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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69
성명
한자 金奎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3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11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19년 8월 7일에 조직한 군정부(軍政府)의 중심인물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10)
2.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단장(師團長)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90, 항일순국의전(抗日殉國義傳) p.146)
3. 1920년 10월 북로사령부(北路司令部) 제2연대(聯隊) 제1대대장(大隊長)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20,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監) p.118)
4. 1920년 대한독립군단총사령(大韓獨立軍團總司令)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21)
5. 1923년 고려혁명군사령(高麗革命軍司令)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p.322)
6. 1923년 장순현(長旬縣)에 있는 광정단(光正團)에 도착한 전보에 보면 노령(露領) 이만에 있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북로정부(北路政府)각 중요 지대(各重要地帶)에 아래와 같이 군대(軍隊)배치(配置)하기로 결정(決定), (一) ...(二)...(三)...(四). 송압령(松鴨領) 제3연대(第三聯隊) 대장(隊長) 김규식(金奎植)(동아일보(東亞日報) 1923. 1. 18)
7. 1920년 육군사관학도대(陸軍士官學徒隊) 대대장(大隊長)으로 청산리(靑山里) 전투(戰鬪) 지휘(指揮)
8. 1927년 신민부(新民府)에서 활약(活躍)
9. 1931년 공산당(共産黨)에게 피살(被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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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경기도 양주(楊州) 사람이다.

한말 육군 참위(參尉)로서 1907년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통분하여 철원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차에 걸쳐 일군을 대파하였으나 부상을 당하고 은신하였다가 1912년 3월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 8월에는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사단장으로서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섰다. 또한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단기속성 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서 김좌진·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 등과 함께 전력을 다하여 청년교육에 정진하였다.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의 제2연대(연대장 김좌진) 제1대대장으로서 전투에 참여하여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에서 일본군을 대파한 뒤 밀산(密山)에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재간도 대한국민회·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야단(野團) 등 여러 단체의 군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편성하고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홍범도(洪範圖)·김좌진(金佐鎭)·조성환(曺成煥)이 각각 취임하였으며 그는 총사령에 취임하여 참모총장 이장녕(李章寧)·여단장 이청천(李靑天)이하 3,500여 명의 대부대를 이끌고 노령의 자유시(自由市)로 갔다. 자유시에서 비참한 사건을 겪은 그는 다시 소만국경을 넘어 옛 근거지인 연길현(延吉縣)으로 돌아왔다.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1922년 3월 3백명의 독립군이 소만국경으로 이전하여 추위와 식량난으로 무한한 고통에 있다는 급보가 도착하자 그 구제에 노력하였으며 상해노병회(上海勞兵會)에서도 50원을 모집하여 독립군에게 보냈다.

이와 같이 하여 물질적인 역경을 겨우 면한 그는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명성을 날린 청년 전략가 이범석(李範奭)을 맞이하여 1923년 5월에는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에 선출되어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제도를 실시하여 농사를 짓고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한편 소련령으로부터 비밀리에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하고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1925년에는 김좌진·김 혁(金赫) 등이 북구 영안현(北溝寧安縣)에서 민족주의 대표를 망라하여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자 이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6년에는 이념(理念)과 사상으로 무장한 독립투쟁을 위하여 각계의 혁신적인 대표들이 모여 양기탁(梁起鐸)을 위원장으로 하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이 동년 4월 5일 길림성 영남(領南)호텔에서 조직되자, 그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조직 당시의 당원수는 약 1천 5백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항일투쟁은 2세 국민들의 교육밖에 없다고 판단한 그는 연길현(延吉縣)에 학교를 설립하고, 그 운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1931년 주하현(珠河縣)으로 가서 최악(崔岳)·홍진(洪震)·신숙(申肅) 등을 만났다. 이때 공산주의로 전향한 최악(崔岳)은, 독립군의 호장군(虎將軍)이라는 별명이 붙은 그를 제거하도록 사주하여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심초사하던 그는 공산계열의 동족인 일당에 의하여 이역 땅에서 무참한 최후를 마쳤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310·320·321·322·392·463·46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21면
