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호남성 형문현(荊門縣)에서 일본군대를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서 공작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보충대(일명:土橋隊)에 입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토교대 명단
| 관리번호 | 378 | ||
|---|---|---|---|
| 성명 |
|
한자 | 金基周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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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이천(利川) 사람이다.
호남성 형문현(荊門縣)에서 일본군대를 탈출하여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서 공작하다가 중경(重慶)에서 광복군 총사령부보충대(일명:土橋隊)에 입대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김기주 | - | 경기도 이천(利川) | - | |
| 본문 |
1923년 6월 12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현 이천시) 백사면(栢沙面)에서 태어났다.
1944년 1월 20일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가 실시되면서 강제징집으로 일본군에 들어갔다. 2월 중순경 중국 후난성(湖南省) 징먼현(荊門縣)으로 배치되어 복무 중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였다.
이후 중국 중앙군 유격대에 들어가 항일 투쟁을 하다가,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에 입대하여 군사훈련과 정신교육을 받았다. 한광반은 중국 각지에서 초모한 한인 청년과 사병을 광복군으로 정식 편입하기 전에 기본교육을 시키려고 설치한 부대였다. 1944년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가 중국 10전구 사령부와 교섭하여 린취안(臨泉)에 있던 중국 중앙군관학교 제10분교(임천분교) 간부훈련단 내에 설치하였으며, 수료 후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4년 5월부터 10월까지 5개월 동안 교육과 훈련을 받은 예비 광복군은 모두 48명이었다. 수료한 48명 중 36명은 충칭(重慶) 광복군 총사령부로 갈 것을 지망하였고, 12명은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남아 광복군 제3지대의 핵심 대원이 되었다.
한광반을 수료한 후 대원들과 함께 1944년 11월 21일 린취안 군관학교 기숙사를 출발하여, 1945년 1월 31일 충칭에 도착, 토쿄대(土橋隊)에 들어갔다. 토교대는 충칭 시내에서 약 30리 떨어진 양자강 상류의 토교(土橋) 에 있어서 토교대라고 불렀다. 토교대는 충칭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광복군 총사령부의 보충대였으며, 대장은 최용덕(崔用德) 장군이 맡았다. 토교대 대원들은 3개 반으로 편성되었으며, 교육 기간은 약 3개월이었고, 군사 및 정훈 교육을 받았다. 수료 후 다시 경위대(警衛隊)에 배속되어 광복군으로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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