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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조경환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07년 함평에서 김태원과 함께 거의하여 함평성의 일군을 급습

1908년 김태원 전사 후 의병장으로 추대, 호남창의대장으로 활약, 대치 등에서 전해산 의진과 합진하여 일군과 교전

1909 어등산에서 일경의 적탄에 맞아 순국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조경환

조경환 , 1876 ~1908 , 독립장 (1963)

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 다시 밝으니

못된 귀식 되어서라도 왜적을 섬멸하리.

(天月重蒼 癘鬼殲賊)

섬나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는다면

죽어 혼이라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不滅島夷 惟魂不復)

- <조경환 의병장의 결전의지> -

열혈 청년으로의 성장

19세기 말부터 조선왕조는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국가라고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근 5백년을 지속해온 왕실의 노쇠함과 권력 투쟁에 매몰된 양반들의 한심한 작태로 말미암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에 속수무책,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 헤매었을 뿐이다. 결국 한반도 진출을 노리던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거듭 승전함으로써 한국의 운명은 일본 제국주의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그 여세로 1905년 11월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꾼 조선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반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500년을 지속한 왕조의 저항이 없지는 않았다. 고종은 때때로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密旨)를 전하기도 하고, 1907년 6월에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조선을 식민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폭로케 하였다. 이른바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이 언론을 통해 국내외에 크게 보도되자, 일본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특사를 파견한 고종에 대한 보복 조치를 단행하였다. 즉, 일본 내각 수상은 같은 해 7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통감으로 하여금 고종을 물러나게 하라고 지시하였다. 그러자 이토는 친일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을 불러 고종의 강제 퇴위를 추진하라고 협박하였다.

강요와 협박에 시달린 고종황제는 1907년 7월 19일 새벽 “슬프도다. 짐이 왕위에 오른 지 어언 44해가 지났노라. … 이에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케 한다.”는 내용의 조칙을 발표하고 황위에서 물러났다. 이러한 내용이 전국에 알려지자, 재야의 유생들과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켜 항일투쟁에 나섬으로써 의병의 불길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더불어 정미7조약의 체결로 인해 한국인의 반일 감정은 더욱 고조되었다. 더욱이 8월 1일에 단행된 군대해산을 거부한 시위대와 진위대가 전국 각지의 의진에 합류하거나 독자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군경과 전면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전국의 산과 들은 의병의 깃발과 함성으로 메아리쳤다.

1908년에는 강원도와 전라남북도, 황해도의 의병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1909년에는 전라남북도의 의병 활동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에 대해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 1859~1925)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체로 각 도의 의병을 말한다면 전라도가 가장 많았는데, 아직까지 그 상세한 사실을 얻을 수 없으니 후일을 기다려야 한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유신사, 1920 ; 『박은식전서』 상, 단국대출판부, 1975, 472쪽

박은식의 이러한 주장은 일제 당국의 통계를 통하여 입증된 바 있다. 일제 자료에 따르면, 1908년 전라도의 의병들은 일본 군경과 교전 횟수와 교전 의병 수에서 전국 대비 25%와 24.7%를, 1909년에는 47.2%와 60%를 차지하였다.1) 이처럼 전라도 의병은 1908~1909년 사이에 타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때 기라성같은 호남 출신 의병장들이 전라도 산야를 누비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대체로 1906년 6월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에서 거의를 주도한 최익현의 의병항쟁에 영향을 받았거나, 1907년 10월에 기삼연이 결성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의 일원으로 활동한 의병들이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의병장 조경환(曺京煥, 음력 1876. 2. 14~음력 1908. 12. 19) 역시 이 시기에 등장하였다.

