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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김세환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19년 3․1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1인

삼일여학교 교사로서 민족의식 교육

1919년 수원과 충청 지역 만세운동 주도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김세환

김세환 金世煥 ,1889.11.18~1945.09.26. 경기도 수원 , 독립장 1963

1. 교회와 신학문을 통해 민족의식 형성하다

선생은 1889년 11월 18일 경기도 수원군 수원면 남수리(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아버지 김동우(金東宇)와 어머니 절강 편씨(浙江片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대부분 근대 인물들의 성장 배경을 잘 알 수 없는 것처럼 그의 집안 환경과 부모 등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려주는 정보가 거의 없다. 단지 여기서는 선생의 삶의 여정을 비추어 집안에 대해 몇 가지를 추측해 볼 수가 있다.

선생이 1900년대 중반에 서울에서 자비(自費)로 학교를 다니거나 일본 유학까지 다녀오는데 많은 재정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당시 집안의 재력(財力)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3·1운동 참여로 체포 투옥되었다가 석방된 뒤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학교를 그만둔 상태에서 ‘곡물상’(穀物商)이란 상업 활동을 시작했는데, 이것은 경제적으로 집안의 재력과 지원이 없었다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와 함께 집안이 상업에 종사했던 것이 선생이 상업 활동을 택할 수 있던 배경으로 추측된다. 이는 선생이 일본 유학 이후 귀국해 상인층과 주도하여 설립한 수원상업강습소(水源商業講習所)의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의 10대 성장과정에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선생의 이웃 마을인 북수리에 세워진 기독교회의 출석이었다. 1901년 말 수원읍내에 처음으로 기독교회가 북수리에 세워졌다. 1900년이전까지만 해도 수원읍내에는 교회 설립이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1901년 수원읍내 북수리에 미북감리회 선교부가 주택과 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이 건축하면서 수원종로교회가 본격적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때부터 수원읍내 지도적 위치에 있는 인물들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다. 19세기 급격한 정치사회 변동 속에서 국가의 위기의식을 느낀 지식인들이 기독교에 희망을 발견한 것이다.

선생은 수원종로교회가 시작할 무렵부터 교회에 처음 출석하였고, 기독교 신앙인으로 성장하였다. 선생은 일평생 착실한 기독교인으로 교회에 출석하며 교회 평신도 지도자인 권사(勸士)로 활동하였다. 선생은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을 정도로 신앙적 절제력이 탁월했을 뿐만 아니라 교인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으로 받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대 때 교회 출석이후 수용한 기독교신앙은 선생의 가치관과 현실인식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선생과 관련하여 수원종로교회가 주목되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삼일남녀학교가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교회’ 옆에 ‘학교’라는 말이 있듯이, 수원지역에서 기독교가 수용되면서 근대적 교육운동도 출발한 것이다. 풍전등화의 국가적 위기 속에서 기독교인이 된 이하영(李夏永), 임면수(林冕洙)와 같은 인물들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민족의식의 고양’과 ‘국권회복’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삼일학교(三一男·女學校)를 각각 설립하였다.

당시 학교의 발기인들은 대부분 기독교인으로 1900년대 애국계몽운동에 적극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선생은 청소년시기에 교회를 통해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영향을 받으며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1903년 이후 삼일학교 학생들
1903년 이후 삼일학교 학생들

이러한 영향 속에서 선생에게는 자연스럽게 민족의식이 형성되었고, 일찍부터 국가를 부강(富强)하게 만들 수 있는 근대적 실력 양성을 위해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선생은 외국어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고 1906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에 진학하였다. 이 학교는 6개로 분립되어 있던 외국어학교를 하나로 통합한 학교로, 선생은 일본 유학을 떠나기 전에 언어 준비를 위해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졸업한 뒤에는 일본 동경에 위치한 주오대학(中央大學)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의 유학에 관해 『신한민보』(1922년3월16일자) 기사에 의하면, “그는 수년 전 동경에 유학하여 상당한 학문을 닦고 귀국한 후에는 삼일학교 교사로 있다” 라고 한 것처럼, 일본 유학은 선생에게 신학문을 접하는 기회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원 지역사회에서 민족 지도자로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2. 민족의식에 기초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

