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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년 (음)6월 18일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대구면(大救面) 송천리(松泉里, 일명 소래마을)에서 아버지 언순(彦淳)과 어머니 무장(茂長) 김씨 몽은(蒙恩) 사이에서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본명은 상진(常眞) 혹은 진상(眞常), 이명은 근포(槿圃)이다. 소래교회의 부설로 출발한 소래학교(해서제일학교의 전신)에 1899년 입학, 수학하고 1903년 졸업하였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1905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1906년 숙부들이 있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숙부인 김용순(金容淳)과 김필순(金弼淳)이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고 올라와 세브란스병원 맞은편에 김형제상회(金兄弟商會)를 운영하고 있었다. 김필순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이 상회를 중심으로 애국지사들과 함께 구국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1906년 언니와 고모들이 다니던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1910년 교명이 바뀐 정신여학교를 제4회로 졸업하였다.
졸업한 뒤 곧 전남 광주의 수피아여학교(須皮亞女學校)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해 8월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실력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권 회복의 지름길이라고 믿고 후배 여성의 교육에 전념하였다. 1912년 첫 일본 유학길에 올라 히로시마(廣島)여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약 1년 만에 귀국하여 모교인 정신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5년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東京)의 동경여자학원(東京女子學院) 본과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본과를 졸업하고 고등과에 진학하였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5년 동경에서 조직된 여성단체로 재일 여자유학생간의 친목 도모와 여성교육운동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회장으로서 첫 사업으로 최초의 여성을 위한 종합 잡지 성격을 띤 기관지 『여자계』를 발간하여 여권 신장과 여성평등 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어 도쿄에 친목회 본부를 두고 일본 각지에 지회를 두는 형식으로 조직을 강화해나갔다. 이후 이 친목회를 중심으로 황에스더(黃愛施德)·나혜석(羅惠錫)·차경신(車敬信) 등과 함께 일본의 한국 여성유학생계를 이끌었다.
한편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사회는 자유민권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확대되던 시기였다. 이때 식민지 지배를 당하고 있는 약소민족을 독립시켜야 한다는 미국 대통령 의 민족자결론이 소개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일본 유학생들은 지금이야말로 독립운동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곧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비밀리에 추진한 것이 바로 2·8독립선언이었다. 친목회 일부 동지들과 함께 조선독립청년단에 가입하고 회장으로 활동비 30원을 지원하였다. 1919년 2월 8일 도쿄의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개최된 2·8독립선언식에 참가, 만세를 부르고 귀교하였다. 활동비 30원을 지원한 이유로 학교에서 일본 경찰에 붙잡혀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2·8독립선언 이후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2·8독립선언서를 필사하여 몸에 지니고 2월 17일 귀국길에 올라 2월 21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후 보성사(普成社)의 사장 이종일(李鍾一)을 찾아가서 거국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는 등 각계 인사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과 시의성을 역설하였다. 자신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여자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기 위해 황해도에서 활동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났다. 3월 2일 이화학당 기숙사 박인덕(朴仁德) 방에서 여성지도자들과 함께 모여 항일 여성단체 조직과 활동 방향 등 향후 대책을 논의하는 등 여학생의 만세 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3월 6일 정신여학교에서 3·1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의 유치장에 갇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조사가 끝난 뒤 서대문감옥으로 송치되어 옥고를 치르고 7월 가석방되었다. 8월 보안법 위반에 대한 경성지방법원 예심재판에서 면소방면(免訴放免)이 결정되었다.
서대문감옥에서 출감한 뒤에 고문의 후유증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건강이 회복되자 모교인 정신여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19년 9월 여성지도자 16명이 정신여학교 자신의 숙소에 모였다. 출옥을 위로하고 축하하는 다과회 명분이었지만, 기존의 애국부인회를 바탕으로 새롭게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의 조직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7시간의 난상토론 끝에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장 황에스더, 서기 신의경/김영순, 재무부장 장선희, 교제부장 오현주, 적십자부장 이정숙/윤진수, 결사부장 백신영/이성완 등의 임원과 각 지부장을 선출하였다. 기존의 재무부를 축소하고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신설한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가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부상자 치료를 위해 대한민국적십자회를 조직하자, 이에 맞춰 적십자부를 신설하였던 것이다. 결사부 신설은 일본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즉각적으로 전장에 참여하기 위한 준비활동이었다.
회장에 선출되어 부인회의 활동 목적, 취지서, 각 임원의 임무, 본부 및 지부 규칙 등을 동지들과 함께 작성하였다. 특히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내는 취지문은 직접 작성하였다. 이 취지문은 1919년 11월 1일부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앞으로 모금된 군자금 2,000원과 함께 송부되었다.
비밀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는 본회를 조직하고 활동한 지 한 달 만에 회원 수가 2,0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하와이와 만주까지 지부를 설치하고 본부와 국내외의 각 지부에서 모금된 독립운동자금 6,000원을 임시정부에 보냈다. 그러나 11월 동지 오현주의 배신으로 비밀 조직이 탄로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관계자 전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불었다.
경북경찰국 고등계의 주도로 시작된 탄압으로 전국에서 약 70명이 체포되었다. 장선희, 신의경 등과 함께 정신여학교에서 붙잡혀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었다가 다시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송치된 부인회 임원과 회원들 중 52명이 신문을 받고 그중 43명은 불기소 방면되었다. 결국 부인회 핵심 간부 황에스더, 장선희, 이정숙, 김영순, 유인경, 신의경, 백신영, 이혜경 등 9명과 함께 대구감옥으로 송치되었다. 부인회 회장으로서 여성이 감당하기 힘든 온갖 고문을 당한 후 대구감옥으로 송치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일제는 그의 건강 상태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하여 1920년 5월 병보석을 허락하여 석방하였다.