  • 고등경찰요사 3·81·90면
  • 매천야록 451·456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79·80·99·102·105·106·139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83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976·978·1049·1050·1052·1053·1055·1056·1058·1059·1063·1078·708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383·396·416·508면
  • 항일독립운동사(이강훈) 86면
  • 해외조선혁명운동소사(최형우) 1집 7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85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규식 호 : 노은(蘆隱) 경기도 양주(楊州) 후기의병, 대한독립선언서
본문
1882년 1월 15일 경기도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사노리(四老里, 현 구리시 사노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노은(蘆隱)이다. 아버지는 영선(永先)이다. 어려서 사숙(私塾)에서 한문을 배웠다. 1900년경 주명래(朱明來)와 결혼하여, 1901년 장남 현욱(顯旭), 1904년 차남 현성(顯聲), 1907년 3남 현의(顯毅), 1915년 장녀 현태(顯泰), 1918년 4남 현륜(顯崙)이 태어나, 4남 1녀를 두었다. 1902년 1월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에 임명되었다. 1906년 시위대에 입대하여 부교(副校)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군대해산 이후 현덕후(玄德厚)와 양주로 귀향하였다. 이후 의병장 허위(許蔿) 부대에 합류하여, 같은 해 9월부터 포천·연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1907년 양주에서 결성된 13도창의대진소의 일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이인영(李仁榮) 의병부대와 합진하여 사령장(使令將)을 맡아 1,500여 명의 의병을 지휘하였다. 장단과 양주 등지를 무대로 일본 군경과 싸웠다. 1908년 6월 서울진공작전 때 허위와 함께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08년 8월 경성공소원(京城公訴院)에서 1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2년 간 유배 생활을 하다가 1910년 9월 5일자로 사면되었다. 1917년 양주군 구리면 동구릉 삼림감시원을 역임하였으며, 1919년 1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조합장을 지내다가 1919년 3·1운동 전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만주 망명 후 중광단을 토대로 설립한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12월 중광단을 이끌던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등과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여단장으로 무장 항일 투쟁을 선도하였다. 북로군정서의 군사력은 북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서간도 지역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1920년 8월 이장녕(李章寧)·이범석(李範奭)·김홍국(金弘國)·김상운(金相雲) 등과 왕칭현(汪淸縣) 서대파 십리평에 설립한 북로군정서 단기 속성 군관학교인 사관연성소의 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사관연성소의 훈련 과정은 6개월 속성이었다. 사관연성소에서는 군사학·총검술 등을 교수하였으며, 축성교범 등의 교재 등도 인쇄하여 사용하였다. 군사훈련은 구한국 군대식의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3,000평 연병장을 만들어 사격 훈련 등의 실질적 훈련을 실시하였다. 1920년 9월 배출된 제1회 졸업생 300명 중 150명으로 지방 시찰 여행대를 조직하였으며, 나머지 150명은 새로 모집한 100명 및 사령부 경비대와 합하여 3개 연대 규모의 400명 병력 1개 대대를 편성하였다. 새로 편성된 보병대대장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 제1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일본군의 막강한 화력 앞에서도 주변 지형과 뛰어난 군사기술을 바탕으로 지휘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백운평전투에서 펼친 활약은 어랑촌전투에서도 빛을 발했지만, 일본의 지속적인 정규군 투입과 보급선 확보로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미산(密山)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1920년 11월 독립군단의 지도자들이 연해주로 이동할 것을 결정하고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다. 대한독립군단의 조직은 3개 대대로 구성된 1개 여단으로 병력은 3,000여 명이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 홍범도·김좌진·조성환이며, 이때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참모장에는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池靑天)이 선임되었다. 1921년 1월초 연해주 이만에 도착한 독립군들은 무장해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 자유시로 이동하거나 다시 만주로 귀환하였다. 