선생은 서울과 일본 유학을 통해 근대 신지식을 습득하고 1909년 말경 귀국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곳은 수원상업강습소(이하 강습소, 현 수원중고등학교)였다. 이 곳에서 선생은 1910년 직후부터 직조감독관으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부터 선생은 교육가로서 민족의식에 기초한 교육활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김노적(金露積, 1895~1963)
김노적(金露積, 1895~1963)

이 강습소는 1908년 4월 양성관, 홍건섭, 김흥선, 신준희 등 지역 상인층들이 주도하여 설립된 수원상업회의소 부속사업으로 출발하였다. 1909년 표면적으로는 “상업에 관한 지식, 기능의 강습”을 표방하며 설립되었으나, 이면적으로는 수원지역의 민족의식이 각성된 상인들이 단결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초기에는 주간 보통과에 18명, 야간 보통과에 80명을 모집하였고, 보통학교 졸업 이상자에 한하여 입학을 허가하였다. 강습소에서는 한문, 영어, 상업부기 등 상업과 신지식을 가르쳤다.

선생은 이 곳에서 ‘수원상업강습소’의 소장 겸 소감, 즉 교장과 교감을 겸임하고 있었다. 강습소에서 선생은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가로 활약하는 인물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대표적 인물이 수원지역 3·1운동에서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김노적(金露積, 1895~1963) 등이었다. 선생의 직접적 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이후 수원지역에서 교육활동 및 사회활동을 하는 선생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든든한 배경이 되었다.

한편, 선생은 1913년 삼일여학교 교장 밀러(Lula A. Miller) 감리교 여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자정보고등학교)에 교사 및 학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강습소에서 삼일여학교로 자리를 옮긴 선생은 민족의식에 기초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대 삼일여학교 전경
1920년대 삼일여학교 전경

삼일여학교는 1902년 6월 수원 지역 최초의 여성 근대교육기관으로 수원종로교회에서 출발하였다. 1907년 밀러 선교사가 부임하며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09년 4월 28일에는 대한제국 학부의 정식 인가를 받았고, 교가도 제정하였다. 교과목으로 국어, 한문, 영어, 산술(수학), 체조, 성경, 음악, 재봉 등을 가르쳤다.

학감으로 부임한 선생은 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17년과 18년 교사 증축을 주도적으로 진행하는 등 학교 발전을 위해 크게 활동했을 뿐 아니라 순회 전도 활동으로 자주 자리를 비운 밀러 교장을 대신하여 학교 살림을 실질적으로 도맡아 관리하였다. 밀러 교장의 보고서에 기록된 그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수원여학교는 우리의 자랑입니다. 학교는 우리의 유능한 학감 선생 지휘 하에 꾸준한 발전을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한국을 떠날 때 학교 부지는 텅 비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름다운 나무 그늘로 덮여 있었습니다. 많은 나무와 꽃들을 옮겨다 심었고, 새로 산책로도 냈습니다. 우리 교사 김씨는 학교 건물 벽에 도르라진 한국 지도를 조각해 붙임으로 방문객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또 학교 앞 쪽에 흐르는 개울 위로 다리를 놓아 장마철에도 학생들이 건널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L.A. Miller, “Evangelistic Work and Day School on the Suwon District”, Annual Report of Korean Woman’s Conferenc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1918, p. 86.)

선생의 희생과 수고 속에서 1910년대 삼일여학교는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수원 지역사회에서도 좋은 학교로 소문이 났다. 특히 선생은 학교에 꽃과 나무를 심어 학교 정원을 꾸미고, 학교 건물 벽에는 한반도의 지도를 조각하여 붙이는 민족의식도 드러냈다.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는 학교 앞 개울로 인해 등교조자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나뒹굴고 있는 수원 남문(팔달문) 문짝을 옮겨다 다리를 놓기도 하였다.

또한 양잠 실습장을 만들어 학생들의 생활정도를 개선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선생은 학교의 어려운 운영 상태를 극복하고 학생들의 생활도 개선시킬 방법을 모색하던 중, 양잠업을 발견하고 양잠을 통해 일제의 수탈로 어려워진 학생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실습장을 만들었다. 당시 일반화되지 못한 실업교육을 누구보다 먼저 실천에 옮긴 것이다.

다음은 민족의식에 기초한 선생의 노력으로 1910년대에 학교가 안정을 찾고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신문기사이다.

