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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2
성명
한자 姜基東
이명 姜基周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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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병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통령장

관련정보


2011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장단(長湍) 고랑포(高浪浦) 헌병보조원으로 옥문을 열어 다수의 의병을 구출하였음

2. 1908년 의병장 이은찬(李殷贊)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오수영(吳壽泳), 강원호(姜元浩) 등과 왜병을 토벌할 것을 죽엄으로 맹서하고 여러 방면으로 격전하다가 원산에서 체포되어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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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경기도 장단(長湍) 고랑포(古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07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과 군대해산이 일제에 의하여 단행되자 뜻 있는 많은 의사들이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고 무기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의병들은 정규군인 관군과 일군에 의하여 속속 체포 사살 당하였다. 이때 강기동이 근무하던 장단에는 의병투쟁하다가 체포된 인물들이 다수 투옥되어 있었다. 그가 옥문을 열어 주어 많은 의병들을 구출할 수 있었으며,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의거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의병 대장이 되어 각지의 의병장들과 유기적 관계를 맺었다. 강기동의진은 주로 양주(楊州), 포천(抱川)을 중심으로 활약하였다. 그리고 그의 주변 일대 특히 경기도의 양주 포천을 위시하여 삭령(朔寧) 마전(麻田) 황해도의 토산(兎山) 금천(金川) 재령(載寧) 등지에서는 연기우(延基羽) 전성서(田聖瑞) 이한경(李漢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서 강기동은 연기우의 의진과 서로 비밀 연락 아래 밀착된 전략을 전개하였다. 연기우는 군인 출신 의병장으로서 군대 해산 직전 강화도 진위대(鎭衛隊)에서 봉기하여 가장 장기간 투쟁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이들은 이미 현상금이 걸린 사람들로서 밀정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부대를 소수 정예부대로 편성하였다. 1908년 이은찬(李殷瓚)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에 접하고 6월에 강기동은 남학서(南鶴瑞) 오수영(吳壽泳) 임명달(任明達)과 함께 격문을 띄우고 병사를 모아 대일 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것을 맹서 하였다. 10월 22일 포천으로 들어가서 1910년 2월 포천에서 왜병과 접전하였다. 이 시기에 강기동 의진의 좌군인 전성서(田聖瑞) 휘하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은 포천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았다. 3월 6일 강기동은 이용규 등과 더불어 영평(永平)으로 들어가 활약하니 일인들은 현상금을 천냥으로 올렸다. 4월 29일 강기동은 전성서와 함께 양주(楊州)에서 적군과 교전하였으며, 5월 16일에는 양주 노원(楊州 盧原)에서 교전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가 체포되었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피신할 수 있었다. 이 즈음 강기동은 강두필(姜斗弼)과 함께 병력 1백여 명의 의병부대를 거느리고 강원도 일대를 넘나들었다.

1910년 8월 29일 소위 한일 합방 후 일제는 11월 25일부터 12월 20일에 걸쳐 임시 파견대 1개 대대와 헌병 경찰대의 연합 병력으로 경상도 일월산(日月山)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安東) 예천(醴泉) 영춘(永春) 봉화(奉化) 일대에 대한 포위 작전을 전개하여 의병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910년 9월 하순에서 11월 초순에 이르는 40일간에 걸쳐 황해도내 1개 여단(旅團) 병력을 집중하여 대살륙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같은 의병부대에 대한 작전과 아울러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 소속 애국 계몽운동가들의 거점을 소탕하였다. 