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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신건식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77년

주요공적

1912년 동제사 및 대동보국단 활동

1939년 제31회 임시의정원 충청도 대표 의원

1941년 임정재무부원

1943년 3월 임시정부재무부 차장으로 활동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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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식 / 오건해

신건식 , 1889 ~1963 , 독립장 (1977) 오건해 , 1894 ~1963 , 애족장 (2017)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큰형 정식의 아들),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1. 청주 산동신씨 개화 문중에서 태어나다

신건식(申健植, 1889 ~ 1963)은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132번지(현재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신용우(申龍雨)와 전주최씨 사이에서 3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독립운동 당시에는 신환(申桓)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신건식부부와 신순호
신건식부부와 신순호

청주 일원에 고령신씨가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신숙주의 7남인 영성군(靈城君) 형(泂)의 아들 광윤(光潤) 때부터이다. 광윤은 1504년(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복위 문제로 훈구파 사림들이 피해를 입었던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영의정 윤필상의 외손녀 사위라는 이유로 연좌되어 구금되었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났고, 이후 청주로 내려왔다.

광윤은 처음에는 북이면 용계리 모애마을에서 살다가 낭성면 관정리 묵정으로 옮겨 살았다. 그 후 신숙주의 5남 소안공(昭安公) 준(浚, 파조)의 증손인 석회(碩淮)가 이곳으로 내려오고, 6남 부(溥)의 후손들도 내려오며 자연스레 16세기 초기부터 고령신씨 문중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현재에도 낭성면·가덕면·미원면 일원에 집성촌이 유지되고 있다.

청주의 고령신씨는 일명 산동신씨(山東申氏)라고 한다. 그것은 이들의 문중촌이 청주 상당산성의 동쪽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주 산동신씨는 고령신씨 가운데에서도 매우 번성한 문중을 이뤄 이중환이 『택리지(擇里志)』 충청도조에 “상당산성(上黨山城) 동쪽에 신씨 마을이 있다.”고 기술할 정도였다.

근대에 들어 산동신씨는 문중 개화의 길을 걸으며 많은 인재와 독립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그 가운데에서도 ‘산동삼재(山東三才)’라 일컬었던 신규식·신채호·신백우가 대표적 인물이다. 산동신씨 문중 청년들이 개화의 길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친 것은 서울에서 활동하던 신규식과 신채호가 고향에 내려와 근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실시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곳에는 1901년에 설립된 문동학원(文東學院)을 비롯해 덕남사숙(德南私塾)과 산동학당(山東學堂) 등이 있었는데, 이들 학교는 신규식·신채호 외에 고향에서 한학을 열심히 수학하던 신백우가 중심이 되어 운영하였다. 이른바 ‘산동삼재’가 힘을 합쳐 문중 개화의 문을 연 것이다. 청주의 고령신씨 문중은 1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인데, 신규식 형제와 신채호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신건식의 어린 시절, 부친 용우와 큰형 정식(廷植)은 중앙 정계에 진출해 있었다. 용우는 1887년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고, 중추원 의관을 지냈다. 그는 경제적으로도 부유하여 많은 토지를 지니고 있었는데, 춘궁기가 되면 광을 열어 인근의 빈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인심 좋은 양반이었다고 한다. 큰형 정식은 1885년 사마시에 급제한 후 검서관, 탁지부 재무관, 회계국장을 거쳐 참서관과 덕천군수를 지냈다.

그는 고향에서 형 규식이 세운 덕남사숙에서 공부하다가 아버지와 큰형을 따라 상경하여 무관학교 유년반을 다녔고, 관립한성외국어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그의 동창이 신익희라고 하니, 대략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수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형 규식이 관립한성한어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것과 비슷한 경로이다. 또한 정식의 큰아들 형호(衡浩)도 관립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하였으니, 개화 문중이 선택한 실용적 학문과 노선의 사례를 보여준다.

