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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740
성명
한자 盧伯麟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1993년 0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일본(日本) 경응의숙 보통과(慶應義塾普通科)육사(陸士)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육군정령(陸軍正領)(대령(大領)) 관립무관학교장(官立武官學校長). 교육국장(敎育局長)으로 후진 육성(後進育成)진력(盡力)

2. 1919년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後) 상해(上海)에 망명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조직하고 군무총장(軍務總長)이 됨.

3. 그 후 해삼위(海蔘威)로 갔다가 1925년 상해에서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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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황해도 송화(松禾)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뛰어나서 장군감이라고 촉망받았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가, 상경하여 1895년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윤치성(尹致晟)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경응의숙(慶應義塾)을 수료하였다.

이어 1898년에 성성(成城)학교를 졸업하고, 다음 해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900년에 귀국한 그는 육군 참위에 임관되어 한국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그 뒤 정령(正領)까지 승진하였으며, 육군무관학교장, 헌병대장, 육군연성(硏成)학교장, 군부(軍部) 교육국장 등으로 한국군 육성에 주력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기울기 시작한 국권은 1907년 마침내 군대를 해산하기까지에 이르렀다. 그는 실의와 비운을 안은 채 조국의 운명을 안타까워하였으며, 1906년에 안창호 이갑(李甲)·전덕기(全德基)·양기탁·안태국(安泰國)·이동녕·이동휘·조성환·신채호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독립운동 전초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또한 그는 고향인 송화(松禾)에 민립학교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고, 이어 1908년에는 김구(金九)·최명식(崔明植)·김홍량(金鴻亮) 등과 함께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를 조직하여 구국교육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 의해 마침내 국권이 침탈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1910년 6월 그는 박용만(朴容萬) 등과 하와이 오아후 가할루지방에서 국민군단(國民軍團)을 창설하여 김성옥 허용과 함께 별동대 주임으로서 3백여 명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4월 10일 군무부 총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승만·안창호·박용만·이동휘·김규식과 함께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고 확신하고, 1920년 2월 20일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이는 이곳 교포인 김종린(金鍾麟) 등의 적극적인 재정지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설립 초기에는 비행기 2대, 미국인 기술자 1인과 비행사 6명을 교관으로 하였으나 생각했던 것만큼 큰 호응을 얻지는 못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직에 있으면서, 계속 미국에 머물러 비행학교 육성에 종사하여 1920년 7월에는 제1회 졸업생 25명을 배출하였고 1922년 6월에는 학생이 41명에 달하였으며, 1923년에는 1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비행기도 5대로 늘어났으며, 비행기에는 무선통신장비까지 갖추게 되었다.

한편 그는 미국에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못하였으나, 1920년 1월에 "전국민이 광복군 전투 대열에 참가를 당부"하는 군무부포고 제1호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상해로 돌아온 그는 1921년 2월 국민대표회 문제로 이승만과 안창호가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이의 중재에 나섰으나 별다른 효과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안창호와 시국대책을 논의하던 끝에 임시정부가 소련과 연합해야 할 것이라는 토의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서 노태연(盧泰然)·도인권(都寅權)·김훈(金勳) 등 무관학교 출신인 열혈청년들과 함께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주창하는 한편 일반외교 활동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성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1922년 1월에는 독립운동 선상에서 변심(變心)한 자와 소련 정부로부터 수령한 독립운동 자금을 공산계열의 조직을 위하여 사용한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 등을 성토하는 임시정부포고 제1호를 국무총리 대리 신규식(申圭植),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교통총장 손정도(孫貞道) 등 각료들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다. 동년 7월에는 국민대표회의 등의 개최에 따른 독립운동 단체의 분규와 알력을 수습하기 위해서 안창호 김덕진(金德鎭)·최일(崔日)·한진교(韓鎭敎)·최창식(崔昌植) 등 주요 인사들과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하여 통일된 의견과 행동으로 조국광복에 매진할 것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또한 동년 10월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하여 군무총장 명의의 격문 등을 작성하여 경북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이던 국내 특파원이 체포되기도 하였는데 이를 의용단사건(義勇團事件)이라고 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의 지명으로 국무총리 대리로 선출되었으며, 1923년 1월에 정식 국무총리로 추대되어 1924년 4월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1924년 12월에는 대통령대리 겸 국무총리에 박은식(朴殷植)이 추대되고 그는 다시 교통 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 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으며, 교통 겸 군무총장에 임명되었으며, 1925년 3월 대통령 이승만이 탄핵 면직되고 후임에 박은식이 당선되자 박은식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로 추천하여 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임명하였으며, 교통 겸 군무총장직을 겸직하였다.

