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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임병극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1920년 대한국민회 지휘관으로 봉오동 전투 승리

1921~1922년 간도와 연해주 일대에서 대일항전 전개

1924년 중국군에 체포, 징역 15년 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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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극

임병극 林炳極 ,(1885)~미상. 평안도 미상 , 독립장 1995

조국광복의 서전 봉오동전투의 인물 임병극

1. 머리말

의병과 독립군을 구별하지 못하는 한국인이 꽤있다. 하지만 봉오동(鳳梧洞)과 청산리(靑山里)전투는 일제 강점기하의 독립전쟁이고, 그 주역이 독립군이라는 사실은 대개 알고 있다. 이 두 전투는 식민지시기 한민족이 침략자 일제를 상대로 벌인 독립전쟁 중 가장 큰 성과를 거둔 조국광복의 상징이다.

2020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임병극(林炳極)은 이 같이 역사적인 두 전투에 모두 참가한 인물이다. 그의 호는 중송(中松)이며, 1885년 평안도에서 출생했다.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에 한계가 있어 정확한 출생 월일과 출생지를 밝힐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임병극은 침략자 일제에게 나라를 잃은 지 7년째가 되는 1917년 고향을 떠나 북간도(北間島)로 망명했다. 그가 망명했을 시기 북간도는 김약연(金躍淵)·구춘선(具春先)·이중집(李中執) 등 먼저 당도한 민족운동가들이 간민회(墾民會)라는 자치단체를 설립해 이를 기반으로 한창 독립운동기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임병극은 곧 기지 개척에 동참하였다.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전민족적인 3·1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3·1운동은 순식간에 국외로 퍼져 나갔고, 북간도의 한인들도 이에 동참해 간민회 주도하에 독립선언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3월 13일 북간도 전역에서 약 3만 명의 한인이 용정촌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 모여 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행진을 벌였다.

2. 대한국민회군 지휘관으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다.

이 독립선언식과 시위행진으로 조국광복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 북간도의 한인들은 간민회를 본격적인 독립운동 실천 단체인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로 변경했다. 대한국민회는 본부를 연길현(延吉縣) 춘양향(春陽鄕) 하마탕(哈蟆塘)에 두고, 본부 밑에 동·서·남·북·중의 5개 지방회와 70여 개에 달하는 지회(支會)를 만들어 북간도 전역에 설치했다. 이 단체를 총괄하는 회장에는 구춘선이 선임되었고, 그 아래 서기·재무·경호·편집부 등의 부서를 편성했다.

이 같은 대한국민회에 임병극도 조직의 일원이 되어 북간도 한인사회를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임병극은 국민회가 성립된 후, 이진(李鎭)·김강(金强)·강구우(姜九禹)·황병길(黃丙吉) 등과 외교실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외교실행위원은 중국측의 군·관과 협상을 벌여 그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는 것이 그 임무였다. 이 같은 임무수행과 함께 국민회가 만든 항일무장활동 기관인 국민회군의 제2중대장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의 최일선에 섰다. 안무(安武)를 사령관으로 한 국민회군은 약 450명의 병력과 560여 정의 소총을 보유한 막강한 독립군단(獨立軍團)이었다.

대한국민회군 주둔지ⓒ독립기념관
대한국민회군 주둔지ⓒ독립기념관

이 같은 국민회군과 함께 북간도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무장활동을 펼치던 독립군단들은 효과적인 항일전을 위해 1920년 초 통합을 논의했다. 1920년 2월 21일 국민회군 사령관 안무와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 진영을 구축한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사령관 홍범도(洪範圖)가 연길현 하마탕에서 만나 최초로 통합을 논의했다. 이어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봉오동에 진영을 갖춘 최진동(崔振東)까지 가담시켜 3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3월 25일, 4월 22일, 5월 7일, 5월 15일 등 연이어 만나 통합을 위한 합의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같이 노력했으나 노선이나 이념을 합일시키지 못해 통합체는 만들지 못하고, 연합체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1920년 5월 22일 북간도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탄생시켰다.

북간도의 대표적인 3개 독립군단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는 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 북로정일제일군사령부 사령부장 홍범도, 사령부 부관 주건(朱建), 참모 이병채(李秉埰)와 오주혁(吳周爀) 등이 선임되고, 4개 중대와 헌병대 등을 편성하였다. 임병극은 이 연합군단의 피복과장(被服課長)에 임명되었다. 피복과장은 소속 독립군의 군복과 영내생활시 필요한 이불과 모포, 그리고 무장활동 시 사용되는 모든 장비까지 책임지는 것이 임무였다. 이 같은 북로독군부는 1,200여명의 병력을 가지고, 소총 900여정, 권총 50여정, 수류탄 100여개와 2문의 기관총까지 보유한 막강한 전력의 독립군 연합부대였다.