조경환의병장 생가터(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693-2)
조경환의병장 생가터(광주광역시 북구 신안동 693-2)

조경환은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호는 대천(大川), 아명은 정거(丁擧), 이명은 준환(準煥)으로 알려져 있다. 또는 “자(字)는 경락(敬洛)이요 호(號)는 묵헌(黙軒)이요 본(本)은 창녕(昌寧)이니, 천성(天性)이 효우(孝友)하고 박학다재(博學多才)하였으며, 후학(後學)의 교도(敎導)에 많은 노력(努力)을 하였다.”2)는 내용도 전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자료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조경환이 남긴 글도 많지 않거니와 후손들에 의해 기록된 문헌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조경환의 행적을 밝힐 수 있는 단편적인 기록마저 여기저기 흩어져 있어서 그것을 갈무리하더라도 조경환 의병장의 성장과정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조경환이 의병장으로 활약하던 당시의 자료보다는 1960년대 이후의 문헌에 의거하여 성장과정을 살필 수 있을 뿐이다. 일제의 잔혹한 통치과정에서 독립운동가의 항일 기록보다도 후손들의 생존조차 버거웠던 암울한 식민지 상황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조경환이 의병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을 밝히기는 어려운 편이나, 조경환의 항일투쟁에 관한 내용은 비록 일제가 남긴 기록이긴 하나 비교적 풍부한 편이다. 그만큼 조경환 의병장의 빛나는 항일투쟁의 반증이라 판단된다. 따라서 이 글은 조경환 의병장의 항일투쟁을 복원하는 방향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먼저 의병에 투신하기 전의 행적을 간단하나마 살펴보겠다.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위의 본문에서 인용한 자료에 주목해보자. 조경환은 창녕 조씨로서 자는 경락, 호는 묵헌이라 전한다. 그는 대천의 호가 있으니,3) 생전에 두 개의 호를 사용한 듯하다. 왕재일(王在一, 1904~1961)이 편찬한 「전병장 조경환 순국사실(戰兵將 曺京煥 殉國事實)」에 의하면 조경환은 8세부터 25세까지 유학(儒學)을 배웠으며, 23세부터 30세까지 전국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순력했다고 한다.4) 약 2년간 시기가 중첩되나 아마도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크다.5) 이로써 보면 1880년대 중반부터 10여 년간 유학을 배웠으며, 1900년 전후부터 1905년 을사늑약 체결을 전후한 시기까지 전국을 돌아다닌 것으로 추정된다.

미루어 짐작컨대 조경환은 유학을 배운 시기의 호는 묵헌이고, 전국을 순회한 시기에는 대천을 썼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래서 의병에 투신한 후에도 대천이란 호를 사용한 것 같다. 1909년 초를 전후해서 결성된 호남동의단(湖南同義團)의 명단에 그는 ‘조대천(曺大川)’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부인 이순임 영정
부인 이순임 영정

대천이란 호는 그가 산천을 누비며 항일투쟁을 벌인 점과 연관될 것이다. 그와 함께 의병활동을 전개했던 전수용(全垂鏞, 1879~1910)이 “바다와 산을 누비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리라.”는 포부를 담아 해산(海山)이라 자호한 점과 유사하다 하겠다.

다만 그가 10세를 전후하여 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그를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최익현(崔益鉉, 1833~1907)의 문인이라 하지만6)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7) 1880년대 중반부터 1900년 사이에 최익현은 경기도와 서울을 중심으로 관료생활과 화서 이항로(李恒老) 연원의 유학자로서 주로 활동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가 면암을 대면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전국을 돌아다녔던 시기인 1900년대 전반에 면암을 뵈었을 수도 있다. 면암은 1900년 음력 4월 충남 정산으로 이거하여 활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찾아지지 않는다.

초야에 의로운 뜻과 용맹이 있는 선비들이 분발하여 자신의 죽고 사는 것은 되돌아보지 않고 의병과 의곡을 모았으므로 전 지역민들이 벌떼같이 일어났으니 曺장군도 그 가운데 한 분이시다.(중략) 奇省齋(기삼연-필자주), 高鹿川(고광순-필자주) 두 분이 죽은 뒤 장군의 풍채와 義氣를 듣고 즉시 김태원 장군 및 曺장군과 더불어 군사 전반에 관한 것을 의논하고 고락을 같이 하기로 했다.

박현동, 「曺京煥 將軍의 行蹟」, 1960 ; 조세현 편, 『殉國先烈 大川曺京煥義兵大將 獨立運動行蹟』, 24쪽에서 재인용

박현동은 태인의병뿐만 아니라 조경환 의진에서도 활동한 바 있었다. 그는 조경환 의병장을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의병과 군량을 모은 의로운 뜻과 용맹이 있는 선비로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이자 향토사학자였던 김정상(金正祥, 1894~1965)은, 조경환을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혈기왕성한 청년으로 서술하였다.