일이 이렇게 급진전되어 가자 상당수의 애국지사들이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만주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이즈음 강기동은 계속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다가 그 후 북간도로 이동해 가던 중 1911년 2월 원산(元山)에서 체포 압송되어 서울 용산(龍山)에서 총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매천야록 498, 513, 524, 526, 531, 533, 535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566, 685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28, 37, 55, 57, 492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1권 83, 142, 144, 148, 152, 161, 172, 175, 540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51, 155, 66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기동 기주(基周) 서울 명동 -
본문
1884년 3월 5일 서울 명동(明洞)에서 태어났다. 이에 대해 일제 자료 『폭도에 관한 편책』에는 1909년 당시 29세로 되어 있고, 『독립유공자공훈록』에는 경기도 장단(長湍) 출신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이명으로 강기주(姜基周)가 있다. 서울에서 거주하던 중 일가가 경기도 부평군(富平郡) 수탄면(水呑面) 오류동(梧柳洞)으로 이사하자, 식솔을 거느리고 오류동으로 이사하였다.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김해 김씨와 결혼하여 슬하에 준복과 복동 등 1남 1녀를 두었다고 한다. 성장 후 일본군 기병대에 입대하여 근무하였다. 1908년 6월 헌병보조원 제도가 시행되자, 일본어를 능통하게 구사한 덕분에 헌병보조원으로 발탁되어 경기 양주군(楊州郡) 고안헌병분견소(高安憲兵分遣所)에서 근무하였다. 계봉우(桂鳳禹)의 「의병전」과 박은식(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는 경기 장단군 고랑포(高浪浦)에서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한 것으로 되어 있고, 『매일신보』에는 구(舊) 한병(韓兵) 오장(伍長)으로 근무하다가 군대 해산 후 일본 헌병보조원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길인식(吉仁植) 등 의병 2명이 일본 경찰에 붙잡혀 고안헌병분견소에 수감되자, 1909년 1월 15일 옥문을 부수고 길인식 등 2명을 탈출시켰다. 탈출 시 총 2정, 권총 1정, 총검 5정, 탄환 300발을 탈취하여 이은찬(李殷瓚)이 이끄는 경기 동북 지방 최대의 연합 의병부대인 창의원수부(倡義元帥部)에 투신하여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투신 후 헌병보조원 시절 입수한 정보를 바탕으로 의병장 이은찬에게 우편물 탈취를 통한 군자금 확보 계획을 건의하였다. 당시 우편물에는 서신(書信)뿐 아니라 재무서(財務署)에 납부하는 현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일본 헌병대 내부 사정을 창의원수부에 제공함으로써 반일 투쟁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투신한 지 1개월여 만인 1909년 2월경 일약 의병장 이은찬의 부장(部將)으로 임명되었다. 1909년 2월 한 달 동안 19회에 달하는 전투를 전개한 창의원수부는 2월 25일 양주군 석적면(石積面) 항동(項洞) 부근의 돌압산전투(乭壓山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창의원수부는 2월 27일 양주군 덕도리(德道里) 전투에서 일본 헌병대 3개 부대로부터 공격을 당해 탄약을 전부 소모할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이후 양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의 대대적인 작전으로 인해 3월 초순 이은찬이 이끄는 창의원수부는 해산하였다. 3월 31일 이은찬의 체포 소식을 듣자, 4월 초순 남학서(南鶴瑞)·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함께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이은찬이 사용하던 ‘창의원수부 중군장’ 칭호를 그대로 계승하여 의병부대를 재조직하였다. 1909년 6월 초순경 양주군 건천면장(乾川面長)과 금촌면장(金村面長) 앞으로 격문을 발송하여 “먼저 일어서 창의한 것이 민권의 선진일 뿐이니 앉은 자 일어선 자 어찌 모두 의병이 아니겠는가?”라면서 이후 경기 동북 지방에서 가장 활발한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5월 초순부터 일본군이 경기 포천·영평(永平)·연천(漣川) 일대에서 이른바 의병 토벌 작전을 단행하자, 일본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피하고 군자금 확보와 군기(軍器) 마련 등 조직 강화에 주력하였다. 한 달간 조직을 정비한 뒤, 6월 8일 의병 20여 명과 함께 양주군 바뎅이촌에 집결하였는데, 이를 알아챈 고안헌병분견소 헌병들이 강기동 부대를 추격하였다. 