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
1897년 5월 28일 중국 저장성(浙江省) 취저우부(衢州府) 장산현(江山縣) 바오안향(保安鄉)에서 태어났다. 자는 위농(雨農)이고, 어릴 때 이름은 춘펑(春風)이다. 가문은 청말 장산현 바오안향의 중소 지주였으나, 이후에 가산이 기울어 매우 빈곤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어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11세 때 모친의 격려와 지도를 통해 소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계속하였다.
1906년 성년이 되자 고향의 지주무장민단(地主武裝民團)에 가담해 활동하였다. 그러다 1918년 친구 쉬스요우(許世友)·쉬창징(徐長卿) 등과 함께 사오린스(小林寺)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3년 후에 돌아와 춘펑무관(春風武官)을 열었다. 그러나 군벌의 혼란으로 1922년 무관이 문을 닫게 되자 저장군벌 저우펑치(周鳳岐) 부대에 들어가 복무하다가 동년 12월 부대를 떠나 다음해 상하이(上海)로 향하였다. 상하이에 도착한 후 교역소에서 장제스(蔣介石)·예팅(葉挺)·저언라이(周恩來)·판한니엔(潘漢年)·리반농(李半農)·다이지타오(戴季陶) 등과 교류하였다. 1926년 황푸군관학교 기병과(奇兵科)에 제6기생으로 입학하였다. 황푸군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자 장제스는 칭찬하며 비서·보디가드 겸 부관으로 임명하였다. 1927년부터 스스로 정보공작에 참여하였다. 1927년 8월 장제스는 국민당 내부에 왕계(汪系)와 계계(桂系, 廣西派)의 공격으로 사면초과에 놓여 있었다. 이를 돌파하고자 황푸군관학교 2기생인 후징안을 중심으로 상하이에 황푸동학연락소조(黃埔同學聯絡小組)를 설치하고 정보 수집과 부대 감시 등의 활동을 지시하였다. 이는 사실상 장제스의 기밀조직으로, 이때 소조원 중에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1월 장제스가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복귀하면서 사령부 상위참모에 임명되었고, 황푸동학연락소조의 일을 맡았다.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정보수집 분야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장제스로부터 인정받았다. 2차 북벌 개시 후 산둥(山東)에 잠입한 후 지난(濟南)‧바오딩(保定)‧톈진(天津)‧베이징(北京) 일대에서 장쫑창(張宗昌)·쑨촨팡(孫傳芳)·장쭤린(張作霖) 군대에 관한 고급 정보를 다량 수집하였다. 이는 장제스가 2차 북벌을 승리로 이끄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이때부터 장제스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931년 장제스는 군사정보 수집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혁명군 총사령부 안에 많은 시부관(侍副官)과 연락참모를 임명하고 군사정보를 수집하도록 하였다. 이때 정지에민(鄭介民)과 함께 정보 수집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장제스로부터 책임자로 임명되어 정식으로 총사령부 하에 밀사조(密査組)를 조직하고 정보수집 활동을 시작하였다. 밀사조 책임자를 맡은 후 난징성(南京城) 지어강(雞鵝巷) 53호의 주택을 사무실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곳에서 저우웨이롱(周偉龍) 등 10여 명과 함께 정보수집 활동을 하였다.
1932년 장제스는 부흥사(復興社) 즉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를 설립하고, 사장직을 맡았다. 부흥사는 하부에 조직·선전·훈련·특무 등 4개 처(處)를 두었다. 이 가운데 장제스가 특히 중시하였던 것은 특무처로서 사실상 부흥사의 핵심이었는데, 특무처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밀사조와 중앙조직부 조사과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으로 통일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천리푸(陳立夫)를 군통국 국장으로 임명하였다.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3처로 이루어졌고, 특무2처 처장(軍統 前身)을 맡았다.
1938년 3월 29일 국민당 임시전국대표대회가 우창(武昌)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장제스는 특무활동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원래 천리푸를 국장으로 두었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을 철폐하고 원래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제1처를 국민당 중앙조사통계국(간칭 중통국), 제2처를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간칭 군통국), 제3처를 군사위원회 특검처로 확대하였다. 이때 군통국의 부국장을 맡았지만, 실제로는 책임자 역할을 하였으며, 군통국의 공작·인사·경비를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다. 항전 후기 누차 일본 점령구역 안에 침투해 정보수집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일본은 마오쩌둥(毛澤東) 보다 더 많은 현상금을 내걸기도 하였다.