倜儻慷慨하고 放談縱橫하였다. 22세까지 漢學을 배우고 23세부터 名山大川을 巡歷하며 山勢와 地理를 歷覽記하였다. 倭勢가 泛濫하여 國勢가 累卵의 위기에 빠지매 이를 徵求하려고 丁未(단기 4239) 12월 10일에 咸平 海保面 背岩洞에서 竹峰 金泰元 義士와 만나고 13일에 거의 기병할 새 左翼將이 되었다.

金正祥 편, 「大川曺京煥義士略傳」, 『增補再版 湖南節義史』 上, 松川書院, 1961, 495쪽

인용문을 통해 조경환은 1907년 음력 12월을 전후하여 면암의 문인 여부와는 상관없이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거의할 결심을 굳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경환은 1906년 6월 최익현이 임병찬과 함께 전북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참여하려 했거나, 태인의병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컸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위의 본문에서 인용한 자료를 통해 그는 효성과 우애로운 성품을 지녔으며, 박학다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후학의 지도에 열성적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10여 년간 유학에 정진한 후 조선 정국의 상황을 살필 겸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산천지세를 파악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그는 을사늑약의 체결 소식에 충격을 받아 귀향한 후 시국을 관망하는 한편, 서당의 훈장으로 활동한 것 같다.

1907년 10월에 창평 출신의 고광순 의병장이 지리산 연곡사에서 순국하자, 그를 추모하는 만사(挽詞)를 다음과 같이 지었다.

“백발이 되어서도 충성스런 마음으로 의로운 깃발 세웠건만 /

홀연 불어오는 북풍에 무궁화꽃 떨어지네 /

광산모임 약속있으나 어디로 다 갔는지 /

등불 앞에 잠들지 못한 나 홀로 슬퍼한다네 /

당나라 장수 허원이 우리나라에 다시 태어나 /

의로운 북소리 연곡사 골짜기 드높였건만 /

국운이 비색하여 능히 승전하지 못했으니 /

서쪽 바람에 만장을 쓸 제 눈물만 가득하네”

조경환이 지리산 연곡사에서 전사한 고광순 의병장을 추모하는 애사(哀詞)를 지었음이 주목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조경환은 더욱 우국지사로 전환되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이 조경환은 10대를 전후하여 10여 년간 유학에 정진하며 효성과 우애로움을 갖춘 박학다재한 청년이었다. 이후 조경환은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산천지세를 파악하며 조선 정국을 살피는 과정에서 뜻이 크고 기개가 넘치는 우국지사로 성장하였다. 결국 조경환은 약 7년 동안의 전국 순회를 마치고 귀향한 후 누란의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하기 위해 서당을 개설하여 훈장으로 활동한 것이다. 조경환이 ‘후학의 교도에 많은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그러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의병에 투신하여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다

조경환은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의병을 일으킨 태인의병이 1906년 6월 봉기한 지 열흘 만에 해산된 상황을 전해 들었을 것이다. 태인의병을 주도한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林炳贊, 1851~1916)을 비롯한 이른바 순창 12의사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그 가운데 핵심인물인 최익현과 임병찬이 일본 쓰시마(對馬島)에 감금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접했을 것이다. 결국 1907년 1월 1일(음력 1906. 11. 17) 최익현은 원수의 나라 외딴 대마도섬에서 사망하여 충남 정산으로 운구(運柩)한다는 소식 역시 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조경환은 수만 명이 참가한 운구 행렬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당시 면암의 순국 소식은 특히 호남지역 우국지사들을 격분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면암의 1876년 흑산도 위리안치(圍籬安置)를 계기로 호남지역에 그의 제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추대의 일월고충(春秋大義 日月高忠)’의 대명사인 면암의 충성심에 감복한 호남의 우국지사들은 면암의 순국이후 적극 거의를 모색하였다.8) 조경환 역시 면암의 순국에 충격과 함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한편, 1907년 후반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의 제자인 기삼연(奇參衍, 1851~1908)은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본격화하고 있었다. 기삼연은 1896년 음력 2월 기우만이 주도한 장성의병에 참여한 이래 10여 년 동안 불굴의 항일의지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였다. 그의 항일정신은 ‘인통함원(忍痛含怨)’ 넉 자에 집약되어 있는데, 이를 가슴에 새기며 오로지 거의할 궁리에 전념하였다.

