의 공통된 속성은 투철한 국가관이나 정치관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무력을 배경으로 사적인 목적을 추구할 뿐이었다. 더욱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서슴없이 제국주의와 손잡고 매국행위를 일삼았다. 따라서 중국군벌이 한국독립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독립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거의 유일한 군벌이다. 한국과의 관계는 일본 유학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정부의 한중유학생 규제가 한국의 현실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귀국 길에 한국을 경유하면서 한국에 대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서울을 경유하면서 “거리를 거니는 학생을 보니 모두 생기가 있고 활발하고 영준하고 유능하여 결코 망국인 같지 않았다”라고 보았다. 이후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한국인은 망국민이 아니다. 반드시 조만간 구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한국독립지사들과의 직접 접촉은 반원운동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무렵 중국 혁명파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었던 한국의 인물은 신규식(申圭植)이었다. 그는 상하이(上海)에서 활약하고 있던 천치메이(陳其美)와 함께 토원운동에 직접 참가하였다. 이 때 두 사람의 접촉이 이루어졌으며, 그 관계는 대단히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 덕분에 신규식에게 많은 도움을 주어왔다. 1915년 중국으로 망명한 이범석(李範奭)이 다음 해 신규식의 추천으로 윈난 육군강무학교(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때 이범석과 동행한 인물로 배달무(襄達武) ・ 김정(金鼎) ・ 김세준(金世唆) ・ 최진(崔震) 등이 있었다. 이범석은 1919년 제12기로 포병과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이 되었는데, 신규식의 지시에 따라 만주로 옮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윈난에서 받은 군사훈련은 청산리전투에서 빛을 발휘하게 되었다. 신규식과의 관계는 김홍일(金弘壹)의 회고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한 김홍일이 군관학교에 들어갈 길을 모색하던 중 구이저우독군 뤼시엔스(劉顯世)의 아들 뤼강우(劉剛吾)를 만나 그의 추천으로 천다쥔(陳大均)과 함께 어렵게 구이저우군관학교로 가게 되었다. 가는 길에 광저우에 들렸는데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신규식을 방문하였다. 그는 며칠 후 김홍일에게 구이저우군관학교는 너무 교통이 불편하니 윈난의 육군강무학교로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했다고 한다. 김홍일은 뤼시엔스의 관계를 잘 알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며, 신규식과 더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1921년 10월, 임시정부는 국무회의 결의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인 신규식을 쑨원의 호법정부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광저우로 가던 길에 신규식이 홍콩을 경유하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재회할 수 있었다. 이때에 이별한지 오래 되었으며 지금 홍콩에서 만나니 퍽이나 유쾌하다는 말로 반가움을 표시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물어보면서 “만일 윈난으로 돌아가면 한국을 위하여 최소한도 2개 사단의 군관인재를 양성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하였으며, 실제로 적지 않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윈난에서 군사훈련을 받게 되었다. 당시 중국군벌들 가운데 가장 열렬히 한국독립을 지원해 주었는데, 특히 한국의 군사인재를 양성하는데 최대한의 편의를 제공하여 주었다. 윈난 강무당 출신의 한인들이 만주지역의 독립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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