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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상덕
채상덕
, (1862) ~(1925)
, 대통령장
(1995)
너는 아직 어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독립군이 되어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 채상덕 선생이 제자인 이수흥에게 남긴 유언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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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910년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경술국치 전후 국내에서 활동하던 많은 의병들은 서북간도 또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했다. 미약하나마 국권이 남아있을 때는 국내에서 싸우며 일제가 침략해 올 수 없도록 방어해야 했으나,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이를 회복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전략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절한 지역을 서북간도 및 연해주로 판단했던 것이다. 심호 채상덕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출신배경 및 의병투쟁
채상덕은 1862년 황해도에서 출생했다. 그의 출생지와 시기는 자료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1925년 생산된 일제의 보고문서(大正 15年 1月 12日, 「統義府의 現狀 및 寬甸地方不良鮮人」)에는 1862년생(일제의 다른 한 자료는 1863 ~ 4년생으로 추정하는 것도 있다)으로 충청도가 본적지인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문일민의 「한국 독립운동사」(애국동지원호회, 1956)와 김승학의 「한국독립사」(독립동지회, 1956)에는 출생 시기는 나오지 않고 출생지만 황해도로 나온다.
그리고 남만주에서 채상덕을 스승으로 섬기며 운명할 때까지 따른 후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다, 일제에 피체되어 순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部) 특무정사 이수흥(李壽興)1) 또한 그의 출신지를 황해도라 하고 있다. 이들 자료를 비교해볼 때 제자가 되어 임종 시까지 함께한 이수흥의 진술과 한국 측 두 자료가 타당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명은 같은 음이지만 한자만 다른 채상덕(蔡相悳)을 사용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한국 침략을 시작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은 1905년 마침내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압해 외교권을 빼앗아 갔다. 이는 국제사회에 한국이란 존재를 인정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 같은 상황이 벌어지자 전국각지에서 애국지사들이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의진을 구성해 일어났다. 개항을 전후한 시기부터 위정척사론자로서 외세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온 힘을 쏟았던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도 마침내 소극적인 상소투쟁을 그치고, 1906년 6월 4일 전라북도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6월 4일 의병을 일으키기 전까지 최익현은 여러 가지 준비 작업을 하였다. 이 때 최익현의 문인이었던 채상덕은 스승의 명을 받고 1906년 1월 충남 예산의 곽한일(郭漢一)과 정두화(鄭斗和)에게 가 의병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동의한다는 의사가 담긴 답신을 받고 돌아왔다. 이어 3월 초에는 또다시 스승의 서한을 들고 이재윤(李載允)과 이남규(李南珪)를 찾아갔다. 서한의 내용은 이들 두 사람에게 북경(北京)으로 가 청나라의 구원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제자 및 동조자들의 이 같은 조력을 받으며 일어난 최익현 의진은 태인에서 시작해 정읍, 내장사, 순창을 거쳐 전남 곡성까지 진출하였다. 대표적 애국 관리이자 최고의 학자로 전국에 알려진 최익현이었기에 충청과 호남지역에서 애국인재들이 몰려들어 시작부터 큰 기세를 올렸고, 한 때는 900명에 이르는 의진을 구성하기도 했다. 10일도 되지 않은 기간에 정읍·순창·곡성군을 접수하며 기세를 올렸다. 이에 일제는 이 같은 최익현 의진에 촉각을 곤두세워 공격을 서둘렀다. 일본군 1개 중대를 전라도 광주로 급파했고, 한국정부를 압박해 전주와 안동의 진위대까지 동원시키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주와 남원의 진위대로 하여금 순창에 진영을 치고 있던 최익현 의진을 공격토록 했다.
6월 11일, 진위대가 공격해 오자 의병장 최익현은 처음에는 일본군으로 판단해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명했으나 한국의 관군임이 확인되자 반격을 멈추도록 했다. 동족상잔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투태세를 풀자 진위대는 의진의 해산을 요구했다. 이에 최익현은 서로의 처지가 다르다고 동족끼리 박해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지를 펴며, 의병들에게 해산을 명했다. 최익현은 의진이 해산되고 끝까지 남아있던 낙안(樂安)군수를 역임했던 임병찬(林炳瓚)을 비롯한 12명의 부하와 함께 피체되고 말았다. 피체된 최익현은 임병찬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폐되었다가 이듬해 1월 1일 옥중 순국했다. 의진 활동기간이 짧아 큰 활동을 펼칠 기회는 없었지만, 채상덕은 스승 최익현을 도와 의진 구성에 최선을 다해 활약했다.