절치부심하던 기삼연은 1907년 10월 중순 장성 석수암(石水庵)을 근거지 삼아 30여 명을 불러 모아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주둔했다가 전북 고창 문수사(文殊寺)로 이진하였다. 이때 50여 명으로 증가했는데, 아마도 전남 나주 출신의 김준(金準, 1870~1908)9)이 의병을 모아 문수사에서 합류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탐지한 일제는 법성포주재소, 영광분파소, 고창 및 무장 분파소 등이 연합하여 이들을 공격하였다.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자료를 통해 살펴보자.

드디어 모집된 의사들을 거느리고 총과 창 등속의 기계를 준비하여 가서 고창 문수사에서 만나니 성재가 크게 기뻐하여 더불어 병사(兵事)를 의논하였다. 밤이 3경쯤 되자 비는 부슬부슬하고 숲은 깊고 길은 험한데 적병이 뒤밟아 와서 총소리가 뇌성 같아 바로 절 문에까지 날라들어 창과 벽이 모두 부숴졌다.

깊은 밤에 창졸이요 또 적병이 많은지 적은지 몰라서 여러 사람은 모두 놀라 흩어지려 하였다. 준이 강개히 말하기를, “군사가 의병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적을 만나 도피하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또 기구한 험한 길에 살아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니 기왕 죽기는 같을 바에야 싸우다가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 곧 포수들을 시켜 석벽에 몸을 기대고 연달아 총을 쏘아 크게 한바탕 싸우자 적병이 도망하였다.

성재는 극히 칭찬하기를 “그대가 장수의 재주가 있으니 우리 일이 되겠다.”하고 곧 준으로써 선봉장을 삼아서 군무를 모두 맡기었다.

오준선, 「의사 김준·전수용합전」, 『독립운동사자료집』 2, 1971, 641-642쪽

기삼연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한밤중에 기습을 당했으나 김준의 지혜로운 대처로 인해 일제의 연합부대를 물리쳤다.10) 문수사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준은 이후 호남창의회맹소의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였다. 당시 이들은 장성, 고창, 영광, 함평, 나주 등지에서 대담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침략기구인 주재소와 우편취급소, 일본인 농장, 일진회원 등 닥치는 대로 공격했던 것이다.

1907년 11월 1일, 이들은 고창읍성을 점령했다가 기습을 받아 큰 피해를 입고서 장성 백양사로 퇴각하였다. 기삼연과 김준은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면서 새로운 전략 수립에 고심하였다. 이들은 대규모 의진의 기동성 문제와 정면 공격의 무모함을 지양하기 위해 의진을 나누어 유격전술로 전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11) 그리하여 기삼연은 장성·순창을 중심으로, 김준은 영광·나주·함평·무안을 무대로 활동하면서 의진의 전력을 강화하기로 한 것이다. 얼마 후 기삼연은 담양 금성산성에서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아 6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패퇴하였다. 그는 순창군 복흥면 구수동에 은신 중 체포되어 광주로 압송, 불법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이 무렵 조경환은 김준 의병장과 산장에서 만나 시사(時事)를 상론(相論)한 혐의로 체포되어 광주감옥에 수일간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적이 있었다.12) 아마도 그가 개설한 서당에서 만나 시국 현안을 논의했던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조경환은 김준 의병장과 의기투합하여 의병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듯하다. 그리하여 1907년 음력 12월 중순 전남 함평군 해보면 배암동에서 김준 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을 맡았다.13) 이후 조경환은 함평읍, 창평 무동촌(茂洞村), 장성 낭월산(浪月山), 영광 월암산(月岩山), 어등산(魚登山) 등 수많은 전투를 주도하였다. 때로는 여러 의진이 합진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기도 했는데, 이때 조경환은 연합의진의 선봉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08년 음력 3월 25일(양력 4. 25) 어등산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대패하여 의병장 김준이 순국하였는데, 이때 조경환은 함평의 당산촌 나평집(羅平集) 가옥에 잠적하며 일본 군경의 추적을 따돌렸다. 당시 일제는 제2특설순사대 60여 명을 전남에 파견하여 김준·김율 형제 의병장과 그 의병부대의 진압에 전력을 기울였다. 뿐만 아니라 광주수비대 역시 김준 의진을 진압하기 위해 8개 종대를 편성하여 15일 동안 군사작전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이들 형제 의병장이 순국한 것이다.