1908년 청주 고령신씨 문중은 종회를 열고 ‘영천학계’를 조직하였다. 학계의 설립 목적은 종중 재산으로 학교를 세워 문중 자제의 근대교육을 지향하고자 한 것이다. 그 주역은 상경해 있던 문중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이 학계는 총감·계장·부계장·총무·부장 등의 직임을 두고 있었는데, 총감은 관찰사 출신의 신태휴가, 계장은 신흥우의 부친인 신면휴가 맡았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용우가 부계장, 큰형 정식이 부장, 둘째형 규식이 총무를 맡는 등 그의 부형들이 주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는 그의 집안이 문중 개화를 이끌었으며, 그가 실용적인 근대 학문을 수학하고 독립운동의 길로 나가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2. 형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다

1911년, 그는 형 규식을 따라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곧 항저우에 있는 저장성 성립(省立) 의약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이는 후일 그가 중국군 의무 장교로 활동하는 기반이 되었다. 1912년 공부를 마치고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형 규식이 박은식 등과 함께 조직한 독립운동 단체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규식은 한국인으로는 중국의 신해혁명에 참가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문중 인물인 신채호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고 주도해 나갔다. 동제사라는 이름은 ‘동주공제(同丹共濟)’ 즉, 한마음으로 같은 배를 타고 피안(彼岸)에 도달하자는 뜻으로, 표면적으로는 우리 동포들의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국권회복이 그 진정한 목표였다.

동제사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신규식, 박은식, 신채호, 조소앙, 문일평, 김규식, 박찬익, 조성환, 신건식, 민필호, 김갑, 이광, 신석우, 한진산, 변영만, 정원택, 여운형, 선우혁, 서병호, 조동호, 정인보, 윤보선, 홍명희

동제사는 전성기 회원이 3백여 명에 이를 만큼 상하이 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동제사원들은 대부분 국혼론적 역사인식을 지닌 민족주의자들이었다. 그 이념적 바탕이 된 것은 대종교사상이었다. 신규식은 대종교 중광 때부터 신도가 되었다. 그는 박은식·신채호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대종교 행사를 주관하였다. 대종교도들은 매주 일요일에 모여 경배식을 가졌고 3월 15일에는 어천절(御天節), 10월 3일에는 개천절 경하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8월 29일의 국치일에도 모여 나라 잃은 슬픔을 함께 하고 조국 독립의 결의를 다졌다. 그는 형을 도와 대종교 행사를 주관하였다. 신규식은 국내에 있던 대종교총본사가 만주로 이전하자, 상하이에 서도본사를 설치하는 일을 주도하였는데, 응당 그도 형과 함께 참여하였다. 그의 딸 순호가 생전에 동제사 직인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이는 그가 형을 도와 동제사의 실무를 맡았음을 입증한다.

동제사는 효율적인 독립운동 추진을 위해 청년들의 교육과 유학 주선에 주력하였다. 1913년 프랑스조계인 명덕리에 설치된 박달학원은 동포 자제를 중국과 구미지역으로 유학시키기 위한 예비과정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신규식 등 동제사 지도부는 국내로부터 망명해 오는 청년들을 위해 중국어 강습소를 설치하였고, 많은 청년들의 중국 학교 입학을 주선하였다. 그가 김용준과 함께 상해광학교(上海鑛學校)에 입학하고, 정원택이 무상중학(務商中學)에 입학한 것은 동제사가 청년교육의 일환으로 추진한 교육 사업이었다.

한편 신규식은 동제사 조직 이후 신아동제사·박달학원·신한혁명당·대동보국단 등 상하이 지역에서 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을 조직하고 주도하였다. 따라서 그가 형을 보필하여 이들 단체에 참여하였을 개연성은 인정되나, 구체적 활동상이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는 않는다.