병보석으로 풀려나온 뒤 대구 동산의 선교사들의 주거지로 거주가 제한되었고, 외부인의 면회를 일체 금지당했다. 1920년 6월 병세 악화로 불참한 가운데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7월 다시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의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도 항소하여 일제에 맞서 끝까지 법정투쟁을 전개하였다. 12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았다. 1921년 1월 다시 상고하였다. 4월 요양을 위해 서울 성북동 농가에 월세방을 얻었다. 6월 경성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항일 여성지도자를 그대로 둘 수 없다고 판단한 임시정부와 지인들에 의해 망명이 추진되었다. 특히 임시정부 특파원 윤응념(尹應念)과 선교사 매큔G. S. McCune(한국명 尹山溫)은 망명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마침내 1921년 7월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하였다. 세브란스병원을 퇴원한 후 인천에서 배를 탔으나 고문 후유증과 심한 뱃멀미로 거의 혼수상태 속에서 겨우 중국 산동성(山東省)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시 한 달만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여 고모부 서병호(徐丙浩) 집에 머물며 요양하였다. 다소 건강을 회복한 11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 주최로 열린 환영회에 참석하면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22년 2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구(金九)와 함께 여성으로는 최초로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난징(南京)의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여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였다. 난징에 있는 동안 여자유학생을 중심으로 1923년 1월 대한여자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런데 상하이에 도착했을 당시 독립운동계는 이념, 노선, 지연 등 여러 이유로 분열, 갈등하고 있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임시정부의 외교 노선에 대한 문제로 임시정부를 대신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자는 창조파(創造派)와 임시정부의 잘못된 점만을 고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크게 양분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및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두 참여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대표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막식에 참석하여 수백 명의 국민대표자 앞에서 개막 연설을 하였다. 이어 개최된 시국문제 토론회에서도, “임시정부는 수만의 피로 성립되었고 다수의 국민이 믿고 따르는 정부이므로 잘못된 것은 개조해서라도 이 정부를 중심으로 통일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뜨거운 논쟁은 아무런 합의안을 내지 못하고 결국 결렬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직후인 1923년 6월 중국 여권을 가지고 미국 유학을 위한 두 번째 망명길에 올랐다. 7월 12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총회장 최진하(崔鎭河) 등의 영접을 받고 편집장 백일규(白一圭)의 집에 여장을 풀었다. 7월 22일 샌프란시스코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 주최의 환영회, 7월 25일 새크라멘토Sacramento의 교민환영회, 8월 4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와 대한여자애국단 주최의 환영회 겸 기념식 등에 참석하여 조국 독립을 위해 진정 필요한 것은 실력 양성과 독립 의지의 통일이라고 역설하였다.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활동을 마치고 한인 교포가 많아 거주하는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갔다. 여기서 약 1년 동안 진학준비를 위해 필사원, 가정부, 도서관 서기 등의 일을 하며 생활비와 학비를 벌었다.
1924년 9월 미주리Missouri주 소재 파크Park대학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1927년 사회학을 더 공부하고자 시카고대학 대학원 연구학생으로 1년간 수학하였다. 이해 말경 콜롬비아대학 사범대학원 입학이 허가되어 뉴욕New York으로 갔다. 1928년 1월 뉴욕에서 여자유학생들을 규합하여 근화회(槿花會)를 조직하여, 총무 황에스더, 서기 이신행, 재무 남궁쪼애안 등이 선임되었다. 2월에는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9년 6월 콜롬비아대학 사범대학원에서 교육행정학을 주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흥사단에 제228단원으로 입단하였다. 9월 뉴욕신학교Biblical in N.Y 입학하였다. 학업 성취에도 열성적이었지만 유학생회에 가입하여 미국에 사는 동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하기 위한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당시 미주 동포 사회에서 가장 큰 유학생 단체는 북미대한인유학생총회(北美大韓人留學生總會)였다. 이 유학생회는 학우들간 친목과 단합은 물론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에게 한국의 사정을 알리는 등 외교 활동과 선전사업을 통해 독립운동을 후원하였다. 1930년부터 1931년까지 이 단체의 이사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다각적으로 귀국 준비를 하였다. 드디어 1932년 7월 캐나다 장로교 여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캐나다 밴쿠버Vancouver를 출발하여 하와이를 경유, 일본 요코하마(橫濱)를 거쳐 부산에 도착하였다. 조국에 돌아오자, 각계 인사들은 환영회를 개최하였다. 1932년 8월 2일 정신여학교 동창회 주최의 김마리아양 환영회, 9월 6일 함태영·장선희·황에스더 등 30명이 발기인이 되어 주최한 남대문 식도원에서의 김마리아 귀국환영 간담 초대회 등에 참석하였다. 이후 함남 원산에 있는 마르다윌손Marta Wilson 여자신학원(女子神學院)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신학을 강의하였다. 주로 핍박받는 민족에게 새 희망을 주는 예언서를 강의하면서 역사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34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전국연합회 제7대 회장에 선출되었다. 이 여전도회는 1928년 9월 창립된 후 여성들의 신앙운동을 지원하고 국내외에 여선교사를 파견하여 선교사업을 전개하였다. 이 여전도회의 제7대부터 제10대 회장을 지내며, 교회 내의 여성 평등을 실현하고자 노력하였다.
1937년 일제는 중일전쟁을 일으켜 한국을 대륙병참기지화하는 동시에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하여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장로회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을 따를 수 없어서 여전도회의 공식행사를 미루는 등의 방법으로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다. 그해 겨울 원산 자택에서 졸도하여 중태에 빠져 호전되지 않자 1944년 2월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하였다. 3월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시신은 화장하고 유골은 대동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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