눈부신 항일투쟁으로 일제조차 신출귀몰하다고 평가했던 김준 의병장을 잃은 조 장군은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김준 의병장의 뒤를 이어 강력한 의진을 재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의 진압작전이 종료되고 감시망이 다소 느슨해지자, 조경환은 의병장을 잃고 떠도는 의병을 불러 모아 전열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바로 이때 전북에서 이석용(李錫庸) 의진에서 활동하던 전수용이 광주에 왔다. 전수용은 이석용 의병장과 의논한 끝에 전남지역에서 종횡무진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김준 의진에 합류하기 위해 남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김준 의병장이 어등산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 그는 크게 낙심하고 통탄했으나, 김준 의진의 선봉장이었던 조경환을 만나 다시 한줄기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당시 용진산(聳珍山)에서 모여 제휴하기로 결정하고서 의병의 전력 강화에 힘쓴 끝에 200여 명의 의진으로 재편할 수 있었다.14)

전열을 정비한 조경환과 전수용은 유격전술에 적합한 형태로 부대를 운용하기 위해 두 개의 의진으로 편성하였다. 이때가 1908년 음력 7월경이었고,15) 전수용은 이 무렵부터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해산(海山)’이라 자호함으로써 전해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들은 협동작전이 가능하도록 서로 긴밀한 연락을 유지하며 활동하였다. 평소에는 의진을 나누어 운용하고, 일본 군경과 전투할 때에는 협동작전을 수행함으로써 일본 군경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조경환 의병장이 이끄는 독자적인 의병부대가 등장한 것이다.

불굴의 항일투쟁과 나라 위한 순국 - 일본군 14연대의 996발의 총탄 속에서도 결사 항전

조경환 의병장은 전열을 재정비한 후 먼저 김준 의병장에 대한 장례를 거행했다고 한다. 박현동에 의하면, “(1908년) 9월 어느 날 어등산 속에서 김태원 장군의 장례를 거행”16)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조경환 의병장은 자신과 생사고락을 나눈 김준 의병장의 시신을 순국 장소인 어등산에 안장하며 결사항전의 의지를 밝힌 것 같다. 그 후 조경환 의병장은 인근의 용진산 석봉(石峯)에서 호군(犒軍)한 후 광주 흑석(黑石)의 순사대를 공격하였다. 이후 이들은 불굴의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당시 조경환 의병부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17)

도통장 : 박용식(朴鏞植)

선봉장 : 김원국(金元國)

도포장 : 김원범(金元範)

총독장(摠督將) : 박규봉(朴圭奉)

좌익장 : 이원오(李元吾)

모사(謀士 혹은 書記) : 권택(權澤)

1초십장(一哨什長) : 이동언(李東彦)

3초십장 : 원재룡(元在龍)

4초십장 : 서경수(徐景洙)

동몽집사(童蒙執事) : 김복동(金福東), 곽진일(郭鎭一), 조찬성(趙贊成) 등.18)

이들 외에도 조경환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좀 더 확인이 가능하다. 박영근(朴永根, 함평)은 1908년 4월 나주 용진산에서 조경환 의진에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같은 해 8월 말 전해산 의진으로 옮겨 호군장으로 활동하였다.19) 이범진(李凡辰)은 1908년 7월 조경환 의진의 종사로 활동하다가 9월에 이르러 전해산 의진으로 옮겨 도포장으로 활약하였다.20) 김원국의 호는 석포(石浦)이며 본명은 김창섭(金昌燮)으로, 1908년 음력 9월 5일 광주 선암시장에서 조경환을 만난 후 선봉장에 임명되었다.21)

도포장으로 활약한 김원범은 1909년 1월 10일 어등산에서 조경환 의진이 기습을 당할 때 체포되었다.22) 이와 같이 조경환 의진의 주요 구성원들은 광주를 비롯한 함평, 영광, 장성 등 전남 서부지역 출신들이 많은 편이다. 도통장 박용식은 나주의 군서기 출신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배포한 상당한 문건이 전해지고 있다.23)