이렇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던 그는 상해에서 병을 얻어 1926년 1월 22일 한 많은 일생을 마치게 되니, 임시정부에서는 정부요인 및 학생 등 8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인성(仁成) 학교에서 성대한 장의식을 거행하고 정안사로(靜安寺路)의 공동묘지에 안장하였다.(1993년 유해봉환, 서울현충원 안장)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57면
  • 기려수필 239·240·247·31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59·450·465·88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0·65·609·709·734·736·737·74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143·150·206·310·327·330·338·342·343·376·407·408·440·451·456·495·518·529·535·541·550·577면
  •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84·108·117·124·16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5·16·167·177·178·431·432·437·448·449·450·452·453·460·462·472·480·486·597·755·833·931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091면
  • 조선민족운동연감 10·11·167·174·188·18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52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75·91·92·344·347·44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36면
  • 고등경찰요사 15·84·87·89·95·96·130·184·208·209·28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271·315·327·37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655·65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27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121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51·72·147·219·238·310·358·403·51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06·220·223·240·242·66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10·71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7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1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노백린 자 : 경보(景輔), 호 : 계원(桂園), 이명 : 노진방(盧鎭邦) 황해 송화(松禾) 국민대표회의, 의용단사건
본문
1875년 1월 10일 황해도 풍천군(豊川郡) 풍천면(豊川面) 성상리(城上里, 현 황해도 송화군 풍해면 성상리)에서 부친 노병균(盧秉均)과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어렸을 때 이름은 진방(鎭邦)이었으나, 뒤에 백린(伯麟)으로 바꾸어 불렀다. 자는 경보(景輔)이고, 호는 계원(桂園)이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서울 계동(桂洞) 1번지(현, 중앙 중·고등학교)에 거주한 데서 ‘계원’이라 불렸다.1880년 6세 때부터 14세까지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비롯한 『사략』·『통감』 등을 배웠다. 1876년 1월 이른바 병자수호조약(丙子修好條約)이 체결되어 일제가 조선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도 어린 시절부터 총명한 기지로 학문에 힘쓰고, 뛰어난 무예(武藝) 기질을 지니고 있어 주위 사람들로부터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으로 촉망받았다.1895년 조선 정부는 부국강병책의 일환으로 일본에 유학생을 선발해 파견하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응시하여 윤치성(尹致晟)·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이조현(李組鉉)·어담(魚潭)·어윤적(魚允迪)·원응상(元應常)·유문환(劉文煥)·김형섭(金亨燮) 등과 함께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때 뽑힌 관비유학생은 모두 114명이었는데,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위해 인천항(仁川港)을 출발하기 전에 단발(斷髮)하였다. 4월 7일 일본에 도착한 일행은 6월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설립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게이오의숙에서는 일본어를 비롯한 기초 교육과정을 이수하였는데, 1895년 6월에 입학하여 이듬해 8월에 졸업하였다. 이어 장차 무관이 되고자 사관 예비학교 성격을 지닌 세이조학교(成城學校)에 윤치성·김희선(金羲善) 등 20명과 함께 입학하여 1898년 8월에 졸업하였다. 이 시기 국내에서는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발생하고, 1896년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일어났다.이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학업을 지속하여 1898년 11월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이듬해 11월 제11기로 졸업하였다. 임관과 동시에 도쿄(東京)에 소재한 보병 제1연대와 제3연대 포병대와 공병대에서 견습사관 생활을 시작하였다. 일본에 유학한 청년 장교들의 목표는 귀국하여, 부국강병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한제국 정부는 이들에게 귀국을 지시하거나 봉급 등을 마련해주지 않아 하루하루의 생계마저 곤란하였다. 정부에 이러한 사정을 탄원하기 위하여 어담·윤치성·김성은(金聖恩) 등과 유학생 대표로 국내로 돌아왔다.1900년 6월에 귀국하였는데, 그 해 7월에 대한제국 육군 참위(參尉)로 임명되었다. 일본 유학 5년 만에 육군 장교로 부국강병의 기틀을 다지게 된 것이다. 1901년 4월에는 김희선·김형섭·김성은 등과 함께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 교관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908년 육군무관학교 교장을 사임할 때까지 대한제국 간성이 될 사관 양성에 매진하였다.1904년 4월 부위(副尉)로 진급하였고, 8월부터 군제의정소(軍制議定所) 위원을 맡았다. 그 해 9월 정위(正尉)로 승진되어 학도대장에 보임되었다.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생도 교육에 한창일 때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1904년 10월 윤치성과 함께 군부대신 권중현(權重顯)을 수행하여 관전위원(觀戰委員) 자격으로 일본군을 따라 중국 뤼순(旅順)·다롄(大連)·선양(瀋陽) 등의 전선을 시찰하고 11월 27일 귀국하였다.1905년 4월 참령(參領)으로 승진되어 잠시 무관학교 학도대장에 보임되었고, 7월에는 장교와 하사관 재교육 기관인 연성학교(鍊成學校)로 전직되어 교관과 교성대장(敎成隊長)을 맡았다. 