단순한 연합이 아니라 편제를 갖춘 군단의 형태로 탄생한 북로독군부는 출범 즉시 활발한 국내진입 유격전을 전개했다. 북로독군부 탄생 이전에도 이에 가담한 3개의 군단 및 북간도의 여러 독립군단 소속의 독립군 유격대는 수시로 국내진입전을 전개해 일제 침략자들을 응징했다. 그런데 복로독군부가 성립하면서 한층 자신감을 갖게 된 소속 독립군들은 보다 많은 유격전을 수행하면서도 심각한 타격을 일제에 가했다.

1920년 6월 4일 3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유격대가 두만강을 넘어 국내로 진입해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인 강양동(江陽洞)에 주둔한 일본군 헌병 순찰대를 공격해 격파시키고 귀로에 올랐다. 독립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즉시 추격대를 편성해 뒤를 쫒아왔다. 추격대는 일본군 중위 니이미 지로(新美二郞)가 이끄는 남양수비대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를 합한 병력이었다. 이들 일본군 병력은 두만강을 넘어 삼둔자(三屯子)에 이를 때까지 자신들을 공격한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의 가옥을 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삼둔자 서남방 산기슭에 잠복해 있다가 이를 목격한 독립군들은 민가를 뒤지며 방심한 일본군 추격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해 섬멸시켰다.

패전을 되갚기 위해 추격한 군대마저 역공을 당해 대패하고 만 것이다. 이에 소규모 전투로는 독립군을 당해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일본군 지휘부는 야스카와(安川)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월강추격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했다. 보병과 헌병대, 경찰대가 혼합된 야스카와 추격대대는 6월 6일 두만강을 넘은 후, 패전해 후퇴하고 있는 니이미 지로의 남양수비대까지 합병시켜 병력을 증강했다. 그리고 독립군이 진영을 구축하고 있는 왕청현(汪淸縣) 봉오동(鳳梧洞)으로 향했다. 이곳에는 보름전인 5월 22일 연합부대를 이룬 대한복로독군부의 주력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인 봉오동은 들어 올수 있는 입구가 하나였고, 나머지는 산으로 둘러싸였다. 따라서 외부의 공격을 방어하기에는 최적의 요건을 갖춘 요새지로 오늘날에는 그 지형의 이점을 살려 봉오저수지가 축조되어 있는 곳이다.

곳곳에 배치된 통신병들이 일본군 대부대가 침입해 들어오는 사실을 본부로 알려왔다. 이에 본부에서는 홍범도 사령관의 작전명령에 의해 독립군진영으로 통하는 길목의 한인가옥들에 연락을 취해 피신하도록 하고, 병사들을 봉오동 골짜기를 둘러싼 산의 동서남북에 겹겹이 배치해 은폐시켰다. 그리고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오고 있는 일본군을 유인하기 위해 제2중대 3소대 소속의 분대장 이화일(李化日)이 이끄는 분대원들을 봉오동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고려령(高麗嶺)에 배치하였다.

6월 7일 새벽 4시경부터 이화일부대는 두만강을 넘어 먼 길을 행군하느라 피곤에 지쳐 야영하고 있는 일본군들을 향해 소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다. 독립군의 일시적 기습공격에 당황한 일본군은 제대로 응전도 못하고 어둠속에서 사상자만 내고 말았다. 새벽 5시가 되어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자 작은 공격을 받았지만 상당한 피해를 당했음을 간파한 일본군은 전열을 정비한 뒤 공격자인 이화일부대를 향해 총구를 겨누며 진군했다. 이화일부대는 공격을 피하는 척 속임수를 부리며 일본군을 유인해 봉오동 입구까지 이끌었다.

오전 8시 30분경 봉오동 입구에 도달한 일본군은 이화일부대는 물론 독립군이 전혀 보이지 않자 자신들의 공격을 피해 모두 도망간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하여 약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봉오동 골짜기 제일 아래 형성된 한인마을의 가옥을 노략질하며 골짜기 안쪽으로 이동을 이어갔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위부대는 봉오동 상촌 마을에서 남쪽으로 약 300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들어갔다. 이곳은 입구보다 더욱 울창한 삼림이 3면을 둘러싼 산이었다. 그리고 일본군 전위부대가 위치한 곳은 독립군들이 3면 고지의 산에 매복해 있는 지역의 정중앙이었다. 전위부대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곧이어 주력부대가 들어왔다.