그리고 일반 병사층 의병 중에서는 1909년 10월에 귀순한 박성채(나주, 상업, 28세), 김창언(광주, 상업, 24세), 정만조(함평, 농업, 16세), 양화영(함평, 농업, 28세), 임달원(함평, 농업, 34세), 임길오(함평, 농업, 23세), 김대규(함평, 농업, 42세), 김창식(광주, 31세), 김응칠(광주, 55세), 송경욱(영광, 33세) 등이 조경환 의진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었다.24) 병사층도 대부분 그러하였으며, 연령은 10~50대까지 분포된 것 같다. 이들의 직업은 상업과 농업이 대다수를 차지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경환 의진은 1~2백 명 내외의 군세를 형성하여 전라남도 광주, 함평, 영광, 장성, 담양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 조경환 의병장은 이들을 8~9명씩 단위로 9개조로 편성하여 통솔하였다. 아울러 그는 일본 군경에 대한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정보를 수집하는 ‘밀정’ 30명을 운용하기도 했다.25) 아마도 이들은 종사의 이름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조경환 의진은 일본제 30년식 보병총과 기병총 4정, 한병총(韓兵銃) 12정, 천보포(千步砲) 8문, 개조한 화승총 약 60정, 쌍안경 등을 보유하고서 일본 군경과 맞서 싸웠다.26) 또한 자주 활용하는 요새는 산병호(散兵壕)를 견고하게 구축하고서 일제 군경의 공격에 대비하였다.27)

조경환 의진은 전해산·김여회(金汝會) 의병장이 이끄는 부대와 연합작전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1908년) 이튿날 음력 2월 8일 기유(己酉). 용진산(龍珍山)에 올라 유진하였다. 이 산은 진작 조경환 장군과 일을 같이 할 때에 여러 번 올라 보았던 산이다. 그 당시 머물러 있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옛 일을 느끼는 회포가 자연 발작된다. 이윽고 김원국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거년에 이곳에 머물던 일을 이야기하게 되자 서로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중략) 옛날 조경환 장군과 함께 이곳을 왕래하며 유련하던 일을 추억하니 사뭇 감개무량 했다.

(중략) 거년 8월 초에 석문(石門)에서 만나자 그 치열한 싸움에 마음과 힘을 같이 하여 종일토록 적병을 무찔렀고 영사재(永思齋) 접전에 공은 명곡에서 병을 치료하면서도 부하 군사를 내보내어 싸움을 독려하여 승첩을 올리게 했고 한재(大峙)의 접전에도 역시 도와서 큰 승첩을 올렸으며,(중략) 그 후 나는 장군 조경환과 더불어 합진하여 통안(通安) 등지에서 유진하고 있었는데, 이 무렵에 공은 군사를 집합하여 장성(長城) 등지에서 기다리다가 내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나는 통안을 출발하여 황룡(黃龍)으로 향하는데 공은 군사 50여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와 서로 황룡에서 만났었다.

(중략) 14일 갑오(甲午). 이날 비로소 들으니 조경환씨 진이 전일에 나산(羅山)의 적과 전전하여 적 3명을 죽이고 승리를 얻어 좌도(左道) 여러 고을을 순회하고 신함평(新咸平)으로 돌아와 내 진과 합세할 차로 지금 근처에 머물러 있다.

「전해산진중일기」, 『독립운동사자료집』 2, 442-450쪽

위의 인용문을 통해 조경환 의병장은 전해산 의병장과 매우 돈독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서로 도와주기 위해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던 것이다. 일제 군경은 체포한 의병을 신문하여 이러한 정보를 얻은 후 이들을 추격하거나 기습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 1908. 12. 24 대한매일신보(제86호)에서 「본월 18일 전라남도 장성군 부근에서 의병장 조경환씨가 인솔한 약 200명이 충청남도 주재 日(일) 헌병 및 수비대와 교전하였다.」고 보도하고, 또한 1909. 1. 15 대한매일신보(제1001호)에서 「본월 10일 광주군 서방 30리 되는 산중에서 의병장 조경환 씨가 인솔한 의병 50명이 해지 日(일) 수비대와 교전하였다.」고 보도하였다.

