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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NG_NO>2762</MNG_NO>
<NAME_KO>서일</NAME_KO>
<NAME_CH>徐一</NAME_CH>
<DIFF_NAME>徐夔學, 徐正學, 徐希世, 徐學圃, 白圃(號), 白浦(號), 熙瑞(字)</DIFF_NAME>
<BIRTHDAY>1881-02-26</BIRTH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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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DAY>1921-09-28</LAST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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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X>남</SEX>
<REGISTER_LARGE_DIV>함경북도</REGISTER_LARGE_DIV>
<REGISTER_MID_DIV>경원</REGISTER_MID_DIV>
<REGISTER_SMALL_DIV>安農面 金熙洞 254</REGISTER_SMALL_DIV>
<JUDGE_YEAR>1962</JUDGE_YEAR>
<HUNKUK>독립장</HUNKUK>
<WORKOUT_AFFIL>만주방면</WORKOUT_AFFIL>
<ACHIVEMENT>함북 경원(慶源) 사람이다.&#13;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1911년 동만(東滿) 왕청현(汪淸縣)에 망명하여, 청일학교(靑一學校)·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설립하는 등 청소년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육영사업에 전념하였다.&#13;
한편 대종교(大倧敎)를 신봉하여 시교사(施敎師)로서 수년간에 걸려 수만명의 교우를 얻고 동일도본사(東一道本司) 전리(典理)와 총본사 전강(典講)을 역임하는 동시에 「오대종지강연(五大宗旨講演)」,「도해(圖解)」,「신화강의(神話講義)」,「진리도설(眞理 說)」,「삼문일답(三問一答)」,「회삼경(會三經)」등을 저술하여 교리를 전파하는 일면, 자유공단(自由公團)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고 약 1만 5천여명의 단원을 거느린 단장으로 선출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는데 이바지하였다.&#13;
또한 일제와 무력항쟁을 하다가 두만강을 넘어오는 의병들을 규합하여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고 청년동지들에게 정신교육을 통하여 자주독립의식을 심어주었다.&#13;
1919년에는 여준(呂準)·정신(鄭信)·김좌진(金佐鎭)·김동삼(金東三)·손일민(孫一民)·서상용(徐相庸) 등 38인과 함께 기미독립선언에 앞선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3·1독립운동에 앞선 조국의 독립선언이 되었다.&#13;
1919년 국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계 화(桂和) 등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의 토대위에 군사행동을 적극적으로 취하기 위하여 동북만에 산재한 대종교도(大倧敎徒)를 중심으로 정의단(正義團)을 조직하여 단원을 모집하는 한편 신문을 간행하여 독립사상을 격려하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13;
1919년 8월에는 김좌진을 맞이하여 정의단을 개편하고 임전태세의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를 조직하여, 본영을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두고 「체코」군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었다. 그는 군정서의 총재로서 김좌진을 총사령겸 사관연성소 소장으로 임명하여 십리평(十里坪) 산림속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였다.&#13;
그들에게 맹렬한 군사훈련을 실시한 지 1년여만에 청산리독립전쟁(靑山里獨立戰爭)을 치르게 되어 일군 3,300여명을 사살하는 독립군 사상 초유의 큰 전과를 거두었다.&#13;
한편 1920년에는 임시정부 직할의 간북북부총판부(墾北北部總辦部) 총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13;
청산리독립전쟁후 일본군의 추격이 계속되자 북로군정서의 전병력이 북만 밀산(密山)으로 옮겨갔으며, 국민회 독립군의 안무군(安武軍)·홍범도군(洪範圖軍)·광복단(光復團)·도독부(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 등 모두 3,500명의 병력을 이곳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란 대군단을 조직하였는데 이때 그는 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어 전 독립군을 지휘하였다.&#13;
그후 대한독립군단은 노령(露領) 자유시(自由市)로 이주하고, 그는 밀산현 당벽진(當壁鎭)으로 옮겨가서 다시 기회를 기다리며 근무의 여가를 타서 교서(敎書)의 저술에 전념하던 중 1921년 9월 27일 토비들의 불의의 습격을 받아 청년동지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나라잃은 슬픔에 겹쳐 부하들마저 무참히 희생됨에 통탄을 금치 못하던 그는 이튿날 9월 28일 아침 마을 뒷산 산림속에 정좌하고 자결 순국하였다.&#13;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ACHIV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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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8·80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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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690·742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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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183·187·363·368·373·393·409·451·666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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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593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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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조선민족운동년감 96·113·115·150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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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4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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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01·804·829·904·912·915·967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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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무장독립운동비사 78·79·98·99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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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3·291·322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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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33·735·751·753·755·770·771·772·773·775·776·778·779·780·793·795·796·804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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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_NAME>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1권 분책 175·214·261·386면</BOOK_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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