월강추격대의 거의 전 병력이 독립군의 포위망에 완전히 갇히자 홍범도 사령관은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을 발사했다. 순간적으로 일본군이 들어온 길을 제외한 3면의 고지에서 독립군의 화기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북로독군부에서의 직책은 피복과장이었지만, 국민회군의 2중대장이기도 하였기에 임병극도 부하 독립군을 독려해 적극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기습적인 공격에 당황한 일본군 지휘부는 카미야(神谷)중대와 나카니시(中西)중대 등 2개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적으로 돌격하도록 했다. 그리고 기관총대로 총알이 날아오는 산위를 향해 집중사격 하도록 했다. 하지만 고지인데다 수목이 울창한 바위사이에 은폐해 총알을 날리는 독립군을 맞히기는 어려웠다.

이 같이 불리한 상태에서 약 3시간을 버틴 일본군은 시간이 갈수록 사상자만 늘어나자 후퇴를 시작했다. 일본군이 후퇴하자 독립군은 그들의 뒤에서 공격을 가했다.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는 결국 봉오동 골짜기 안에서, 그리고 후퇴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를 내고 대패를 당했다.

봉오동 승전 기사(독립신문 1920년 6월 22일자)ⓒ독립기념관
봉오동 승전 기사(독립신문 1920년 6월 22일자)ⓒ독립기념관

전투가 끝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표한 결과는, 일본군 사망자 157명, 중상자 200여명, 경상자 100여명이었다. 반면 독립군은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 뿐이었다. 한국 독립군의 완승이었던 것이다. 봉오동전투 이전에도 독립군은 삼둔자전투를 비롯 여러 승전을 기록했다. 하지만 봉오동전투는 침략자 일제에게 한민족이 기필코 조국광복을 달성하리란 증표를 보여준 독립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 임병극 또한 함께했던 것이다.

한국을 영구 식민지화할 계획이었던 일제는 삼둔자와 봉오동에서 크게 당하자 당황하였다. 서북간도를 포함한 만주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독립전쟁을 펼치는 독립군을 제거하지 않고는 한국을 영구식민지로 삼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이 같은 판단 하에 일제는 1920년 8월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域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즉 서북간도의 독립군들을 완전히 소멸시킨다는 의지를 밝힌 군사작전이었다.

일제는 이 계획을 실행하고자 같은 해 10월 2일 중국마적을 매수해 주훈춘(駐琿春)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파괴하도록 하는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서북간도로 대규모 병력을 침입시킬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조작된 훈춘사건이 일어나자 일제는 일본영사관을 파괴한 범인들을 잡는다는 구실을 내세워 약 2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서북간도를 향해 침입시켰다. 이 침략군은 서북간도를 포위하듯, 동쪽에서는 시베리아파견군, 남쪽에서는 일제의 조선군 제 19·20사단, 서쪽에서는 관동군, 북쪽에서는 북만주파견대가 들어왔다. 일제는 구실로 삼았던 마적 공격은 뒷전으로 한 채, 곧 바로 일본군들을 서북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로 향하도록 했다.

하지만 독립군들도 첩보를 통해 훈춘사건 이전에 일제의 이 같은 계략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독립군은 일제의 대병력과 전면전을 치러 큰 피해를 입기보다는 일시적인 피전책(避戰策)을 쓰기로 했다. 이 전략에 따라 북간도의 독립군단들은 8월 하순과 9월 초부터 삼림이 울창한 백두산록 서쪽으로 병력을 이동하기로 하고 이를 실천했다. 서간도의 독립군단들도 마찬가지로 행동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들도 일본군이 진영에 이르기 이전에 홍범도·안무 등 지휘관들의 인솔 하에 상호 연락을 취해가며 병력을 백두산록을 향해 이동시켰다. 그러나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는 연합부대인 북로독군부에서 이탈해 백두산록을 향하지 않고 동북방향으로 진로를 정해 별도로 행동했다.

3.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다.

