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5월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3지대에 입대하였고 1945년 5월 국내정진교육훈련반(國內挺進敎育訓練班)에 편입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관리번호 | 520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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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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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榮根 |
| 이명 | 李資福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63 | 훈격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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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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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이영근 | 이자복(李資福) | 평북 정주(定州) | - | |
| 본문 |
1911년 3월 22일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 정주면(定州面) 덕산리(德山里)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자복(資福)이다. 1945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고 국내정진교육훈련반에서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교육받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중국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휘하에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지대를 편성하고 그 외에 모병기구로서 징모처(徵募處)를 두었다. 창설 초기 징모처는 제1분처, 제2분처, 제3분처, 제5분처, 제6분처가 있었다. 이 중 징모 제6분처는 김학규(金學奎)를 주임으로 하여 오광심(吳光心)·신송식(申松植)·서파(徐波) 등 8명이 편성되어 있었다. 제6분처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을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푸양은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한 지역이며, 중국군 제10전구사령부와 중국중앙군관학교(中央軍官學校, 황포군관학교의 후신) 제10분교와 가까운 곳이었다. 제6분처는 이 지역에서 지속적인 공작 활동을 통해 학도병이나 한인들을 포섭하여 광복군으로 편입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적극적인 초모 활동으로 징모 제6분처의 인원이 크게 증가하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제6분처를 제3지대로 개편하였다. 제3지대는 미국 전략첩보기구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와도 합작하여 훈련을 실시하는 등 초모‧선전‧첩보‧훈련 등의 영역에서 광복 때까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같은 달 국내정진교육훈련반에 편입되어 국내정진을 준비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강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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