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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4월 16일 중국 신장(新疆) 지역에서 부친 명해(明海)와 신장 회교도 출신인 마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만주족이며, 자는 유침(柳忱)이다. 1887년 부모님과 함께 본적지인 지린성(吉林省) 솽청현(雙城縣, 현 黑龍江省)로 돌아가, 1889년 사숙에 입학하였다. 1901년 겨울 솽청현 관판(官辦)의 의학에 입학하였다. 만주족의 습속에 따라 16세부터는 매일 기마와 활쏘기를 연마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
1902년 창춘(長春)으로 가 동자시(童子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이후 2년간 사숙의 교사를 지냈다. 외부적으로는 열강의 압박에 시달리고 내부적으로는 부패하고 무능한 당시 청나라의 상황을 목도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를 위해서는 무비(武備)와 함께 경정(警政)의 확립이 절실하다고 판단하여 경찰이 되고자 하였다. 1906년 텐진(天津)에 자리한 북양고등순경학당에 입학하였다. 3년의 수업기간 경찰 관련 과목 외에도 법학 방면, 특히 국제공법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1909년 순경학당 졸업과 동시에 원적지에 배치되어 지린성 경찰청 서국(西局) 국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여 곧 국장으로 승진하였다.
1910년 하얼빈경무국 빈장(濱江) 순경국장으로 전보되었다. 취임 후 먼저 내부조직의 정돈과 개혁에 나서는 한편 직접 범죄조사와 심문에 임하기도 하였다. 당시 러시아는 중국과 중동철도를 함께 경영한다는 구실로 하얼빈에 관구(管區)를 설정하여 동북침략의 대본영으로 삼았다. 중국인 범법자들이 치외법권 지역이나 다름없는 러시아관구로 몸을 숨기면 중국 경찰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어 지방의 치안이 방해되고 국권의 손실도 컸다. 일찍부터 연구하였던 국제공법을 원용하여 교섭한 끝에 중국 경찰이 러시아관구에 진입하여 범죄자 체포업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경찰업무 뿐만 아니라 쑹화강(松花江)의 홍수 예방에도 치적을 보였으며, 페스트 창궐 시 적절한 조치를 취하여 러시아황제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빈장 순경국장 재임 시 탁월한 치적에 힘입어 1913년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4월 8일 제1기국회 개막식에 출석하였다.
1913년 11월 14일 위안스카이(袁世凱)가 국민당에 대한 해산령을 내리고 350여 명에 달하는 국민당적 국회의원의 자격을 박탈하여 국회가 문을 닫자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도중 선양에 들렀을 때 펑텐(奉天)도독 장스란(張錫鑾)의 요청으로 솽산현(雙山縣) 지사를 맡게 되었다. 취임 후 지방의 필요에 맞추어 경찰력 강화, 실업 및 교통의 진흥, 학교와 의료위생기구의 설립에 치중한 3년 시정방침을 정하고 단기간에 순차적으로 실행에 옮겨 성과를 거두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칭제(稱帝) 음모를 구체화시키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위안스카이 사후 1916년 6월 7일 대총통직을 계임한 리위안훙(黎元洪)이 6월 29일 약법과 국회의 회복을 약속하자 솽산현(光山縣) 지사에서 물러나 1916년 8월 1일 국회에 출석하였다. 대총통 리위원훙과 국무총리 돤치루이(段祺瑞)가 참전문제로 갈등을 빚고 이로 인하여 1917년 6월 13일 국회해산령이 내려지게 되었다. 이에 베이징(北京)을 떠나 지린성 몽고기(旗) 부도통으로 재직하고 있던 부친을 만나러 갔다가 지린성장 곽종희(郭宗熙)의 간곡한 요청으로 지린성 관산(官産)처장을 맡고 관은호(官銀號) 감리관을 겸하여 지린성의 재정을 개선하는데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1918년 여름 지린독군 맹은원(孟恩遠)과 헤이룽(黑龍江)독군 포귀경(鮑貴卿) 사이에 무장충돌이 발생하여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돌자 지방의 관신(官紳)들과 연합하여 조정에 나섰다. 1919년 봄 지린성 위슈현(楡樹縣) 지사에 임명되었다. 재임 시 부세(賦稅) 정돈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성과를 거두었다.
1922년 4월 2일 베이징에서 모임을 가진 제1기 국회의원들은 직권행사를 계속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8월 1일 국회가 베이징에서 회복되자 출석하였다. 국회에서의 헌법제정 작업이 상당히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을 때, 차오쿤(曹錕)이 총통이 되고자 국회의원들을 매수하였다. 이때 고위직 제안을 뿌리치고 동북으로 돌아가 장쭤린(張作霖)에게 차오쿤 토벌을 요청하였다. 장쭤린에 의해 동삼성보안총사령부 자의(諮議)에 임명되었다. 쑨원(孫文)·돤치루이와의 연합이 성사된 뒤에야 차오쿤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장쭤린의 말을 듣고 가족을 데리고 상하이로 남하하여 일부 국회의원들과 함께 차오쿤에 반대하는 정치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10월 23일 대총통 차오쿤이 하야하자 장쭤린과 연합하여 돤치루이를 임시 집정으로 추대한 뒤 동북으로 돌아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동북의 동단 13개 현을 관장하는 이란도윤(依蘭道允)에 임명되었다. 의란도윤 재임시 관할구역 내에 거주하는 한인(韓人) 문제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25년 5월 농상부 차장에 임명되었으며, 7월 28일 신임총장 양서감(楊庶堪)의 취임이 저지되자 총장 직무를 대리하였다. 1927년 10월 북양정부의 마지막 내각인 반복(潘復)내각의 농공(農工)총장에 임명되었다.