독립의군부 활동
대마도의 유배에서 돌아온 임병찬은 1910년 8월 29일 나라가 일제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국치를 당했지만 이후에도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1912년 광무황제의 밀칙을 받고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도 순무대장(巡撫大將)에 임명되어 비밀리에 격문을 돌려 동지를 규합했다. 임병찬은 우선 호남지방의 유생 및 의병들과 협의하며 조직을 확대시켜갔다. 그리고 1913년 1월에는 아들인 임응철(林應喆)을 서울로 보내 전 참판(參判)인 이인순(李寅淳)을 비롯해 이명상(李明翔)·곽한일·전용규(田瑢圭) 등과 전국 조직망을 갖출 수 있는 방안을 협의해 오도록 했다. 그 사이 자신은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완료했다.
이러한 노력 끝에 독립의군부는 서울·강화·수원·개성·광주(廣州)에 5영(營)을 설치하고, 각 도(道) 및 군(郡) 이하까지 하부 조직망을 구축하는 편제를 만들었다. 이 편제에 의해 1913년 3월 총대표와 도대표가 선정되었는데, 채상덕은 임병찬·민정식(閔正植)·이명상 등 13명의 총대표 중 한사람으로 선임되었다.
독립의군부는 일제의 내각총리대신과 조선총독을 비롯한 침략수뇌부에 한국을 침략한 부당성을 깨우치는 서한과 함께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고 이에 대한 반응이 없을 경우 대규모 의병부대를 구성해 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1913년 5월 국권반환요구서와 부당성을 일깨우는 서한을 보내는 1차 활동을 전국의 조직망에서 동시에 실천하기로 결정하였다. 그와 동시에 전국 360여 곳에 설치된 전화로 거의 같은 시간에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전화를 총독부로 걸기로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5월 23일 대원 김창식(金昌植)이 일경에 피체되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의군부의 조직과 계획을 자백하면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임병찬을 비롯한 많은 간부와 대원들이 피체되고 말았다.
만주로의 망명과 대한통의부 설립
이 같은 결과로 독립의군부마저 와해되자 채상덕은 국내에서의 활동으로는 큰 성과를 내기 어렵다고 판단해 압록강을 넘어 남만주(南滿洲)로 망명했다.
1920년 10월 약 2만 명에 이르는 일본군 병력을 서북간도로 침입시킨 경신참변(庚申慘變)이 발생했고 이후 약 6개월여 동안 지속되어 1921년 4월부터 일본군들이 물러갔다. 일본군들이 물러간 후,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파괴된 독립군기지와 한인사회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1921년 후반부터 독립운동세력의 통합운동을 일으켰다. 1922년 봄,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광한단(光韓團) 등의 대표들이 환인현(桓仁縣)에 모여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결성했다. 통군부는 기존의 각 단체를 해체하고 하나로 합친 통합 독립운동단체였다.
통군부가 성립되면서 채상덕은 이 단체를 이끌어갈 최고 책임자인 총장에 선임되었다. 비로소 남만주 지역 독립운동계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남만주 지역 최초 통합 단체의 책임자로 추대된 것을 보면, 도만(渡滿) 이후 통군부가 성립될 때까지 그의 활동이 미미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밑으로 통군부의 조직은 비서장 고활신(高豁信),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 군사부장 이천민(李天民), 교육부장 김동삼(金東三), 실업부장 변창근(邊昌根),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경무감 전덕원(全德元) 등이 맡았다.
채상덕 통의부 포고문
1차적인 통합을 이룬 통군부는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와 그 후원대를 조직해 더 폭넓은 통합운동을 계속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통군부에 참여하지 않은 단체의 대표들까지 참가시켜 1922년 8월 23일 환인현 마권자(馬圈子, 현 향양[响陽])에서 남만한족통일회의를 개최했다. 이 때 참가한 각 단체는 관전동로한교민단(寬甸東路韓僑民團)·대한광복군영(大韓光復軍營)·대한정의군영(大韓正義軍營)·대한광복군총영(大韓光復軍總營)·평안북도독판부(平安北道督辦府) 및 대한독립단과 서로군정서였다. 이들 단체의 대표들은 7일간에 걸친 회의 끝에 기존의 각 단체를 해체하고 새로운 통합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키기로 합의했다.
