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5월 서안(西安)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5지대에 입대하였다. 1942년 4월 서안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2지대에 편입되었다. 1942년 8월 서안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 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 서북통신사(西北通信社)로 파견 근무하였다. 1943년 6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특별반(特別班)을 수료하였다. 1946년 6월 귀국 후 병사(病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관리번호 | 94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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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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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鄭義京 |
| 이명 | 朴陽春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63 | 훈격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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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월 서안(西安)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5지대에 입대하였다. 1942년 4월 서안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2지대에 편입되었다. 1942년 8월 서안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 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 서북통신사(西北通信社)로 파견 근무하였다. 1943년 6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특별반(特別班)을 수료하였다. 1946년 6월 귀국 후 병사(病死)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정의경 | 정양춘(鄭陽春) | - | - | |
| 본문 |
자료에 따르면 1922년생으로 추정된다. 출신지는 알 수 없다. 이명은 정양춘(鄭陽春)이다. 1941년 한국광복군 제5지대 입대, 1942년 4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어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인의 징병에 대하여 회의적이던 일제는 중일전쟁 이후 병력의 충원이 어려워지자 1938년 ‘육군특별지원병령(陸軍特別支援兵令)’을 공포해 한국인 병력 동원을 제도화하였다. 해군 또한 태평양전쟁 이후 해상 전투가 본격화되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1943년 ‘해군특별지원병령(海軍特別支援兵令)’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44년부터는 조선에서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약 19만여 명의 조선인 청년들이 육군과 해군으로 징집되어 전선으로 동원되었다. 이즈음 일본군에 징집되어 중국전선에 투입되었다가 탈출하여 1941년 광복군에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광복군에 들어간 이후에는 제5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광복군 제5지대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에 편입되어 조직된 부대로 1940년 광복군이 창설되고 총사령부가 시안(西安)으로 옮겨오면서 1941년 편성되었다. 전지공작대 대장인 나월환(羅月煥)이 지대장을 맡았고 시안을 근거지로 하여 허난성(河南省)과 하베이성(河北省) 일대의 카이펑(開封), 타이위안(太原), 스자좡(石家莊), 베이징(北京) 등지에서 활발한 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다 1942년 3월 1일 제5지대 지대장인 나월환이 부하들에게 살해당하는 하극상 사건이 벌어지고 살해혐의로 20명의 대원이 체포되고 이 가운데 8명이 사형 혹은 징역형을 받으면서 제5지대는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편련처장(編鍊處長) 송호성(宋虎聲)을 나월환의 후임으로 임명하였고 이후 조선의용대개 광복군에 들어오면서 1942년 4월 1일 제5지대를 기존의 제1, 2지대와 통합시켜 새롭게 제2지대를 편성하였다. 이때 새롭게 편성된 제2지대 지대장은 이범석(李範奭), 지대부장은 이복원(李復源)이 맡았다.
이때 다른 지대원과 함께 제2지대로 편입되어 산시성(陝西省), 허난성, 허베이성 일대에서 초모활동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1942년 8월에는 시안의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 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 서북통신사(西北通信社)로 파견되어 근무를 하였고, 1943년 6월에는 한국광복군특별반 과정을 수료한 뒤 중국지역에서 활동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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