양평군(楊平郡) 남종면(南終面) 우천동(牛川洞)으로 퇴각하여 추격해 오는 헌병대원들과 우천동 부근 한강 연안에서 교전을 벌였다. 7월 6일 1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양주군 건천면(乾川面) 독정동(獨井洞)에서 퇴계원(退溪院)·후평리(後坪里) 혼성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고, 7월 11일에는 20여 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양주군 둔야면(芚夜面) 누원(樓院)에 있는 밀고자 전기홍(全基弘)의 집을 방화하였다. 7월 25일 15명의 의병을 이끌고 양주군 둔야면 도봉산 천황사(天皇寺)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8월 1일 부하 24명과 함께 둔야면 누원에서 양주군 우편전신취급소 체송부를 습격하여 모자와 피복을 탈취하였다. 8월 5일 양평군 남종면 분원동과 우천동에서 군자금 모집과 보급 투쟁을 하고 광주 방면으로 이동하던 중, 양주군 노원면(蘆原面) 갈매동(葛梅洞)에서 양주서 순사와 고안헌병분견소 공동 토벌대의 기습공격으로 부하 1명이 사망하고 수 명이 부상당한 끝에 퇴각하였다. 8월 29일과 9월 1일에는 적성군 남면(南面) 입암리(笠岩里)의 송성개(宋聖介)와 영평군 북면(北面) 동자일리(東自逸里)의 한인 교사 이춘경(李春敬) 등 밀고자들을 납치하였다. 이처럼 6월부터 8월까지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벌인 세 차례의 전투를 제외하면 의복·식량·군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보급 투쟁과 밀고자 처단 등의 활동을 벌였다. 9월 13일 22명의 의병을 이끌고 퇴계원에서 헌병대와 전투를 벌였다. 9월 중·하순경에는 양평군 면종면(面終面) 매곡(昧谷)을 습격하였으나, 양주군 마석우리(麻石隅里) 헌병대의 추격을 받아 1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한강을 건너 양주군 하도면(下道面) 백월리(白月里)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곳에서 다시 고안헌병대의 습격을 받자, 한강을 건너 양평군 북면으로 이동하였다. 9월 하순경 20여 명의 부하를 대동하고 가평군(加平郡) 외서면(外西面) 대성리(大成里) 화랑동(花浪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9월 한 달간 일본군과 17차례에 걸쳐 교전하였다. 1909년 10월경 일본군이 집중적으로 의병 토벌 작전을 단행하자, 포천으로 이동한 연기우(延基羽) 의병부대와 연합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은찬의 창의원수부 시절 함께 활동하고 연기우 의병부대에서 참모로 활동 중인 홍원유(洪元裕)에게 서신을 보내 합동을 제의하였다. 이어 좌군(左軍) 전성서(田聖瑞)를 통해 10월 15·16일경 포천 ‘솔몰시장’에서 회합할 것을 전달하였다. 그러나 1차 회합을 시도하던 10월 5일 만남은 실패하였다. 10월 25일 포천군 내소면(內所面) 이동교리(二東橋里)에서 서울 필동(筆洞) 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퇴각하였다. 11월 9일 1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외소면(外所面) 상송우(上松隅)와 하송우(下松隅) 중간 지점에서 강원도 김화(金化) 수비대 15명과 일본인 6명으로 이루어진 일행을 급습하여 일본인 1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1월 중순 연기우 의병 부대와 연합 부대를 구성하여 11월 22일 포천군 내소면 이가팔리(二加八里)에서 포천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교전한 뒤 1910년 1월까지 다시 헤어졌다. 12월 16일 5명의 부하와 함께 포천군 외소면 상송우리 여인숙을 급습하여 일본인 2명으로부터 권총 1정과 탄환 95발을 획득하였으며, 12월 18일에는 부하 70여 명과 함께 포천군 송우리 등지 주민들이 추수한 곡식을 모아,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았다. 1910년 1월 재차 연기우와 연합하였다. 1월 9일 연기우 지휘하에 강기동 부대는 외소면 송우리에서 영좌(領座)에게 일본 헌병에 신고할 것을 명령하고 상송우리 방면에 40여 명을 잠복시켜 의정부·포천 간 우편물을 빼앗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곳 이장이 포천헌병분견소에 밀고한 까닭에 우편물호위대가 원산가도 서쪽으로 우회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연기우·강기동 연합 부대가 포천 일대를 자주 기습하자, 일제는 1월 13일 포천헌병분견소로부터 서남 20리 부근에 송우리파견소를 신설하고 16일부터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연기우 부대와 분산한 강기동 부대는 2월 26일 포천군 외처면(外處面) 수내리(水內里)에서 양주헌병분견소와 의정부헌병분견소로 이루어진 연합 수색대와 충돌·교전하여 사망자 2명을 내고 패퇴하였다. 이때 강기동 부대는 둘로 분산하여 각기 포천군 일동교리(一東橋里)와 양주군 고주내면(古州內面)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강기동 부대가 공세를 취하며 전투를 전개하자, 일제는 현상금 천금(千金)을 내걸었다. 