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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마리아
조마리아
, (1862) ~1927
, 애족장
(2008)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 조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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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 배경
조마리아(趙姓女)는 1862년에 황해도 해주군에서 배천 조씨 선(煽)과 원주 원씨의 3남 2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조마리아의 가문은 조선 선조 대 만경현령을 지낸 조복립(趙福立), 효종 대 한성판윤에 오른 조관(趙灌), 현종 대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은 조응건(趙應建) 등을 배출한 명문가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문과 급제가 점차 어려워지자 무과를 통해 관직 진출을 모색하였다.
조마리아의 고조부 조완옥(趙完玉)은 무과 급제 후 훈련원 주부(主簿, 종6품)로 봉직했다. 증조부 조기원(趙箕源)은 실제 업무가 없는 명예직인 통덕랑(通德郞, 정5품)의 품계를 받았으며, 오빠 조규증(趙珪增, 1854 ~ 1911)과 사촌 오빠 조철증(趙喆增)은 고종 대에 각각 행(行) 수군절제사(水軍節制使, 정3품)와 충훈부도사 겸 선략장군(종4품)을 지냈다.
조마리아는 황해도 해주군 광석동에 사는 동갑내기 안태훈(安泰勳, 1862 ~ 1905)과 혼인하였다. 안태훈의 본관은 순흥으로 본래 해주부의 향리가문이었으나 5대조 안기옥(安起玉) 이래 무과급제자를 다수 배출하여 명망 있는 무반가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무반가문이라는 공통점은 두 가문의 결속을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었을 것이다.
조마리아의 남편 안태훈은 어려서부터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황해도내 양대 신동으로 불렸다. 그는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안진사로 불렸으며, 개화파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 유학생에 선발되기도 하였다. 한편 평소부터 개신교나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1896년 가을 명동성당을 찾아가 천주교에 귀의하였으며, 1897년 1월에는 형제, 아들, 조카들과 함께 빌렘 신부에게 영세를 받은 가운데 10개월 후에는 어머니, 아내, 누이동생들도 뮈텔 주교에게 영세를 받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 일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조마리아는 안태훈과의 사이에 안중근(1879 ~ 1910), 안성녀(1881 ~ 1954), 안정근(1884 ~ 1949), 안공근(1889 ~ 1939) 등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장남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역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고, 차남 안정근은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군단을 통합시켜 청산리전투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삼남 안공근은 백범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며 윤봉길과 이봉창의 항일의거를 성사시켰고, 딸 안성녀는 안중근 의거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손수 독립군의 군복을 만들었다. 실로 조마리아는 자식들을 모두 독립운동의 제단에 바친 장한 어머니였다.
민족교육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의 추진
1904년 러일전쟁의 발발로 대한제국이 위기에 처하자 안태훈과 안중근 부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를 위해 1905년 가을 안중근은 중국의 상황을 시찰하고자 상해로 이동했으며, 안태훈은 남은 가족과 함께 평양의 관문인 진남포로 이주하여 안중근의 귀국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태훈이 지병으로 서거했으므로 조마리아는 신천군 청계동에서 남편의 장례를 치르고 아들들을 따라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06년 봄, 진남포로 돌아온 안중근은 동생들과 함께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했다. 삼흥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천주교 학교인 돈의학교를 인수, 제2대 교장을 역임하면서 1907년 8월 1일에 해외로 망명할 때까지 학교의 운영을 맡았다.
안중근은 삼흥학교와 돈의학교의 운영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미곡상을 경영하는 한편 석탄판매회사인 삼합의를 운영하였다. 그리고 일정 부분은 조부 안인수에게 물려 받은 유산을 활용했는데, 이는 부친 안태훈 사후 집안의 어른이었던 조마리아의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안중근 형제들의 민족교육운동 역시 조마리아의 지원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일제의 한국침략이 극에 달한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다. 운동을 이끈 서상돈(徐相敦)은 일본에서 빌린 국채 1,300만 원을 갚지 못하면 장차 나라를 잃을 것이라며 2천만 동포 모두가 참여하는 국채보상운동을 제창했다.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는 가운데 안중근은 자청하여 국채보상기성회 관서지부를 개설하고 지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1907년 2월 평양 명륜당에서 천여 명을 대상으로 국채보상운동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어 자신의 가족이 소지한 패물을 모두 국채보상금으로 의연하게 하였고, 1907년 5월에는 동생 정근과 공근도 형의 뜻을 받들어 삼흥학교 교원 및 학생들과 함께 34원의 국채보상 의연금을 납부하였다.