국민혁명군의 베이징 점령이 가시화되어 1928년 6월 2일 장쭤린이 출관(出關)을 선언하자 같은 열차편으로 선양으로 향하였다. 1928년 가을 북벌이 성공하자 일본은 동북지방이 국민정부의 편에 서는 것을 방해하고자 하였다. 1928년 11월 쇼와(昭和) 일왕의 가면대전(加冕大典)에 축하 전사(專使)로 임명되자, 11월 3일 선양을 출발하여 조선을 거쳐 일본으로 향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수상 겸 외상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와 동북지방의 역치(易幟)문제를 두고 쟁론을 벌였다. 귀국 후의 보고에 따라 12월 29일 동북 전역에 정식으로 청천백일만지홍 국기가 게양되어 중국의 통일이 완성될 수 있었다. 1929년 1월 동북정무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7월 10일 동삼성교통위원회가 중동로 전보처를 접수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하는 한편 소련인 2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로 인하여 소련군이 동북을 침공하는 이른바 중동로사변이 발생하였다. 문제해결과 교섭의 책임을 띠고 1929년 12월 30일 중동철로독판에 임명되었다. 1930년 1월 5일 하얼빈에서 정식으로 취임한 뒤 1월 28일 난징에 도착하여 소련과의 장래 협상에 관해 당국과 협의하였다.
1930년 2월 12일 중·소회의 전권대표로 결정되어 1930년 11월과 1931년 4월 11일부터 8월 19일까지 18 차례의 회의를 열고 중동로 관리와 인사문제 등 쟁점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었다. 중동로 문제가 원만하게 해결될 희망이 보이던 차에 9·18사변이 발생하여 중동철도가 일제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중·소회담은 자연 중지되고 말았다. 1933년 가을 귀국하여 상하이와 톈진에 머문 뒤 1935년 가족들과 베이핑(北平, 북경)에 정주하였다. 1936년 11월 장쉐량의 요청으로 장제스(蔣介石)을 만나 시국에 관해 건의하였다. 이어 서안사변이 발생하자 급히 난징으로 가 옌시산(閻錫山) 등과 대책을 논의하였다. 난징으로 귀환한 장제스이 고향 봉화(奉化)에서 휴양하자 위문하고 장쉐량을 만난 뒤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에서 휴양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한 뒤 전시국회 성격의 국민참정회가 성립되자 제1기 참정원에 선출되어 1938년 7월 6일 한커우(漢口)에서 열린 개막회의에 출석하였다. 1940년 제2기 국민참정원에 연임되었다. 1941년 11월 17일 국민참정회 제2기 2차대회에 출석하여 타오싱즈(陶行之) 등과 ‘자유한국임시정부 정식승인’을 제안하여 ‘한국의 복국(復國)운동 완성을 부조하고, 적당한 시기에 자유한국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한다’는 결의를 이끌어 내었다. 1942년 제3기 국민참정원에 연임되었으며 국민참정회 주석단 주석에 당선되었다. 1942년 10월 한·중 두 민족의 문화 연구와 교류,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고 동양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기구로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가 성립되자 초기 회원으로 참여하여 명예이사에 추대되었다.
1943년 10월 동북난민구제위원회 집행위원회 주임위원을 맡아 동북 출신 난민의 구제 업무를 담당하였다. 전시에는 동북 난민의 생활 및 교육문제의 해결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전후에는 각지에 산재한 동북 난민이 순조롭게 귀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1944년 5월 25일 중한문화협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을 초대하여 모임을 개최할 때 참가하여 “항전 승리와 한국의 독립이 멀지 않았음”을 강조하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계속적인 지지를 약속하였다. 1944년 6월 중화민국 각계 전선 위문단장을 맡아 위로품과 위로금을 들고 구이저우(貴州)와 후난(湖南) 서부전선을 돌며 병사들을 위문하였다. 1944년 9월 5일 개회한 국민참정회 제3기 3차대회에 출석하여 후츄웬(胡秋原) 등과 한국 독립 지원과 즉각적인 임시정부 승인을 제의하였다. 동년 11월 8일 열린 한중문화협회 성립 2주년기념식에도 출석하여 한국 독립운동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취지의 연설을 하였다.
1945년 제4기 국민참정원과 국민참정회 주석단 주석을 연임하였다. 항일전쟁 승리 후에는 동북선위사, 동북구제회 부회장을 맡았다. 1946년 11월 15일 난징에서 개최된 제헌국민대회에 대표로 출석하여 주석단 주석에 당선되어 중화민국헌법 통과에 기여하였다. 1947년 2월 1일 헌정실시촉진위원회 부회장에 추대되었고, 4월 18일 국민정부 위원에 임명되었다. 1948년 3월 29일 난징에서 열린 제1기 국민대회에서 부총통 후보에 제명(提名)되었다. 5월 26일 헌정독도(督導)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헌법의 연구, 헌정의 고찰 및 실시에 힘을 쏟았다. 1950년 타이완(臺灣)으로 건너가 1951년 고문 신분으로 중일화약(中日和約)의 논의과정에 참여하였다. 1954년 2월 29일 소집된 제1기 국민대회 제2차 회의에 출석하여 주석단 주석에 당선되고 총통 후보로 제명되었으나 투표 직전 경선 참가를 포기하였다. 1954년 9월 1일 고시원 원장에 취임하여 12년간 연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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