김좌진·이범석과 함께 옌지(延吉)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2년 8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주간부 내에 조직된 고려부가 연해주에 산재한 ‘고려의병대’ 통일 문제를 러시아인 연해주의병대 혁명군사위원회에 제출하였다. 9월에는 러시아공산당 연해주 간부의 지도 아래 연해주고려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조직되었으며, 9월 5일 연해주 고려인의병대 혁명군정의회가 결성되었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제1본대총사령부의 총사령으로 677명의 병력을 지휘하였고, 관할 지역은 포시에트 훈춘구역이었다. 10월 연해주 백위파 잔당을 몰아내는 최후 전쟁에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전선에서 러시아 적군의 우수리스크를 점령 전투를 지휘하였다. 1922년 11월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총사령부 편제를 개편할 때 군정위원장 최호림, 기병대장 이범석 등과 함께 총사령관 직을 맡았다. 11월 15일부터 고려혁명군이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부하 200여 명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무링현(穆棱縣)으로 이동하였으나, 중국 관헌에 무장해제당하였다. 1923년 초 고평(高平)·이범석과 함께 옌지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선임되었다. 고려혁명군은 병농일치(兵農一致) 제도를 실시하여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연해주 지역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하였다. 중국 지방 관헌들의 압박으로 근거지를 헤이룽장성 닝안현(寧安縣)으로 이전한 뒤에는 부하 100여 명을 선발하여 동경성(東京城) 일대 관유지를 임대 개간하였다. 1923년 2월 노농 정부로부터 군자금과 무기를 조달받아, 중동선 철도 및 남만주철도 연선의 친일파 및 일본 관헌을 척살하기 위한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60여 명으로 구성된 결사대와 모연대를 조직, 간도 및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사상 선전을 꾀하였다. 3월 5일 각자 권총 1정과 공채증권을 휴대한 결사대와 모연대를 국내로 보내 함경북도 명천군과 경성군을 무대로 군자금을 모집토록을 명령하였다. 1923년 5월 김좌진·현천묵과 함께 기진회(期進會)를 조직하고, 오성륜(吳成崙)·최웅렬(崔雄烈)·한상오(韓尙五) 등으로 암살단을 편성하여 국내에 파견하였다. 같은 해 5월 현천묵·조성환·김좌진·나중소·이장녕·이세영(李世永) 등 79명 명의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개조 지지 선언문을 발송하였다. 11월에는 이범석·조성환(曺成煥) 등과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1924년 10월 독립군단을 재수습하여 통빈현(同賓縣)에 본부를 두고 김좌진과 함께 세력 확장을 도모하였다. 총재에 현천묵이 선임되었으며, 이때 사령관에 부임하였고, 이범석은 군사부장이었다.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대한독립군으로 명명하였으며, 중국 우페이푸(吳佩孚) 군벌을 상대로 군자금과 무기 구입을 도모하였다. 1925년 부인 주명래를 비롯하여 4남 1녀를 중국으로 불러들였다. 1925년 3월 대한군정서를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은 무링현(穆陵縣)에서 부여족통일회의(夫餘族統一會議)를 개최하여 김좌진·김혁(金爀, 김학소)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고, 1926년 3월에는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그해 김좌진과 함께 한족총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팡정현(方正縣)과 옌쇼우현(延壽縣) 및 주허현(珠河縣, 현 尙志市)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1927년 2월 신민부 내 민정파(民政派)로 구성된 고려국민당(高麗國民黨)에서 군사부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고려국민당은 통빈현 소량자(小亮子)에 본부를 두고 주허현과 통빈현 일대에서 활동하였으며, 1929년에는 국민부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0년 7월 이장녕·홍진·지청천·조경한·황학수·신숙 등과 한족총연합회와 생육사를 모체로 하여 중동선 연선(沿線)의 웨이허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인재 양성과 운동 자금 확충을 위한 활동에 진력하였다. 한국독립당은 강령으로 삼본주의(三本主義)의 바탕 아래 민본정치(民本政治)의 실현, 노본경제(勞本經濟)의 조직, 인본문화(人本文化)의 건설을 표방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이후 각지의 주민회를 조직화하여 일반주민을 결속하고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을 저지하기 위한 표면기관으로 1931년 2월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결성하였다. 1931년 부인 주명래 등 가솔들과 옌쇼우현으로 이주하였으며, 그해 3월 한족자치연합회 본부가 있던 주허현 이붕해(李鵬海)의 집에서 신숙(申淑)·지청천 등과 북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대해 논의하고 있을 때, 백운봉·최호 등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다. 유해는 주허현 마이강에 뿌려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동일인 여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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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내란 유(流) 15년 경성공소원 1908-08-25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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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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