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5권(2020년 발간)
강영파의 정확한 출생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1945년 11월 4일 작성된 「여투한교명책(旅渝韓僑名冊)」에 “유진동(劉振東) 38세, 강영파 33세”로 기재되어 있다. 1945년 당시 강영파의 나이가 33세라고 하면 1913년생이 된다. 그리고 출신지는 1944년 3월 15일 작성된 임시의정원 각 당파 명단에 ‘경기도’라고 기재되어 있다.
강영파의 남편 유진동이다. 강영파·유진동 부부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시절부터 김구를 도와 독립운동 전선에 참여했다.
강영파는 1930년 8월 16일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上海韓人女子靑年同盟)에 참여했다. 여기에는 김두봉(金枓奉)의 처 조봉원(趙鳳元), 이운선(李雲仙) 등이 참여하였다.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은 당시 좌파진영에서 여자청년동맹을 조직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우파진영에서 이를 봉쇄하기 위해 서둘러 만들게 되었다. 상해한인여자동맹이 출범하자 기존의 여성단체인 상해한인애국부인회와 심한 갈등을 빚게 되었다. 이에 김구를 비롯한 한국독립당 지도자들이 중재에 나서, 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은 회원의 자격 규정에 만 16세 이상 28세 이하로 한정시켰다. 그래서 ‘동맹’이라는 명칭은 상해여자청년회(上海女子靑年會)로 바꾸고, 상해한인애국부인회는 연장자들이 가입하는 것으로 결론을 보았다. 이때 강영파는 상해여자청년회 창립대회주비위원과 임시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강영파는 윤봉길의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따라 치장(綦江)에 머물고 있었다. 김구가 미주지역에 알린 공함에 따르면, 1940년 7월 22일 일본의 비행기가 임시정부가 있던 치장을 공습하였다고 한다. 비행기가 공습할 당시 김구는 유진동의 부인 강영파와 그의 두 살 된 딸을 데리고 산속으로 피신했다. 폭탄이 산속에 떨어졌지만, 강영파와 그녀의 딸 모두 무사했다. 그 후 강영파는 임시정부를 따라 충칭(重慶)에 정착하게 되었다. 『백범일지』 따르면, 김구가 그의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를 충칭으로 모셨는데, 이때 유진동·강영파 부부는 김구가 독립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게 곽낙원 여사를 정성을 다해 모셨다고 한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 주의와 이념을 초월하여 애국·구국을 다짐하는 사회단체가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1943년 2월 23일 각계 각파의 부인 50여 명이 한인애국부인회를 재건되었을 데, 강영파는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임시정부는 1944년부터 중국 국민당 선전부의 대적 선전위원회와 합작하여, 방송을 통한 우리말 방송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때 주로 국내 동포들에게 보내는 우리말 방송을 담당하였던 인사들은 엄항섭(嚴恒燮)·안원생(安原生) 등 남성들이었다. 재건된 애국부인회에서도 재무부장 강영파를 비롯하여 회장 김순애와 부회장 방순희(方順熙) 등이 매주 1회 정기 방송을 통해 항일독립운동을 역설했다. 이후에도 방송을 통하여 임시정부 및 광복군의 활동 상황과 한국 여성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선전을 계속하였다. 강영파는 1944년 3월 15일 한국독립당의 당원으로 가입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신한민보(新韓民報)(1940. 8. 22, 1943. 6. 3)
- 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1991) 제20권 임정편Ⅴ 141, 143면
- 사진 : 국사편찬위원회 제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