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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263
성명
한자 朴次貞
이명 朴哲愛, 林哲愛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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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중국방면 포상년도 1995 훈격 독립장

관련정보


2006년 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24.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東萊支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1929. 3월 동래(東萊) 일신여학교를 졸업한 후 동래청년동맹(東萊靑年同盟) 집행위원, 동래 노동조합원 겸 근우회(槿友會) 중앙집행위원과 조사연구부장 등으로 활동하였고, 1929. 12월 광주학생운동(光州學生運動)에 동조하여 서울에서 시위를 주도하였다가 불구속으로 나온 후 북경(北京)으로 망명하여 1932년 남경(南京)의열단(義烈團) 계열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는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활동하였고, 1936. 7. 16 남경(南京)에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였고, 1938. 4, 5월에는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투고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1938.10월에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부녀복무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9. 2월 곤륜산전투에 참여하여 부상을 당하는 활동(活動)을 하다가 1944. 5. 27 중경(重慶)에서 작고(作故)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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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2권(1996년 발간)

부산(釜山) 사람이다.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朝鮮靑年同盟)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朴日馨)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근우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 시내 각 여학교 학생들을 동원하여 광주학생운동 동조 시위를 주도하여 전국적으로 반일학생운동으로 확산시키다가 일경에 붙잡혔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釜山紡織)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붙잡힌 박차정은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1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이청천(李靑天)의 처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南京朝鮮婦人會)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단합시켰다.

그 후 1937년 11월 의열단의 한중민족연합전선(韓中民族聯合戰線)의 일환으로 파견된 박차정은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통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한편, 1938년 4∼5월경에는 기관지 『조선민족전선(朝鮮民族戰線)』에 「경고, 일본의 혁명대중」, 「조선부녀와 부녀운동」이라는 글을 투고하여 총체적인 무장궐기를 촉구하였다.