이 같이 독립군들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일어 난 것이 청산리전투였다. 북간도의 진영을 떠난 북로독군부 소속의 대한독립군과 국민회군 소속의 독립군들은 1920년 9월 하순 경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에 도착했다. 그와 함께 같은 북간도에 진영을 구축하고 있던 의군부(義軍府)·신민단(新民團)·광복단(光復團)·의민단(義民團) 등 소속 독립군들도 거의 동시에 이도구로 집결했다. 그리고 이들 독립군단들보다 조금 늦은 10월 12일경에는 김좌진(金佐鎭)이 이끈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이도구에서 조금 떨어진 삼도구(三道溝)에 도착했다. 북로군정서는 군단 내 독립군 양성기관인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을 9월 9일 마치고 출발했기에 다른 독립군단들보다 늦게 도착했다.

화룡현 이, 삼도구에 모인 독립군단의 지휘관들은 향후 일정을 논의했다. 사방에서 좁혀오는 일본군의 동정을 살피며 회의를 진행하느라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는 와중에 첩자를 통해 독립군의 집결장소를 알게 된 일본군 아즈마(東)지대가 이, 삼도구를 향해 병력을 이동해 왔다. 대규모 일본군이 몰려오자 독립군 지휘관들은 일전을 겨루지 않고는 진로를 뚫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삼도구 청산리에서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가 전투 진용을 갖추고 일본군을 맞을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대한북로독군부 사령부장이자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는 이도구에 집결한 독립군단을 하나로 묶어 연합부대를 결성했다. 이 연합부대에는 국민회군도 가담했고, 임병극도 중간간부의 직책을 맡아 부하들을 인솔하고 일전을 준비했다.

아즈마지대 소속의 야마다(山田)연대 일본군 병력이 1920년 10월 21일 새벽 삼도구의 청산리마을을 지나 오전 8시경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백운평(白雲坪)골짜기로 들어왔다. 약 1시간에 걸쳐 야마다연대 200여명의 전위부대 병력이 골짜기 깊숙이 들어왔다. 순간 사령관 김좌진의 명령에 의해 고지에 은폐하고 있던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일제히 총격을 가했다. 마치 사격연습을 하듯 불을 뿜은 독립군의 총격에 200여명의 일본군이 순식간에 전멸했다. 전위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주력부대 또한 독립군의 총격에 피해만 입고 철수해야했다.

백운평으로 향한 야마다연대를 뺀 아즈마지대 주력부대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진용을 갖추고 있는 이도구 완루구(完樓溝)로 향했다. 10월 22일 이도구에 도착한 아즈마지대는 병력을 2개로 나누어 각기 북완루구와 남완루구로 향하게 해 연합부대를 포위 공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즈마지대의 이 같은 작전을 간파한 홍범도는 남북에서 오는 일본군을 맞아 전면전을 펼치는 척 하면서 일부병력을 중간 사잇길로 돌아가게 해 측면에서 공격토록 했다. 백운평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군을 한 군데에 놓고 집중사격을 가할 수 있는 작전을 펼친 것이다. 완루구전투 역시 독립군의 대승이었다.

이후 홍범도의 연합부대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약 10일간 이도구·삼도구 일대의 천수평(泉水坪)·어랑촌(漁郞村)·맹개골·만록구(萬鹿溝)·서구(西溝)·천보산(天寶山)·고동하(古洞河) 등에서 연전연승의 전투를 이어갔다. 북로군정서와 일본군이 첫 전투를 벌였던 백운평으로 들어가는 삼도구 내에 청산리란 한인마을이 있었고, 그 일대를 이주한인들은 청산리라 통칭해 불렀다. 따라서 독립군의 이 승첩은 역사에서 청산리전투라 불린다. 청산리전투에서 독립군은 1,200여명의 일본군을 사살했고, 200여명을 부상시켰다. 그러나 독립군은 수명이 전사하는 수준에 그쳤다.

청산리전투를 끝낸 독립군들은 백두산록 서쪽으로 향하려던 애초의 행로를 변경해 북만주로 향했다. 1920년 12월경 북만주 밀산(密山)에 집결한 약 3,500명의 독립군들은 대한독립군단이란 통합 군단을 조직해 대오를 편성한 후 이듬해 1월 초 러시아의 이만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임병극은 이 때 이들과 함께하지 않고 자신을 따르는 부하 독립군을 이끌고 처음 목적지인 백두산 서쪽인 안도현(安圖縣)으로 갔다. 이곳에서 임병극은 울창한 삼림지대에 병영을 축조하고 함께한 독립군으로 편대를 구성해 의용대(義勇隊)를 조직했다.