그 해 12월 부령(副領)으로 진급하여 육군 헌병대장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정령(正領)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연성학교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군부(軍部) 고위 인사들과 마찰을 일으켜 1907년 4월 이른바 군기문란죄로 정직 처분을 받았다.2개월 후 징계가 면제되면서 군부 교육국장을 맡았다. 이어 육군각병과조규전범편찬위원장(陸軍各兵科條規典範編纂委員長)에 보임되었고, 8월에는 사관 양성의 최고책임자인 육군무관학교 교장에 임명되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24일 한일신협약을 통해 내정을 장악하고 8월 1일 전격적으로 군대 해산을 감행해 대한제국의 군대는 해산당하였지만, 무관학교는 명목상으로 존속되었기에 교장을 맡게 된 것이다. 결국 1908년 5월 무관학교장을 사임하였다.일본에서 귀국한 후 무관 양성에 주력하면서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이미 1906년부터 서북지방 우국지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서우학회(西友學會)에 가입하여 교원 양성에 나섰으며, 1907년 12월에는 보성중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학생들에게 상무정신을 고취하였다. 이 시기 안창호(安昌浩)와 교류하며 같은 군인 출신이었던 이동휘(李東輝)·이갑·유동열 등과 함께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 창건에 참여하였다. 1907년 11월에는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흥사단은 유길준(俞吉濬)이 국민들의 교육 확대 방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조직한 것이다.육군무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권회복방안을 모색하다가 1908년 11월 고향인 풍천으로 내려갔다. 황해도에서도 안악(安岳)을 중심으로 교육구국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풍천에 광무학당(光武學堂)을 설립하여 문무쌍전(文武雙全) 교육을 실시하였고, 이 지역 학회인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에도 가입하였다. 해서교육총회는 면(面) 단위마다 소학교를 설립하여, 황해도 일대 교육을 촉진시키고자 하였다. 1909년 개최된 제2차 총회에서는 회장으로 선출되어 지역 사회 교육 진흥에 앞장섰다.한편, 경제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실업 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1909년 9월 퇴역한 장교들과 함께 대한공업회(大韓工業會)를 조직하였다. 대한공업회는 그 해 10월 대한흥업회(大韓興業會)로 명칭을 바꾸고 가죽 제품 제조 회사를 차리기로 방침을 세웠다. 단발령 이후 신식 복장이 유행하면서 가죽 구두 수요가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유학 동기인 윤치성과 가죽 제품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고 기술자를 영입하기 위해 직접 일본에 다녀왔다. 이외에 식료품점, 철공소, 금광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벌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으나, 밀려오는 일본 자본의 공세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하고 이에 반대하고자 하는 계획도 마련하였지만, 일제의 삼엄한 경계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그 해 1월에 발표된 ‘회사령’은 그동안 지속해 왔던 실업 활동도 어렵게 만들었다. 회사를 계속하려면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는데, 여기에서도 탈락하였다.국내에서 활동이 어렵게 되자, 국외로 망명을 모색하였다. 5년이 넘게 은둔하는 것처럼 지내다가 1916년 7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여기서 약 2개월간 체류하면서 각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그 해 10월 여권도 없이 유학생 신분으로 위장하여 상하이(上海)에서 출발하는 배를 타고 12월 초에 하와이 호놀룰루(Honolulu)에 도착하였다.하와이에서 박용만(朴容萬)이 설립한 대조선국민군단(大朝鮮國民軍團) 별동대 주임으로 군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15년 창설된 국민군단은 1917년 재정난으로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독립군 양성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자, 한인 단체와 언론을 통해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8년 11월 『태평양시사(太平洋時事)』를 창간하여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며, 한국의 절박한 사정을 국제 사회에 알리고 동포들에게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데 주력하였다.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각지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한제국 장교 출신의 무관 경력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그 해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에서 군무부 총장으로 이름을 올렸고, 9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하면서 군무총장(軍務總長)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당장에 국내나 중국으로 돌아가 군사 책임을 맡을 수 없는 처지였다. 우선 미주 한인사회에 자신의 독립전쟁론을 전파하기 위해 1919년 10월 하와이를 떠나 시애틀을 시작으로 시카고·뉴욕·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 한인사회 순방에 나섰다.1920년 1월 샌프란시스코 방문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는 대대적인 환영회를 개최하는 동시에 그의 독립전쟁론에 대해 찬사와 지지를 보냈다. 이때 주장한 ‘독립전쟁론’은 독립을 위해서 전쟁을 치러야 하지만,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외교도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쟁과 외교에 앞서 우리 민족의 통일이 우선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으며, 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할 것도 당부하였다.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미주 순방에서 동포들에게 독립전쟁론을 펼치면서, 우선 군인 양성계획을 실행에 옮길 기회를 갖게 되었다. 