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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950430</MNG_NO>
<NAME_KO>가네코 후미코</NAME_KO>
<NAME_CH>金子文子</NAME_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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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1903-01-25</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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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26-07-23</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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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여</SEX>
<REGISTER_LARGE_DIV>외국</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일본</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山梨 東山梨 諏訪村杣口 1236</REGISTER_SMALL_DIV>
<JUDGE_YEAR>2018</JUDGE_YEAR>
<HUNKUK>애국장</HUNKUK>
<WORKOUT_AFFIL>독립운동지원</WORKOUT_AFFIL>
<ACHIVEMENT>1922년 2월부터 박열과 의기투합하여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활동을 시작하였다. &#13;
5월 경 흑도회에 가입했고 7월부터는 박열과 함께 기관지 『흑도』의 발간책임을 맡았다. 9월에는 흑우회를 조직해 사상연구와 연설회 등을 추진하면서 기관지 『민중운동(民衆運動)』을 한글로 발행하였다. 12월에는 『후토이센진』을 창간했고, 1923년 3월 『현사회』라는 이름으로 개칭하여 지속적으로 발간하였다. &#13;
1923년 4월 무정부주의 운동가들을 규합하여 불령사를 조직하였다. 불령사는 한국 내 형평운동을 지지하는 한편 노동운동을 적극 지원하는 등 무정부주의에 입각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의열단과 함께 의열투쟁을 추진했는데, 폭탄을 도쿄로 반입하여 일왕과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13;
1923년 9월 도쿄대지진 직후 보호감속 명목으로 도쿄 세타가야(世田谷)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취조 도중 폭탄 반입 사실이 알려지게 되어 이른바 ‘대역사건’의 주모자가 되었다. 구금 중 박열과 결혼하고 일제 사법당국을 향해 항일 활동을 떳떳하게 항변했으며 재판 중 만세를 부르기도 하였다.&#13;
1926년 3월 25일 대심원 제1특별형사부에서 이른바 ‘형법 제73조(大逆罪) 및 폭발물취체규칙위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4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13;
정부는 2018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신문조서(訊問調書)(동경지방재판소, 1923. 10. 25, 1924. 1. 24, 1. 25, 3. 31, 5. 14)</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예심종결결정(豫審終結決定)(1925. 7. 7)</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예심청구서(豫審請求書)(1925. 7. 17)</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판결문(判決文)(대심원 제1특별형사부, 1926. 3. 25)</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동아일보(東亞日報)(1925. 8. 4, 12. 20, 1926. 3. 1, 4. 21, 4. 24)</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시대일보(時代日報)(1925. 11. 25)</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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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8108</MNG_NO>
<NAME_KO>가재연</NAME_KO>
<NAME_CH>賈在衍</NAME_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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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1923-04-08</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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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45-03-29</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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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충청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서산</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瑞山 東門</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1</JUDGE_YEAR>
<HUNKUK>애족장</HUNKUK>
<WORKOUT_AFFIL>학생운동</WORKOUT_AFFIL>
<ACHIVEMENT>충남 서산(瑞山) 사람이다. &#13;
인천상업학교 재학중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뼈저리게 느끼면서 한국인 학생끼리 비밀리에 친목회를 조직하고 고락을 함께 하기로 결의하였다.  &#13;