한편, 혹한기인 1908년 음력 12월에는 과세(過歲)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부하를 일시 귀향시키기도 하였다. 조경환 의병장은 일부 귀가하지 않은 의병 50명을 이끌고 어등산에 주둔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광주수비군의 명령으로 나주, 무안, 함평, 나산, 불갑산 지구를 수색하기 위해 약 2주간 예정으로 출동 중이었다. 이들은 조경환 의진이 어등산(魚登山) 운수동(云水洞) 서북방 약 500미터 떨어진 산중에 주둔한다는 사실을 탐지하고서 20명의 부대를 세 개로 나누어 포위,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였다.28)

야마다(山田) 소위가 지휘하는 일본군 3개 부대는 1909년 1월 10일(음력 1908. 12. 19) 오전 10시 40분경 조경환 의진을 포위한 채 동정을 살피다가 우연히 대숲을 나오는 한국인 1명을 체포하여 신문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정보를 얻었다.

1. 적괴 조경환 이하 약 50명의 적도는 지금 대숲 안에서 酒宴後 대부분 낮잠을 자는 중임.

2. 중앙에 돌출한 삼림 및 그 서방 약 10미터의 독립 가옥에는 각각 1명의 적 보초가 있음.

『진중일지』 Ⅲ, 152쪽

이러한 정보에 의거하여 일제 군경은 조경환 의진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가해서 진퇴양난에 빠뜨렸다. 그 후 일본군이 점차 포위망을 좁히면서 공격하자 퇴로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의병들의 피해가 갈수록 증가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경환 의진은 전사 20명, 체포 10명이 발생하는 등 심각한 피해를 당했다. 아울러 이들은 30년식 보병총 1정, 동(同) 기병총 1정, 한병총 4정, 화승총 12정, 5연발 엽총 1정을 빼앗겼다. 전사자에는 의병장 조경환이 포함되었다. 일제는 부상이 심해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빙자하여 1명을 불법 총살했는데, 아마도 도포장 김원범일 가능성이 크다. 체포되었다고 하나 재판을 받거나 석방된 기록이 없이 자결한 것으로 전해지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일제는 체포된 의병 중 다른 2명을 야음을 틈타 도주를 기도했다고 빙자하여 사살하였다. 1월 10일 체포된 10명 가운데 실제 재판에 넘겨진 의병은 이운선만 확인될 뿐이다.29)

일제는 노획한 5연발 엽총이 미국의 선교사가 조경환 의진에 매각한 것으로 의심하며 엄밀한 조사를 진행하였다.30) 심지어 피탈된 30년식 보병총 1정은 지난 1908년 설날 담양 무동촌 전투에서 일본군 하야시(林周助)가 빼앗긴 총기로 파악되었다. 당시 일본군은 두 시간 동안의 격전 과정에서 996발의 탄환을 소모한 외에는 피해가 거의 없었다.

일제 경찰은 이때 순국한 조경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首魁 曺京煥 光州 32세.

故 巨魁 金泰元의 部將으로 泰元의 死後 독립해서 광주군에 근거하여 각지를 횡행하였고, 그 세력이 한창일 때는 부하가 1백여 명이나 되었다. 沈南一, 全海山 등의 巨魁와 서로 도우면서 가끔 官憲과 싸웠으나 여기서 戰歿했다.

『전남폭도사』, 86쪽

이와 같이 조경환 의병장은 1907년 음력 12월에 의병에 투신하여 항일투쟁을 벌이다 1909년 1월 10일 전사, 순국하였다.

박현동은 당시 용진산에서 주둔하던 중 전사 소식을 듣고서 어등산으로 달려와 시신을 거두어 매장한 후 다음과 같은 추모시를 남기며 조경환의 절의와 충성심을 기렸다.

“눈물을 흘리며 동쪽 언덕에 서서 장렬하게 죽어간 모습을 슬피 바라보네. 절개는 눈 속의 푸른 소나무와 같고 충성은 해악(海嶽)보다 더 높구려.”

