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11월 중국(中國) 북경(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제3지대 공작원(工作員)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관리번호 | 10678 | ||
|---|---|---|---|
| 성명 |
|
한자 | 崔春蘚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63 | 훈격 | 대통령표창 |
|---|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최춘선 | 최팔복(崔八福) | 평북 용천(龍川) | 제2차 세계대전 | |
| 본문 |
1920년 12월 2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郡) 양광면(陽光面) 봉덕리(鳳德里) 해주(海州) 최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최팔복(崔八福)이라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유복한 환경에서 출생하여 청소년기에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였고, 와세다(早稲田) 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공부하던 중 일본의 기독교 사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카가와 토요히코(賀川豊彦)의 사상에 감화되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였다. 약자를 핍박하는 일제 치하의 부정함을 인식하고 그에 맞서 조국 독립을 쟁취하기로 결심하여 중국으로 건너갔다.
중국에서 거주하던 중 1944년 11월 베이핑(北平)에서 한국광복군 지하공작대원과 접선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의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에 도착하여 한국광복군에 정식 입대하였다. 첩보작전에 필요한 훈련을 이수한 뒤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의 지시에 따라 베이핑 지구의 전방공작대원으로 파견되었다. 베이핑 시내의 한국인 상점들 내에 구축된 지하공작망을 중심으로 영어,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하다는 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 연합국에 제공하였으며, 중국 국민혁명군 지하조직과 연계하여 일본군 시설 습격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고, 일본군 점령지에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거나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들을 동지로 포섭하여 임시정부로 인도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한 이후 국민혁명군을 도와 일본군 무장해제 작업 및 관할 내 치안 유지를 보조하며 한국인 일본군 포로들의 신병을 인도받았고,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 및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다가 1946년 중국 내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사재를 빈민 구제에 쾌척하였으며, 기독교인으로서 사역 활동에 종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