…현재 미라씨가 교장으로 취임하며 따라 김세환 선생께서 학감으로 취임하야 부단한 노력과 있는 성의를 다하야 내용 충실과 실력 향성에 오로지 힘쓴 결과 교운은 날노 융성하야…(『동아일보』 1927년 1월 17일자.)

위 기사에서는 삼일여학교는 현재의 교장인 밀러 선교사가 취임한 이후 김세환 선생이 학감으로 부임하여 부단한 노력과 정성으로 힘쓴 결과 학교가 날로 발전하여 여자보통학교로 승격하게 되었음을 밝히면서, 이같은 삼일여학교의 발전은 수원 여자계를 위해 큰 기쁨이라고 보도하였다.

이처럼 선생은 1910년대 일제의 식민지 구조 속에서 수원 지역의 대표적인 종교거점인 수원종로교회의 교인인 동시에 근대교육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수원상업강습소와 삼일여학교에서 학감과 교사로 활약하였다. 이를 통해 선생은 민족의식을 기초로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3. 민족대표 48인으로 3·1운동에 참여하다

1910년대 수원지역 교육계에 자리를 잡은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투옥되었다. 그렇다면, 선생의 3․1운동은 어떤 현실 인식아래 이뤄지고 있는 것이었을까? 아래의 글은 이를 잘 보여준다.

“본래 합병을 조선 사람이 싫어하였으나 대세에 못하고 기회만 있으면 나도 독립운동에 진력을 하려 하였더니 이번의 전쟁이 처음에 민족의 생존을 위한 싸움이었으나 미국이 전쟁에 참가한 뒤에는 군국주의에 대한, 제국주의에 대한 평화주의의 전쟁이니까 강화회의에는 미국이 주장하는 민족자결을 적용하게 될 것을 따라 우리도 독립을 하자 함이요…”(「선언동기의 진실한 고백」, 『동아일보』 1920년 7월 16일자)

“아무리 세계대세로 병합이 되었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 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는 이슬도 눈물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장래에 정정당당히 조선 사람은 권리를 찾고 일본 사람은 권리를 돌리여 줄 시기가 돌아올 줄 알았다.”(홍석창, 「공소공판기」, 『수원지방 삼·일운동사』, 왕도출판사, 1980, 295쪽.)

선생은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의식을 갖고 있었다. 비록 힘의 열세로 현상적으로 일제의 식민지로 빠졌으나 독립의식 만큼은 결코 일제의 지배와 통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선생은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게 되었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활용하고자 하는 판단아래 3·1운동에 참여하였다. 선생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군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맞서는 평화주의로 이해하였고, 민족자결에 따른 한국의 독립은 평화주의를 실현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그 방법은 독립의 의사를 선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열강에 독립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기독교적 신앙, 가치 아래 민족이 자주적 독립과 자유를 되찾는 것을 곧 하나님의 뜻이자 소명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3·1운동에 참여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독립의 권리를 “하나님의 뜻”으로 확신한 것처럼, 선생 역시 3·1운동을 단순히 독립과 자유를 되찾는 행위를 넘어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선생의 3·1운동 참여는 YMCA 간사 박희도와의 관계에서 시작되었다. 삼일여학교의 학감으로 서울을 오고 가던 중 선생은 미 감리회 전도사로 서울 YMCA 학생부 간사로 학생들을 지도하던 박희도와 신뢰를 쌓았다. 그와 자주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신앙과 인격에 대한 존중과 공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1919년 2월 10일 선생은 삼일여학교의 교사 충원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박희도를 만났다. 보다 중요한 이유는 박희도가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우연하게 알게 되어 직접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였다. 선생은 박희도로부터 ‘지금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고 있으므로 조선독립을 할 때’라는 요지의 말을 듣고, 이에 동의하였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의 계획을 듣게 되었다. 이를 고민하던 중 참여하기로 결단하고 2월 18일 서울로 올라가 박희도를 만나서 독립운동을 상의하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3·1운동에 참여하는 인물들과의 모임에 참석하여 독립만세운동을 토의하였다. 2월 20일에는 선생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할 것을 정식으로 결심하였다.