안중근이 국채보상운동에 매진하고 있을 때 모친 조마리아도 이에 적극 동참했다. 1907년 5월 조마리아는 ‘삼화항패물폐지부인회’의 제2차 의연활동에서 은장도, 은가락지, 은귀걸이 등 20원 상당의 은제품을 납부하였다. 이 같은 정황은 일제의 한국 강점 이전부터 조마리아 역시 국권 회복을 위해 미력이나마 자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안중근 의거와 해외 망명
1907년 7월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위해 고국을 떠나고자 돈의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고 모친인 조마리아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때 조마리아는 “집안일은 생각지 말고 최후까지 남자답게 싸우라”는 천금 같은 격려를 해주었다. 조마리아의 이러한 가르침은 안중근이 북만주와 연해주에서 풍찬노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한국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였다. 안중근의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던 국내외 독립운동가는 물론 만청정부 타도운동을 벌이던 중국의 혁명운동가들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고, 더 나아가 일제의 한국침략을 주시하던 서구 열강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일대사건이었다.
그러나 남겨진 안중근의 가족들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직면해야 했다. 일제는 의거 직후부터 진남포에 소재한 안중근 가족의 거처는 물론 신천군 청계동의 안중근 친척들의 거처까지 수시로 수색하였다. 특히, 안중근의 동생들은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09년 11월 7일 이전에 안정근과 안공근은 안중근 의거 관련 혐의로 일제에 체포되어 한 달 넘게 옥고를 치렀다. 이들은 뤼순의 안중근을 면회하기 위해 12월 13일 인천에 당도했는데, 일제는 다시 이들을 수일간 구류하고 구타하였다.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 안병찬(安秉瓚)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다. 이때 평양 헌병대와 경찰서는 헌병과 경관을 파견송하여 조마리아를 추궁하였다. 그러나 조마리아는 태연자약한 태도로 아들 안중근이 러일전쟁 당시 밤낮으로 국사를 근심하였고, 국채보상운동 당시 온 집안사람들에게 국채보상 의연금을 내게 하였고, 평소 가내 생활에서 매사에 정당주의를 모색했던 진실한 애국자라는 점을 강조하며 오히려 일제의 추궁을 반박하였다. 아울러 조마리아는 1910년 2월 14일 일제가 안중근에게 사형을 언도하자 분노를 표하며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며 일제의 안중근 재판을 강하게 질타하였다.
조마리아는 죽음을 앞둔 안중근을 면회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당차고 의기로운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앞둔 아들을 차마 만나볼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마리아는 뤼순감옥으로 형을 면회하러 가는 아들들에게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는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고 한다. 또한 안병찬 변호사를 통해서 “네가 국가를 위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죽어도 오히려 영광이나 우리 모자가 현세에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말을 전했다고 한다. 조마리아는 안중근보다 보름 늦게 태어난 안중근의 사촌동생 안명근(安明根)에게 흰색 명주 수의를 보내 안중근이 이 옷을 입고 최후를 맞이하도록 하였다.
1910년 5월 이후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장녀이자 자신의 손녀딸 안현생을 명동성당 수녀원의 프랑스인 수녀에게 맡긴 뒤 자신은 아들을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망명 이후 조마리아는 주변으로부터 ‘안중근의 모친’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찬양과 주목을 받았으며, 동시에 위대한 독립운동가인 아들의 유지를 제대로 선양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었다.