이들은 일본인 교장 야마모도의 억압에 반대하면서, 학교에서 못하게 하는 졸업앨범을 제작하여 졸업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기로 굳게 약속하였다. 그런데 이 학교 출신으로 일본 명치대에 진학한 송재필(宋在弼)이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에 다니는 친구를 방문하여 학병 반대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처에 편지로 연락하다가 충북 영동서에 발각되었다.  이에 따라 친목회에 가입하였던 그를 비롯한 고윤희·김여수·김형설·정태윤 등의 동기생들이 1944년 1월부터 속속 영동서에 붙잡혔다. 이들은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전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그는 1945년 3월 29일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의 여독으로 대전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제적등본(1945. 3. 29 대전형무소에서 옥사)</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인고90년사(85. 12. 20) 189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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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1069</MNG_NO>
<NAME_KO>가재창</NAME_KO>
<NAME_CH>賈在昌</NAME_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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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1897-11-02</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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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36-05-31</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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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충청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서산</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安眠 倉基</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0</JUDGE_YEAR>
<HUNKUK>애족장</HUNKUK>
<WORKOUT_AFFIL>국내항일</WORKOUT_AFFIL>
<ACHIVEMENT>충남 서산(瑞山, 현 태안) 사람이다. &#13;
1919년 3·1독립운동 당시 서산군 안면도(安眠島)의 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이후 비밀결사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에 가입하여 항일활동을 폈다. &#13;
대한독립청년단은 윤종정(尹宗楨)·안영식(安英植) 등 평양(平壤)의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임시정부 지원단체로서 주요 활동은 임시정부와의 통신연락, 군자금 모집, 비밀출판 등이었다.  &#13;
그는 1919년 이종성(李鍾聲)·이종헌(李鍾憲)·임정호(林楨鎬)·오몽근(吳夢根) 등과 함께 서산군 안면도(安眠島)에 대한독립청년단의 지단으로서 독립지단(獨立支團, 일명 決死團)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이후 각 가정의 청년들을 역방하며 동지규합에 힘써 단원이 20여명에 이르렀으며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여 250원의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그러던 중 그는 동지들과 함께 1920년 3월 일경에 붙잡혀 동년 10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정치범처벌령 위반으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신분장지문조회회보서</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3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321·322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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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952208</MNG_NO>
<NAME_KO>감상두</NAME_KO>
<NAME_CH>甘祥斗</NAME_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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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1915-06-29</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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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미상</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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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경상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남해</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남해 남변 216</REGISTER_SMALL_DIV>
<JUDGE_YEAR>2020</JUDGE_YEAR>
<HUNKUK>애족장</HUNKUK>
<WORKOUT_AFFIL>국내항일</WORKOUT_AFFIL>
<ACHIVEMENT>공산주의 사상에 공명해 1932년 11월 김기두(金琪斗)의 집에서 회합하고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 결성에 동의했다.
1933년 9월 이른바 ‘전북적색교원사건’으로 취조당했다. 이 사건은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등 3도 13개 군에 걸쳐 보통학교 교원, 면서기, 농회 기수, 학생, 신문기자 등 각계각층의 인물 40여 명이 관여된 사건이었다. 
이후 감상두는 남해보건동지회에서 활동했다. 이 단체는 표면적으로 체육 장려를 목적으로 한 합법적 단체로 조직됐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공산주의 의식분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결성됐다.
감상두는 1934년 6월에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 등으로 전주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됐다. 당시 직업은 사진업이었고, 동아일보사 남해지국에서 활동했다.
1935년 10월 전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에, 3년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이후 1935년 10월 28일 출옥했다. 