1919년 2월 21일 선생은 이갑성 집에서 열린 회의에 참여했는데, 독립만세운동을 전 민족적이고 전국적으로 펼칠 것을 구체적으로 논의하는 자리였다. 선생은 지방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계획을 알리고 동지를 모집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이는 독립만세운동의 확산을 위해 중요한 일이었다. 선생은 수원과 충청지역의 운동을 준비하는 ‘순회위원’ 책임을 맡았다.

선생은 순회위원으로 지방에 다니며 동지를 모집했다. 충남 해미읍 감리교회에서 열리는 사경회를 인도하러 온 김병제 목사에게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동지로 서명해 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았다. 수원으로 돌아와 선생은 남양교회의 동석기 목사를 만나 운동계획을 설명하니 이미 박희도로부터 그 계획을 들었다고 하면서 승낙하였다. 특히 동석기 목사는 미국 유학을 다녀온 인물로 평소 민족의식을 고취하면서도 국제 정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승낙을 받을 수 있었다.

경성시위 장면
경성시위 장면

다음날에는 이천교회 이강백 목사, 오산교회 김광식 목사, 수원종로교회 임응순 전도사 등으로부터 승낙을 받았다. 이들을 포함하여 40여 명의 동조자를 확보한 선생은 민족대표 서명식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에 도착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미 독립선언서 기명(記名)이 다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갖고 있던 동지들의 명단을 소각할 수밖에 없었다.

3월 1일 선생은 갑작스럽게 독립선언 장소가 바뀌었다는 소식을 듣고 원래 계획에 잡혀 있던 서울 탑골공원으로 향하였다. 오후 2시에 서울 탑골공원에 도착한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는 것을 확인하였고, 자신도 종로에서 무교동을 거쳐 경성일사 앞까지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

4. 수원지역 3·1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하다

선생은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활약하면서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지도하였다. 선생은 1919년 2월 말 전국적인 만세시위에 동참하기 위한 마지막 회의를 수원상업강습소에서 개최했다. 삼일여학교 학감 및 교사로 오기 전 1910년대 중반에 강습소 소장을 역임한 바 있는 선생은 당시 자신의 학생이었던 김노적을 수원면 만세시위 인원 동원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자리에는 박선태, 이선경, 임순남, 최문순, 김석호, 김병갑, 이희경 등 청년 학생들이 참석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상업강습소 및 종로교회 소속 청년학생들로 교회와 학교를 통해 선생의 지도를 받던 청년인 동시에 수원학생친목회(水源學生親睦會)의 멤버들이기도 하였다. 수원학생친목회는 수원출신의 서울 유학생들이 만든 친목단체로 1917년 4월 선생의 주도아래 삼일여학교에서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는데, 기존의 수원학생토론회가 보다 확대된 조직형태로 발전된 것이었다. 선생은 청년학생들에게 독립만세시위 계획을 설명하고, 수원에서 서울과 같이 3월 1일 정오에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전개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런데 경찰이 미리 감지했다는 정보가 있자, 이 날 거사는 3월 1일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되었다.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시위가 시작되자, 그 날 저녁 수원 화홍문 방화수류정(용두각) 부근에 수백 명이 모여 횃불 시위를 펼쳤다.

수원지역 3․1운동 시작 장소인 방화수류정
수원지역 3․1운동 시작 장소인 방화수류정

이날 밤 화성 동쪽의 봉수대에 횃불이 올랐고 이를 신호로 독립만세시위가 퍼져 나갔으며, 팔달산 서장대를 비롯한 20여 곳의 성곽에서 일제히 봉화가 타올랐다. 이 때 남문 밖 객주집에 묶고 있던 시골 상인도 여기에 합세했다. 이후 이들을 통해 만세시위의 열기가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이 횃불 시위에 참여할 수 없었다. 3월 1일 아침 서울 상황을 직접 파악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선생은 2시경 서울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선언서 낭독을 지켜본 뒤에 시위에도 참여했는데, 일본 경찰의 삼엄한 검속으로 당분간 수원으로 다시 내려갈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수원의 김노적, 박선태, 이선경 등 약 60여 명의 청년 학생들이 3·1 수원면 야간 횃불 만세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체포, 연행되었다.