연해주 생활과 독립운동 지원 활동
1910년 5월 조마리아는 정근 혹은 공근의 가족과 함께 안중근의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로 이동했다. 조마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안중근의 유족은 그 해 겨울을 크라스키노에서 보냈으며, 이 과정에서 연해주 한인들의 지원을 받았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조직된 안중근 유족 구제공동회가 모금한 기금이 크라스키노의 한인지도자 최재형의 손을 거쳐 안중근 유족에게 전해진 것이다.
조마리아를 비롯한 안중근 유족은 안창호(安昌浩)의 도움 하에 크라스키노를 거쳐 1911년 4월 동청철도 동부선상의 목릉(물린) 팔면통에 정착하였다. 이곳은 서북 출신들이 많이 살고, 미간지가 넓은 곳이었다. 안정근은 이곳에서 잡화상을 운영하며 생활비를 벌었고, 안공근은 형의 지원으로 러시아 수도로 가서 러시아어를 공부하였다.
1914년 3월 조마리아 등 안중근 유족은 목릉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쪽으로 110km 떨어진 니콜리스크로 이주하여 잡화상을 운영하였다. 이때 안중근 유족은 안정근의 장모인 황해도의 만석꾼 왕재덕과 독립운동가 이갑의 동생의 후원을 받으며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이어 정근·공근 형제는 안창호가 미국에서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1919년부터 니콜리스크에서는 최초로 벼농사에 성공하여 200석 가량을 수확하였다. 안정근은 벼농사의 성공을 계기로 니콜리스크에 대규모 농장을 개설하여 독립운동 기지건설에 필요한 항구적인 재원을 마련하려 하였다.
정근·공근 형제가 목릉과 니콜리스크에서 일가족의 생활 안정과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힘쓰는 동안 조마리아 역시 쉬지 않고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독립신문≫ 1920년 1월 30일자에 의하면,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이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서쪽으로는 바이칼호수에 이르기까지 분주하여 동포를 각성시키는 사업에 종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러시아 동부 각지를 돌며 동포들의 독립의식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강연활동과 방문활동을 전개하였음을 보여준다.
조마리아는 러시아 동부를 순회할 때 깊은 밀림에서 산적이나 맹수를 만나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지혜로운 술책과 담력으로 상황을 타개하여 동행한 남자들의 감탄을 자아냈다고 한다. 아래의 인용문은 조마리아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담대한 기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만주에서 이사를 가는데 마차에다 이삿짐을 잔뜩 싣고 가는데 마적들이 나타났어요. 총을 마구 쏘면서. 그러니까 같이 가던 청년들 수십 명이 전부 땅에 엎드려서 꼼짝 못해요. 이때 안중근의 어머님이 척 내려오더니 ‘이놈들아, 독립운동 한다는 놈들이 이렇게 엎드리기만 할거냐? 이렇게 엎드려 있다간 다 죽어’라고 대갈일성(大喝一聲)했다는 겁니다. 그리고는 벌벌 떠는 마부를 제치고 스스로 말고삐를 확 쥐더니 죽는 한이 있어도 가고 보자고 소리를 질렀다죠. ‘에야’ 소리 지르며 마차를 몰아 결국 무사했다는 것 아닙니까? 보통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조마리아는 이처럼 담대한 기상을 바탕으로 러시아 동부 각지를 순회하며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의식 각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상해 생활과 임시정부 지원 활동
1919년 3.1운동의 결과 국내외 각지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중국 상하이에서도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때 내무총장이었던 안창호는 5월 미국에서 상하이로 들어와 아직 부임하지 않고 있었던 국무총리 이승만을 대신하여 임정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나가는 한편, 친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안정근에게 임정의 최대 외곽단체인 대한적십자회의 운영을 맡겼다.
