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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7월 20일 서울 화동(花洞)에서 아버지 황두연(黃斗淵)과 어머니 홍씨(洪氏)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자는 필옥(弼玉), 호는 몽호(夢乎)이다. 만주지역에서 활동할 때 이국현(李國賢)이란 가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고, 아버지는 서울에서 상업을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등으로 서울의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아버지가 어머니와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켰다. 1884년 어머니와 함께 충북 단양군 어상천면(魚上川面) 대전리(大田里) 삼화동(三花洞)이란 곳으로 내려와, 이곳에서 자랐다.
어려서는 서당에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였다.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어머니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중국 송나라 때 악비(岳飛)의 어머니가 악비의 등에다가 진충보국(盡忠保國)이라고 새겨주어 악비가 이를 잊지 않았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여 일본을 몰아내고자 한다는 소문을 듣고, 제천(堤川)에서 동학당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서울에서 아버지가 내려와 극구 만류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1898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하여 2년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1900년 1월 제1기생으로 졸업하였다.
1900년 1월 육군 참위(參尉)로 임관하여,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될 때까지 대한제국 군인으로 복무하였다. 이 동안 서울을 수비하는 친위대(親衛隊), 황실의 경비를 담당하는 시위대(侍衛隊)에서 복무하였고, 육군연성학교 교관 ・ 안동진위대 대장 ・ 육군유년학교 교관 등의 보직을 맡았다. 1907년 8월 1일 군대가 해산당할 때, 일본유학을 권유받지만, 이를 거절하고 제천으로 내려갔다. 1907년 제천으로 낙향하여 1919년 3・1운동이 일어날 때까지 은거생활을 하며 지냈다. 제천에도 교육기관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1909년 지방유지들과 함께 보명학교(溥明學校)를 설립한 것이 드러난 활동이었다.
서울에 올라갔다가 무관학교 동기생 김학소(金學韶, 일명 김혁(金爀))를 만나 만주일대에서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을 양성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강원도 오대산에서 금광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가산만 탕진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학소와 함께 활동할 생각으로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안둥(安東, 현 단둥(丹東))에 도착하여 김학소의 소재지를 수소문하였지만, 알 수 없었다. 1919년 11월 안둥에서 배를 타고 상하이(上海)로 갔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군무부 참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군무부에서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였고, 교관을 맡아 학도들의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교장 김희선(金羲善)이 일제에 투항하는 일이 일어난 후, 후임 교장 도인권(都寅權)과 함께 무관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그러나 재정적 어려움 등이 겹치면서 무관학교는 3기생을 배출하고 폐교되었다.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 초 김학소가 만주 푸쑹현(撫松縣)에서 흥업단(興業團)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만주를 향해 상하이를 떠났다. 1921년 4월 베이징(北京)에 이르러 박용만(朴容萬) ・ 신채호(申采浩) 등이 독립군 단체들의 통일을 추진하기 위해 군사통일회의를 추진하자, 통일당 대표로 이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5월 베이징을 출발하여 지린성(吉林省) 화뎬현(樺甸縣)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서간도 지역의 대표적 지도자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독판을 맡고 있던 이상룡(李相龍)을 만났다. 이상룡은 독립군들이 러시아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며, 이곳에서 함께 활동하자고 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재건하자는 그의 권유를 받아 참모장을 맡고, 군무부장도 겸임하였다.
서로군정서를 재건하기 위해 활동하였다. 화뎬현 ・어무현(額穆縣)을 중심으로 각지의 한인 마을을 돌아다니며 노동 야학을 실시하고,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장정을 군적(軍籍)에 편입시켰다. 그리고 별동대(別動隊)를 조직하여 각 지방을 정돈시켰다. 이때 그가 서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 추천하였던 박용만이 변절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로 인해 의심의 눈초리를 받게 되고 조사까지 받았다. 일제의 모략일 수 있다며 신중을 기할 것을 당부하였지만, 문제가 계속되고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참모장직을 사직하고 북만주로 떠났다.
북만주로 향하던 중 어무현 무치하(武致河)에서 최남표(崔南表)를 만났다. 그는 농장을 개척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로부터 청년들의 군사훈련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동안 군사강습을 실시하였다. 이때 김학소와 연락이 닿았다. 곧바로 무치하를 떠났다. 황지강자(黃地崗子)에 이르러 서로군정서 부독판을 지낸 여준(呂準)을 만났다. 그의 부탁으로 잠시 검성학원(儉城學院)에서 군사훈련을 담당하였다.
