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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3457
성명
한자 司徒德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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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80 훈격 독립장
1942년 중국(中國) 국민정부 입법원 의원으로 중경(重慶)에서 창립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 비서장(秘書長)을 맡아 한중간(韓中間)의 문화교류에 힘쓰는 한편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 한국독립 건의를 중한문화협회 명의로 제출 하는 등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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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쓰투더(司徒德)는 1943년 5월 9일 한중문화협회 좌담회에서 “일본침략자의 동아시아대륙에 대한 침략은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병합 때부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이번의 대전이 끝난 후에 한국이 독립을 얻지 못하면 이번 전쟁의 목적을 제대로 얻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국 독립문제는 전후 평화의 관건”이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이 자리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규식·장건상(張建相)·조소앙 등이 한국 측 인사로 참여했다. 중국 측에서도 후츄위안(胡秋原)·천정페이(陳正飛) 등이 참석했다.

1943년 12월에는 동맹국의 조속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담화문에서 “동맹국들은 속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영도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동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은 평소 우리가 가장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정부는 198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대공보(大公報)(1943. 3. 1, 4. 12, 12. 6)
  • 독립신문(獨立新聞)(1943. 6. 1, 1944. 8. 15, 8. 29, 10. 8)
  • 중앙일보(中央日報)(1943. 12. 22, 1945. 2. 6)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제16권 299, 335면
  •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1983) 113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쓰투더(사도덕) 자: 신원(慎元) 중국 광둥성(廣東省) 언핑시(恩平市) -
본문
1907년 10월 15일 중국 광둥성(廣東省) 언핑시(恩平市)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신원(慎元)이다. 상하이(上海) 세인트 존 대학(聖約翰大學, Saint John’s University) 출신이며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1943년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 편역처(編譯處)에서 편수(編修)직을 맡았고, 1945년 2월 입법원 입법위원을 지냈다.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 원장 쑨커(孫科)의 수석비서를 겸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며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은 주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를 통해 이루어졌다. 중한문화협회는 1942년 10월 11일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장이던 조소앙(趙素昻)과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장(立法院長)을 맡고 있던 쑨커가 주도하여 조직되었다. 1942년 4월 15일 중한문화협회 주비회가 조직되어 중한문화협회 결성을 준비하자, 주비회 주석으로 임무를 총괄하였다. 그해 10월 8일 주비회가 충칭에서 활동하는 각 문화단체 책임자를 초청하여 중한문화협회 결성 관련 최종 보고회를 가질 때 임시정부 측의 신익희(申翼熙)와 함께 협회 설립 준비 경과를 발표하였다. 3일 후 열린 중한문화협회 성립식에도 참석해, 설립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1942년 10월 17일 개최된 제1차 이사 및 감사회의에서 중한문화협회 비서장에 임명되어 실무를 관장하였다. 그리고 쑨커와 조소앙(趙素昻)을 비롯한 한국 측 인사의 면담에 관한 사항을 맡았다. 또한 중한문화협회에서 개최한 강연의 연사를 섭외하거나 원고의 교정을 요청하였으며, 강연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미국인 학자와 임시정부 인사의 면담을 알선하는 등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한문화협회에서 개최한 각종 강연회·좌담회·토론회·기념식·환영회·환송회 등을 대부분 주관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혁명운동과 독립을 지지하는 중요한 발언도 발표하였다. 대표적으로 1943년의 3.1운동 기념 강연회에서 “한국 혁명은 보다 늦었지만 환경과 임무의 간고성은 중국과 러시아 두 나라 혁명보다 못지 않았다”며 3.1운동을 높이 평가하였다. 1943년 5월 9일 한중문화협회가 전후 한국 독립문제 좌담회를 개최하자, “한국 독립문제는 전후 평화의 관건”이라는 취지로 발언하였다. 1943년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중·미·영 삼국이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증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 기자에게 담화를 발표하였다. 담화에서 “동맹국들은 속히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여 영도력을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 한국임시정부가 동맹국으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은 평소 우리가 가장 바라는 바이다.”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1944년 1월 청두(成都)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마련한 다과회에서도 “한국 동지들이 카이로회의 이후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국제정세를 잘 활용하여 한국의 역량과 연합국의 역량이 상호 연계되고 보완작용을 할 수 있도록 힘써 주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치사를 하였다. 1944년 9월에도 중한문화협회 좌담회를 열어, 임시정부 승인문제를 토론하였다. 1943년 12월 중한문화협회는 한국의 독립 자유에 관한 방송좌담회를 주최하여 일본군에 끌려간 한국 청년들이 총구를 돌려 일본을 타도하는 데 앞장서 줄 것을 호소하였다. 1945년 2월 중한문화협회가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 청년을 위해 개최한 환영회에서 중국어와 영어로 적진을 탈출한 한국 청년들이 충칭까지 도착하게 된 경과를 보고하였다. 1944년에는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발휘하여 미국인·스웨덴인 등 각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기독교 재중경한교복리촉진회(在重慶韓僑福利促進會)를 발기하였다. 1944년 6월 24일 재중경한교복리촉진회 주비위원회가 설립되자, 부주석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20일에는 주비위원회 인사들과 충칭시 남쪽에 위치한 한인 거주지를 방문하여 위로의 뜻을 표하는 등 충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의 주택·의약·교육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진력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27일 중한문화협회가 개최한 한국국치기념 강연회에서 주석을 맡아 중국항전의 승리와 한국 민족의 해방을 축하하며, “동맹국이 충분한 원조만 제공한다면 한국은 다시 동아의 중심으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취지의 치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29일 미국유학청년회관에서 중한문화협회 창립 3주년 기념식과 더불어 김구 등 한국 혁명지도자 귀국환송회를 개최하였고, 중한문화협회의 업무보고를 하였다. 임시정부 요원이 귀국한 뒤에도 한·중 두 나라의 우의 증진을 위해 주화대표단을 이끄는 민석린(閔石麟)과 긴밀히 협력하여 중국 내 한국 관련 업무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47년 4월 이승만이 장제스(蔣介石)와 정부수립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상하이를 방문하자, 4월 10일 중한문화협회를 통해 환영식을 개최하도록 하였다. 다음날에는 이승만의 난징(南京) 방문에도 동행하였다. 1948년 1월 유엔한국임시위원단 중국부대표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하였다. 1951년에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주한위원회 정기위원도 역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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