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훈전자사료관

통합검색
독립유공자 명단보기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706
성명
한자 薛岳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77 훈격 독립장
1944∼1945년에 중국(中國) 국민당(國民黨) 제9전구 사령관(戰區司令官)으로 광복군(光復軍) 제1지대 제3구대(區隊) 설립 당시 경비를 지원하고,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 학병(學兵)들의 광복군 편입을 지원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쉐웨(薛岳)는 중국 국민당 정부 제9전구 사령관으로 한국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위해 물질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인사들은 1945년 7월 쉐웨에게 부대 활동 경비 지원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1945년 3월에는 일본군에 동원되었다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한국인 학병 40명의 신원을 확보하고 한국광복군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에게 보냈다. 특히 한국인 학병들의 한국광복군 합류 문제뿐만 아니라 미군과의 독수리작전 투입 여부를 함께 논의하였다. 그리고 이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지원했다.

일제는 1944년 1월 20일 대학과 전문대학에 재학 중인 한국인 청년들을 ‘학도지원병(學徒志願兵)’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동원 하였다. 강제동원된 학병들은 일본군 부대로 배치된 이후 적지 않은 인원이 탈출을 감행했는데, 탈출 지역에 따라 국민당 중앙군(中央軍) 또는 공산당 팔로군(八路軍) 측에 인계되었다. 그리고 국민당 중앙군 측에 수렴된 인원들은 다시 한국광복군으로 들어와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한국광복군뿐만 아니라 미 전략첩보국과 함께 공동작전을 펼치기 위한 특수 훈련을 받고 한미 항일연합전선의 대열에서 활약하기도 했다.

쉐웨는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들을 한국광복군에 인계하기까지 훈련과 이동 등의 편의를 제공하고 군사 작전에 관한 사항을 함께 협의하는 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항전을 적극 지원하였다.

1945년 7월 현재 쉐웨가 신변을 확보하여 한국광복군 측으로 인계한 한국인 학병은 총 120명에 달하였다.