헤이룽장(黑龍江) 연안을 돌아, 1926년 중동선(中東線) 이도하자(二道河子)에 도착하여 김학소를 만났다. 당시 김학소는 자유시참변을 겪고 다시 북만주로 돌아와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신민부에 참여하여 주로 군사 분야를 담당하였다. 신민부에는 군사 활동 기구로 군사부와 참모부가 있었다. 나중소(羅仲昭)가 위원장을 맡고 있던 참모부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참모부 위원으로 신민부의 군구(軍區)를 개척하고, 병력을 확대하는 사업을 추진하였다. 방법은 신민부 관할 구역을 돌아다니며 군사 강연과 노동 야학 등을 실시하고, 장정들을 군적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별동대를 조직하여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구도 동만주지역으로 확대시켰다. 당시 동만주는 일본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으로, 중국관헌들의 협조가 절대적이었다. 훈춘(琿春)에 있는 중국의 최고 책임자 왕삼덕(王三德)을 찾아가 한국인들의 독립운동을 묵인하여 달라며 협상을 벌였고 협조를 얻어냈다. 이로써 신민부의 관할구역이 둔화(敦化)를 비롯한 동만주 일대로 확대되었다.
1927년 2월 김학소가 체포된 일이 일어나자 본부가 있는 웨이허현(韋河縣) 석두하자(石頭河子)로 돌아왔다. 하얼빈(哈爾濱)의 일본영사관 경찰과 중국경찰이 신민부 본부를 습격하여 김학소 등 12명의 간부를 체포하였다. 사건의 수습과 향후 활동방향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로 양분되었을 때, 김좌진(金佐鎭)과 더불어 군정파의 주요 인물로 역할하였다. 김좌진과 신민부를 재조직하고, 참모부 위원장을 맡았다.
1928년 5월부터 시작된 3부통합운동(三府統合運動)에 참여하였다. 정의부 ・ 참의부 ・ 신민부가 통합을 이루어 유일당을 조직하자는 3부통합운동이 전개되자, 김좌진 등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개인본위’와 ‘단체본위’라는 통합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되면서, 통합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1928년 12월 3부통합운동이 결렬된 후 혁신의회(革新議會)을 결성하였다. 혁신의회는 개인본위 방법을 주장하였던 신민부 군정파와 참의부, 그리고 정의부의 일부 세력이 연합하여 결성한 것이었다. 민사위원장 김승학(金承學)과 더불어 군사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혁신의회는 임시기관이었고, 이를 토대로 군정부(軍政部)를 설립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군정부를 설립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우창현(五常縣)에서 홍진(洪震) ・ 김좌진 ・ 지청천(池靑天) 등과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고, 중앙상무원을 맡았다. 생육사는 북만주 일대에 이주해 있던 한인들의 생활기반을 안정시키고, 군자금 마련과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930년 7월 위하현(韋河縣)에서 홍진 ・ 지청천 ・ 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창당하고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것을 계기로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하여 조직한 것이었고, 남만주에서 창당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더불어 만주지역을 대표하는 독립운동 단체였다.
1931년 11월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중국의 항일군과 함께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당군(黨軍)이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한국독립당은 긴급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각 군구에 있는 청장년들을 소집하여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총사령은 지청천이었고, 김창환(金昌煥)에 이어 부사령을 맡았다. 길림구국군(吉林救國軍)과 합작을 추진하고, 합작한 부대의 명칭을 중한연합토군(中韓聯合討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박호(鏡泊湖) ・ 사도하자(四道河子) ・ 동경성(東京城) ・ 대전자령(大甸子嶺) 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3년 10월 사하자(沙河子)에서 모병활동을 하던 중 한국독립군이 중국의 우이청(吳義成)부대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리품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마찰을 빚었던 우이청부대가 한국독립군을 기습 포위하고, 무장을 해제시킨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핵심세력은 중국관내로 이동하였다. 이때 지방에 나가 있어 이들과 함께 행동하지 못하고, 이탁(李沰)과 함께 중국인 집에 몸을 숨겼다. 일제 밀정에 은거지가 노출되자 1933년 말 단신으로 중국관내로 향했다. 잉커우(營口)를 거쳐 베이징에 도착하였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었다. 쑤이위안성(綏遠省)의 포두(包頭)로 가 배달농장을 경영하고 있던 조병준(趙秉準)을 만나 한동안 머물렀다. 그로부터 임시정부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다퉁(大同) ・ 우위안(五原) ・ 위린(楡林)을 거쳐 1938년 2월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에 도착하여 그곳에 이동해 있던 임시정부와 만났다.
임시정부와 합류한 이후, 줄곧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38년 7월 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군사위원회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의 군사정책과 활동을 전담하기 위해 설립한 기구였다. 군사위원회에서 초급장교 양성과 군대편성을 추진하였지만 이를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전란을 피해 창사를 떠나 광저우(廣州) ・ 류저우(柳州) ・ 치장(綦江) 등지로 이동해 다녀야 하였다.
