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평북 영변(寧邊) 사람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가 국내특파원으로 입국하여 활동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608면
| 관리번호 | 8459 | ||
|---|---|---|---|
| 성명 |
|
한자 | 白昌燮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국장 |
|---|
평북 영변(寧邊) 사람이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 입대하여 복무하다가 국내특파원으로 입국하여 활동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백창섭 | - | 평북 영변(寧邊) | - | |
| 본문 |
1916년 7월 30일 평안북도 영변군(寧邊郡) 영변면(寧邊面) 약산에서 소작농인 아버지 백낙순(白樂淳)과 어머니 이씨(李氏)의 4남 1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고향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읍내의 영변공립보통학교에 다녔다. 1933년 평양으로 가서 병원 약제사로 일하였다. 1939년 4월 펑톈(奉天)·다롄(大連)·칭다오(靑島)를 거쳐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였다. 이후 난징(南京)·한커우(漢口)·베이징(北京)·톈진(天津) 등지를 거쳐 1940년 3월 상하이로 돌아왔다.서병호(徐丙浩)로부터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941년 4월 임시정부를 찾아갈 목적으로 광둥(廣東)으로 갔다가, 베트남 사이공·싱가포르·버마 랑군·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 등지를 거쳐 1943년 12월 9일 충칭에 도착하였다.이후 중국군에 연행되어 4개월 정도 감금되었다가, 서병호의 아들 서재현(徐載賢)의 신분 보증으로 풀려났다. 임시정부 요인 숙소에서 함께 지내며, 광복군총사령부 부원이 되었다.조소앙(趙素昻)으로부터 국내에 들어가 한용운(韓龍雲)을 찾아가라는 지시를 받고, 1944년 11월 22일 조성산(趙成山)과 라오허커우(老河口)를 거쳐 12월 말 광복군 제3지대가 있던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도착하였다.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을 만난 다음 1945년 2월 22일 푸양을 떠나 카이펑(開封)·베이징·톈진 등지를 거쳐 1945년 4월 14일 국내에 잠입하였다.평양에서 버마에서 만났던 윤재픙(尹在豊)의 협조를 얻어 경방단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국의용단(韓國義勇團)을 조직하였다. 서울에 올라와 한용운을 찾아갔으나 6개월전에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아들이 있는 충남 홍성으로 가서 그의 도움으로 한국의용단 조직을 결성하였다. 이어 조치원으로 가서 버마에서 같이 있었던 이준국과 함께 한국의용단 조직을 결성하였다고 한다. 한국의용단의 목적은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하여 국내에 거점을 확보하고, 호응할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평안북도 회천에서 활동하던 중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월남하여 이규갑(李奎甲)·조중서(曺仲瑞)·김제선(金濟璿) 등과 서울 계동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특파사무국을 설치하고, 임시정부 환영회 및 요인 숙소 등을 준비하였다. 특파사무국은 임시정부 환국 후 해체되었다.1945년 12월 임시정부 내무부장 신익희가 결성한 정치공작대(政治工作隊)에 참여하여 전라도 지역 조직책임을 맡았다. 1946년 5월 남북분단을 저지하기 위해 한국철혈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이후 염응택(廉應澤)을 총사령으로 하여 조직된 백의사(白衣社)에서 고문을 맡았으며, 만주로 가서 활동하다가 1948년 5월 귀국하였다. 1956년 신익희가 대통령에 입후보하자 선거운동에 나섰고, 광복회 경기지회장 등을 역임하였다.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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