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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100012
성명
한자 孫科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독립운동지원 포상년도 1970 훈격 대통령장
1942년 3월 중국 국민정부 입법원장으로 중국 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촉구함.

1942년 10월 중국(中國) 중경(重慶)에서 (韓),중 양 국민의 문화교류와 단결을 위한 한중문화협회(韓中文化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 요청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한국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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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 공훈록 24권(2019년 발간)

쑨커(孫科)는 1942년 3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입법원장으로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국 수상 처칠을 향해 인도와 베트남 그리고 한국과 필리핀의 독립을 요청하였다. 특히 한중 관계에 대하여 “중한 양국은 4천년 이래의 깊은 관계가 있고 또 밀접한 교섭과 문화의 교통이 있었다”고 하면서, “근년 이래 우리나라[중국]는 한국의 독립혁명 진행을 원조하기를 결심할 뿐 아니라 우리와 공동 항일하는 형제의 나라로 보는 것이다”라고 하여 한중연대를 통한 대일항전 의지를 분명히 주창하였다. 4월에도 중국 군중이 모인 대회석상에서 한국은 절대 독립해야 하고, 중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10월 한중문화협회 회장이 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국의 독립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주장했다.

1944년 7월 한중문화협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초청하여 개최한 행사에서 “동맹국가는 하루바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함으로써 동맹국의 대일작전 역량을 증가 시킬 것을 희망한다”라는 취지의 환영사를 하였다.

정부는 1970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참고문헌>
  • 불령단관계잡건(不逞團關係雜件)-조선인(朝鮮人)의 부(部)-재지나각지(在支那各地)(2)
  • 선봉(先捧)(1927. 9. 25, 10. 23, 1935. 12. 15)
  • 신한민보(新韓民報)(1928. 1. 12, 11. 1, 1931. 6. 11, 1942. 3. 26, 4. 2, 10. 15, 11. 19, 1944. 6. 8)
  • 국민보(國民報)(1943. 10. 20)
  • 독립(獨立)(1944. 7. 26)
  • 대공보(大公報)(1945. 9. 7)
  • 독립운동사자료집(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제7집 136, 140, 1108면
  •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국사편찬위원회, 2008) 제22집 135, 155~156, 177~178, 225~226, 237면
  • 사진:독립기념관 제공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쑨커(손과) 자 : 철생(哲生)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현 중산시) -
본문
1891년 10월 20일생으로, 중국 광둥성(廣東省) 샹산현(香山縣, 현 중산시) 사람이다. 자(字)는 철생(哲生)이고, 쑨원(孫文)의 첫째 부인인 루무전(蘆慕貞)의 소생이다. 태어난 이듬해, 쑨원이 마카오의 경호병원에 취직되어 모친과 함께 마카오로 이주하였고 얼마 후 홍콩에 정주하였다. 1895년 겨울, 광저우(廣州)봉기에 실패한 쑨원이 모자를 호놀룰루(Honolulu)로 보내 형 쑨메이(孫眉)의 보살핌을 받도록 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삼자경(三字經)』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배웠으며, 12살에 천주교회가 설립한 성안동(聖安東)학당에서 공부하였다. 영민하고 성적이 우수해 8년 과정을 4년에 마치고 성 루이스학원으로 진학하였다. 1910년 3월 쑨원이 호놀룰루로 옮겨와 혁명운동을 전개할 때 동맹회에 가입했고, 『자유신보』 ・ 『대성주간』의 편집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성 루이스학원을 마친 후 캘리포니아주립대학(University of California)에 입학하였고, 현지 화교가 창립한 『소년중국신보』의 편집에 참가하였다. 신해혁명이 발발하자 학업을 일시 중단하고 귀국하여 혁명 선전에 몰두하였다. 1912년 7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중단된 학문을 이어갔다. 1916년 대학을 졸업한 후 캘리포니아대학원에 입학하여 정치경 제학을 전공하였고, 신문학을 부전공하며 이듬해 경제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 8월 미국유학을 마친 후 귀국하여 광저우 호법군정부의 대원수부 비서겸 외교부 비서를 맡았고, 이듬해 『광저우시보』를 창간하여 부주편을 맡았다. 1920년 11월 쑨원이 광저우군정부를 조직하면서 광저우 시정청장(市政廳長) 겸 치하독판(治河督辦)을 맡았다. 광저우의 첫 번째 시장으로 「광저우시조직조례」를 제정하고, 시정부에 공안 ・ 공무 ・ 재정 ・ 교육 ・ 위생 ・ 공용 6국을 개설하였다. 