치장에 도착한 후 군사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목표는 임시정부의 군대로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을 편성하는 것이었다. 우선 병력을 모집해야 하였다. 1939년 10월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 위원으로 선임되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갔다. 당시 시안은 화북지역을 점령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일 수 있는 최전선이었으므로 화북지역에 이주해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시안의 통제방(通濟坊)에 거점을 마련하고, 화북지역의 한인동포들을 대상으로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招募活動)을 전개하였다. 초모활동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또한 1939년 10월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군사특파단의 임무를 띠고 시안에 파견되어 활동되면서 또 광복군 총사령 대리로 활동하게 되면서 임시의정원에서는 거의 활동하지 못하였다.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총사령부 부관처장에 임명되었다. 창설 당시 군사특파단이란 이름으로 시안에 초모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국광복군은 병력이 충분히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칭(重慶)에 있던 군사간부와 시안에 파견되어 있던 군사특파단을 중심으로 편성하였다. 군사특파단 단장인 조성환이 총사령으로 선임된 지청천의 후임으로 군무부장에 선임되어 충칭으로 돌아가면서 군사특파단의 단장을 맡았다.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전하면서 총사령 대리로 임명되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한 후 1940년 11월 총사령부를 시안으로 이전하였다. 총사령 지청천과 참모장 이범석(李範奭)은 중국 군사 당국과의 협정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충칭에 남았다. 임시정부는 총사령부 잠정부서를 편성하고 총사령 대리로 임명하였다. 총사령 대리로 창설 초기 광복군을 총괄 지휘하였다. 총사령 대리로 임명된 후 시안시내에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광복군의 부대편제를 갖추었다. 충칭에서 온 인원과 시안에서 활동하던 군사특파단 인원을 중심으로 3개 지대(支隊)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1941년 1월 시안에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고 있던 무정부주의 계열의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자 이를 제5지대로 편성하였다.
1941년부터 한국청년훈련반을 설립 운영하였다. 부대편제를 갖춘 이후 각 지대 단위로 병력을 모집하는 임무를 부여하고 적극적인 초모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러한 활동으로 화북지역에 이주해있던 많은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게 되었다. 모집해 온 청년들은 일정한 기관 교육과 훈련을 받고 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들의 교육과 훈련을 위해 설립한 것이 한국청년훈련반이었고, 자신도 군사교관으로 이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담당하였다.
1941년 6월 발표한 「미국의 연안방어와 태평양방위선」이란 글을 통해 미국과 일본 간에 전쟁이 발발할 것임으로 예견하였다. 이 글은 미국의 해군과 공군의 군사력이 태평양 연안에 배치된 것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미일간의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미일 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이는 군사활동가로서 뿐만 아니라 군사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있는 사례였다.
1942년 10월 시안에서 충칭으로 돌아왔다.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의 행동을 규제하면서 통제 가능한 지역에 두려는 의도로 시안에 있던 총사령부를 충칭으로 이전하도록 하였다. 시안에 군사적 기반을 마련하여 활동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중국군사위원회의 명령이었다. 시안총사령부는 1942년 10월 충칭으로 이전하였고 총사령부와 함께 충칭으로 돌아왔다.
1942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고 생계부장(生計部長)에 임명되었다. 10월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증원된 국무위원을 선출하면서, 유동열(柳東說) ・ 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선출되었고, 국무회의에서 생계부장에 임명되었다. 생계부는 충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생활문제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당시 충칭에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가족들을 비롯하여 약 3백여 명의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중국정부로부터 이들에 대한 생활지원을 받았고, 이를 식구수에 따라 월급으로 지급하고 일정한 양의 쌀을 배급하기도 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44년 4월 임시정부가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할 때 국무위원으로 다시 선임되었다.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세력들이 참여해 오면서 임시정부는 헌법을 개정하고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이때 정부조직을 확대 개편하면서 국무위원에 대한 선거가 이루어졌고 다시 국무위원에 선출되었던 것이다.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생계부가 폐지되면서 무임소 국무위원이 되었다.
1945년 7월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이자 여당으로 역할하던 정당이었다. 2년마다 전당대회가 개최되었는데 1945년 7월 개최된 제4차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었다.
1945년 8월 10일 저녁 중국의 라디오뉴스를 통해 일제의 항복소식을 들었다. 이후 중국 ・ 미국과 환국을 위한 교섭이 전개되었다. 11월 5일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11월 23일 주석 김구와 부주석 김규식 등 제1진이 국내로 출발하였고, 12월 1일 홍진 ・ 조소앙(趙素昻) 등과 제2진으로 환국하였다.
환국 후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47년 임시의정원을 계승한 비상국민의회(非常國民議會)에서 정치분과 위원장에 선임되었다. 미군정하에서 정치적 활동은 어려웠고 단군전봉건회(檀君殿奉建會) 고문, 단군귀일회(檀君歸一會) 부총재, 대종교의회(大倧敎議會) 의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제천으로 피난하였다가 1953년 3월 12일 7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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