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2월 중국 북경에서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에게 접선되어 적지구 공작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중국 북경지구 적지 공작원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관리번호 | 10506 | ||
|---|---|---|---|
| 성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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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石海 |
| 이명 | 없음 | 성별 | 남 |
| 생년월일 | 사망년월일 | ||
| 본적 | |||
| 운동계열 | 광복군 | 포상년도 | 1963 | 훈격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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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2월 중국 북경에서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에게 접선되어 적지구 공작원으로 임명되었으며 중국 북경지구 적지 공작원으로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순번 | 성명 | 이명 | 출신지 | 관련사건 | |
|---|---|---|---|---|---|
| 1 | 최석해 | - | - | 제2차 세계대전 | |
| 본문 |
1943년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지하공작원으로 활약하였다.
중국에 체류하며 생업에 종사하던 중, 1943년 2월 베이핑(北平)에서 한국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金學奎)와 접선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귀순하였다. 일본군 점령하에 있던 베이핑 지구의 현지 지하공작원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파(洪坡)·손기달(孫基達) 등 베이핑 지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공작원들과 함께 동지와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정수(李廷秀) 등 뜻있는 한국인들을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의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로 인도하여 한국광복군에 입대하게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베이핑 시내에서 현지 노무자를 가장하여 수집한 정보를 연합국 측에 제공하였으며, 한국인 식당 및 숙박시설, 민가를 거점으로 구축한 지하연락망을 통해 미군의 공중작전 및 국민혁명군 편의대(便衣隊)와 항일유격대의 일본군 시설 습격을 지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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