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초모공작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5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14면
| 관리번호 | 8660 | ||
|---|---|---|---|
| 성명 |
|
한자 | 金鳳賢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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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용천(龍川) 사람이다.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여 초모공작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김봉현 | - | 평안북도 용천(龍川) | - | |
| 본문 |
1920년 12월 29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동하면(東下面) 대산동(台山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어려서 한문을 배우고, 동하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소년기에 집안 어른의 영향으로 독립정신을 갖게 되었다.
1940년 군대에 강제 동원하려는 일제를 피해 사촌 형이 거주하는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톈진(天津)으로 탈출하려고 두 차례 시도하였다. 첫 번째 탈출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실패해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두 번째는 산하이관(山海關)에서 일본군 검문에 걸려 산하이관 국경초소 영창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일제 영사관 순경과 동행으로 귀향 조치를 받고 돌아오는 도중에 꾀를 내어 일제 경관을 따돌리고 도주해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하였다.
1944년 톈진과 허난성(河南省) 구이더(歸德)를 오가며 상업으로 생활하던 중, 10월경 중국인의 밀고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겪었다. 이 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재지를 알게 되어, 출옥 후 감옥에서 만난 김응주(金應柱)와 함께 중국군 부대를 찾아갔고, 중국군 부대의 안내로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있는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3지대에서 부지대장 이복원(李復源)의 지휘 아래 동료 50여 명과 함께 한국광복군훈련반(약칭 한광반)에 입교하여 군사교육, 정훈교육, 외국어 교육을 받았다. 교육이 끝나자 1945년 6월부터 8월 15일 광복 때까지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 경리처에서 복무하였다. 주로 중국 측 각처로부터 식량·연료 등 보급품을 조달하는 일을 맡았다.
1945년 8월 15일 광복후 한국광복군 제3지대원 일부와 함께 부산으로 환국해서 고향인 평북 용천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북한이 공산화되어가자 다시 월남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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