정부는 202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판결문(전주지방법원: 1935. 10. 25)</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동아일보(東亞日報)(1933. 8. 26, 1934. 12. 29, 1935. 8. 8).</BOOK_NAME>
</RE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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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1421</MNG_NO>
<NAME_KO>감익룡</NAME_KO>
<NAME_CH>甘翊龍</NAME_CH>
<DIFF_NAME>甘益龍</DIFF_NAME>
<BIRTHDAY>1887-12-29</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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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46-09)</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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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황해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송화</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蓮井 溫水</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0</JUDGE_YEAR>
<HUNKUK>애족장</HUNKUK>
<WORKOUT_AFFIL>계몽운동</WORKOUT_AFFIL>
<ACHIVEMENT>황해도 송화(松禾)군 연중(蓮中)면 온수(溫水)리에서 태어났다. &#13;
1907년 4월 양기탁(梁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하여 황해도 지회에서 활동하였다. &#13;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武官學校)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 창건사업을 추진할 때 이에 적극 참가하여 1910년 12월 초순 만주 안동현(安東縣)을 독립군기지 후보지로 시찰하여 물색하고, 평안북도 용천(龍川)의 신민회 회원인 김용규(金容奎)·고일청(高一淸)·김용삼(金容參)·김희록(金熙錄)·김성주(金成柱) 등 동지들과 함께 1910년 12월 하순 연락근거지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감익룡 등은 안동현에서 상업을 경영하면서 안동이 만주 중국으로 가는 통로이므로 이곳에 하나의 거점을 설립하여 한편으로는 다수의 청년들을 북경무관학교에 입학토록 알선하고 그 입학자금을 공급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간도에 세울 독립군기지와 무관학교에 갈 이주민을 모집하는 사업을 하였다. &#13;
일제가 1911년 1월 신민회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관계인사를 검거한 소위 「양기탁 등 16명 보안법위반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무장독립운동비사 14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216면, 10권 668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549·550면, 14권 809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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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956314</MNG_NO>
<NAME_KO>감태순</NAME_KO>
<NAME_CH>甘泰舜</NAME_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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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RTHDAY>1889-01-01</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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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경상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창원</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북 무곡 351</REGISTER_SMALL_DIV>
<JUDGE_YEAR>2024</JUDGE_YEAR>
<HUNKUK>대통령표창</HUNKUK>
<WORKOUT_AFFIL>3.1운동</WORKOUT_AFFIL>
<ACHIVEMENT>창원군에서는,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 발표 이래 3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창원면･진동면(鎭東面)･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 등지에서 만세시위가 계획되고 진행되었다.&#13;
3월 23일 오후 2시 창원 읍내 시장에서 감태순･박화열(朴和熱) 등의 주도 하에 장날을 맞아 장터에 나온 약 5,000여 명의 군중들이 함께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 곳곳을 행진하였다. 이날의 만세시위는 오후 6시까지 진행되며 고조되었다. 이에 마산(馬山) 중포병 대대와 진해(鎭海) 요항부(要港部) 장교 이하 26명의 일본군이 출동하여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이때 만세시위에 참여한 60여 명이 체포되었고 35명이 징역을 선고받았다.&#13;
무곡리(茂谷里)에 거주하던 감태순은 창원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다.&#13;
1919년 5월 6일 부산지방법원(釜山地方法院) 마산지청(馬山支廳)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1923년 2월경 체포되어 그해 3월 27일 대구복심법원(大丘覆審法院)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13;
정부는 2024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판결문(判決文)(대구복심법원 : 1923. 3. 27)</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형사공소사건부(刑事控訴事件簿)</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집행원부(執行原簿)</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매일신보(每日申報)(1919. 5. 29)</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신한민보(新韓民報)(1919. 9. 6)</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1) 제3권 241~243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창원군지(창원군지편찬위원회, 1994) 371~374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ITEM>
<ITEM>
<MNG_NO>4097</MNG_NO>
<NAME_KO>강갑영</NAME_KO>
<NAME_CH>姜甲永</NAME_CH>
<DIFF_NAME>姜顯永</DIFF_NAME>
<BIRTHDAY>1907-06-07</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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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45-07-19</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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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경상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산청</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三壯 德橋 267</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5</JUDGE_YEAR>
<HUNKUK>대통령표창</HUNKUK>
<WORKOUT_AFFIL>국내항일</WORKOUT_AFFIL>
<ACHIVEMENT>경남 산청(山淸) 사람이다. &#13;
