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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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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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한자 毛元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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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19. 3. 31 평북 정주군 정주읍 장날에 시위군중 2만 5천여 명이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가를 행진할 때 일경의 무자비한 발포로 사살 순국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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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3권(1987년 발간)

평안북도 정주(定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정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일으킨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날 신안(新安)·동주(東州)·고현(高峴)면민들은 읍성 동문(邑城東門)으로, 이언(伊彦)·복달(復達)·아이포(阿耳浦) 면민들은 남문으로, 임해(臨海) 면민들은 서문으로 들어와서 시위군중이 2만5천명이 넘는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시위군중은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이던 중, 출동한 일본 경찰·헌병과 충돌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은 잔인하게도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치던 최석일(崔晳一)의 양팔을 잘라 죽이고, 최석일을 대신하여 태극기를 주워들고 만세를 외치던 최사걸(崔士傑)도 짐승을 죽이는데 사용하는 쇠갈구리로 배를 찌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시위군중이 이같은 일제의 만행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시위를 벌이자, 일제는 드디어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때 선두에 있던 그는 흉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는데, 모원규(毛元奎)·모신영(毛信永)과 함께 한 집안에서 3명이 순국하는 비운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2권 451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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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모원봉 - 평북 정주(定州) 정주군 정주면 3.1운동
본문
1899년 4월 6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덕언면(德彦面) 대성동(大成洞)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31일 정주면에서 전개된 만세시위를 주도하던 중 사망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을 준비할 무렵 평안북도 서남부 해안에 위치한 정주군의 기독교계는 이승훈(李昇薰)에 의해, 천도교계는 김진팔(金鎭八)에 의해 사전에 연락을 받은 상태였다. 정주에서는 제일 먼저 정주면에서 3월 5일에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벌였다.정주면의 대규모 시위는 3월 31일에 천도교인의 주도로 일어났다. 천도교중앙총부의 지도자로서 활약하던 김진팔은 정주 천도교구장인 최석일(崔晳一), 곽산 천도교구장인 김경함(金庚咸) 등과 만나 정주면 장날인 3월 31일에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고 대중 동원과 시위 준비에 들어갔다.3월 31일 낮 12시에 일본인 거리에 있는 정주우편국 앞에 모인 시위대는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보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모신영(毛信永)·모원규(毛元奎) 등 친척들과 함께 참가하였고, 적극적으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신안면(新安面)·동주면(東州面)·고현면(高峴面)에서 온 시위대는 읍성의 동문(東門)으로, 이언면(伊彥面)·덕달면(德達面)·아이포면(阿耳浦面)에서 온 시위대는 남문으로 들어왔다. 임해면臨(海面)에서 온 시위대는 서문으로 들어왔다. 이렇게 모인 시위군중이 4,000여명이 넘었다.대규모 만세시위에 놀란 일본군 수비대는 총칼을 사용한 폭력적인 진압을 전개하였다. 수비대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치던 김사걸(金士傑)을 칼로 내리쳐 죽였다. 시위대는 일본군의 만행에도 굴하지 않았다.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멈추지 않자, 소방대가 갈고리를 휘둘렀고 수비대는 무차별 총격을 가하였다. 최석일이 태극기를 들고 행진을 계속하다가 수비대의 총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분노한 시위대와 함께 선두에서 지역 식민 통치의 상징적 기관인 면사무소에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부수는 등 격렬한 시위를 펼쳤다. 일본군 수비대가 다시 발포하였고 소방대는 사냥총을 쏘아댔다. 총격은 시위대가 남문에 도달할 때까지 그치지 않았다.이 날 수비대와 소방대의 폭력 진압으로 최소 28명, 최대 120명이 사망하였다. 선두에서 적극적으로 시위에 가담하였음으로 일본군 수비대의 총탄을 피할 수 없었다. 모신영·모원규 등 친척들과 더불어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이날의 인명피해는 1919년 만세운동 당시 일어난 전국의 만세시위 중 가장 규모가 컸다.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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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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