한국독립운동과 관계를 맺게 된 것은 국민정부의 한국독립운동 비밀 원조를 책임지면서부터이다. 중국국민당과 국민정부의 대한(對韓) 비밀원조는 세 방향에서 이루어졌다. 당을 대표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에 나섰던 곳은 중앙조직부였다. 군에서는 정치작전과 정보방면의 부서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연락업무를 담당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담당한 또 다른 비밀 연결선이던 군부에서 정치작전과 정보방면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 및 조선의용대 책임자였던 김원봉(金元鳳)과 황푸군관학교 동문이라는 개인적인 인연으로 연결되어 업무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이들의 활동을 지원하였다. 1919년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직된 의열단은 단원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고자 하였다. 이후 의열단원들의 황푸군관학교 입교가 실현되었다. 김원봉은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중국의 국민당정부가 있는 난징으로 이동하여 군사위원회와 연락해 반만항일(反滿抗日)을 위한 한·중 공동투쟁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중국 측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 서한을 받은 장제스가 그에 대한 지원을 승인하였다. 중국의 지원을 받게 된 후 상하이와 화베이(華北) 등지에서 대일정보 수집 등 특무공작을 전개하였다. 이 특무공작에 대한 지원을 책임지는 동시에 활동을 지휘하였다. 또한 김구(金九)가 이끌고 있던 한국국민당의 활동 또한 지원하였다. 중일전쟁을 계기로 한국국민당은 중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활동하였다. 중국의 대일전면전 시작 후 김구는 난징에서 비밀리에 장제스를 만났다. 장제스는 이 자리에서 한국 측의 역할을 강조하며 자금 지원을 약속하였고, 한국국민당은 화베이와 상하이 등 중국 관내지역에 청년들을 파견해 대적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하이지역에서는 프랑스조계 가오산루(高山路) 부근에 지부를 두고 상점으로 위장한 채 활동하였을 때, 군사위원회 특무대 책임자로서 연락하였다. 상하이지부 역시 군사위원회의 특무대 상하이지사와 연락하며 활동하였다. 훙커우(虹口)·양수푸(楊樹浦)·우쑹(吳淞)·강한라점(江漢羅店)·양행(楊行)·유행(劉行)의 각 전구에 들어가 일본군의 진용·편성·실력 등을 조사하고 무기·탄약·식량·비행기·대포의 저장소 등을 보고하였다. 이러한 정보를 바탕으로 중국군 비행기의 야간 공습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한국독립운동 세력이 군사조직을 결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하였다. 1937년 7·7사변으로 중국이 대일전면전을 시작하자, 한국독립운동 세력들은 각각 군사조직의 결성을 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충칭(重慶)에 정착하면서 중국정부를 상대로 한국광복군 창설을 교섭하였다. 1940년 5월 장제스에게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계획서를 제출하였다. 장제스는 이를 검토하고 ‘한국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조건으로 찬성한다며 중국군사위원회에 조속히 실현해주도록 지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독자적으로 운영하고자 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상호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은 가운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장제스의 비준을 근거로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1941년 중국군사위원회가 한국광복군의 행동을 규제하는 「한국광복군 9개항 행동준승」을 보내왔고, 이에 의해 한국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되었다. 그 대가로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에 대한 재정적·물질적 지원을 하였는데, 매달 6만원 중국달러의 보조를 책임졌다. 조선의용대를 조직한 김원봉에게도 대일전선준비비(對日戰線準備費)의 명분으로 매월 3천 원의 활동비를 지원하였다.
1942년 다이리는 미국과 연합해 만든 특무기관 중미특종기술합작소(中美特種技術合作所)의 주임을 맡았다. 1943년 국민정부 재정부집사총서(財政部緝私總署) 서장(署長)에 임명되었고, 오래지 않아 재정부 전시화물운수관리국 국장까지 겸하게 되었다. 1945년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임시의정원 의장 홍진(洪震) 및 부의장 최동오(崔東旿), 조선민족혁명당을 탈당한 김붕준(金朋濬)과 신기언(申基彥) 등이 합류하면서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의 창당을 선언하였다. 한반도와 점령지에 있는 한국인들 중에서 기존 조직을 확대하고 강화시켜 적의 정보 획득, 적의 군사시설 파괴, 연합국과 협력하여 적절한 시기에 전면적인 봉기의 준비를 활동목표로 삼았다. 오래 전부터 신한민주당의 일부 당원들과의 특별한 관계를 바탕으로 이 당의 적후활동(敵後活動)에 재정적 원조를 해주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