김노적, 박선태, 이선경 등은 일본 경찰의 무자비한 취조를 당했다. 특히 김노적은 이 때 심한 고문과 구타를 당했는데, 머리를 총 개머리판으로 맞아 머리 한쪽이 함몰될 정도였고 훗날 왼쪽 손목을 거의 못 쓸 정도로 심한 육체적 고초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서울에서는 민족대표로 나섰던 인물들 대부분이 체포되었고, 또 수원에서는 지역의 만세운동을 기획, 준비한 청년학생들도 대부분 체포되었다. 이어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동참하며 머무르던 선생도 결국 3월 13일 당주동 숙소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출옥 후 기념사진(1920년)
출옥 후 기념사진(1920년)

3월 1일 이후 수원읍을 중심으로 하는 수원면 독립만세시위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3월 16일 장날을 기해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때 일본 경찰은 시위와 관련하여 삼일여학교를 급습하여 사무실을 파괴하였는데, 이 역시 김세환 선생의 영향력을 인식한 것이었다.

투옥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생이 3·1운동 계획을 한 민족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선생은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과 같이 심문을 받고 검찰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여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이같은 선생의 자세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구류 360일 만에 송진우, 현상윤, 김도태 등과 함께 ‘증거불충분’ 이유로 수감된 지 만 1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5. 기독교 문화운동과 사회운동을 전개하다

김세환 선생은 금년에 32세로 아직 젊으십니다. 출옥 후에 교편을 듣고 있든 수원삼일여학교에 일을 볼 목적을 있었으나 환경의 간섭으로 뜻과 같이 되지 못하고 맘을 도리켜 수원 읍내에서 곡물상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상업을 한답니다.(「기미년운동과 조선의 사십팔인(칠) 최근소식 편편」, 『동아일보』 1925년 10월 7일자)

투옥되었다가 1년 만에 출옥한 선생은 다시 삼일여학교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것은 독립운동자라고 하는 ‘정치범’의 꼬리표가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로 돌아가는 일은 일제의 감시와 경계가 공공연하게 일어날 것이 뻔한 상황에서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3·1운동 이후 선생은 현직 교사보다 일상의 생활인으로 수원읍내에 곡물상, 목재상 등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가로, 수원지역을 대표하는 민족운동 진영의 명망가로 자리잡았다. 즉 3·1운동이후 선생은 한국기독교와 함께 지역사회를 이끌어 가는 민족지도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출옥 직후 선생은 기독교문화운동 차원에서 추진된 조선기독교창문사(朝鮮基督敎彰文社 이하 창문사) 설립에 참여하였다. 창문사의 설립에는 당시 한국기독교계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3·1운동이후 일제의 통치방식이 더욱 고도화된 지배전략을 추구하는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뀌었는데, 외형적으로 한국인들에게 제한된 범주 내에 표현의 자유를 허용하는 통치방식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독교계에서는 주체적인 기독교 문화 창출을 목표로 1921년 8월의 조선기독교광문사(朝鮮基督敎廣文社)가 설립되었는데, 얼마 안가 기독교창문사란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에 3·1운동에 관련되어 옥고를 치른 이승훈·김창준·김백원·김지환 등과 함께 선생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기독교적 문화운동으로 제반 기독교의 서적을 간행 판매하고…… 그 외의 잡지 및 기타 도서 간행 및 판매, 일반 인쇄업, 교육용품 판매 또는 이상 업무의 부대사업 등을 경영”하려는 취지로 모인 설립 준비모임부터 적극 참여하였다.

김세환을 비롯한 구성원들은 강연단을 조직하고 전국을 돌며 순수 한국인 자본으로 설립된 문서선교 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주식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창문사의 초기 사업 확장을 위해 각 지방 출장을 다니며 창문사의 취지를 설명하였다. 예컨대, 1921년 10월 12일 여주 창리예배당에서 일반신자들에게 창문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그 다음날 충북지방으로 향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은 1923년 1월에 수원엡윗청년회의 총간사로 선출되었다. 감리교회의 엡윗청년회는 한국기독교청년회들 중에 가장 먼저 설립된 기독교 청년단체였다. 1월 13일 수원종로교회에서 개최된 수원엡윗청년회 정기총회에서 선생은 최상훈과 함께 총간사에 선출되었는데, 이 때 문예부 간사에 김노적, 종교부 간사에 김병호 등이 선출되었다.