대한인국민회 총무를 맡고 있던 곽림대(郭林大)는 캘리포니아에서 군인 양성을 제안하였으며, 윌로우스(Willows)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던 김종림(金宗林)·이재수(李在洙)·신광희(申光熙) 등은 군사운동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를 통해 윌로우스에 비행가 양성을 위한 군단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김종림을 비롯한 재미 한인들의 경제적 지원과 당시 일본을 능가할 공군력에 대한 호의적인 인식과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미국 각지의 비행학교에 입학해 비행술을 연마하는 한인 청년들이 있었고, 김종림은 실습용 비행기 구입과 군단 운영에 필요한 경비로 2만 달러를 출연하고 40에이커 규모의 토지를 제공해 비행훈련소를 설립하는 기반이 갖추어졌다.1920년 2월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임시정부 국무총리인 이동휘에게도 보고되었다. 그 해 6월 윌로우스 비행학교에 연습용 비행기 2대가 도착하여 실전을 방불케 하는 훈련에 돌입할 수 있었다. 이처럼 비행학교 운영에 필요한 준비를 거의 마치자, 임시정부 군무총장으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미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1920년 7월 호놀룰루로 가서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 등과 교류하면서 중국으로 갈 준비를 하였고, 1921년 1월 출발해 2월 2일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2월 18일 민단사무소에서 거행된 환영회에는 대통령 이승만을 비롯하여 각부 총장과 교민 300여 명이 참석할 정도로 환영을 받았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독립신문』은 “총장은 과연 대장군의 기상이 있어 한번 호령하매 가히 만군(萬軍)을 움직이고 한번 검을 휘두르며 족히 적중을 멸하겠도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에 답하여 자신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비행사 양성을 위한 학교의 설립을 보고하고,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대동단결하여 투쟁할 것을 강조하였다.하와이에 있으면서도 군무총장 명의로 임시정부의 기본적인 군사정책을 발표하였다. 1920년 1월에 발표한 군무부 포고 제1호에는 군대양성과 편성을 통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겠다는 자신감이 드러나 있었다. 이러한 군사 위주 정책은 대통령 이승만과 갈등을 빚는 요소로 작용하였다. 이미 이동휘는 1921년 1월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고, 학무총장 김규식과 노동국총판 안창호도 사퇴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에 임시정부의 혼란이 계속되자, 대통령 이승만과 정부 각료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승만은 1921년 5월 20일 태평양회의를 대비한다는 구실로 미국으로 돌아갔고, 신규식(申圭植) 국무총리 대리를 비롯하여 이동녕(李東寧)·손정도(孫貞道)·이시영(李始榮) 등의 남은 국무위원들과 임시정부의 국정을 책임지게 되었다.1922년 4월 자신을 제외한 임시정부 국무위원 전원이 사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태평양회의가 한국인들에게 실망만 남긴 채 종료되자,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이 가중되었고 임시정부도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 와중에 새로운 독립운동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가 일어나면서 상하이 정국은 혼란에 빠졌다. 1922년 9월 25일 국무총리 대리를 맡았던 신규식이 사망하였다. 이에 그 해 10월 국무총리에 취임하여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벗어날 수 있었다.1923년 1월 5일 국무원 포고를 발표하여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하였다. 포고문에는 그 해 1월 3일부터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대응과 기대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국민대표회의는 회의가 계속되면서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로 의견이 갈려 각지에서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또 다시 갈리는 결과를 낳았다. 국무총리로서 이들 각 파의 의견을 조정하고자 시도하였지만, 사태는 오히려 극단적인 대립으로 흘러갔다. 마침내 김구(金九)가 내무총장에 취임하고 1923년 6월 6일 내무부령을 발표하여 국민대표회의를 해산시켰다.임시정부는 국민대표회의 결렬로 정부 존립의 위기는 넘겼지만, 계속되는 재정난과 갈등으로 파행을 거듭하였다. 대의기구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도 정족수 미달로 개원조차 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24년 4월 국무총리로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였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이동녕을 국무총리에 임명하였고, 이동녕 내각에서 군무총장과 참모총장을 맡았다. 이동녕 내각은 당시 상하이 한인 사회의 소요로 오래가지 못하였다.1924년 12월 박은식(朴殷植)이 새롭게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어 박은식은 1925년 3월에 열린 제13회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탄핵, 면직되고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박은식의 천거로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되면서 군무총장과 교통총장을 겸임하였다. 당시 임시정부의 인력난이 그만큼 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중책을 맡으며 독립운동계의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힘썼으나, 지병인 심장병과 정신 쇠약으로 정상적인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1925년 들어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고, 언어 장애와 시력도 잃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926년 1월 22일 사망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공소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4-03-12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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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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