1922년 8월 국민당개진안기초위원회 위원을 맡아 국민당의 개조준비 작업과 새로운 당강(黨綱) 및 당장(黨章)의 입안에 참가하였다. 1923년 10월, 국민당 임시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개최를 준비하였다. 1924년 가을, 쑨원의 명령에 따라 선양(瀋陽)에서 펑계(奉系)군벌 장쭤린(張作霖)과 남북합작을 추진하고 즈계(直系)군벌의 토벌을 계획하였다. 그해 11월 북상한 쑨원이 베이징(北京)에서 간암으로 사망한 후 1925년 7월 대원수부가 국민정부로 개조되었다. 국민정부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926년 1월 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5월에는 광둥성 정부위원 겸 건설청장에 취임하여 광저우의 도시건설을 주도하였다. 북벌군이 승리하면서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당부가 12월 우한(武漢)으로 이전하였고,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및 임시 연석회의 주석단을 역임하였다. 2기 3중 전회에서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 위원, 중앙정치위원, 군사위원회 위원과 국민정부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청년부장을 겸임하였다. 4・12정변으로 국민당의 내분이 심화되자 중앙당부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당의 통일방안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7년 9월 중앙특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고, 국민정부 재정부장과 건설부장을 맡았다. 국민당의 파벌투쟁이 격렬하던 1928년 1월, 후한민(胡漢民)과 함께 출국하여 유럽 각국의 정치경제 상황을 고찰하면서 건국 구상을 가다듬었다. 그해 6월 파리에서 미래의 중국정부는 쑨원의 구상에 따라 ‘오권(五權) 통치’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국(黨國) 훈정대강 및 외교처리방안」의 초안을 작성하였다. 같은 해 9월 귀국하여 「국민정부조직법」 및 「중국국민당훈정강요」 작성에 참여하였고, 10월 국민정부가 개조된 이래 국민정부 위원, 고시원 부원장, 행정원 철도부장, 교통대학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중국의 첫 민항공사를 창립하고 사장을 역임하였다. 정치적으로 장제스蔣介石의 권력독점에 불만을 가졌지만 되도록 충돌을 피하며 합작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31년 2월 28일, 후한민이 수감되자 국민당 재조파가 결성되었고 지도자로 옹립되었다. 광둥 ・ 광시(廣西)를 기반으로 반장(反蔣)세력을 규합하여, 5월에 국민당 중앙집감위원(執監委員) 비상회의와 국민정부를 조직하고 두 조직의 상무위원을 맡았다. 양광(兩廣) 세력이 장제스의 토벌을 목표로 북상하려고 할 무렵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였다. 전국적으로 “내전중지, 항일일치”의 여론이 고조되자 난징(南京)과 광저우 쌍방은 당쟁을 해결하기 위한 협상에 나섰다. 평화통일회의에서 중앙상위에 추천되었고, 행정원장을 맡아 1932년 1월 1일 취임하였다. 그러나 장제스의 지지를 받지 못해 재정위기와 외교적 곤경을 처리할 힘이 없어 1월 25일 사직하였다. 1933년 1월 입법원장에 취임하여 헌법 기초 작업을 주도하였다. 1934년 10월, 입법원을 통과한 헌법안이 국민당 중앙의 수정을 거쳐 1936년 5월 5일 공포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장제스는 전시상황을 이유로 헌정 실시를 미루다가 1946년 11월 국민대회에서 재수정한 헌법을 통과시켰다. 대외적으로는 소련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35년 중소문화협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37년 8월 21일 중소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 또한 소련의 군사원조와 차관을 얻기 위해 1938년 1월과 3월, 1939년 4월 세 차례 걸쳐 소련을 방문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중일전쟁이 끝난 후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고, 1946년 10월 제헌국민대회주석단, 1947년 4월 국민정부 부주석 겸 입법원장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3월 장제스에 의해 부총통 후보로 추천받았으나 리쭝런(李宗仁)에게 패하였다. 얼마 뒤 입법원장, 행정원장에 취임하였고 1949년 2월 5일 행정원이 광저우로 이전하면서 3월 8일 정계를 은퇴하였다. 그 후 홍콩과 프랑스를 거쳐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65년 타이완에서 열린 쑨원 탄신 100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한 후 총통부 자정(資政)과 고시원 원장을 맡았다. 1967년 8월 중화문화부흥운동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73년 9월 13일 심장병으로 타이베이에서 생애를 마쳤다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다. 국민정부 입법원장과 중한문화협회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이 문제를 거론하며 여론을 환기시켰다. 입법원장으로 재직하던 1942년 3월 충칭(重慶)에서 국민외교협회와 동방문화협회 및 국제반침략회 중국지회 등 세 단체가 공동 주최한 한국문제강좌에서 한중관계의 역사성을 주장하며 양국의 당면과제로 대일 공동항전을 제기하였다. 