또한, 2월 10일부터 두 달에 걸쳐 순사와 밀정들이 변장하여 광주·포천·양주 지방을 샅샅이 뒤지는 등 체포에 혼신을 기울였으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3월경부터 좌군 전성서 휘하의 한인수(韓仁秀)와 김순복(金順福)을 체포하는 등 강기동 부대에 타격을 입혔다. 이에 따라 소규모 부대 중심의 유격전으로는 일본군을 궤멸시킬 수 없음을 깨닫고 군자금을 모금·저축하여 국외로 망명한 다음 독립군으로 전환하고자 결심하였다. 3월 8일 의병 14명과 함께 양주군 별비면(別非面) 덕릉리(德陵里)에서 의정부분견소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3월 24일에는 외소면 초동리(初東里)에서 양주군 고주내면을 정찰하고 돌아오던 송우리헌병파견소 헌병들을 기습하여 헌병 1명에게 총상을 입혔다. 4월 14일 37명의 부하를 인솔하고 포천군으로 행군하던 강기동 부대가 서면 묵동(黙洞) 신기리(新基里)에서 수색 중인 마전(麻田), 적성(積城) 헌병분견소의 연합대와 충돌하여 교전을 벌였다. 이후 부대를 분리하여 부하 17명만 대동한 4월 28일 양주군 어등산면(於等山面) 이리(二里)에서 유산리헌병분견소 헌병들과 교전하였다. 같은 달 29일에는 전성서 부대와 합류하여 양주군 어등산면 일리(一里)에서 유산리헌병분견소 헌병과 재차 격전을 벌였다. 이즈음 일본 헌병사령부에서는 체포를 위해 현상금 200원을 내걸었다. 5월 7일 포천군 외소면 추산동(秋山洞) 연령(蓮嶺)에서 정찰 중이던 송우리헌병분견소 대원과 1시간가량 교전하였으며, 5월 15일 양주군 노원면 간촌(間村)에서 의정부분견소 토벌대와 교전 끝에 토벌대원인 상등병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그러나 갈수록 강화되는 토벌대와의 항전 속에 의병부대가 세력을 잃어가자, 부대를 해산하였다. 5월 27일 서울로 잠입하려다 일본 경찰에 잡혔으나 순사를 넘어뜨리고 탈출하였다. 일제는 강기동과 그의 부대를 없애기 위해 6월 2일부터 약 1개월 예정으로 포천군 무림리(茂林里)·길모리(吉毛里)·능현(陸峴)과 양주군 송현리(松峴里) 4개 지역에 각각 하사 1명, 상등병 2명, 보조원 6명으로 구성된 임시 파견소를 설치하고 이른바 토벌을 단행하였다. 이때 우익장 강원호(姜元浩) 등 3명이 양주군 어등산면 부근에서 서울 필동헌병에 붙잡혔다. 6월 18일 10여 명의 부하와 함께 양주군 구지면 평촌에서 군자금을 모집한 뒤 양평군 남종면 우천리로 이동하는 등 일본군을 피해 강원도로 이동하였다. 그 뒤 강두필(姜斗弼)과 연합하여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금성군 창동(蒼洞)에서 두 부대로 분산하여 회양(淮陽)과 통구현리(通口縣里) 방면으로 진출하는 등 점차 북상하였다. 이은찬의 뒤를 이어 경기 동북방에서 게릴라전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의병장이었다. 계봉우는 『조선역사』에서 “의병장의 가장 저명한 자를 든다면 해산 군인 출신 민긍호(閔肯鎬)·연기우(延基羽)·강기동 등이 있다”라고 평하였다. 1910년 8월 국권피탈(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9월 하순부터 11월 초순까지 40일간에 걸쳐 황해 지역 내에서 ‘의병대토벌작전’을 벌이자, 이를 피해 북간도로 망명하려고 이동하였다. 1910년 11월 일본군 사령부는 강기동 체포를 위해 500원의 현상금을 내걸었다. 1911년 2월 12일 원산항으로 잠입하여 일본인 음식점 오처루(吾妻樓)에서 식사 도중 원산경찰서 경찰에게 붙잡혔다. 일본 경찰은 2월 16일 오사카상선회사(大阪商船會社)의 기선(汽船) 제이남월환(第二南越丸) 편과 열차를 이용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17일 밤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에 도착하자 즉시 경성제일헌병분대 유치장에 구금되었으며, 18일부터 심문을 받았다. 심문은 고안분견소 헌병보조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분견소장이었던 다쓰구치(龍口) 군조(軍曹)가 맡았다. 심문이 끝난 후 3월 16일 용산 일본군 특별군법회의에 넘겨졌다. 4월 17일 오전 8시 용산 일본군 행형장(行刑場)에서 경무총장을 비롯한 일본군 고위 관계자들이 입회한 가운데 사형이 집행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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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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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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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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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조형물 항일독립운동기념비 경기도 파주시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3 연천군 항일독립운동 기념탑 경기도 연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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