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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1월 19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창덕면(昌德面) 삼봉리(三峯里)에서 부친 김도식(金道湜)과 모친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교사였다고 하나 어떤 학교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동생은 김복돌(金福突)이다. 김종림(金鍾林)·김종린(金鍾麟)이라는 이명이 있다.흥사단원 이력서에 따르면 20세 때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갔다고 되어 있지만, 이민자 명부를 보면 1904년 12월 9일 몽골리아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했고 나이는 21세로 되어있다. 2살 연상의 처 박씨(朴氏)가 있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후 1918년 3월 10일 백엘리스와 결혼해 첫 딸과 두 아들(김진원과 김두원)을 낳았다. 두 아들은 태평양전쟁 때 미군으로 입대해 일본과의 교전에 참전하였다.하와이에 도착한 이후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였다. 그러다가 1907년 1월 2일 한시호·한재상·김운용 등 16명과 함께 알라메다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고, 유타주(State of Utah)의 솔트레이크(Salt Lake City)로 가서 철도 건설 노동자로 근무하였다. 당시 철도 건설 노동자 임금이 사탕수수 농장보다 2~3배 정도 높았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북미 대륙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1907년 1월 공립협회(共立協會) 솔트레이크지방회에 가입하였고 1908년 프레즈노Fresno로 노동 현장을 옮기면서 프레즈노지방회에도 가입하였다. 1909년 1월에는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하였다. 1909년 2월 1일, 하와이 합성협회(合成協會)와 공립협회가 통합해 국민회(國民會)가 탄생하여 같은 해 4월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산하에 샌프란시스코지방회가 결성될 때 법무원 대리로 선임되었다. 그 해 7월에는 총무 겸 학무원이 되었고, 1910년에는 총무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1908년 정원도(鄭源道)·김영일·김사옥 등과 함께 한인사회의 식산흥업을 위해 아세아실업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1909년 4월 회사명을 태동실업주식회사로 바꾼 후 1909년 7월 정재관(鄭在寬)·이상설(李相卨)을 해삼위(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해 회사의 자본금 5만 달러로 북만주 밀산 봉밀산 일대의 땅을 구매해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는 사업을 도왔다. 1910년 2월 선우탄·강호영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여관 겸 서양 음식점인 양찬관을 개업해 처음으로 개인 사업에 뛰어들었다.힘든 노동자로 살면서 1907년 8월부터 공립신보사를 돕기 위한 의연금을 내었고 국내에 10건의 『공립신보』를 발송하는 임무를 수행해 국권회복을 위한 노력을 뒷받침하였다. 1908년 3월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스티븐스(Durham White Stevens) 처단 의거 직후 공립신보사의 인쇄원이 되어 신문 발간에 도움을 주었다. 이후 1918년 1월 『공립신보』의 후신인 『신한민보』에 새로운 인쇄 식자기계 구입을 위해 200달러를 기부하였다(.1909년 학무원으로 있을 때 노동으로 번 돈으로 전도유망한 한인 청년들의 학비를 지원하였다. 1910년대에 북미지방총회장과 『신한민보』 주필, 상항한인감리교회 목사로 활동한 이대위와, 레드우드(Redwood) 비행학교에 수학 후 윌로스(Willows) 비행학교 교관으로 활동한 한장호 등 많은 한인 청년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였다. 1913년 10월 17일 안창호(安昌浩)가 설립한 흥사단(興士團)에 제34단우로 입단하였으며, 함경도를 대표한 흥사단 창립위원으로 피선되었으나 1920년대 들어 탈퇴하였다.1912년부터 고향에서 농사짓던 경험을 살려 북 캘리포니아주 프린스톤(Princeton)에서 쌀농사를 시작한 후 계속된 풍작과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세계 곡물시장에서 농산물 가격이 폭등해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1910년대 말 미주 한인사회에서 ‘쌀의 왕’이라 부를 정도로 쌀농사로 백만장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외에도 박영순·송종익(宋鐘翊)·임준기(林俊基)·정봉규 등 흥사단원들과 함께 1916년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세워 한인사회의 안정적인 경제 발전을 도모하였다.이후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가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직후부터 파리강화회의와 뉴욕 약소국동맹회의에 한인 대표를 파견하기로 하고는 특별의연금 모금을 시작하고, 1919년 3·1운동으로 대대적인 독립의연금 모금에 나서자 기꺼이 동참하였다. 한 번에 가장 많은 의연금인 1,345달러를 내어 한인사회를 놀라게 하였다. 당시 1천 달러 이상을 의연한 사람은 임준기(1,220달러), 신광희(申光熙)(1,045달러), 김승길(1,010달러)이었다. 