1922년 10월 5일 선생은 소년운동 일환으로 조직된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이 수원을 방문하자 이를 환영하는 행사를 대대적으로 주도하였다. 조선소년군은 순수보이스카우트 정신 아래 조철호가 ‘조선소년군은 조선 사람의 조선군’을 내세워 조직한 민족주의 성향의 소년단체였다. 조선소년단 18명이 1923년 4월2일 인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하자, 수원종로교회에서 선생의 사회로 500여명의 관중이 참석하는 연예회가 개최되었다. 그 자리에서 동정금이 자발적으로 기부되기도 했다.

또한 선생은 1923년 8월에 고국을 방문한 하와이 조선인기독학원 학생들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행사를 주도하였다. 수원지역 유지들을 중심으로 환영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김세환·지공숙·엄주철·윤용희를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8월 16일 ‘하와이 학생단’에 대해 김세환을 비롯한 수원지역의 유지들은 식사와 관광, 친선야구경기, 환영공연 등을 개최하여 즉석에서 후원금까지 거둘 정도로 진심으로 동포애 및 민족애를 과시하였다.

한편,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서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일제의 지배에 맞서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심어주며 식민지교육정책에 대항하며 ‘한국인에 의한 한국인의 대학 설립’을 위해 추진되었다.

1922년 11월 이상재·이승훈·박희도·이갑성·조만식·허헌 등 발기인 47명이 서울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朝鮮民立大學期成準備會)를 조직하였다. 이듬해인 1923년 3월 29일에 서울 YMCA 회관에서 1,170명의 발기인 가운데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때 선생은 이규재, 박기영, 임면수, 윤용희 등과 함께 수원 지역을 대표하는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6. 신간회 지회 설립과 수원체육회를 주도하다

3·1운동이후 국내 민족운동진영은 크게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는 사회주의사상이 새로운 민족운동 방법론으로 청년 학생층에 폭발적으로 수용된 결과였다. 민족운동 진영의 두 세력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운동 방법론으로 갈등과 대립현상을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중반부터 일제가 한국민족운동 진영의 분열을 꾀하는 시도하는 한편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을 가함에 따라 민족운동 진영이 크게 위축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에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서로의 관점을 유보하고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민족협동전선론(民族協同戰線論)이 대두하였다. 그 결과 1927년 2월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수원지역의 경우도 신간회 지회가 1927년 10월 17일 조직되었다. 신간회 수원지회는 크게 보면, 감리교, 성공회, 천도교 등의 종교세력 및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관련의 민족주의세력과 사회주의세력의 합작으로 조직되었다.

1927년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기사
1927년 신간회 수원지회 설립기사

1927년 10월 8일 3·1운동 이후 구국민단을 조직하여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던 인물들과 수원의 유지들이 처음으로 북수리 천도교당에 모여 신간회 수원지회 결성문제를 논의하였고, 조직준비회의를 결성하였다. 이어 10월 17일에는 수원천도교당에서 신간회 수원지회가 조직되었다. 김노적의 사회로 개회한 이후 경과보고, 임시집행부 선거, 회원심사, 임원 선정, 중앙본부에서 파견 온 이관구의 취지 설명, 내빈 축사, 언론·집회의 자유 획득 등 안건 결의 순서로 수원지회 조직을 마쳤다.

1928년 8월 19일 개최된 임시대회에서 김세환 선생이 지회장에 선출되었다. 아래 기사는 신간회 임시대회와 선생의 지회장 선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신간회 지회에서는 지난 19일 오후 3시에 북수리 동회관내에서 임시대회를 총무간사 감병호 씨의 사회로 개회하고 개회사와 각부 경과보고서가 있은 후 임시집행부 선거에 박승극씨가 의장으로 김도성 씨가 서기로 피임되어 순서를 따라 진행 할 때 오랫동안 보류해오던 지회장 선거에 들어가 무기명 투표로 김세환 씨가 절대다수의 득점 되어 선거된 후 그 이하간부 전부의 개선이 있는 중…(「수원 신간회대회」, 『동아일보』 1928년 8월 22일자)

위 기사는 선생이 신간회 수원지회 임시대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진행된 선거에서 ‘절대다수’의 표를 획득하며 지회장에 당선되었음을 보여준다. 이는 수원지역 민족운동 진영에서 김세환 선생이 지닌 위상이 잘 드러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해 12월 16일에 개최된 제3회 정기대회에서 또다시 지회장에 선출되었고, 1930년 4월 25일 임시대회에서는 감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일제의 김세환 감시카드(1928년)
일제의 김세환 감시카드(1928년)