구체적 방안으로 중국이 한국을 원조하여 독립운동을 촉성시키면 한국 민중은 자동적으로 봉기하여 해방을 요구하고 일제를 타도할 수 있다고 보았다. 중일전쟁 시기 한국은 일제를 붕괴시킬 수 있는 촉진제로 인식된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이 ‘한국독립을 원조할 수 있는 방도의 하나로 제일 중요한 것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이라고 판단하였다. 1942년 2월 22일 ‘한국독립문제’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중국이 항일전을 전개하기 이전에는 임시정부를 승인할 힘이 없었으나 26개국과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는 현재로서는 그 역량이 있으므로 한국의 독립을 원조하고 특히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한다. (중략) 한국 임시정부의 23년간 혁명분투의 역사는 구주의 유망정부와는 달리 성립시 한국민족을 대표하였으며 현재까지 한국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한국 내에는 비록 상이한 당파가 있으나 제2의 임시정부는 없다. 미국 내 수만의 한교(韓僑)는 최근에 회의를 개최하여 충칭의 한국 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으며 소련의 수만 명의 한인, 동삼성의 수만 명의 한인도 또한 임시정부를 옹호한다고 하였다. 이는 한국의 천만 인민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이다. (중략) 중국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나면 영국 ・ 미국도 이에 따를 것이고 소련도 이에 따라 승인을 할 것이다. 승인한 후에 한국 임시정부는 역량을 키워 우리들이 도쿄로 군사를 집합할 때 저들의 본국으로 돌아가서 부흥대업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라고 그 당위성을 밝혔다. 1942년 4월 8일 국민참정회에서도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제의하여 통과되었으나 당시 상황 때문에 발표되지 않았다. 1942년 7월 국민정부는 임시정부의 승인 계획을 확정하고 적당한 시기가 오면 곧 승인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국민정부의 공식 입장은 끝까지 유보적이었다. 한국과 민간차원의 외교활동도 적극적이었다.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과 함께 1942년 10월 11일 충칭에서 중한문화협회를 결성하였다. 이 조직은 한국과 중국의 각계 인사들을 망라한 우호단체로 다과회 ・ 강연회 ・ 좌담회 등을 통해 친선도모 및 독립촉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11월 10일 개최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초대 다과회에서 ‘단결은 존망의 관건’이란 연설을 통해 “한국 혁명은 중국 혁명과 마찬가지로 한 당 한 파만의 일이 아니다. 어느 한 당 한 파가 전적으로 알아서 처리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모든 당파가 일치단결하여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지금 모든 정세는 우리에게 극히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는 중국항전 승리의 기회이자 한국독립의 기회이기도 하다. 한인들이 언제 어디에서든 단결을 이룰 수 있기 바란다. 절대 단결을 잊지 말라! 단결! 단결!”이라 하며 단결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캐나다 위니펙(Winnipeg)에서 열린 태평양관계 토론회에 중한문화협회 회장자격으로 연합국의 조속한 임시정부의 승인을 촉구하는 전문을 보냈다. 1944년 5월 18일 임시정부의 신임 국무위원 및 각부 수장을 위한 다과회를 직접 주재하고 단결에 기초한 신속한 국권회복을 기원하였다. 같은 해 10월 8일 중한문화협회 성립 2주년 기념식 및 회원대회에서는 “이번 세계대전이 동맹국의 승리로 마감됨으로써 한국은 반드시 독립국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각국은 속히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여 대일작전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게 하고, 무장한 한국 인민이 중국의 반공(反攻)에 동참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라고 하면서 연합국의 임시정부 승인을 촉구하였다. 중한문화협회는 민간단체인 까닭에 집행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주요 구성원이 대다수 한중 당 ・ 정 ・ 군의 유력인사들로 한중 유대와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이들은 각종 강연회와 좌담회 등을 통해 한중간의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며 상호 이해를 증진시킴으로써 공식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외교문제를 해결하는데 적지 않게 도움이 되었다. 이처럼 해방 직전까지 중국국민당, 국민정부, 국민참정원, 중한문화협회 등에서 주요직책을 역임하며 사적, 공적으로 한국독립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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