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1942년 8월 산동성 청도학원(靑島學院) 상업학교 3학년 중퇴 후 북경으로 탈출하였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2·550면
| 관리번호 | 8727 | ||
|---|---|---|---|
|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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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景潤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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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신의주(新義州) 사람이다. 1942년 8월 산동성 청도학원(靑島學院) 상업학교 3학년 중퇴 후 북경으로 탈출하였다가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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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김경윤 | - | 평안북도 신의주(新義州) | - | |
| 본문 |
1928년 3월 14일 평안북도 신의주부(新義州府) 미륵동(彌勒洞)에서 태어났다.
1942년 산둥성(山東省) 칭다오학원(靑島學院) 상업학교 3학년을 중퇴하고, 일본 경찰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베이징(北京)으로 갔다.
1944년 말, 베이핑(北平) 지구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던 김광언(金光彦)과 이정수(李延秀)에게 포섭되어 김은석(金銀錫)·정길주(鄭吉冑) 등 10여 명과 함께 광복군 제3지대 본부가 있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으로 이동해 입대하였다. 입대 후 푸양현 산타지(三塔集)에서 기초 군사훈련을 받았다.
1945년 1월, 제3지대 미국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 OSS) 무전훈련대의 대원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비협조로 인해 훈련 계획은 무산되었다. 당시 제3지대는 연합군과 함께 국내 침투 작전을 수행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은 연합군과의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무전 연락의 필요성을 느끼고 지대원 중 5명을 선발해 중국에 있는 OSS 지부에 교육을 위탁하였다. 이때 무전훈련 반장으로 임명된 김우전(金祐銓)을 비롯하여 박상기(朴相基)·문수열(文洙烈)·선우석(鮮于碩)과 함께 선발되었다.
2월 13일 지대장 김학규의 인솔 하에 산타지 지대본부를 출발하여 린취안(臨泉) 세완(謝灣)으로 향하였다. 2월 14일 린취안 중국군 제10전구 전방 지휘소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2월 15일 아침 지대장의 격려사를 듣고, 대원들은 혼신을 다하여 무전 교육을 받고 하루 속히 적진에 들어가 연합군의 작전에 큰 역할을 하여 조국의 광복을 앞당기는 데 온몸을 바친다는 선서를 하였다. 결사보국의 신념을 품고 ‘광복군가’, ‘용진가’를 우렁차게 합창하면서 린취안 강둑을 걸어 미군 OSS 통신대 버치(John M. Birch) 대위가 주둔하고 있는 세완 중국군 무전통신대에 도착하였다. 2월 17일 아침 중국군 책임자 왕(王) 주임과 버치 대위에게 유감스럽지만 광복군 일행에게 무전 훈련을 실시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2월 18일 부대로 복귀하였다. 이렇게 1차 무전 훈련 계획이 실패하였지만, 미군과의 연합 작전 계획은 이후에도 계속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내 진공 작전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기 전에 취소되어 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실질적으로 참전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부대로 복귀한 후 푸양(阜陽)을 중심으로 공작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잡혀 지난(濟南)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광복 후 같은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광복군 제3지대 공작원 이장식(李章植)·석만금(石萬金) 등과 함께 석방되었다. 석방 후 다시 지난(濟南)·칭다오 지구 특파단으로 배속되어 파견되었다. 당시 제3지대 참모진은 일본군 점령 지구 내 거주하는 교포들의 보호가 사회 문제로 대두되자, 교포의 생명과 재산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광복군 군사 특파단을 중국 주요 도시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8월 20일 경 지난·칭다오 지구 특파단 제1진이 파견되었다. 당시 단장에는 제3지대의 부관 장호강(張虎崗)이 임명되었으며, 부단장 최규련(崔奎連) 외 박재곤(朴載坤)·김응주(金應柱)·박용운(朴龍雲)·유청수·유창근(劉昌)근·유기준(柳基濬)·김상후(金尙厚) 등이 특파단 제1진으로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광복군이 1946년 해체됨에 따라 특파단 활동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며 조직된 우익 청년단인 조선민족청년단(朝鮮民族靑年團)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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