또한 도통장 박용식은 1909년 어느 시기에 제사를 지내며 제문을 남기고 있다. 그는 맹자의 사생취의(捨生取義)를 실천한 조경환의 순국을 높이 평가하였다. 예부터 호남의 의성(義聲)이 가장 높아서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高敬命)과 조헌(趙憲), 진주 삼장사(三壯士) 등이 의리를 드높였다는 것이다. 조선 말에 이르러서도 기삼연과 고광순 역시 고인의 의로운 죽음이라고 강조하였다. 조경환 의병장 역시 국민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나라에 보답하려는 일념으로 호남지역을 무대로 우레와 바람처럼 위세를 보여주었다고 추앙하였다. 아울러 조경환 의병장의 선공후사(先公後私) 정신이 타오르는 불빛과 같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끝으로 조경환 의병장이 말한 “하늘이 거듭 푸르고, 달빛 밝으니, 못된 귀신 되어서라도 왜적을 섬멸하리. 섬나라 오랑캐를 멸하지 않으면 죽어 혼백일지라도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결전의지를 굳게 다짐하는 제문을 통해 조경환과 박용식의 항일 정신을 마음에 새길 수 있다.

또한 장성의병을 주도한 기우만도 어등산에서 산화(散花), 순국한 조경환을 애도해마지 않았다.31)

기우만은 조경환을 김태원을 계승한 의병장으로서 기삼연의 막부에서 장군으로 추대됨은 모략과 충성, 용기를 갖춘 때문이라 하였다. 병사들의 마음이 복종하고 바라는 바가 되어 열 번 싸워 열 번 이긴 것은 전례가 없는 것이라 높이 평가하였다.

도정 권상호 2018 봄 씀
도정 권상호 2018 봄 씀

그리하여 어등산에서 김준 의병장이 먼저 죽고 나중에 조경환 의병장이 죽음은 임진왜란 당시 금산(錦山)의 일과 같다고 이해하였다.

사실 기우만은 조경환이 유학을 발전시킬 인물로 기대했었으나 의병에 나아가 전사했으니 매우 애통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이 1을 성취할 때 조경환은 100을 달성할 것이라 격려한 바 있었다.32)

1909년 1월 19일 조경환 의병장이 순국하자, 그 뒤를 이어 선봉장 김원국과 도통장 박용식 등이 흩어진 의병을 수습하여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요컨대, 조경환 의병장은 김준 의병장의 뒤를 이었고, 김원국·박용식 등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던 의병장들이 그를 계승하여 전라도 의병항쟁을 주도한 것이다.

또한 전해산·심남일 의병장과 더불어 연합전선을 형성하거나 연합작전을 전개함으로써 전라도가 후기의병의 중심지로 떠올랐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요컨대, 조경환은 1908년을 전후하여 광주·장성·나주·함평·영광 등 전남 서부지역을 무대로 불굴의 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표적 의병장이라 할 수 있다.

조경환 의병장의 순국의 모습 또한 장렬하다. 1960. 8. 26 참의원 의원 조국현(1896. 6. 11~1969. 6. 29)은 증언을 통하여 “자신의 사후 부하들의 명록이 왜놈의 수중에 들어가 희생을 당할까 염려하여 가슴에 흐리는 피를 움켜잡고서도 이를 불사르고 운명하였다.”는 소식이 당시 시가마동들에게도 널리 회자하였다고 하였다.

조 장군의 시신을 부하들이 업고 인근 마을 두엄자리에 숨기고 왜놈들이 머리를 자르는 화를 면하였다고 가족들로부터 전하여져 온다고 하였다.

1960년 참의원 의원 조국현의 「증언」
1960년 참의원 의원 조국현의 「증언」

1963년 정부는 조경환 의병장의 공을 기려 「건국공로훈장 독립장(건장증제154호)」에 추서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화순군 북면 안심리에 안장되었다가, 후손에 의해 1973. 10. 16(금) 현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136호)에 부인 이동임(李同任)과 함께 이장하였다.

훈장
훈장
광주광역시 북구 대천로
광주광역시 북구 대천로

한편 광주광역시는 북구 오치동(989-18)에서 북구 문흥동(972-1)까지의 2,064m를 조경환 의병장의 호를 따 대천로(大川路)로 명명하여 그의 공적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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