당시 미주 한인들의 한 달 수입은 도시 노동자의 경우 많아도 60~80달러였다. 1919년 9월 독립의연금과 애국금 명목으로 의연한 금액은 총 3,400달러였다. 이러한 공로로 상하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준기, 신광희, 김승길에게 1920년 10월 16일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이름으로 특별히 감사장을 발송해 치하하였다. 1919년 9월 안창호의 상하이행으로 공석이었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에 새로 당선된 윤병구(尹秉求)로부터 재무로 임명을 받았다.한편 1919년 말 유럽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조소앙(趙素昻)이 이살음(李薩音)을 통해 후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재미 한인들이 미주 한인의 노동과 사회 발전을 도모한다는 목적으로 1919년 12월 2일부터 3일까지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사회개진당(勞動社會改進黨) 창립총회를 개최할 때 당수 이살음을 도와 집행부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노동사회개진당의 이름으로 조소앙에게 외교활동비 2,500달러를 보낼 때 도움을 주었다.1919년 10월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건너온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이 미국 각지를 순방하면서 독립전쟁론을 설파하고 군인양성을 주장하자, 북캘리포니아의 윌로스와 맥스웰 등지에서 쌀농장을 운영하던 신광희(申光熙)·이재수(李載洙) 등과 함께 군단 설립을 주도하였다. 설립될 군사 훈련의 방향을 독립전쟁에 활용할 비행사 양성에 두고, 1920년 2월 20일 자신의 농장지대인 윌로스에 노백린이 군단을 설립하는데 후원하였다. 이때 군단 운영에 필요한 막사와 시설들을 제공하였고, 군단에 참여한 학생들이 둔전병제로 훈련할 수 있도록 자신의 농장에서 일하도록 편리를 제공하였다. 또 비행기 3대를 구입하였고, 체계적인 비행교육을 위해 레드우드(Redwood)비행학교 교관 브라이언트(Frank K. Bryant)을 수석 교관으로 초빙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원한 규모는 40에이커의 부지 제공 외에 약 2만 달러 정도였다.1920년 7월 5일 윌로스에 대한인비행가양성소(大韓人飛行家養成所)란 이름으로 비행학교를 개소하자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후원을 위해 7월 25일과 26일 대한인비행가양성사 ‘장정’과 ‘취지서’를 공포하였다. ‘장정’에 따르면 모든 사무를 총재 중심으로 운영하고, 운영 경비는 사원들의 월례금 10달러와 기부금, 그리고 학생들의 학비로 충당하며 존속 기한을 2년으로 정하였다. 대한인비행가양성사는 총재 김종림(金宗林)을 비롯해 부총재 송덕용, 서기 강영문(姜英文), 재무 이재수(李在洙)·신광희 등 15명의 사원으로 구성하였다.비행학교 설립과 운영에 많은 공력을 쏟아 부은 것에 감동한 한장호를 중심으로 한 교관과 훈련생들은 1920년 8월 자체의 조직으로 대한인비행가구락부(KAC)를 결성할 때 총재인 그에게 은제 컵을 수여해 감사를 표하였다. 그런데 1920년 11월 북가주(北加州) 지역의 대홍수로 쌀농사에 큰 타격을 주자 재정 곤란으로 비행기 수리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다 1921년 4월 10일 박희성(朴熙成)이 레드우드비행학교에서 미국정부의 비행사 자격시험을 치루는 도중 상공에서 추락해 중상을 입자 동년 4월 중순 막대한 치료비와 임대한 비행기 수리비의 지원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최진하(崔鎭河)에게 호소하는 청원서를 보낸 후 비행학교를 폐쇄할 것을 예고하였다. 청원서를 받은 북미지방총회는 동년 4월 26일 만장일치로 동정하고 최대한 협조하기로 하여 중상 당한 박희성은 치료할 수 있었지만 비행학교는 끝내 폐쇄되었다.1920년 11월 중앙총회장 윤병구를 비롯해 홍종만·정몽룡(鄭夢龍) 등과 부동산 매매와 중개 업무를 담당하는 유니온식산회사(사장 윤병구)를 설립해 부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4월 30일 과일의 유통과 판매를 담당하는 리들리건제회사를 설립해 사장이 되어 총무 김정진김호(金乎) 재무 오충국(吳忠國)과 함께 사업을 전개하였다. 1923년 10월 한시호가 안재창(安載昌)이 덴버Denver에서 설립한 한인농척회사를 인수해 한인농상주식회사를 설립할 때 여기에 참여하였다. 1923년 맥스웰에서 열린 3·1절 기념식 때 「이제는 대동단결」이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3·1운동 이후 뜨거운 독립의 열정으로 시작한 미주 한인의 독립운동이 각 단체별로 분열되고 있고,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구심점을 잃어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상황이 이르자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대동단결을 부르짖은 것이다.1928년 6월 6일 나성(로스앤젤레스)에서 설립된 국어학교를 돕기 위해 학부형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29년 9월 국어학교의 발전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리들리, 딜라노의 유지들이 로스앤젤레스에서 아동교육기관을 조직하기 위한 발기위원을 조직할 때 나성지역을 대표해 참여하였다.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국어학교 운영이 크게 위축되자 1931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 공동회를 개최하고 나성국어학교를 후원하기 위한 9명의 교육위원 선출하였는데 이 때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국어학교 발전을 위한 후원금으로 292달러를 모금해 지원하였다.1929년 11월 일어난 국내 광주학생운동 소식이 미주 한인사회에 전파되자 뉴욕, 시카고, 중가주(리들리), 로스앤젤레스에서 국내 학생들을 돕기 위한 방안으로 한인공동회가 설립되었다. 