평소 일제 식민지 통치에 반대하여 민족 의식을 길러 오던 중 1931년 8월 26일 부산의 전영진(田永鎭) 집에서 박귀선(朴貴先)·이인형(李麟炯) 등과 함께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격문을 인쇄·배포하면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일본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혁명적 노동자가 선두에 서서 농민·소시민 등과  조직적 단결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내세우고, 이를 위해 일반의 의식을 각성하기 위해 등사판에 이와 같은 내용을 담은 격문을 인쇄하여 노동자에게 배포·선전하다가 동년 9월 24일 일경에 붙잡혔다.  &#13;
1931년 11월 14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공소하여 1932년 3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5년을 받았다. &#13;
출옥 후 그는 노동조합(勞動組合) 운동에 참가하여, 김상혁(金相赫)과 함께 전남 지방의 노동조합 건설에 힘을 쏟았다.  &#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판결문(1932. 3. 22 대구복심법원)</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신분장지문원지(경찰청)</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동아일보(1933. 11. 22)</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ITEM>
<ITEM>
<MNG_NO>70001</MNG_NO>
<NAME_KO>강경근</NAME_KO>
<NAME_CH>姜京根</NAME_CH>
<DIFF_NAME/>
<BIRTHDAY>미상</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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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24-05-10</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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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평안북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정주</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郭山</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5</JUDGE_YEAR>
<HUNKUK>애국장</HUNKUK>
<WORKOUT_AFFIL>만주방면</WORKOUT_AFFIL>
<ACHIVEMENT>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20년대 중반 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강경근이 활동한 참의부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이념문제로 대한통의부와 의군부(義軍府)로 분열되었을 때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통의부 의용군내 제1·2·3·5중대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한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는 독립운동단체이다.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였으며, 창설 당시의 주요 부서와 간부는 다음과 같다.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대(金蒼大), 훈련대장 박응백(朴應伯) 등이다. 참의부는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제1중대장 백광운과 제2중대장 최석순에 이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광운이 피살된 후에는 최석순이 참의장 겸 제2중대장으로 있으면서 군사활동을 주도하였다.  
강경근도 참여한 참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진격전으로 대표된다. 참의부는 압록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독립신문 1924년 7월 26일자에 실린 통계만 보더라도 참의부 군대는 1924년 4월부터 7월 16일까지 20차례 정도 국내에 진격하여 군자금 모금 및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물론 계절적으로 독립군이 자연을 이용하여 대일투쟁을 하기 가장 좋은 시절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것은 상당히 많은 숫자라고 하겠다. 아울러 이 통계에 따르면 독립군들은 평안도 의주군·초산군·강계군·선천군·영변군·위원군·태천군·용천군·자성군 등 평안도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이처럼 지역적으로 평안도 지역이 많은 것은 압록강 대안이 평안도 지역이라는 지역적인 이점 외에 참의부의 주민과 독립군 병사들 가운데 평안도 출신이 많아 이곳 지리에 밝았으므로 효과적인 게릴라전을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참의부원으로 활동하던 강경근은 1924년 5월 10일 집안현(輯安縣) 옥석하(玉石河)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친일적인 중국 보갑대(保甲隊)와 충돌하여 계동화(桂東化)와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492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한국독립사(김승학) 전권 355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4집 936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신문(1925. 5. 5)</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5권 468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한국독립운동사(국사편찬위원회) 제4권 128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ITEM>
<ITEM>
<MNG_NO>80006</MNG_NO>
<NAME_KO>강경선</NAME_KO>
<NAME_CH>康景善</NAME_CH>
<DIFF_NAME/>
<BIRTHDAY>1891-08-15</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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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30-08-18</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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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평안북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정주</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大田 雲田</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95</JUDGE_YEAR>
<HUNKUK>독립장</HUNKUK>
<WORKOUT_AFFIL>중국방면</WORKOUT_AFFIL>
<ACHIVEMENT>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13;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년 12월 상해에서 여운형(呂運亨)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류민단 규칙에 기초하여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어 약 1년간 상해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통솔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13;
1921년 11월 임시정부의 후원과 전시(戰時) 부상자의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어 김구(金九) 등과 함께 활동하는 한편, 국내의 화요파(火曜派)와 연락하는 등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13;
1923년 2월 임시정부의 조직 개편을 놓고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로 분립되자 태극단(太極團) 대표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참가한 그는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장하는 개조파의 성명을 지지하였다. 동년 10월 상해지역 재류(在留)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교민단과 중국 상해에 재류하는 일반 동포의 자질과 민족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교민단 단장 이유필(李裕弼), 의원 김승학(金承學) 등과 함께 교민단 의사회를 개최하여 1920년 9월 교민단 조직 시 제정한 교민단 조례를 개정하고 부과금을 징수하여 재정을 충원할 것을 논의, 통과시켰다.  &#13;