3. 중국군 장교가 되어 독립운동을 후원하다

신건식은 1921년 10월 31일 신의주에서 일경에 붙잡혔다. 그가 국내 잠입을 시도한 것은 국내정세 조사와 군자금 모금에 대한 형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내 활동을 위한 밀파로 추측된다.

당시 『독립신문』(1921. 12. 26)은 그의 입국과 피체와 관련한 중대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즉, 그가 국내에 밀파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상하이로 되돌아오기 위해 압록강 철교를 건너다 신의주에서 일경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였고, 검사국으로 이송 도중 암살되었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가 신의주경찰에 붙잡힌 것은 사실이었다.

그 까닭은 일제가 주목하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신규식의 동생이고 여행권 없이 압록강을 건너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신의주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움직이기 어려울 정도가 되자, 보석을 신청하여 풀려나 청주의 집으로 와 있으며 망명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또다시 청주경찰서에 연행되어 취조를 받고 감옥에 미결수로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1922년 그는 재차 상하이로 망명에 성공하여 형과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국내 활동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당시 그가 입국한 정확한 시기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상하이에서 함께 활동했던 동지 정원택의 『지산외유일지』에 1920년 2월 23일 신건식이 상하이로부터 입국하여 서울 모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자신의 상하이 망명과 관련한 대화를 나눈 기록이 확인된다. 따라서 그는 적어도 1920년 2월 이전에 입국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는 이 때 이전에도 입국하였던 적이 있었다. 『지산외유일지』에는 그가 1913년 2월 22일 김덕진 등 4인과 더불어 국내로부터 난징으로 돌아와서 형과 동지들에게 본국의 현황에 대해 말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11년 망명한 이후 몇 차례 국내를 왕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재차 망명한 직후인 1922년 5월 형 규식은 심장병과 신경쇠약으로 몸져누웠고, 급기야 9월 25일 서거하였다. 형을 잃은 비통함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그는 1925년 저장성 육군형무소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중국군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 형무소는 중국 군벌의 대립과 투쟁과정에서 발생한 정치범과 군사범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그는 군의관으로서 정성을 다해 의무 활동을 하였고, 중국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다. 이듬해에는 의무 순회 반장이 되어 장쑤성(江蘇省) 닝보(寧波) 등지를 순회하며 의료시설의 개선과 진료활동을 벌였다.

1928년에는 중국 정규군 장교인 중교(中校, 중령에 해당)에 임명되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후일 황포군관학교로 개칭) 외과주임이 되었다. 이 때 그는 난징에 거주하던 독립운동가와 청년 학생 등 한인 동포들의 숙식 경비를 지원하였다. 중국군 장교로서 비교적 넉넉한 급료를 받아 우리 독립운동을 후원한 것이었다. 그러나 1933년 과로와 교통사고 등으로 심신이 고단해지자 중국군 계급과 직책을 사임하고 입원 치료를 받았다.

4.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다

1937년경부터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는 난징시 교외에 있는 남기가(藍旗街) 1호에서 조소앙, 지청천, 홍진, 이광 등과 함께 생활하며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당시 그는 엄항섭과 함께 광복진선 선전부에 소속되어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그러던 중 난징이 일제에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11월 다른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난징을 탈출하여 창사로 이동하였다.

일제 자료에는 신건식이 1935년 신악(申岳)이란 별명으로 난징에서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여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에서 활동한 이동화(李東華)의 활동과 혼동한 것으로 그와는 무관한 것으로 판단된다.

신건식은 1939년 10월 개원한 제31회 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의원으로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는 양묵, 손일민과 3인이 상임위원에 당선되었으며, 이듬해 3월 13일 이동녕의 국장 복상위원회가 서무·의식·공사의 3개조로 편성되었을 때 최동오 등과 서무조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1941년과 1942년 10월 개최된 33회, 34회 의정원 회의에도 충청도의원으로 참석하였다.