안정근은 니콜리스크의 농장을 동생 공근에게 맡기고, 1919년 11월경 큰아들 원생, 형 중근의 자녀인 현생과 준생, 그리고 동생의 큰아들 우생을 데리고 상해로 건너와 임정에 가담하였다. 1920년 1월, 안창호와 안정근 러시아어에 능통한 안공근을 임정의 러시아 외교특사로 임명하였다. 이에 안공근은 1920년 5월경 연해주의 생활기반을 사촌 안경근(安敬根)에게 부탁하고 상해로 진출하였다. 이때 안정근은 임정 북간도 특파원으로 북만주에 난립한 독립단체를 통합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처럼 안중근 유족은 안창호를 통해 임정에 본격 가담하면서 독립운동의 최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아들들이 임정의 요인으로 활약하는 동안, 조마리아는 니콜리스크에 머물렀다. 그녀는 1922년 4월 니콜리스크에서 동포들의 환대를 받으며 회갑잔치를 치렀으며, 이후 상해로 이주하여 다시금 아들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24년 2월 안정근이 처자를 데리고 안창호를 따라 북경 근처 해전농장으로 이주하여 농장 개척을 통한 독립운동기지 건설운동에 착수함에 따라 조마리아는 안중근·안공근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자기보다 세살 위인 백범 김구의 모친 곽낙원(郭樂園)과 동기간처럼 지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일찍이 189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안태훈은 동학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관군의 추격을 받던 김구와 그 부모를 자신의 거처인 청계동으로 초빙하여 보호해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조마리아와 곽낙원이 친분을 쌓았고, 더불어 안중근 유족과 김구의 인연이 시작된 것이다. 이 같은 배경에서 북경의 안정근이 1925년 이후 뇌병이 발생하여 독립운동 일선에서 물러나자, 안공근을 필두로 하는 상해의 안중근 유족이 김구의 최측근에서 임정의 독립운동을 수행하는 중요 역할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상해 거주 당시 조마리아는 동포들 간의 분란과 다툼에 적극 개입하여 중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하였다. 이때 이해 당사자들은 조마리아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의 모친으로 평소 모범을 보인 가운데 독실한 천주교인으로서 공정한 자세를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1920년대 전반에 안정근이 북만주에서, 1920년대 중반에 안공근이 상해 일원에서, 1920년대 후반에 안경근이 북만주에서 독립단체 통합운동을 벌였던 것도, 모두 안중근의 동생들이자 조마리아의 아들 내지 조카라는 후광이 크게 작용한 결과였을 것이다.
상해에서 조마리아는 셋째 아들 공근에게 의지하였다. 동·서양 언어에 능통한 안공근은 임정을 대표하여 프랑스조계 당국과 협상을 담당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그는 수년간 구미공사관에서 통역과 정탐원 생활을 하며 자신의 가족과 큰형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그러나 그의 수입은 11명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기에 충분치 못하였다. 1925년 5월에 안공근은 가게를 세내어 아이스크림 장사를 해보기도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로 인해 안중근 유족은 경제적 어려움에 처했다. 안중근의 자녀들은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있다가 1926년에 국립 기남학교 교장의 도움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입학하였다.
조마리아는 가정이 경제적으로 궁핍하였음에도 오히려 같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임정 후원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1927년 7월 19일 밤 상해 거주동포 208명이 상해 삼일당(三一堂)에 모여 안창호의 사회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후원하기 위한 ‘임시정부경제후원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간단한 헌장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출하였다. 안창호가 주도한 경제후원회는 모든 회원들로부터 법정세금을 받고, 매년 1인당 1원 이상의 후원금을 받아 곤경에 처한 임정의 경제적 궁핍을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위원장에 안창호, 서무위원에 조상섭, 재무위원에 진희창 등이 선출되었고, 조마리아, 최승봉, 김순애(김규식 부인) 등이 위원에 선출되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
조마리아는 생전 ‘여중군자(女中君子)’, ‘여걸(女傑)’이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로 신망이 높았다. 상해에서 조마리아와 함께 생활한 여성 독립운동가 정정화는 조마리아에 대해 “너그러우면서도 대의에 밝은 분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이는 조마리아가 안중근 유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상해 독립운동진영의 안주인이자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로 조마리아는 한국 여성 독립운동가의 전범에 해당하는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조마리아 여사는 1927년 7월 15일 상해에서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장례는 프랑스조계 천주교당에서 상해 교민장으로 치렀고, 유해는 프랑스조계 만국공묘(萬國公墓)의 월남묘지에 안장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시개발로 묘지터가 개발되고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무덤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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