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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34
성명
한자 郭泰棋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68 훈격 독립장
1921년 중국 광동입법정부(廣東立法政府) 선전국장 재직 중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에 적극 협조하였고, 1941년 국제연맹에 중국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절대독립을 주장하는 등 국제적 여론을 조성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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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궈타이치(郭泰棋)는 1921년 11월에 광둥호법정부 대총통부(大總統府) 선전국장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1941년에는 국제연맹 중국 대표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주창하고 11월 이후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외교부장으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의 공식 승인에 적극 협력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집행부로부터 치하를 받기도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와 조선민족혁명당 김원봉(金元鳳) 등 주요 독립운동가와 소통하면서 국민당 정부의 협력과 지원을 이끌어내는데 기여하였다.

1942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직후, 영국 주재 중국 대사로 임명되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미국 정부로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항전 의지 여부를 타진받자, 이를 충칭의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협의했다.

1943년 3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주최한 3.1독립선언 제24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는 등 한국의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부는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6) 14집 375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7) 19집 83면, 359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25집 504면
  • 신한민보(新韓民報)(1941. 12. 4)
  • 독립(獨立)(1945. 7. 25)
  • 자유신문(自由新聞)(1949. 1. 6)
  • 대한민국 독립운동공훈사(1983) 1135면
  • 사진출처:『최신지나요인전(最新支那要人伝)』(조일신문사, 1941)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궈타이치(곽태기) 자 : 복초(複初)·보동(葆東)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광제(廣濟) -
본문
1888년 12월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광제(廣濟, 현 武穴) 전진(田鎮) 곽충완(郭沖垸)에서 태어났다. 자는 복초(複初), 혹은 보동(葆東)이다. 1902년 장즈퉁(張之洞)이 후베이성 우창(武昌)에 세운 신식학당인 남로고등소학당(南路高等小學堂)에 입학하였다. 총명한데다 근면·성실하고 학업성적이 우수하여 재학기간 장즈퉁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장즈퉁의 배려로 1904년 관비유학생으로 미국에 파견되었다. 1908년 펜실베니아대학에 입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펜실베니아신문사에 취직하여 편집과 취재 업무를 담당하였다. 신해혁명 폭발 직후인 1912년 초 귀국하였다. 후베이군정부의 외교고장(股長)을 맡아 외교에 발을 딛게 되었다. 1913년 3월에는 부총통 리위안훙(黎元洪)의 영문비서가 되었으며 왕스제(王世杰)의 소개로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1916년 6월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사망하여 리위안훙이 대총통을 계임한 뒤에도 영문비서를 맡아 총통부 고등고문과 외교부참사를 겸하였다. 이 기간 신해혁명 후에 중화민국군정부(中華民國軍政府) 외교총장과, 난징(南京)임시정부 사법총장을 역임한 우팅팡(伍廷芳)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다. 우팅팡으로부터 능력과 재능을 인정받아 다수의 실제 외교 사무를 처리한 것이 후일 외교계에서 활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1917년 장쉰(張勳)이 선통제 푸이(溥儀)를 옹립하여 청나라를 다시 세우려고 기도한 사건을 일으키자 우팅팡을 따라 광저우(廣州)로 남하하여 쑨원(孫文)이 조직한 호법정부의 참사 및 외교차장으로 활동하였다. 1918년 광저우 호법정부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미국을 방문하였으나 실제적인 도움을 얻어내지는 못하였다. 1919년 중국대표단 전문위원 신분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여 정식으로 국제사무를 처리하였다. 1923년 리위안훙이 총통직에서 물러나자 비서직을 사임하고 낙향하였다가 곧 광저우로 가 호법진영에 재차 가담, 대원수부 참사에 임명되었다. 외교 재능을 중시한 쑨원에 의해 9월 30일 대본영 외교부차장에 임명되었다. 궈타이치는 쑨원의 호법 정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였다. 1926년 7월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시작되자 만현참안(萬縣慘案), 한커우(漢口) 영국조계 회수, 주장(九江) 영국조계 회수, 영국군함의 난징포격사건 등 외교적 현안의 해결에 침착하게 임하여 각 방면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았다. 1927년 3월 북벌군이 상하이(上海)와 난징을 수복하자 우한국민정부 외교부장 천유런(陳友仁)의 명으로 현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상하이에 파견되었다. 