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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5년 2월 1일 충청남도 덕산군(德山郡) 장촌면(場村面) 막동리(幕洞里, 현 예산군 삽교읍 하포리 막골)에서 아버지 박명구(朴明九)와 어머니 온양 방씨(方氏)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자는 도일(道一), 이명은 남수(南壽), 아명은 용호龍(浩)이며, 천도교 도호는 춘암(春菴), 존호(尊號)는 상사(上師)이다.빈농으로 가난을 면치 못한 전형적인 상민 집안에서 자라나 11살에 한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15살부터 지리서나 의학서를 공부하며 풍수쟁이나 의관을 꿈꿨다고 한다. 1883년 초 충남 예산(禮山) 읍내 오리정(五里亭) 주막에서 김월화 부부를 통해 동학(東學)을 처음 접하였다. 곧바로 충청남도 목천군(木川郡)에 머무르던 최시형(崔時亨)을 찾아가 동학에 입교하였다. 1884년에는 충북 음성군(陰城郡) 가섭사(迦)葉(寺) 사은암에서 최시형의 지도하에 손병희(孫秉熙)와 함께 49일간 기도와 수련을 하였다. 이후 예산 지방을 중심으로 동학 포교에 힘썼다. 수천 명의 교인과 10여 개의 포(包)를 관할하는 동학 지도자로 성장하면서 서산(瑞山) 지방의 박희인(朴熙寅)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1892년 동학이 교조신원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자, 앞장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3년 2월 동학교인들이 서울에 올라와 궁궐 문 앞에 엎드려 상소할 때,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893년 3월 동학이 개최한 충북 보은집회(報恩集會)에서는 덕의포(包)를 이끄는 대접주에 임명되었다. 보은집회에 모인 동학교인들은 조선 정부를 향해 ‘척왜척양(斥倭斥洋)’, ‘민씨 척족 정권 축출’ 등을 요구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의 제2차 봉기에 참가하여 10월부터 해미(海美)·덕산·예산·온양(溫陽)·당진(唐津)·홍성(洪城) 등 충남 일대에서 정부군·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중 충남 당진군의 승전곡 전투와 충남 예산군의 신례원(新禮院)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0월 말 홍주성(洪州城)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도피생활에 들어갔다. 예산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에 토굴을 파고 살다가 청양(靑陽)의 칠갑산(七甲山)으로 옮겨 오두막집을 짓고 은거하였다.1897년 다시 최시형을 찾아가 동학교단에서 활동하였다. 1898년 4월 최시형이 체포되자 구명운동을 펼쳤으나, 그 해 6월 최시형이 교수형을 당하였다. 이때 유해를 수습하여 안장하였다. 최시형 사후에는 손병희를 교주로 받들었다. 1901년 이후 손병희가 일본에 망명하여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할 때는 심복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안도·황해도 등의 서북지방을 돌며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동학 포교 활동을 펼쳤다. 1904년에는 문명개화의 정치운동을 위한 민회인 대동회(大同會)를 조직하였다. 대동회는 중립회(中立會)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개명하였다. 1904년 펼쳐진 진보회를 통한 민회운동을 천도교에서는 갑진개화운동이라 부른다.1905년 12월 1일 동학이 천도교(天道敎)로 개편된 후에는 핵심적인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1906년에는 금융관장(金融觀長) 등의 주요 직책을 맡으며 충청도 조직 기반을 다지는 활동을 펼쳤다. 1907년 12월 10일 대도주(大道主) 김연국(金演局)의 다음 자리인 차도주(次道主)에 올랐다. 김연국이 일진회의 이용구李(容九)가 이끌던 시천교(侍天敎)로 이적하자, 1908년 1월 18일 4대 대도주가 되어 제일 먼저 교단 정비에 나섰다. 교당의 이전과 교구의 증설, 조직 체계의 개편, 각종 제도와 규칙의 제정·개편 등을 10여 년에 걸쳐 추진하였다. 교단 정비와 함께 대내외적인 교육계몽운동을 추진하였다. 대내적으로는 천도교 교리 교수와 함께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교리강습소를 전국에 700개 넘게 설치하였다. 교리강습소의 강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강습소를 열었으며, 지방마다 부인전교사·부인순회교사를 선발하여 여성 포교와 여성 교육에도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재정적 어려움에 처한 보성소학교(普成小學校)·보성중학교·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同德女學校)·양덕여자소학교(養德女子小學校)·문창학교(文昌學校) 등을 인수하여 경영하였다.1919년 만세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도교를 대표하여 만세운동을 이끈 손병희가 천도교 조직의 보호와 유지를 맡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심양면으로 만세운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2월 10일경 금융관장 노헌용(盧憲容)에게 명령하여 김상규(金相奎)에게 3만 원을 지급하였다. 2월 21일에는 만세운동을 준비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요구한 5천 원의 운동자금을 천도교 지도자 최린(崔麟)을 통해 제공하였다. 천도교는 헌금 대신 ‘성미(誠米)’라 하여 쌀을 내도록 하였는데, 1918년에는 교당 건축의 명목으로 수만 원의 특별 성미를 거두었다. 이렇게 모은 돈의 상당수가 만세시위 자금으로 쓰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천도교인의 결속력을 다지는 일에도 앞장섰다. 1월 5일부터 49일간 특별 기도를 실시하도록 하여 교인들을 결집시켰다. 49일 기도를 마친 뒤에는 2월 25일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의 오영창(吳永昌)을 비롯한 천도교 지도자 30여 명을 서울로 불러 만세운동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였다.