1943년 3월 4일, 국무회의에서 각 부장 추천으로 차장을 선임하였는데, 그는 재무부 차장에 선임되었다. 곧이어 3월 30일 개최된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재무부 이재과장 업무까지 겸임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정부의 각료로 선임된 것이다. 6월 29에는 겸임하던 이재과 과장을 곧 사위가 될 박영준에게 넘겨주었다. 그는 이듬해에도 재무부 차장에 선임되었고, 사위가 된 박영준은 이재과 과장을 맡았으니 장인과 사위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재무부장 임명장
재무부장 임명장

그해 10월에 개원한 제35회 의정원 회의에서 분과위원을 선임할 때, 그는 최석순, 이시영, 이상만, 왕통 의원과 함께 재정·예산·결산을 담당하는 제3과 위원에 당선되었다. 제3과 위원으로서 임시정부의 재무와 예산, 결산을 담당한 것은 이듬해의 36회 의정원 회의에서도 계속되었다. 특히 1945년 5월 8일 수정된 원법에 의거하여 새로 분과위원을 투표할 때 그는 27표를 획득한 최석순에 이어 24표를 얻어 2위로 계속하여 제3과 위원에 선임되었다. 그는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서 예산과 재정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7회에 걸쳐 각종 의안을 공동 발의하는 등 왕성한 의정 활동을 펼쳤다. 그가 가장 힘써 공동 발의한 제안은 중국군사위원회가 요구한 이른바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의 폐지를 요구한 것이다. 1941년 11월 15일 중국군사위원회는 한국광복군을 통할 지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9개 준승을 요구하였다. 이는 광복군의 위상과 진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서, 매우 굴욕적인 것이었다. 이 준승은 임시정부의 통수권을 완전히 박탈함은 물론, 광복군이 한국 영토 안으로 진입한 이후에도 중국군사위원회의 군령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중국이 광복군의 창설은 인준하되, 임시정부와 단절시키고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켜 중국의 지원군으로 만들어, 광복 이후까지 예속 하에 두겠다는 것으로 광복군의 자주성을 크게 해치는 것이었다.

중국군사위원회의 준승이 통보되자, 임시정부는 수용 여부를 둘러싸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1942년 11월 19일 개최된 제18차 국무회의에서 중국 측의 제의를 수락하기로 결정하였다. 임시정부로서는 분통 터지는 일이었으나, 중국의 승인과 협조 없이 광복군의 조직과 운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픔을 참으면서 접수한다는 의미의 ‘인통접수(忍痛接受)’는 당시 임시정부의 9개 준승 수용에 대한 심경을 잘 대변해 준다.

그가 1942년 10월 28일, 16명의 동료 의원과 공동 발의한 「광복군에 관한 건」은 9개 준승을 취소하고 ‘절대적으로 국제간 평등적 입장’에서 우호적으로 적극 원조를 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듬해 10월 14일, 5인 의원과 함께 다시 9개 준승의 취소 교섭을 추진할 것을 제안하였고, 11월 29일에도 6인 의원과 수정 제의하는 등 끈질기게 취소를 요구하였다.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의 후원을 받아 9개 준승의 취소를 위한 교섭에 나섰다. 여러 차례의 교섭 끝에 1944년 8월 10일, 중국은 김구 주석에게 공함을 보내 9개 준승을 취소하고 한국광복군을 임시정부에 직속케 한다고 통보해 왔다. 그로부터 8개월 후인 1945년 5월 1일 새로운 군사협정인 ‘원조한국광복군판법(援助韓國光復軍辦法)’이 성립되었다.