통의부가 탄생하면서 기존의 통군부는 자연 소멸되었다. 채상덕은 통의부의 부총장에 선임되었다. 총장은 통군부 시기 교육부장이었던 김동삼이 맡았다. 통의부는 항일무장활동에 주력했던 기존의 독립군단과는 달리 항일활동과 함께 경신참변으로 파괴되고 흩어진 이주한인사회를 복원해야 할 임무까지 주어졌다.
따라서 총장과 부총장 밑으로 행정부서인 민사·재무·학무·권업·교섭·참모·교통·법무·군사 등을 설치하고, 관할지역 내 한인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사법기관인 사판소 및 한인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의회를 구성해 자치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중앙조직을 편성했다. 그리고 별도로 의용군을 편성해 무장활동을 추진했다. 이 중앙조직은 관전현 하루하(下漏河)에 두고, 남만의 각 지역에 흩어져 형성된 한인사회에는 총관(總管)·구(區) 등의 지방조직을 설치해 중앙조직과 연계시켜 한인의 삶을 지원하고 이끌었다.
한편 통의부에 가담한 단체들 간에는 신봉하는 이념이나 노선에 얼마간의 차이가 있었다. 특히 의병출신 인사들이 주축이 된 대한독립단의 경우는 광복된 조국의 정치체제를 왕정(王政)으로 하고자하는 복벽주의(復辟主義)를 신봉하고 있어, 공화주의를 지향한 다른 단체와는 확연히 다른 이념을 가졌다. 이 이념의 차이가 통합 후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남만한족통일회의 시 참가대표들은 향후 통합단체에서는 구성원 모두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념이나 노선은 포기한다는 약속을 했었다.
약속은 했었지만, 성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이념적 갈등이 일어나고 말았다. 대한독립단 출신으로 통의부 성립에 크게 기여한 복벽주의자 전덕원과 신민회 계열 인사로 1920년 말 도만해 남만주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계몽활동을 펼치고 있던 공화주의자 양기탁(梁起鐸) 간에 불화가 일어난 것이다. 성립 초, 양기탁은 통의부의 직책을 맡지 않았다, 하지만 통의부 내에는 그를 따르는 인사들이 많았다. 이 두 사람의 불화는 복벽과 공화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커졌고, 무력충돌까지 발생하고 말았다.
양측은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1923년 초 복벽주의계열 인사들이 통의부를 이탈해 대한의군부(大韓義軍府)라는 독립군단을 성립시키고 말았다. 의병출신인 채상덕도 부총장의 직책을 버리고 전덕원·김평식(金平植)·오완하(吳完夏) 등과 함께 통의부를 나와 의군부에 가담했다. 통의부를 이탈하고 의군부를 만드는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전덕원은 최익현 의진에서 그와 함께 활동한 인물이었다. 따라서 채상덕이 통의부를 이탈하고 의군부에 가담한 것은 개인의 이념적 문제도 있었지만, 인간적 관계도 작용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의군부에서 만주독립운동의 통합과 진로를 설계
의군부가 성립되자 채상덕은 총책임자인 총재에 추대되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군무부장 전덕원, 정무부장 김유성(金有聲), 사한장(司翰長) 박홍제(朴弘濟), 재무부장 이병규(李炳奎), 종교부장 성보운(成寶運), 경리부장 조대능(趙大能), 참모부장 박일초(朴日楚) 등의 간부들이 임명되었다. 본부의 근거지는 통의부와 같은 관전현에 설치되었다.
1923년 여름, 남북만주 독립운동계 지도자 58명이 남만주 화전현(樺甸縣)에 모여 만주독립운동계의 통일과 진로에 대해 회의를 가졌다. 1923년 8월 15일부터 11월 3일까지 2개월 반이 넘는 기간 개최된 대장정의 회의였다. 채상덕 또한 참여했고, 통의부를 비롯 광복단·맹호단(猛虎團)·서로군정서 등 서간도 독립군단 대표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국민회(國民會)·적기단(赤旗團) 등 북간도 및 북만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군단과 멀리 상해에 설치된 중한호조사(中韓互助社)에서도 대표가 참가한 모름지기 중국 내 한국 독립운동자들 대부분이 큰 관심을 보이며 개최된 대규모 회의였다.