『조선독립신문』 발간을 통해 1919년 만세운동의 대중화에도 족적을 남겼다. 2월 28일 『천도교월보』 사장 이종일(李鍾一)과 편집원 이종린(李鍾麟), 보성법률상업전문학교 교장 윤익선(尹益善)과 함께 독립선언의 전말을 담은 『조선독립신문』의 원고를 작성하였다. 이 원고를 이종린에게 전달하여 천도교가 운영하는 인쇄소인 보성사에서 공장감독 김홍규(金洪奎)를 시켜 약 1만 매를 인쇄하였다. 이 신문은 3월 1일 오후 2시 탑골공원에 모인 시위 군중에게 배포되었다. 일찍이 전국의 천도교 대교구에 설치한 인쇄기도 만세운동의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이 인쇄기 덕에 독립선언서를 대량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만세운동으로 천도교단의 재산이 압수당하자, 자금 마련을 위한 모금에 나섰다. 3월 5일 평안북도 강계(江界)·자성(慈城)·후창(厚昌) 등을 관장하는 대교구장 이정화(李晶和)와 강계천도교구의 간부 김명준(金明俊)을 불러 독립을 위하여 대표자 혹은 위원을 파리강화회의와 상하이(上海)에 파견하려는 계획을 알렸다. 또한 천도교단 재산의 압수 상황을 설명하면서 운동자금을 모집할 것을 지시하였다. 천도교인들에게는 교당 건축비 명목으로 걷지만, 실제는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리도록 하였다.1919년 3월 10일 『조선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등 만세운동에 관여하였다는 이유로 붙잡혔다. 집에 숨겨두었던 자금 70만 원도 압수되었다. 경무총감부에 송치되었고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으로 이른바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받고 다음날 1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풀려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밀리에 후원하였다.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의 천도교 전교실을 통해 자금을 제공하였다. 천도교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매개한 천도교 지도자는 최동오(崔東旿)와 신숙(申肅)이었다. 1921년 9월 태평양회의 개최와 관련하여 임시정부로부터 모종의 활동을 지시받았다는 이유로 대종사장 정광조(鄭廣朝), 현기관장 오상준(吳尙俊), 경성대교구장 장효근(張孝根), 천도교청년회장 정도준(鄭道俊)과 함께 경찰에 소환되기도 하였다.천도교 민주화운동에 의해 천도교 조직이 개편되면서, 1922년 1월 18일 다시 교주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천도교의 민주화를 둘러싼 보수파와 혁신파의 갈등이 격화되고 그 해 5월 손병희가 별세하자, 6월 6일 교주직을 사임하였다. 1925년 천도교는 또다시 자치운동을 추진하는 최린의 신파(新派)와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지속하려는 구파(舊派)로 갈렸다. 이때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이종린 등과 함께 구파에 가담하였다.1926년에는 천도교 구파의 최고 원로로서 구파 지도자 이종린·권동진, 천도교청년동맹 간부 박래홍(朴來弘)·박래원(朴來源) 등이 추진하던 6·10만세운동을 승인하였고, 1927년 1월에는 천도교 구파가 비타협 민족주의세력 및 사회주의세력과 연대하여 조직한 신간회(新幹會)에 참여를 후원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역할에 힘입어 1932년 다시 천도교 교주 자리에 올랐다.천도교 교주로서 멸왜기도운동(滅倭祈禱運動)이라는 종교적 민족운동을 이끌었다. 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일(地日紀念日)에 지방에서 올라온 천도교 구파 지도자들에게 비밀리에 일제의 패망을 재촉하는 기도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 지시에 따라 최준모(崔俊模)·한순회(韓順會)·김재계(金在桂)·김경함(金庚咸) 등이 황해도·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교인들에게 “개같은 왜적놈”을 소멸하고 독립을 달성한다는 내용의 ‘멸왜기도문’으로 기도하도록 전달하였고, 이에 따라 각지의 교인들이 멸왜기도를 행하였다.1937년 4월 4일 노환을 이유로 은퇴하였다. 그 해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8월 10일경 최준모·김경함·한순회 등과 상의하여 국권회복의 기회에 대비하여 활동 자금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희사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전 국토를 넷으로 나누고 간부들이 나서 비밀리에 324원을 모금하였다. 특별기도도 이루어졌다. 이 특별기도가 1938년 2월 17일 최택선(崔澤善)의 비밀 누설로 발각되는 동시에 1936년의 멸왜기도운동 역시 드러나 전국적인 검거 선풍이 일어났다. 천도교 지도자 수십 명과 교인들을 합하여 256명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5월 20일부터 모두 석방되고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 사건은 1936년의 멸왜기도사건을 문제 삼은 것이지만, 1938년에 발각되었으므로 ‘무인(戊寅)멸왜기도사건’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천도교 구파의 간부가 강제로 교체되었다. 붙잡혀 간 교인 중 김재계·손필규(孫弼奎)·이강우·김정삼 등 4명은 고문으로 출옥 후 사망하였다. 당시 멸왜기도운동을 주도하였음에도 84세의 병약한 노인이라 일본 경찰의 체포를 면할 수 있었다.1940년 4월 3일 오후 3시 35분 서울 내수동(內需洞) 자택에서 86세로 죽음을 맞았다. 천도교의 신구파가 합동대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을 남겼다. 4월 7일 오전 9시 내수동 자택에서 정광조의 집례로 성복식(成服式)이 집행되었고, 10시에 천도교대교당에서 교회장으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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