이로써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은 자주성을 회복하게 되었다. 광복을 불과 3개월 남긴 시점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지만, 대중국 외교의 중요한 성과라는 점에서 의의가 적지 않다. 신건식이 이처럼 중요한 의안을 끈질기게 공동 발의하여 성사시킨 것은 그의 임시의정원 의정 활동 중에서 대표적인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그는 27명 의원 공동 명의로 「임시정부 승인에 관한 건」(1942. 10. 28)을 발의하였다. 이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20여 년이 넘었으나 국제사회로부터 아직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으니, 최단 기간 내에 중·미·영·소 등 연합국 각 정부에 정식으로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요구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과 미국을 상대로 국제적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연합국 열강들이 합의에 의해 한국을 ‘국제 공동 관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국제사회가 한국을 공동 관리한다는 것은 즉각 독립을 열망하는 임시정부의 의도와는 크게 어긋나는 결정이었다. 이에 그를 비롯한 대다수의 의원들은 연합국 열강에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도록 제안한 것이었다.

이 같은 활발한 의안 발의 활동과는 달리, 의정원 회의에서 발언한 내용은 1945년 4월 28일 회의 때 조시원의 예산안 관련 동의에 대해 오청(五請)한 기록이 유일하다.

5. 임시정부 요인들을 보살핀 오건해

오건해(吳健海)는 1894년 2월 29일 오우석(吳禹錫)과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보성이며 조부는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형학(亨翯)이다. 그 밖의 인적사항에 대하여는 호적부조차 이름도 없이 ‘오씨’라고만 기재되어 있는 등 자료가 없어 알 수 없다. 그나마 호적부와 『고령신씨대동보』의 생몰년도가 다른 등 정확하지도 않다. 다만, 청주 인근의 현도면 등지에 보성이씨 집성촌이 많아서 그중의 어딘가가 친정일 것이고 인접한 가덕면에 거주하던 신건식에게 시집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초 신건식은 고향에다 처자를 두고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었다. 그들이 결혼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딸 순호가 1922년 1월생이다. 그녀의 회고에 의하면 고향에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라다가 4세가 되던 해 모친의 등에 업혀 상하이로 가서 가족이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한 자료에는 오건해가 중국에 당도한 시기가 1926년 3월로 되어 있으니, 순호의 회고가 정확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임시정부의 안살림과 독립운동가들의 수발을 드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사위 박영준은 장모를 “독립운동가치고 오건해 여사의 음식을 먹어 보지 못한 사람은 독립운동가가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오건해 여사는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 평생을 보낸 분”으로 회고하였다. 1937년경에는 병약해진 이동녕의 병환 치료에 정성을 다했고, 만주에 가족을 두고 홀로 충칭으로 와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박찬익의 뒷바라지에도 힘썼다.

신건식(왼쪽)과 박찬익(오른쪽)
신건식(왼쪽)과 박찬익(오른쪽)

박찬익은 1940년 화평로 청사의 화재로 머리를 다쳤을 때와, 연화지 숙소가 일제의 폭격으로 무너져 어깨를 부상당했을 때 오건해와 신순호의 간호로 회복될 수 있었다. 박찬익은 신규식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신건식도 박찬익과 의형제를 맺고 ‘형님’으로 부르며 함께 활동하였는데, 후에 사돈이 된 뒤에도 호칭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돈으로 결합한 것은 이런 인연이 작용한 결과이다.

특히 그녀가 김구 주석을 봉양한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 1938년 5월 6일, 김구가 창사에서 총격을 당해 사경을 헤맨 이른바 ‘남목청사건’ 때의 일이다. 이날 조선혁명당 본부인 남목청(楠木廳) 9호(현재는 4호)에 조선혁명당에서 이청천·유동열·현익철 등이, 한국독립당에서 조소앙·홍진·조시원 등이, 한국국민당에서 김구·이동녕·이시영 등이 참석하여 통합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조선혁명당 간부 이운한이 회의장에 뛰어 들어 권총을 난사하였다. 한인 독립운동 세력 간 갈등의 결과로 불행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현익철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김구·유동열·이청천이 총상을 당하였다. 중상을 입은 김구는 즉시 상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김구의 상태를 진찰한 중국 의사는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응급처치도 하지 않은 채 문간방에 방치해 두었다. 김구의 장남 인과 안공근에게 사망 통지를 하였고, 그들은 백범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창사로 급히 달려왔다.