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 동년 8월 교민단 총무,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최석순(崔錫淳)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李承晩)의 탄핵안건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이승만을 축출하는데 앞장섰다.  &#13;
1926년 3월 1일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교민단장 대리로 한국독립선언기념식을 거행하고 식사(式辭)를 낭독하였으며, 동년 10월 인성학교 교감으로 동포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 후 192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한국유일당(韓國唯一黨) 조직 촉성회(促成會)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후 남경(南京)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8월 18일 피살되어 10여 년간의 독립운동을 마감하였다.  &#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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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조선민족운동연감 179·190·196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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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고등경찰요사(경북경찰부) 105·139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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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01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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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32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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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요시찰인명부(국가보훈처) 214∼216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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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제4권 474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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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13집 1044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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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동아일보(1926. 10. 24)</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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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조선일보(1930. 9. 14)</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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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424·439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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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305·309·453·543·549·585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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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제9집 552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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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ITEM>
<ITEM>
<MNG_NO>954218</MNG_NO>
<NAME_KO>강경숙</NAME_KO>
<NAME_CH>康景淑</NAME_CH>
<DIFF_NAME>康敬叔</DIFF_NAME>
<BIRTHDAY>(1875)</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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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43-06-19</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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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평안남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용강</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삼화</REGISTER_SMALL_DIV>
<JUDGE_YEAR>2015</JUDGE_YEAR>
<HUNKUK>대통령표창</HUNKUK>
<WORKOUT_AFFIL>미주방면</WORKOUT_AFFIL>
<ACHIVEMENT>&#13;1909년부터 1942년까지 멕시코에서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프론테라지방회 대의원, 알바로 오부리곤지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3;
1909년 공립협회 회원, 1912년 대한인국민회 메리다지방회 회원, 1926년 프론테라지방회 대의원, 1928년 알바로 오부리곤지방회 재무,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알바로 오부리곤지방회 회장, 1936년 대한인국민회총회관 건축 위원, 1937년부터 1939년까지 알바로 오부리곤지방회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에는 오부리곤지방회 통신처 지방통신원으로 1942년까지 통신 사무를 맡아 보았다. 1921년부터 1938년까지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였다.  &#13;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REFERENCES>
<REFERENCE>
<BOOK_NAME>新韓民報(1921. 6. 23, 1924. 10. 2, 1925. 1. 29, 12. 31, 1926. 5. 27, 12. 2, 1927. 9. 22, 10. 20, 1928. 2. 9, 5. 31, 9. 27, 12. 20, 1929. 2. 21, 8. 22, 12. 12, 12. 26, 1930. 11. 27, 1931. 1. 1, 6. 4, 12. 17, 1933. 7. 13, 1934. 5. 31, 1936. 7. 9, 1937. 3. 11, 3. 18, 1938. 2, 3, 5. 12, 1939. 3. 9,  1940. 1. 18, 1942. 4. 30)</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미주국민회자료집(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2005) 제1권 432면, 제5권 191면, 제9권 45면, 제16권 116면, 제17권 550면</BOOK_NAME>
</REFERENCE>
<REFERENCE>
<BOOK_NAME>멕시코 프론테라 임원 등이 흥사단이사부로 보낸 편지(1928. 1. 29), 저축금 환부 청원서(1928. 2. 28), 멕시코 프론테라지방회에서 흥사단이사부로 보낸 공문(1928. 3. 21) 미주 흥사단자료(독립기념관 소장)</BOOK_NAME>
</REFERENCE>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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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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