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1944년 6월 광복군(光復軍)에 현지(現地) 입대(入隊)하여 일군(日軍) 내의 정보탐지(情報探知) 및 초모활동(招募活動)한 사실이 확인됨.
| 관리번호 | 97 | ||
|---|---|---|---|
| 성명 |
|
한자 | 康珽祥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80 | 훈격 | 대통령표창 |
|---|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강정상 | - | 평안북도 벽동(碧潼) | - | |
| 본문 |
1928년 11월 25일 평안북도 벽동(碧潼)에서 태어났다.
1943년,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중학교 재학 중 상급생 장세국(張世國), 인근 칭다오(靑島)중학교 백운용 등과 더불어 항일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였다. 5개 강령을 정하고 2개 중학교 시위운동을 모의하였다. 같은 해 4월, 신입생 입학식에서 일제의 침략상과 반일 사상을 담은 전단을 뿌리며 시위를 주도하였다. 중국인 학생 대표가 단상에 올라가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전 중국인은 궐기하자’라고 연설하자 일본 헌병들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했다. 이때 톈진(天津)으로 피신하였다.
194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징모처 제6분처 공작원 윤창호(尹昌浩)와 접촉해 제6분처 주임 김학규(金學奎, 광복군 제3지대장)의 지하공작원 임명장을 받고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윤창호는 화중(華中)지구(허난성(河南省), 후베이성(湖北省), 후난성(湖南省), 장시성(江西省)) 특파원으로서 한국인 학도병·지원병을 탈출시키는 광복군 모집 공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입대 후 일본군의 이동 상황과 군수품 야적지, 부대 위치와 병력 배치 상황 등을 파악해 본부에 보고하는 한편, 광복군 모집 공작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7월, 모집된 신입 대원 20여 명을 호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본대로부터 공작 업무를 중지하고 귀대하라는 지령을 받고 복귀하였다. 복귀 후 한 달 뒤 광복을 맞아 1946년 5월 광복군 복원령에 따라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군 11사단에서 복무하고, 강원도 춘천시에서 30년간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