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1988년 발간)
경남 남해(南海) 사람이다.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배속되어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33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379면
| 관리번호 | 3222 | ||
|---|---|---|---|
| 성명 |
|
한자 | 崔龍德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90 | 훈격 | 애족장 |
|---|
경남 남해(南海) 사람이다.
강소성(江蘇省) 소주(蘇州)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배속되어 항일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최용덕 | - | 경남 남해(南海) | 제2차 세계대전 | |
| 본문 |
1920년 5월 20일 경상남도 남해군(南海郡) 삼동면(三東面) 영지리(靈芝里) 경주(慶州) 최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일본으로 유학하여 주오(中央) 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40년대 들어 일제는 수세에 몰린 전황을 타개하기 위해 전시체제를 강화하였고, 1943년 10월부터 고등교육 이수자의 징병 연기를 금지하고 대학교의 수업과 졸업 연한을 단축하여 학생들을 전장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조치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일제는 1943년 10월 20일의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도(朝鮮人學徒陸軍特別志願兵制度)’를 근거로 한국인 학생들의 입대를 강제하였다. 이때 강제로 입영 지원서를 쓰게 되었고, 1944년 징집되어 대구의 일본군 육군 보병 제80연대를 거쳐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소재 일본군 제60사단으로 전속되었다.
간부후보생이 되어 난징(南京)의 일본군 예비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중, 1944년 6월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 소재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區隊)의 지하공작대원과 접선하여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다. 같은 간부후보생 김영남(金映男)의 주도하에 성동준(成東準)·정병훈(丁炳勳)·유재영(柳在榮)·박영(朴英)·전풍옥(全風玉)과 함께 탈출 계획을 수립하고, 1945년 2월 전방 시찰을 가장하여 기관총과 소총, 탄약, 기밀문서를 챙긴 뒤 부대를 탈출하였다. 일본군 헌병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탈출 경로상의 일본군 초소와 왕징웨이(汪精衛) 괴뢰정부 소속 화평건국군(和平建國軍) 부대를 격파하면서 3월 중국인 유격대와 합세하여 항일 전투를 계속하였다. 4월 국민혁명군 제3전구 휘하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과 접선하는 데 성공하여 적의 동향과 기밀문서를 연합국 측에 제공하였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신병이 인도되어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 정식 입대하였다. 구대장 이소민(李蘇民) 휘하의 전방공작대원으로 활동하면서 최전선의 국민혁명군 진영에 파견되어 일본군의 후방을 기습하고, 동지 초모(招募) 활동 및 일본군 대상 선전·심리전을 전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자 일본군 부대를 함께 탈출한 동지들과 저장성 항저우(杭州)에 한국광복군 특파단으로 파견되어 단장 김관오(金冠五) 휘하에서 국민혁명군의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 및 관할 내 치안 유지를 보조하며 한국인 일본군 포로들의 신병을 인도받았고,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 및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였다. 이후 다른 한국광복군 동지들과 함께 1946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미군 수송선편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고향 남해군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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