이런 때 1930년 1월 30일 송헌주(宋憲澍)·박재형(朴在炯)·김중수·박경신·곽림대·강영승(康永昇)·황성택·김배혁(金培赫)·윤혁 등 27명과 발기회를 갖고 2월 9일 나성공동회를 설립해 위원장이 되었다. 설립 목적은 한국독립운동을 협조하며 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의 행복 증진에 두었다. 임원진으로 서기 곽림대, 재무 박재형이 선임되었다.1931년 9월 일제가 만주침략을 단행하자 나성한인공동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재개할 목적으로, 11월 9일 중가주한인공동회와 대한인국민회가 미주한인연합회를 결성할 때 동년 12월 묵경자성단과 참여하였다. 1935년 3월 최진하가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이 된 후 한인사회의 로스앤젤레스에서 지역 유지들과 간담회를 개최할 때 김정진·한재명(韓在明)·안석중(安奭中)·송헌주·손승관 이순기·송종익 등 21명과 참여하여 한인사회의 발전을 위한 방향으로 노인구제, 청년교양, 임시정부 후원을 3대 민족과제로 정하였다. 그리고 가장 역사가 깊고 정체성이 뚜렷한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합동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헌장을 개정해 각계의 인재들이 모여 활동할 수 있도록 기존 회장제를 위원제로 개편하였다. 새 총회관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신축하기로 하였다. 그 결과 로스앤젤레스를 비롯한 각지의 한인공동회는 대한인국민회의 지방회로 개편되거나 복설되었다. 그런데 새 헌장에 의거 대한인국민회의 집행부가 조직될 때 참여하지 않았다. 1939년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후원을 둘러싸고 대한인국민회와 완전히 결별하였다.중일전쟁 발발 직후 재미 한인사회에 중국인의 항일전 승리를 기원하고 적극 도울 방편으로 1937년 9월 뉴욕에서 중국후원회가 발기된 후 미국 각지에서 중국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런 중에 1938년 10월 중국 한커우(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결성되자 1939년 4월 뉴욕 한인들이 조선의용대후원회를 조직하고 후원활동에 앞장서자 미국 각지에서도 조선의용대를 후원하기 위한 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때에 1938년 1월 로스앤젤레스에서 나성한인연합중국후원회가 결성될 때 참여하였다. 1939년 8월 2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안석중·황사용·이경선·김강·신두식·변준호(卞俊鎬)·곽림대 등 34명과 조선의용대후원회를 발기할 때 발기인 대표 안석중과 함께 총무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기존의 대한인국민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경유하지 않는 조선의용대의 후원활동을 반대한다는 방침을 정하자 대한인국민회와 결별하였고, 흥사단에서도 출단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 나성지방회에 가입하였다.1940년 5월 김강·이경선과 함께 로스앤젤레스 대표가 되어 뉴욕 대표 남궁염(南宮炎)·이진일(李進日)·변민평과 시카고(Chicago) 대표 천세헌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안석중·김순권(金順權)·김강·이경선과 함께 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연합회 제1차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일화배척운동과 일본에 대한 금수품 수출금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9개 단체의 대표들이 모여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고 독립운동의 중심기관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만들었다. 동년 6월 15일 대한인국민회 나성지방회, 나성동지회, 조선의용대미주후원회연합회 등 3개 단체가 로스앤젤레스 대한인국민회 총회관에서 한인민중대회를 개최할 때 대회를 주관하였다. 당일에 독립금 650여 달러를 거두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지원하였다.1942년 6월 시카고에서 북미동지회대표회가 개최될 때 동지회 나성지방회 대표로 참석해 의장이 되었고, 북미동지회총지부라는 통합체 결성을 의결하였다. 그리고 동지회 3대 정강 중 ‘비폭력적인’ 운동 방침이 태평양전쟁시대 무장독립운동의 방향과 맞지 않는다고 동지회 중앙부에 삭제를 요청하였다. 동지회 발전을 이루기 위해 로스앤젤레스에 동지회 북미총회관을 마련하고, 1943년 4월 11일 헌관식을 거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로스앤젤레스는 북미 동지회의 중심지가 되었다.1945년 5월 26일 대한인동지회 제1회 미포대표대회 때 의장에 선출되었고, 1946년 1월 5일 제5차 동지회 연례대표회 때에 의장으로 선출되는 등 동지회의 발전에 앞장섰다. 해방 직후 이승만의 환국을 돕기 위해 동지회북미총회와 함께 6,873달러를 거두어 지원하였다. 동지회북미총회 기관지 『북미시보』의 발전을 위해 신문확장위원이 되어 기부금 모금운동 전개하였다. 1965년 7월 한국 중부 지방에서 일어난 수해로 많은 수재민이 발생하자 수해성금을 직접 보냈다. 이 일로 대한민국 정부는 1971년 광복절을 기해 감사장을 수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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