이 기회에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던 우한정부와 관계를 단절하고 난징정부의 편에 서 4월 상하이임시정치위원회 위원, 5월 장쑤(江蘇) 교섭원에 임명되어 외교 사무를 처리하며 상하이정치분회 위원을 겸하였다. 이 일로 우한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결의에 따라 당적이 박탈되고 수배령이 내려지기도 하였다. 1927년 8월 6일 난징정부 외교부 차장에 임명되었다. 분열되었던 국민당과 국민정부가 하나로 합쳐진 뒤인 1927년 10월 20일 외교부장 우차오수(伍朝樞)를 보좌하는 외교부 차장에 재임명되었다. 1928년 2월 11일 황푸(黃郛)가 외교부장에 임명되자 3월 6일 외교부 차장을 사임하고 상하이교섭원 겸 국민당 중앙선전부 상하이판사처 국제조 주임에 임명되었다. 국민혁명군의 북벌이 완성된 뒤인 1928년 10월 새로운 정부조직법에 따라 5원제가 시행되면서 11월 7일 제1기 중화민국 훈정시기 입법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2월 27일 중앙정치회의의 결정에 따라 이탈리아 공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1930년 9월‘확대회의’의 약법(約法)기초위원회 비서장에 임명되었다. 1931년에는 반장(反蔣, 반 장제스)의 기치를 내건 광저우 국민정부에 참가하여 국민정부 위원에 임명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의 침공으로 이른바‘상해사변’이 발생할 당시 외교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었다. 동년 1월 31일 외교부 정무차장에 임명되었다. 3월 19일부터 중·일 간에 정전담판이 시작되자 중국측 수석대표로 참가하였다. 1932년 5월 주영공사에 임명되어 8월 5일 취임하였으며 8월 16일 제13기 국제연맹 대표에 특임되어 귀국 전까지 겸임하였다. 부임 이후 구웨이쥔(顧維鈞)·옌후이칭(顔惠慶) 등과 함께 일본의 침략행위를 낱낱이 폭로하고 국제연맹 차원에서 일본을 견책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외교 활동이 주효하여 1933년 2월 24일 국제연맹대회는 「19국위원회 보고서」를 통과시키고 ‘만주국’을 승인하지 않기로 하였다. 이 일로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였다. 1934년 9월 10일 국제연맹 제15차 대회가 개막되자 장편의 연설을 통해 국제연맹이 중국문제를 중시할 것과 ‘만주국’ 정권에 대한 어떠한 형식의 승인에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9월 28일에는 국제연맹과 중국의 기술합작위원회에 출석하여 중국의 건설성과에 대해 보고하였다. 1934년 9월 17일 국제연맹의 비상임 이사국 개선에서 중국이 낙선하여 연임되지 못하자 이후 2년간 비상임 이사국 지위 회복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 사이 1935년 5월 22일 중국과 영국의 외교관계가 대사급으로 승격되면서 초대 주영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다. 1937년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이 발생하자 각국 대표들을 만나 국제연맹 차원에서 일본에 대한 제재를 가할 것을 유세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1938년 초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성과를 인정받아 옥스퍼드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항전 초기인 1938년 영국은 일본과 세관협정을 맺고 1939년 7월 22일에는 중국에서 일본군의 모든 활동을 인정하며 중국을 지원하거나 반일적인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이른바「아리타-크레이기협정」을 조인하는 등 일본에 대해 타협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나아가 1940년 영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 당시 중국이 연합국과 통하는 유일한 서남 육상교통로인 버마로드, 즉 뎬먼공로(滇緬公路, 윈난-미얀마)를 폐쇄하였다. 이에 중화민국정부 명의로 영국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고 부단히 수상과 외상 등을 만나 교통로 재개를 요구하였다. 협상결과 우선 약품 등 긴급 물자의 수송 재개를 허락받았고, 결국은 영국으로 하여금 일본과 맺은 협정을 파기시켜 뎬먼공로의 완전한 재개통을 성사시켰다. 재임기간의 노력으로 항일전쟁 초기 중국은 영국으로부터 1천 8백만 파운드 상당의 물질적 원조를 받을 수 있었다. 영국대사로 재임 중임에도 1939년 1월 29일 전시 최고정책 결정기구인 국방최고위원회가 설치되자 외교전문위원회 주임위원에 임명되어 본직과 겸하였다. 1941년 4월 17일 영국대사직에서 물러나 귀국길에 올랐고 5월 9일 외교부장에 취임하였다. 1941년 국제연맹 중화민국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역설하였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주창하였다. 김구와 김원봉 등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소통하면서 중화민국 정부의 임시정부 승인과 광복군 지원에 크게 기여하였다. 1941년 7월 21일 국방최고위원회 상무위원에 임명되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12월 23일 외교부장에서 물러나 국방최고위원회 외교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다. 1943년 3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주최한 3·1운동 제24주년 기념대회에 참석하여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역설하고 노력하였다. 1945년 5월 20일 국민당 제6기 중앙감찰위원으로 선출됨과 동시에 외교전문위원회 주임위원에 지명되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인 1946년 1월 제1차 국제연합총회 중국 수석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상임대표에 특임되었다.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안전보장이사회 제1차회의 주석을 맡았다. 1947년 4월 국제연합특별대회 중국전권대표로 출석하였다. 동년 7월 21일 주국제연합 상주대표 겸 안전보장이사회 대표에 특임되었으나 11월 13일 사직하였다. 1947년 9월 12일 국민당 중앙감찰위원에 재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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