한편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들의 주력은 북만주로 이동하고, 임병극 같은 지휘관들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산간오지로 가 자취를 감추자 일제침략군들은 이주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들은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색출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한인마을 곳곳을 수색해 수많은 일반 한인청장년을 사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하거나 죽였다. 심지어 2-3세 된 어린아이까지 창으로 찔러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는 야만적 행태를 자행했다. 인명뿐만 아니라 한인이 소유한 가옥과 교회, 학교 등은 모두 방화해 한인사회 자체를 폐허로 만들었다. 일본군의 이 같은 만행은 이듬해 4월까지 이어졌다. 임시정부 파견원에 의해 조사된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동안 서북간도 한인사회의 피해상은, 3,664명이 피살되고, 155명이 체포되었으며, 3,520채의 가옥, 59개교의 학교, 19채의 교회가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

4. 간도와 연해주에서 대일항전을 전개하다.

일제는 독립군 또는 배일한인(排日韓人)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경신참변(庚申慘變. 또는 간도참변[間島慘變])이라 불리는 이 같은 만행을 자행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 야만적인 행태는 오히려 한민족에게 조국광복의 염원을 강화하여 향후 독립군의 항일전쟁이 중단 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안도현에서 의용대를 조직한 임병극은 일본군이 철수를 시작하자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4월 말, 14명의 부하대원을 이끌고 국내로 진입해 갑산·풍산·단천·성진·길주군 등을 돌며 군자금을 모집하는 한편 일제 침략기관을 기습 공격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약 40일간 이어진 이 국내진입 유격전에서는 일본군과도 수차 교전을 펼쳤다.

1921년 10월경에는 부하들과 함께 안도현을 떠나 한·중 국경지방인 장백현(長白縣)으로 옮겼다. 그리고 장백현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활발한 독립전쟁을 펼치고 있는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합류했다. 합류한 후에도 자신이 지휘하던 의용대를 군비단의 직제에 편입해 대장으로 활동했으며, 군비단의 경호부장도 겸임했다. 군비단은 임병극부대가 합류해 규모가 커지자 이후 단명을 군비총단(軍備總團)으로 변경했다.

1922년 군비총단은 같은 장백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흥업단(興業團)과 통합해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을 성립시켰다. 그리고 3, 4월 중에 대한국민단은 마찬가지로 장백현에 진영을 구축하고 활동하던 대진단(大震團)·태극단(太極團) 등과 통합해 광정단(光正團)을 만들었다. 장백현의 독립군단들이 이 같이 통합을 거듭하자, 임병극은 그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부하들인 의용대 대원과 군비총단에서 새로이 자신을 따르게 된 일부 독립군을 이끌고 러시아의 연해주로 갔다.

연해주로 옮긴 후, 1922년 중반 자신이 인솔해 온 독립군들과, 북간도에서 활동하다 이곳으로 이동해 온 혈성단(血誠團) 및 이중집(李仲執)이 지휘한 한족공산당을 통합시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만들었다. 고려혁명군을 이끈 지휘관은 총재 이중집, 총사령관 김규식(金奎植), 동부사령관 김응천(金應天), 서부사령관 신우여(申禹汝), 북부사령관 이추(李錐) 등이었고, 임병극은 남부사령관에 임명되어 블라디보스토크 서북방인 수분하황구(綏芬河荒溝)에 진영을 구축했다.

이어 같은 해 10월경에는 송전관(松田關) 소성(蘇城)방면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약 한달 후인 11월 상순, 일제의 이간질에 속은 러시아 적군(赤軍)과 마찰이 생겨 고려혁명군은 무장 해제당하는 상황을 맞고 말았다. 이에 임병극은 부하들을 인솔해 훈춘의 북주류포(北珠瑠浦)로 옮겨 그곳에 병사를 짓고 근거지를 마련했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에는 국내진입전을 펼치기 위해 부하 독립군 70명을 지휘해 함경북도 신아산(新阿山)과 마주한 장령자(長嶺子)까지 이동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이 시기 일제가 국경수비를 강화해 수행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중 국경과 훈춘지역에 일본군이 점차 증강되는 기미가 보이자 12월 말경에는 북만주의 목릉현(穆陵縣)으로 옮겼다.

1923년 초 한국 민족운동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편과 독립운동의 현안을 해결하고자 중국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임병극은 이 회의에 러시아 연해주 민족운동계 및 고려혁명군 대표자격으로 참가했다. 1923년 1월 3일 상하이 프랑스조계안의 미국인 교회에서 시작된 국민대표회의는 같은 해 5월 15일까지 5개월 가까운 기간동안 개최되었다. 이 기간 동안 상하이와 베이징(北京)은 물론 만주·연해주·미주·국내 등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던 민족운동가들이 모여 조국광복을 위해 해결해야 될 문제와 실천과제들을 논의했다.