선생의 신간회 수원지회장 선출과 관련하여 박선태, 김노적, 김병호가 주목된다. 박선태는 3·1운동 당시 김세환 선생의 지도를 받아 수원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1930년 신간회 수원지회 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김노적은 성공회 신자로 수원상업강습소의 제자로 3·1운동 당시 김세환의 지도를 받으며 박선태와 함께 수원면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김병호는 김세환과 같은 수원종로교회 교인으로 수원삼일학교의 교사, 수원기자동맹에서 활동하였고, 수원엡윗청년회에 임원으로 같이 활동하였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세력으로 수원지역 민족운동을 이끌던 주도적인 인물들로 김노적과 박선태는 김세환 선생의 지도를 받으며 3·1운동에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활동하였고, 김병호는 선생이 다니던 수원종로교회 교인이며 1920년대 초 수원엡윗청년회에서 김세환 선생과 함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1920년대 기독교세력으로 수원지역 민족운동을 주도하던 이들은 당시 지역 민족운동 진영에서 상징적 명망을 지닌 김세환 선생을 적극 내세움으로써 민족운동 기반을 더욱 확대시키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선생은 이들의 직접적 지원을 받으며 수원지회 지회장에 선출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선생은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하여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다.

수원체육협회는 지금으로부터 이년 전에 창립되었으나 오늘날까지 하등의 활동함이 없다 하여 일반에 한 말썽거리가 되던 중 이를 유감으로 여기든 수원 유지 몇몇 사람은 체육협회 간부와 상의한 결과 무능력한 회를 해체하고 다시 힘있고 활동 있는 신 단체를 만드는 것이 좋겠다 하는 결론 아래에 얼마 전에 체육회 간부가 모여 동회를 해체하기로 가결하여 즉시 해체를 하자 그 자리에서 수원체육회를 조직키로 준비회를 열은 후 각 방면으로 활동 하던 중 지난달 30일 오후 8시 반에 공회당에서 수원체육회 창립총회를 김세환씨 사회로 개회하고 경과보고와 임시 집행부 선거로 역시 김세환씨가 의장에 피선되어 일사천리로 규칙 통과와 다음과 같은 임원선거가 있은 후 기타사항에 이르러 9월 안에 수원시민대운동을 개최키로 만장일치 가결하고…(「수원체육협회 창립 시민대운동회」, 『동아일보』 1929년 9월 5일자)

수원체육협회가 창립된 지 오래되었으나 별 활동을 하지 못하였다. 이에 선생은 홍사훈 등과 함께 새로운 체육단체를 만들기로 뜻을 모으고 수원체육협회의 임원들과 협의하여 해산하였다. 1929년 8월 30일 수원공회당에서 수원체육회를 주도적으로 창립하였다. 당시 수원 사회 유지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 자리에서는 임원으로 회장 김세환, 부회장 박선태, 이사 홍사훈 외 9명이 선출되었다.

수원체육회는 운동경기를 직접 진행할 수 있는 부서로 축구부, 야구부, 정구부, 육상경기부, 빙상경기부 등을 두었다. 9월 안에 수원시민대운동회를 개최할 것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고, 그 방법을 이사회와 간사회에 일임하였다. 수원체육회는 해마다 수원시민대회운동회를 개최하였고, 수원지역 모든 체육의 지도기관으로 많은 공적을 남기고 각종 체육 사업을 진행하였다. 1935년 10월 15일에는 남창리에 현대식 양옥 형태로 체육회 회관을 성공적으로 건립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수원체육회의 조직은 사회주의세력이 수원지역 사회운동을 장악해 나가는데 대한 민족주의 진영의 대응적 성격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간회 수원지회 내의 입지강화와 사회주의세력에 대한 견제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1930년대 초 신간회가 해소된 이후 선생은 1939년경 수원 자산가인 최상희의 협조를 구해 폐교 직전의 삼일 학교를 구해냈다. 1941년에는 홍사훈을 설득하여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민족교육에 힘썼다.

해방직후인 1945년 9월 26에 숨을 거두었다. 개인 묘지에 묻혔던 그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 충렬대로 옮겨져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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