그런데 김구가 기적적으로 소생하였고, 응급 치료가 진행되어 회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건해는 김구가 퇴원 후 요양할 때 식사 등의 봉양을 맡았다. 김구는 충칭시기 홀로 시내에 머물며 임시정부를 이끌었는데, 이때에도 거의 모든 숙식을 오건해가 맡아 보살폈다고 한다.

그녀는 단지 독립운동가의 뒷바라지에만 그치지 않았다. 1940년 6월 17일, 충칭에서 한국혁명여성동맹이 창립되자 이에 참가하였고, 1942년부터 한국독립당원으로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한국독립당 환국 기념(1943. 11. 03)
한국독립당 환국 기념(1943. 11. 03)

6. 독립운동의 명문 가문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그들 자신이 독립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딸 신순호와 사위 박영준, 형 신규식과 조카 신형호(큰형 정식의 아들), 사돈 박찬익이 모두 독립운동가이다. 신규식의 사위는 민필호이고, 민필호의 사위는 김준엽으로 옹서(翁壻, 장인과 사위)가 독립운동가로 연계되는 대표적 사례이다.

우리 독립운동사에는 이처럼 부부·부녀·옹서·형제·조손·숙질·사돈이 독립운동가로 구성된 집안이 가끔 보인다. 이는 식솔을 데리고 해외로 망명하여 장기간 머물며 온 식구가 독립운동을 펼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가 가문끼리 통혼권을 형성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특징적 사례를 예시하는 것이다.

형 규식은 1898년 관립한어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 9월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도중에 그는 잠시 귀향하여 문동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으나, 다시 상경하여 1903년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진위대와 시위대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의병 거사를 도모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음독자결을 기도하다가 오른쪽 눈의 시신경을 다쳤다.

그가 ‘흘겨보다’는 의미의 ‘예관(睨觀)’이라고 스스로 호를 붙인 것인 여기에서 유래한다. 1910년 국치를 당하자 이듬해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참가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노력의 결과에 힘입은 바 크다. 1922년 9월, 무정부 상태에 빠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혼란을 비통해 하며 순국할 때까지, 그는 오직 조국광복을 위한 투쟁으로 일생을 초지일관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동생이자 막내인 동식(東植)도 향리에서 임시정부 조사원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한편 규식은 망명할 때 동생 건식과 함께 형 정식의 아들인 형호도 대동하였다. 형호는 그 후 미국으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네브래스카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 교사를 지냈고, 『만세보』 주필로 활동하였으며, 대한인국민회와 구미위원부 통신원 및 동지회에 참여하며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을 펼쳤다 (2011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딸 순호는 4세 때 상하이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함께 살았으나,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임시정부가 유랑의 길을 떠나자 그녀 가족도 함께 고난의 장정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였다. 그런데 학교 친구들은 그녀가 한국 사람이란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워낙 말이 없기도 하였으나, 만일 ‘망국노’란 사실이 알려지면 중국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까봐 일체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8년 11월부터 약 6개월간 류저우[柳州]에 머물렀다. 17세가 된 그녀는 이곳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에 몸담기 시작하였다. 이 공작대는 노태준을 단장으로 하여 중국인을 상대로 선전물 배포·횃불시위·가두행진·연극공연 등을 펼쳐 우의를 다지고 독립운동을 홍보하고자 한 청년 단체였다. 청년공작대는 1939년 3월 4일 일본군과 전투 중 부상당한 중국군을 위문하는 공연을 펼쳐 큰 갈채를 받기도 하였다.

