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3.1운동 당시 이른바 민족대표들과 국내외 임시정부의 조직자들은 미국 등 서구열강과 파리강화회의에 큰 희망을 걸고 독립이 가까운 시기에 달성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이 결과 국내외에서 여러 임시정부가 조직, 발표되었던 것이다. 이들 임시정부에서 선생은 손병희·이승만과 함께 정부수반으로 선임되거나 국무총리총재 또는 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어느 직책도 수락하지 않았다. 선생은 주위의 측근들에게 “한인사회당의 당수면 되었지 무슨 정부의 직책이 중요한가”며 반문할 정도로 이들 임시정부의 각원취임수락에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1919.2.)
선생과 한인사회당은 3.1운동의 ‘민족대표들’과 임시정부 조직자들을 비판하였는데, 미국 등 서구열강이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며 결국에는 열강들이 패전국의 식민지를 분할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라는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전망이 가능했던 것은 선생을 비롯한 한인사회당 간부들이 시베리아내전시기에 미국 등 열강이 일본과 연합하여 반혁명적인 백위파세력을 지원하고 있었던 사실을 몸소 경험함으로써 이들 열강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9년 8월 30일 대한국민의회 특별상설의회에서 대한국민의회측은 상해임시정부 특사 현순과 김성겸의 제안을 토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국민의회는 상해 임정측의 제안을 받아들여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가 국내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봉대(奉戴)에 합의하게 되었고 국민의회는 해산을 선언하였다. 국민의회의가 해산을 결의하는 과정에서 선생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선생은 한성정부의 국무총리총재에 선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출범할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맡고자 상해로 갔다. 그러나 상해임정과 국민의회 사이에 합의사항의 해석을 둘러싸고 발생한 ‘승인개조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생은 결국 “상해측과 정전(政戰)을 벌임으로써 대국을 파괴할 수 없다”며 1919년 11월 3일 개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에 취임하였다.
상해임정은 선생을 비롯한 주요 각원들이 취임함으로써 지지기반이 훨씬 확대되었으며,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권위도 확립되었다. 그러나 미국에 있던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사실상의 분립정부인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워싱턴에 설립하고 종래 대한인국민회중앙총회에서 수합하던 애국금 등 미주지역의 모든 독립운동자금을 독점하였다. 그리하여 미주동포로부터 자금이 끊어지면서 상해임정은 재정적 어려움과 침체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생은 1920년 중반 6명의 임시정부 차장들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 불신임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를 비롯한 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이른바 ‘기호파’ 총장들의 반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신년축하회 기념사진(1920.1.1.)
한편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박진순과 한형권 등 특사들의 노력으로 볼셰비키정부로부터 200만 루블의 차관제공을 약속받는 데 성공했다. 선생의 한인사회당은 이 가운데 1차로 40만 루블을 건네받았는데, 이 자금은 1920년 말 그리고 선생이 상해임정을 탈퇴한 후인 1921년 3월 말경 상해로 운반되었다.
상해임정이 지도자들의 대립과 갈등으로 제대로 활동을 펴지 못하고 있는 동안, 일제는 3.1운동 이후 급속히 성장하며 식민통치에 위협이 되고 있던 연해주지역과 서북간도지역의 한인민족운동세력에 대한 보복에 나섰다. 1920년 4월 연해주의 러시아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4월참변, 그리고 1920년 10월-11월 서북간도의 동포사회에 대해 대대적인 약탈, 방화, 파괴를 자행하고 수천 명의 동포를 살해한 간도사변[또는 경신참변]이 바로 그것이다. 1920년 여름의 봉오동전투와 가을의 청산리전투에서의 승리는 한인 독립군이 일본침략군을 상대로 얻어낸 쾌거였다. 그러나 일본침략군에 의하여 활동근거를 파괴당한 독립군부대들은 볼셰비키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혁명적 자유지’ 흑룡주[아무르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간도사변은 임시정부가 일본침략군의 만행으로부터 만주의 동포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독립운동세력, 특히 러시아와 만주지역의 무장투쟁세력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선생을 비롯하여 만주·러시아로부터 온 인사들이 중심이 된 급진론과 안창호로 대표되는 준비론간의 노선논쟁이 촉발되었다.
급진론의 득세와 모스크바 자금을 배경으로 하여 선생은 임시정부의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1921년 1월 초에 개최된 국무원회의에서 선생은 이승만에게 위임청원문제를 해명할 것을 요구하였고, 대통령제의 폐지와 혁명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무위원제의 채용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와 다른 각원들의 반대로 자신의 임정개혁안이 좌절되자, 선생은 마침내 1921년 상해임정을 탈퇴하고 말았다.
선생의 상해임정 탈퇴는 1919년 11월 3일 이후 선생과 김립 등 사회주의 세력이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의 민족통일전선적 성격을 띠었던 상해임시정부의 각원구성이 이승만·이동녕·이시영·신규식 등 우파, 특히 기호출신 일색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선생에 이어 남형우·김규식·유동렬·안창호 등 각료들이 연속 사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