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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98
성명
한자 崔振東
이명 崔明祿, 崔喜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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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1. 1919년에 도독부군사령관(都督府軍司令官)으로 취임(就任)했으며 다시 이후 도독부(都督府)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합작(合作)시키다.(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05, p321)

2. 대한독립군사령관(大韓獨立軍司令官)으로 1920년 6월 4일에는 복강삼태랑(福江三太郞)(헌병 군조(憲兵軍曹)),신미이랑(新美二郞)(남양수비대장(南陽守備隊長)), 안천 소좌(安川少佐)(제19사단(第十九師團))등의 부대(部隊)봉오동 부근(鳳梧洞附近)전투(戰鬪)에서일본군(日本軍) 120(名)사살(射殺)하였다.(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監)p83)

3. 1920년 10월 20일 만주 화양현 삼도구(滿洲和陽縣三道溝) 청산리 부근(靑山里附近)에서 제1연대장(第一聯隊長) 홍범도(洪範圖), 제2연대장(第二聯隊長) 김좌진(金佐鎭) 제3연대장(第三聯隊長) 최진동(崔振東)연합(聯合) 부대(部隊)일군(日軍)충돌(衝突), 일본군(日本軍)손해(損害) 사자(死者) 6백여 명(六百餘名)대 전과(大戰果)를 거두다.(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監)p92)

4. 그 외 북간도(北間島)아령방면(俄領方面)독립당수 등(獨立黨首等) (部) 3,4천명(千名)을 거니리고 대활약(大活躍)하였다. (동아일보(東亞日報) 192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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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함북 온성(穩城)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왕청현 대전자(汪淸縣大甸子)에서 중국 순경국장(巡警局長)으로 근무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그의 3형제는 조국광복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하여 왕청현 춘화향 봉의동(春華鄕鳳儀洞)에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를 설치하고 무장독립군을 훈련시켰다. 도독(都督)에는 이 호(李虎)를 추대하고 그는 재정부장이 되어 활약하다가, 뒤에 부장(府長)으로서 도독부를 지휘하여 함북 온성일대의 적 기관을 파괴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대대적인 활약을 벌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국경지대에서의 국민회(國民會)와 도독부의 괄목할 만한 교전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강변8군임시교통국 참사(江邊八郡臨時交通局參事)인 오동진(吳東振)과 김응식(金應植)에게 약 40일간의 출장조사를 명할 만큼 커다란 전과를 올리었다.

이에 대한국민회의 대한독립군과 도독부군이 통합의 필요성을 느끼고 합류하여 일대군단(軍團)을 이루었으니 당시 도독부군은 3백여명이었다. 그는 사령관에 선임되었으며, 부관에 안 무(安武), 연대장에 홍범도(洪範圖)가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종성(鍾城), 온성, 무산(茂山) 등지를 8회나 습격하여 일 헌병대를 파괴하였다고 한다.

1920년 1월에 그는 광복단(光復團) 단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사양하고 동단의 고문으로서 광복단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동년 5월에는 재북간도 독립운동단체의 정신적인 통일과 독립전선의 일원화를 기하기 위하여 신민단(新民團)·군정서(軍政署)·광복단(光復團)·국민회(國民會)·의군부(義軍府) 등의 대표들과 만나 협의를 하기도 하였다.

1920년 6월 4일에는 대한독립군을 지휘하여 봉오동(鳳梧洞) 부근에서 일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와 제19사단 부대를 맞아 전투를 벌여 일군 120여명을 사살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동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김좌진(金佐鎭)등과 삼도구(三道溝)에서 연합작전회의를 갖고 청산리독립전쟁의 협동작전을 논의하였으며, 청산리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하였다.

동년 11월 청산리전쟁 후에 동녕현 삼차구(東寧縣三 口)에 병력을 증강시켰으며, 12월에는 밀산(密山)에서 북로군정서(徐一), 대한독립군(洪範圖), 국민회(具春先), 신민회(金聖培), 의군부(李範允), 혈성단(金國礎), 야단(野團 : 金笑來), 대한정의군정사(李圭)를 비롯하여 도독부를 대표한 그가 모여 협의한 결과 10개 단체를 통합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고, 본격적이 무장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군의 '간도출병'으로 노령으로의 이주 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이에 하바로브스크 소재 공산군 제2군단과의 교섭으로 독립군의 자유활동을 보장받고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고려혁명군관학교를 세워 간부를 양성하고 그는 대한총군부(大韓總軍府)의 외교부장이 되어 활동하기도 하였으나, 러시아정부의 배반으로 '자유시참변'을 당하고 독립군단은 와해되고 말았다.

1922년 11월에는 고려혁명군 약 1천명이 백계 러시아군을 추격하여 혼춘(琿春)방면으로 축출하였으며, 그는 김규면(金圭冕)과 함께 부대를 인솔하고 우리나라 국경방면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에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일군이 이미 철수하고, 백계 러시아군도 모두 축출되었기 때문에 우리 독립군은 이용가치가 없어져 다시 숙청대상이 되니 부득이 만주방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는 1923년에 김응천(金應天)·김규식(金奎植) 등과 북간도 지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1922년 8월에 독립군단의 재통합을 위하여 9개 단체 대표들이 이범윤(李範允)을 임시단장으로 추대하고 통합취지서를 발표하던 뜻을 이어받아, 1923년 9월에 이범윤(李範允)·김좌진(金佐鎭)·김규식(金奎植)·현천묵(玄天默)·강국모(姜國模) 등 중진들이 다시 소수분(小綏芬)에서 군사연합회의 준비회의를 열고 북만지방을 비롯하여 남만과 노령방면의 모든 단체를 통합대상으로 하여 독립전선의 통일을 꾀하였다.

그는 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나중소(羅仲昭)·김규식(金奎植) 등 5명과 함께 회장선정(會場選定)위원으로, 그리고 1924년 1월에는 동 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4년 1월의 동아일보에 의하면 길림성장(吉林省長)이 동녕현지사(東寧縣知事)에게 보고하기를 "그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도독부의 독립군의 수가 4,119명이요, 장총 4,059정, 기관총 27정, 대포가 4문등이라."고 하였으니, 그 규모가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24년 9월에 마침내 동녕(東寧)경찰서에 체포되었다는 동아일보 보도를 끝으로 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선민족운동년감 83·92·115·117·150면
  • 한국독립운동사
  • 고등경찰요사 113·114면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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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대전현충원 대전광역시 유성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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