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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071
성명
한자 崔善嬅
이명 崔素貞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임시정부 포상년도 1991 훈격 애국장
1936년 중국(中國)으로 망명한 후 한국혁명(韓國革命) 여성동맹(女性同盟) 창립 요원(創立要員)이 되어 대한민국(大韓民國)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지원하면서 흥사단(興士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등에 가입하였으며 1943년에 이르러 중경(重慶)에서 한국애국부인회(韓國愛國婦人會) 재건 조직에 참여 서무부(庶務部) 주임(主任)이 되어 김순애(金淳愛) 주석(主席)을 보좌하면서 혁명여성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며 대일 항전(對日抗戰) 역량을 총집결하는데 주력하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 까지 9년간에 걸쳐 활동한 사실이 확인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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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취(鼓吹) : 의견이나 사상 따위를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 넣음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인천(仁川) 사람이다.

1931년 이화여전(梨花女專)을 졸업하고 모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1936년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최선화는 이곳에서 간호대학을 다니다 퇴학하고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여 1937년 5월에는 광주(廣州)에서 흥사단 제24회 창립기념식을 갖기도 하였다. 이 무렵 임시정부 재무차장이던 애국지사 양우조(楊宇朝)를 만나 그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으며, 뒤에 두 사람이 결혼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0년에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뒷바라지하였으며, 동년 6월 임시정부가 광서성 유주(廣西省柳州)에서 사천성 기강(四川省 江)으로 이전한 뒤에는 교포 부인들을 단합시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결성하는 주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3년 2월에는 다시 임시정부를 쫓아 중경(重慶)으로 옮겨 가, 기미년 3·1독립운동 직후에 조직되었던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의 재건운동에 착수하여 조국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애국부인회의 재건선언문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최선화는 서무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회장에는 김순애(金淳愛)가 추대되었다.

이들은 임시정부를 도와 각 방면에서 눈부신 활동을 벌였는데, 방송을 통하여 국내외 여성들에게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 혹은 위문품을 거두어 항일전선에서 활동하는 군인들을 위문하는 한편 여성과 청소년들의 계몽과 교육에 열을 올리기도 하였다.

정부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65면
  • 신한민보(1943. 6. 3)
  • 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자료 3권 639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13권 49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877·1031·1032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최선화 최소정(崔素貞) 경기도 개성(開城) -
본문
1911년 6월 20일 경기도 개성(開城)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최소정(崔素貞)이다. 남편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무차장으로 활동한 양우조(楊宇朝)이다. 평양 정의여자보통학교를 거쳐 1931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영문과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6년 중국에 입국하기 위해 상하이(上海) 간호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가 6개월 만에 자퇴하였다. 중국으로 건너간 후 흥사단(興士團)에 입단하였다. 1937년 상하이에서 결혼한 뒤 남편을 따라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에 입당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그해 5월 광저우(廣州)에서 개최된 흥사단 24회 창립기념식에 참석하였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진영의 재건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을 합당해 한국독립당이 창립되자, 가입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였다. 1940년 6월 한국독립당의 지도와 원조 하에 충칭(重慶)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韓國革命女性同盟)을 창립하였다.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최형록(崔亨祿)·이순승(李順承) 등과 감찰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500만 한인 여성들의 민족정신과 애국심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1942년 임시정부가 독립운동 전선의 통합운동을 추진하여 민족혁명당을 아우르면서 통합임시정부로 확대·개편되자, 1943년 2월 23일 충칭의 각 계파 부인들은 김순애(金淳愛)를 중심으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여 한국애국부인회를 재건하였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 창립 직후 서무부 간부로 선출되어 주석 김순애, 부주석 방순희, 조직부 연미당(延薇堂), 훈련부 정정화, 선전부 김윤택(金潤澤), 사교부 권기옥(權基玉), 재무부 강영파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지원, 국내외 한국 여성들에게 민족해방을 위해 각지 여성 조직의 분발과 긴밀한 연락 호소, 광복군에게 위문품 지원, 싱가포르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한인 위안부 10여 명 인계·치유 및 재교육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해 5월 5일 한국애국부인회가 한국독립당·조선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무정부주의연맹·한국청년회와 함께 재중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자, 이에 참여하여 한국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였다. 그해 7월에는 한국 여성을 향해 자신이 한국의 여성이며 조국광복의 책임을 지고 있다는 것과 한국의 모든 여성은 단합해 국가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용전(勇戰)할 것을 주장하는 편지와 재건선언서를 미주지역의 동포에게 전달해 해외의 일반동포와 여성사회의 협조를 구하는 적극적인 홍보 활동에 앞장섰다. 1944년 3월 말부터 임시정부 선전부가 중국국민당 중앙선전부 대적(對敵)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1주일에 3번 정기방송을 내보내자, 한국애국부인회 간부들도 매주 1회씩 충칭방송국을 통해 고국 동포들에게 임시정부의 활동 상황, 세계정세, 애국부인회 재건에 관한 소식 및 임시정부 후원 요청 등을 방송하였다. 1944년 3월 8일부터 한국애국부인회 총무부장의 자격으로 충칭방송국에서 방송하였다. 광복 후 1946년 5월 남편 양우조와 함께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76년까지 이화여대 영문과에 출강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경기도 고양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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