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 1월 길림성 (吉林省) 유하현 (柳河縣) 에 정착 (定着) 독립운동기지 (獨立運動基地) 건설 (建設) 에 주력 (主力) 하여 1914년에는 유하현 (柳河縣) 의 교육기관 (敎育機關) 인 신흥강습소 (新興講習所) 교장 (校長) 을 역임 (歷任) 하며 인재양성 (人材養成) 에 기여 (寄與) 했고, 1915년 재만 (在滿) ‘광복단’ (光復團) 으로, 1919년에는 서로군정서 (西路軍政署) 창설요원 (創設要員) 으로 활동 (活動) 하였으며 1920년에는 ‘광복단’ (光復團) 의 서간도 지역 (西間島地域) 외교관 (外交官) 으로 농토 개척 허가 (農土開拓許可) 를 얻어내고 철혈광복단 (鐵血光復團) 유격 활동 (遊擊活動) 으로 항일 전쟁 (抗日戰爭) 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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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9권(1991년 발간)
경북 안동(安東) 사람이다.
1905년 이상룡(李相龍)·박경종(朴慶鍾) 등과 함께 가야산(伽倻山)에 들어가 의병활동을 위한 기지건설을 도모하였으나 동지들의 순국으로 무위로 돌아갔다고 한다.
1908년 2월 이상룡과 함께 대한협회 안동지회(大韓協會 安東支會)를 결성하고 협동학교(協東學校) 설립에 참여하여 구국교육운동에 헌신하였다.
1911년 1월 중국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에 정착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위한 기지건설에 주력하였고 1914년 유하현에 소재한 구국교육기관인 신흥학교(新興學校)의 교장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양성하였다.
1915년 동삼성에서 조직된 광복단(光復團)에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농작지도 등을 통하여 간도(間島)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는데 힘썼다고 한다.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창설요원으로 활동하였고, 이듬해인 1920년에는 광복단의 서간도지역 외교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정부 등과 교섭하여 농토개척에 대한 허가를 얻어내었으며 화룡현(和龍縣) 일대에서 군자금 모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37년 흑룡강성(黑龍江省)에서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2卷 247·248面
- 明治百年史叢書(金正明) 第3卷 75面
- 國外容疑朝鮮人名簿(總督府 警務局) 307面
- 獨立運動史(國家報勳處) 第5卷 131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