훗날 남편이 되는 박영준은 상하이 시절부터 알던 사이였으나, 공작대에서 동지가 되어 함께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이후 신순호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군되자 여군으로 입대하여 총사령부에서 근무하였고, 1942년에는 부친을 도와 임시정부 생계위원회 회계부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청년 박영준은 신순호에게 여러 차례 구애를 하였다. 더구나 박영준의 부친 박찬익이 충칭으로 온 1940년부터 화평로에서 신건식 가족과 함께 거주하였다. 1942년 회수구로 이사하였는데, 이때에도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 그러니 계속해서 순호네 식구와 함께 살며 더욱 사랑을 키워갔던 것이다. 순호는 처음에는 박영준에게 관심이 없었으나, 그가 광복군에 입대하여 충칭을 떠나게 되자 청혼을 받아들였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1943)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1943)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식은 1943년 12월 12일 임시정부 청사 대례당에서 열렸다. 당시 충칭에 거주하던 한인은 4백여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한인끼리의 결혼은 다소 드문 일이었다. 결혼식장인 임시정부 강당은 백범 김구를 비롯한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박찬익은 평소 입던 군복을 깨끗이 빨아 입고 입장하였고, 신순호는 중국식 치파오를 새로 맞춰 입고 입장하여 갈채를 받았다. 박영준은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의 결혼식 날을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기뻐하던 순간”이라고 회고하였다.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증서
신순호와 박영준의 결혼증서

결혼식은 외무부장 조소앙의 주례로 진행되었다. 결혼증서에는 김구가 주례로 되어 있으나, 김구는 자신의 삶이 순탄치 않다고 하여 주례를 잘 서지 않았다고 한다. 조완구, 김원봉, 김성숙 등 원로 독립운동가들의 축사가 이어졌다. 조완구는 “비록 성은 다르지만 친자식이나 다름없는 두 사람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하였다. 하객 모두가 같은 심정으로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주었다. 이어서 박찬익이 단상에 올라 답사를 하였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음성으로 “가정을 가져서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두었지만 자식 놈의 결혼식에 참석해 보기는 오늘이 처음이고 또 마지막이 됩니다.”라고 말하였다. 신랑 박영준은 이 말을 들으며 만주에 두고 온 어머니와 형제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신순호·박영준 부부는 동지로서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부친 신건식과 시부 박찬익이 한인 동포의 귀국 문제를 중국과 외교적으로 처리하기 위해 난징에 설치한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의 임무를 맡았고, 남편도 그 업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모와 시부, 남편과 함께 난징에서 독립운동의 마지막 단계인 교민의 귀국 문제 업무를 담당하다가, 1948년 4월에서야 귀국할 수 있었다.

주화대표단 귀국기념사진
주화대표단 귀국기념사진

귀국 후 박영준은 국군 장교로 입대하여 6·25 때 정훈감으로 활약하였고, 1960년 육군 제9사단장을 지내고 소장으로 진급한 뒤 전역하였다. 이후 한국전력주식회사 사장을 역임하였고, 광복군동지회 회장과 독립유공자협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고, 2000년 별세하였다. 그녀 또한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1977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받았고, 2009년 별세하여 남편과 함께 국립현충원에 영면하였다.

사위 박영준은 장인 신건식을 “성품이 강직했던 형 예관과는 달리 삼강(신건식의 호)은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마음이 넓고 인자했다”고 회고하였다. 신건식·오건해 부부는 아들이 없어 환국 후 큰형 정식의 아들 우호(羽浩)를 양자로 입적하였으나, 딸 순호의 집에서 기거하며 함께 생활하였다. 그런데 신건식은 일제강점기에 자신을 고문하였던 친일인사가 해방된 조국의 국회의사당 문지기가 되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충격으로 서울시장을 맡아 달라는 정부의 제의도 거절하고 정신적 고통을 감내하며 살다가 1963년 12월 딸 순호의 집에서 별세하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가덕 인차리 생가가 내려다보이는 선산에 안장되었다가 2004년 서울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였다(애국지사-189). 오건해는 남편이 떠난 그달에 곧바로 남편의 뒤를 따라 별세하였다.

정부는 이들 부부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신건식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오건해는 201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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