그 후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서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하였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하였다. 광복 후 박차정의 유해는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사상정세시찰보고집(其一) 252면
  • 사상정세시찰보고집(其二) 19·21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97·898면
  • 졸업증명서(동래여자고등학교)
  • 김원봉의 생애와 항일역정(한상도) 212·213면
  • 한국독립운동사자료총서(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제2집 조선민족전선(1938. 4, 5월)
  • 독립(미주, 1944. 11. 29)
  • 동아일보(1930. 1. 30, 1. 31)
  • 조선일보(1929. 12. 5)
  • 피의자신문조서(서대문경찰서, 1930. 2. 9)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73·574·618·687·717면
  • 광주학생독립운동사(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1974) 362·363·407·411·417·41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412·41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박차정 박철애(朴哲愛),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 부산 일신여학교 동맹휴학, 광주학생운동, 광주학생운동 1, 2차 서울 학생시위, 민족혁명당 결성, 만국부녀대회, 남로공작대(南路工作隊)의 곤륜관전투
본문
1910년 5월 7일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동래면(東萊面, 현 부산광역시 동래구) 칠산동(漆山洞)에서 아버지 박용한(朴容翰)과 어머니 김맹련(金孟蓮) 사이에서 3남 2녀 중 넷째로 출생하였다. 오빠 문희(文熺)·문호(文昊)와 언니 수정(壽貞), 남동생 문하(文夏)가 있다. 가족은 1918년에 설립된 동래성결교회 교인이었으며, 모두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바 있다. 또 외가쪽 당숙인 김두봉(金枓奉)과 김약수(金若水) 등도 이름난 독립운동가였다. 아버지 서거 후 어머니 김맹련은 삯바느질 등으로 어렵게 5남매를 키우고 가르쳤다.14세 때인 1924년부터 조선소년동맹 동래지부에서 활동하였고, 1925년 일신여학교 고등과에 입학하였다. 일신여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1927년 5월 서울에서 근우회를 창립하고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자 1928년 4월 20일 동래에서는 기존 동래여자청년회를 자진 해산하고 5월 19일 근우회 동래지회를 창립하였다. 근우회 동래지회의 창립 초 명단에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일신여학교 졸업 전이었기 때문이다.1929년 3월 9일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5월 경북지방에 기근이 심해지자, 동래에서 신간회 지회, 청년동맹, 노동조합, 근우회 지회의 4단체가 그 해 5월 17일 경북기근구제회를 결성했을 때 서무를 담당한 5촌 당숙 박일형 밑에서 재무를 맡아 보았다.같은 해 7월 27일부터 29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차 전국대회에 김계년(金桂年)과 함께 동래지회 대의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 경남 전형위원, 33인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33인 중에서 선정된 14인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선전조직과 출판부의 책임을 맡았으며, 지회와 도연합회 규칙세칙 제정위원으로도 선임되었다.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는 12월 2일부터 3일까지 서울시내 학교에 격문이 뿌려지고 학생들은 만세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배후 조종세력으로 지목되어 근우회의 중심 간부인 허정숙(許貞淑)과 신간회 소속의 오빠 박문희와 함께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풀려난 후 제2차 시위를 계획하였다. 1930년 1월 15일 이화·숙명·배화 등 11개교의 여학교가 시위를 전개하였다. 다시 일경은 근우회를 배후 조종 세력으로 지목하고 정종명, 허정숙 등과 함께 붙잡았다. 그 후 2월 중순까지 투옥되었다가 서대문경찰서에서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다시 동래에서 검거되었다가 석방되는 등 투옥과 석방을 되풀이하였다.1930년 중국에서 활동하던 오빠 박문호가 보낸 청년을 따라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피신하였고, 의열단에 가입하여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 중앙부 위원이 되었다. 1931년 3월 김원봉과 결혼하고, 의열단의 핵심 멤버가 되어 활약하였다. 1932년 베이징에서 난징(南京)으로 옮긴 뒤 김원봉과 함께 국민당 정부의 협조하에 1932년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하고 임철애(林哲愛)라는 가명으로 여자부의 교관이 되었다.1935년 7월 ‘통일대당’ 결성을 위해 김원봉 주도로 의열단·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을 통합해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에 1936년 7월 16일 이청천의 부인 이성실과 함께 민족혁명당 난징조선부녀회를 결성하였다.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민족혁명당은 중국군과 항일공동전선을 펴기 위한 준비로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혁명자연맹과 함께 11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창립하였다. 한커우(漢口)에서 개최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가하였고, 창사(長沙)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을 규탄하고, 중국과 조선, 일본 민중의 연합과 일본 혁명대중들의 혁명전쟁을 촉구하는 라디오 방송을 하였다.또한 이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임철애(林哲愛)라는 이름으로 『조선민족전선』 창간호에 실었다. 1938년에는 『조선민족전선』 제3호(1938. 5. 10)와 제5, 6호(1938. 6. 25)에 「조선부녀여부인운동(朝鮮婦女與婦女運動)」이라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 글에서 중국의 전면 항일전쟁이 시작된 시점을 맞아 우리 부녀자들도 일치단결하여 조국의 자유 회복, 동아시아의 화평, 인류의 정의를 위해 투쟁하자고 호소하였다.1938년 10월 10일 조선민족전선연맹이 조선의용대를 창설하자, 22명으로 구성된 부녀복무단의 단장을 맡아 활동하였다. 1939년 말 의용대 본부는 대일투쟁을 강화하기 위해 화북 진출을 결정하고 후난(湖南)과 광시(廣西)의 의용대부터 차례로 북상시켰다. 이 중 엽홍덕(葉鴻德)이 이끄는 남로공작대원(南路工作隊員)들이 북상하면서 곤륜관 전투에 참여하고 적의 진지 앞에서 반전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곤륜관 전투에 참여하여 큰 부상을 입었다. 1942년 12월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었으며, 남편 김원봉은 부사령관 겸 제1지대장에 취임하였다.그러나 곤륜관 전투에서 다친 상처와 지병인 관절염 등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대외 활동은 거의 할 수 없었고, 시와 소설로 해방된 조국을 그리다가 1944년 5월 27일 34세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유해는 충칭 강북구 화상산(和尙山) 공동묘지에 안치되었다. 광복 후인 1946년 2월 남편 김원봉이 환국하면서 김원봉의 고향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하였다. 이때 피묻은 군복과 군모를 유족들에게 전달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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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상남도 밀양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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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기념관 의열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2 생가 박차정의사 생가 부산광역시 동래구
3 동상 박차정의사 상 부산광역시 금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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