그러나 참가한 민족운동가들은 회의를 이어 가는 과정에서 지금의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조직해야 된다는 창조파(創造派)와 현 임시정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실정에 맞게 개편하고 보완하자는 개조파(改造派)로 나뉘어 합의점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임병극은 윤해(尹海)·신숙(申肅)·원세훈(元世勳) 등과 창조파의 입장에 섰다. 조국 광복운동을 크게 이끌지 못하고 명맥만 유지하는 임시정부가 아니라 민족의 생계와 독립전쟁을 앞서서 이끄는 정부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3월 초부터 시작된 창조파와 개조파의 논쟁은 결국 합의점을 도출하지 못하고 5월 15일 국민대표회가 폐회되고 말았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난 뒤 창조파는 정부기능을 수행할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설립했는데 임병극은 이 위원회의 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국민위원회가 근거지로 한 곳은 블라디보스토크였기에 국민대표회의가 끝난 후 얼마간 연해주로 가 활동했다. 하지만 연해주에 오래 머물지 않고, 1923년 말 북만주로 이동해 항일무장활동을 위한 전열을 정비했다. 1923년 12월에는 목릉현 낭낭고(娘娘庫)에서 약 70명의 독립군들을 인솔해 국내진입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1924년 초에는 봉오동과 청산리전투를 일으키기 이전 활동지였던 연길로 들어왔다. 일제는 1920년 10월 이후 경신참변을 자행하고 난 뒤 연길현을 비롯해 왕청·화룡·훈춘현 등 북간도지역이 독립군의 온상이라 판단해 이전보다 경찰력을 훨씬 증강해 설치했다. 즉 경신참변 이전 8개였던 경찰분서를 10개소를 늘려 18개소로 만들고, 각 지역의 경찰병력 또한 대폭 늘렸다. 게다가 친일집단인 조선인민회를 각 지역에 만들어 상시 감시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이 같은 일제의 무력이 북간도를 지배하고 있어 독립군은 물론이고 반일의식을 가진 일반한인도 이곳에서 활동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그러나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빈(李東斌)·조경환(趙慶煥) 등 4명의 부하와 연길에 온 임병극은 1924년 2월 8일부터 10일까지 3일간 적기단(赤旗團)· 북로군정서의 인사들과 숭례향(崇禮鄕) 다조구(茶條溝) 분수동(分水洞)에 있는 동지 최주봉(崔周鳳)의 집과 소명월구(小明月溝) 공의준(孔儀俊)의 집에서 회합을 가졌다. 회합에 참여한 인사들은 ① 용정촌(龍井村), 국자가(局子街), 두도구(頭道溝), 백초구(百草溝), 훈춘(琿春)에 있는 각 일본영사관을 파괴하고, 고위 관리와 특무형사 및 조선인민회장 같은 친일파 거두, 일본측 밀정을 암살한다. ② 실행준비를 위해 각 영사관 경비상황 및 숙사의 상황, 그리고 왕래상황을 상세히 정찰한다. ③ 실행기일은 폭탄 도착 후 실행원 전부가 수행한다. 등을 결정했다. 북간도내에 한국 독립군이 물리쳐야 할 일제의 경찰과 기관이 많아졌지만 독립군단이 활보하며 작전을 펴기 힘들었으므로 의열투쟁 형태의 작전을 수행코자 한 것이었다. 이 작전은 3·1운동 5주년이 되는 3월 1일을 기해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그 성과에 대해서는 자료의 한계상 알기 어려우나 실행은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 후 이 지역에서 임병극을 체포하고자 한 일제의 감시가 심해진 것은 이 같은 무장활동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임병극은 돈화(敦化)와 연길을 왕래하며 지하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임병극의 이 같은 움직임은 일제 경찰이 아닌 중국군에 포착되어 1924년 9월 14일 연길현 숭례향 대명월구(大明月溝)에서 부하 5명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임병극이 체포된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신변을 인도해 줄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 측은 임병극이 중국에 귀화한 중국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인도를 거부했다. 9월 20일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 있는 연길진수사공서(延吉鎭守使公署)로 이송되었고, 이듬해 8월 26일 중국법정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이후 연길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중 탈옥해 러시아의 연해주로 가 집단 근로장인 어업 콜호즈 등에서 일하며 여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의 명지휘관이자,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으로 수많은 독립전쟁의 전선에서 활동한 임병극에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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