정부는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동방전우(東方戰友)(1939.7.15)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0권 192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1권 119~120, 126~12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2권 185면, 256~257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제13권 81, 256~257면
  •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5) 제6권 446~447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쉐웨(설악) 쉐양웨(薛仰岳), 노호자(老虎仔) 중국 광둥성(廣東省) 사오관(韶關) -
본문
1896년 12월 27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사오관시(韶關市) 러창현(樂昌縣) 주펑진(九峰鎭) 샤오핑스촌(小坪石村)에서 태어났다. 하카인(客家人)이다. 이명은 쉐양웨(薛仰岳)‧노호자(老虎仔)이다. 1944년 중국 국민당 제9전구 사령관으로 한국광복군 제1지대장 이병곤(李炳坤)에게 적극 협조하였다. 특히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 설립 당시 경비를 지원하고, 1945년 3월에는 일본군에 동원되었다가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한국인 학병 40명의 신원을 확보하고 한국광복군 이청천(李靑天) 총사령에게 보내주었다. 한국인 학병들의 한국광복군 합류 문제뿐만 아니라 미군과의 독수리작전 투입 여부를 함께 논의하고 이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지원하였다. 1907년 황푸육군소학(黃埔陸軍小學)에 들어가 1910년 졸업하고,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에 가입하였다. 1914년 중화혁명당(中華革命黨)에 가입하고,우창육군제2예비학교(武昌陸軍第二預備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2년간 훈련을 받고 1916년 졸업하였다. 다시 바오딩군관학교(保定陸軍軍官學校) 제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장파구이(張發奎)·리한훤(李漢魂)·덩옌다(鄧演達) 등이 동기생이다. 1918년 졸업하지 못하고 광둥(廣東)으로 가서 쑨원(孫文)이 조직한 혁명군(革命軍) 원민월군(援閩粵軍)에 들어가 총사령부 상위참모(上尉參謀)가 되었다. 1920년 천춘쉬안(岑春煊)의 계군(桂軍, 광서파)을 공격할 때 제1군 제1사(第一師)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비상대총통(非常大總統) 쑨원을 경호하는 경위단(警衛團) 제1영(第一營) 영장이 되었다. 1922년 천중밍(陳炯明)이 쑨원의 북벌정책에 반대하며 총통부와 쑨원의 거처 월수루(粵秀樓)를 공격하였을 때 쑹칭링(宋慶齡)의 목숨을 구하는 한편, 쑨원을 호위하였다. 1924년 장제스(蔣介石)가 천중밍 부대를 공격할 때 월군(粵軍) 제1사 소장(少將) 부관 겸 참모장으로 전투에 참가하였다. 1925년 2월 천중밍 부대와의 전투에서 제1군 제14사 부사장 겸 제14단(第十四團) 단장으로서 많은 전과를 올려 장제스의 인정을 받았다.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이 일으킨 북벌전쟁에 참가하여 제1사 제3단을 지휘하였다. 제3단은 그해 10월 장제스로부터 모범 부대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1927년 장제스의 4.12 정변 후 반장제스파에 합세하면서 파면되자 낙향하여 리지선(李濟深) 제4군에 들어갔다. 뒤에 리지선이 장제스의 반공청당(反共清黨) 정책을 지원하게 되어 난창(南昌)에서 차오산(潮汕)으로 남하하던 공산당 휘하 부대를 진압하였다. 1927년 말부터 1932년 1월까지 국민당 내부의 분열에 휘말려 낙향을 반복하였다. 1933년 5월 장제스에 의해 제5군 군장에 발탁되어 제5차 중앙소비에트구 홍군 포위섬멸 작전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난창에서 북로군(北路軍) 제3로군 부총지휘관 겸 제7종대(第七縱隊) 사령관을 맡았다. 1935년 4월 5일 육군 중장(2성 장군)으로 진급하였다. 1936년 2월까지 대장정에 나선 홍군(紅軍)의 주력 부대를 약 4만 킬로미터에 걸쳐 두 갈래 길로 추격하는 작전을 지휘하였다. 준이(遵義)회의 후 사도츠수이전역(四渡赤水戰役)을 진행한 홍군을 다두허(大渡河)에서 공격하기로 하였으나 놓치게 되었다. 이후 홍군 추격과정에서 구이저우성(貴州省)과 윈난성(雲南省)·시캉성(西康省) 일대를 안정시키는 공을 세웠다. 1937년 5월 홍군을 추격하고 서남부 일대를 안정시킨 공을 인정받아 윈난·구이저우지구 수정공서(綏靖公署) 주임 겸 구이저우성 주석이 되었다. 1937년 8월 13일 송후회전(淞滬會戰)이 터지자 장제스에게 세 차례 전화를 걸어 전장에 나가기를 자원하였다. 9월 17일 장제스의 허락을 받은 뒤 20일 난징(南京)에 도착하여 장제스를 만난 자리에서 제19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제19집단군은 좌익군(左翼軍)에 편제되어 24일부터 11월 12일까지 상하이(上海)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11월 13일 좌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2월 수도 난징 함락 후 항일전쟁 제3전구 전선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둔시(屯溪)에 주둔하면서 대오를 정돈한 뒤에 항저우(杭州)·자싱(嘉興)·난징·우시(無錫) 일대 일본군의 후방에서 전투를 벌여 수륙 교통로를 끊어 놓았다. 제19집단군 일부 병력을 차출하여 콩허총(孔荷寵)을 대장으로 한 유격대를 조직해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8년 5월 항일전쟁 제1전구 제1병단(第一兵團)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허난성(河南省) 카이펑(開封)에 주둔하면서 제74군, 제71군, 제64군, 제8군 및 기타 부대를 연합하여 카이펑회전을 지휘하였다. 5월 14일 시작된 투페이위안(土肥原)전투에서 승리하고 최후에 란펑(蘭封)을 탈환하였다. 5월 30일 제1전구 전선 총사령관으로 승진하여 제1병단과 제2병단을 지휘하였다. 6월 1일 일본군의 총진격전으로 인해 뤄양(洛陽)으로 전선 총사령부를 이전하였다. 6월 9일 장제스가 발표한 우한위수구(武漢衛戍區) 전투병력 배치에서 동 위수구 제1병단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주장(九江)을 점령한 일본군이 우한 포위작전에 돌입하자 8월 1일, 주장-난창 철로 연변과 보양호(鄱陽湖) 주위를 방어하여 일본군의 우한 포위를 막았다. 이때 본인이 직접 개발한 도팔자구대전법(八字口袋戰法)을 사용하였다. 도파자구대전법은 일자(一字) 형태의 장사진(長蛇陣)을 쳐서 적이 진지의 어느 쪽 끝을 공격하더라도 다른 끝에서 구원할 수 있게 하고, 필요할 때는 곧바로 포위망을 치도록 하는 전법이었다. 9월 중순부터 10월 10일 사이에 완자령(萬家嶺) 및 그 주위에서 일본군 1만 명 이상을 섬멸한 공을 세웠다. 1939년 초 국민당 후난성(湖南省) 주임위원 겸 후난성 주석에 임명된 뒤 1945년 6월까지 연임하였다. 이 기간에 ‘안·편·족(安便足)’ 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아편과 매매춘을 금하였다. 1939년 9월 말부터 20여 일에 걸쳐 제1차 창사(長沙)회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4만여 명과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1941년 9월 하순 제11군을 주력으로 한 일본군 15만 명이 창사를 재침공하자 20여만 명의 병력을 결집시켜 천로전법(天爐戰法)으로 격퇴하고 제2차 창사회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2월 일본군이 12만 명의 병력으로 제3차 창사 침공을 개시하여 이듬해인 1942년 1월 1일 창사로 진공해 오자, 1월 4일 일본군 포위작전을 성공리에 완성하고 보름에 걸쳐 일본군 5만여 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며 제3차 창사회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세 차례에 걸친 창사회전을 모두 승리한 공을 인정받아 청천백일훈장(青天白日勳章)을 받았다. 1944년 5월 새로 임명된 일본의 중국파견군 총사령관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垣征四郞)가 20여 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제4차 창사 침공을 시작하여 6월 19일 창사를 점령하고 8월 헝양(衡陽)을 함락시키자 후난성 변경으로 후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인쇄 목록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설악(관리번호:706) 오류 유형 *
오류 제목 *
오류 내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