서로군정서 보도기사
회의의 주제는 중국 내 한민족의 교육과 경제 부양, 각지에 설치된 청년단의 발전 방향, 독립운동을 위한 군사와 외교추진 방향 등이었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논의된 의제는 남북만주 각 단체와 군사기관을 통합시킨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대표자들은 각 지역에서 그동안 활동한 경험과 체득한 지식을 모아 장기간 논의한 끝에 ‘만몽신당(滿蒙新黨)’이라는 통일체를 구성하기로 합의했다. 이 단체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활동지를 몽고 지역까지 확대해 조국 독립 달성을 위한 통일기관을 결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실천하기 위해 합의된 세부사항은 ‘① 내몽고의 한 지역에 식민지를 설정한다. ② 몽고왕과 교섭해 대규모 토지를 빌려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그 안에 사관학교를 세워 15세 이상 25세 이하의 청년들을 모아 군사교육을 시킨다. ③ 화전현에 만몽신당 중앙부를 설치하고 매년 1회의 집회를 가진다. ④ 조국의 독립을 도모할 수 있는 신사상의 국가(통일체 – 필자 주)를 만든다. ⑤ (독립된 – 필자 주)새로운 국가에서는 전인류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고, 한국문명을 세계에 발양(發揚)시킨다. ⑥ 세계개조를 근본주의로 하며 그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⑦ 서울에 본부를 설치해 일본측의 정보를 수집한다.’ 등 이었다.
참가 대표들은 이 같이 합의된 내용을 이번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독립운동계 대표들에게도 보내 동의를 이끌어 내 본격적인 업무에 착수하기로 결의했다. 그리고 참가 대표들과 여건상 불참한 대표들까지를 망라해 만몽신당의 조직을 편제하고 책임자들을 선임했다. 조직을 이끌어 갈 총책임자인 총리는 이범윤(李範允)이, 부총리는 김성극(金星極)이, 비서에는 채상덕과 윤정현(尹貞鉉)을 선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과 노백린(盧伯麟)·구춘선(具春先) 등 16명은 고문으로, 실무부서인 서무·재무·선전·교통·사교·교육·노동·심사(審査)·군사·의사(議事) 등의 책임자들은 국내외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계 중축인물들로 합의하여 임명하였다.
채상덕은 이 같이 독립운동계를 총망라한 거대한 기구에서 비서라는 상급의 중책을 맡았다. 이는 그가 주 활동지인 만주에서뿐만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계 전체에서 큰 명망을 얻고 있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이 만몽신당의 추진상황이나 활약상은 자료의 한계로 인해 정확히 밝히기 어려우나, 망국의 민족지도자들이 남의 나라 땅을 빌려 식민지적 국가를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의군부를 성립시킨 지 얼마되지 않은 시기, 채상덕은 의기충천한 19살의 청년 이수흥(李壽興)을 만났다. 경기도 이천 출신인 이수흥은 독립군이 되고자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로 와 김용보(金龍甫)라는 독립군 간부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단신의 체구였지만 굳은 의지의 소유자라는 것을 알아보고 독립군 인재로 키우고자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제자로 삼았다. 함께 있는 동안 이수흥이 자신과 함께 최익현 의진에서 활동했던 동지 이일영(李日榮)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다.
채상덕은 더욱 정성을 들였고, 제자 이수흥 또한 스승의 노력에 부응해 훌륭한 독립군 인재로 커갔다. 1923년 7월 채상덕은 이수흥을 독립군으로서 더욱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북만주 액목현(額穆縣)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로 보냈다. 이 학교는 김좌진(金佐鎭)이 설립한 사관학교였다. 이수흥은 이듬해 2월까지 신명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채상덕이 있는 남만주로 돌아왔다. 그가 돌아오자 채상덕은 집안현(輯安縣)에 본부를 둔 참의부에 가입시켰다.
의군부 인사들이 빠져 나오고 난 뒤 통의부는 1923년 후반부터 항일무장투쟁을 주된 노선으로 주장한 채찬(蔡燦, 이명 백광운[白狂雲])·김원상(金元常) 등을 주축으로 한 의용군 일부가 또다시 이탈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들은 마침내 1924년 상반기 통의부를 빠져나와 임시정부 산하의 독립군단인 참의부를 성립시켰다. 참의부 성립 당시 의군부의 일부 독립군들도 가담하였다. 의군부와 참의부가 통합한 것은 아니지만 개인별로 참의부로 옮겨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의부 소속이었다가 참의부 대원이 된 인물들, 또 의군부에 있다 참의부로 옮겨간 인물들 모두 채상덕의 부하들이었다. 통의부 부총장, 의군부 총재로 활동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항일무장투쟁을 노선으로 한 참의부는 용감하고 민첩한데다 독립정신이 강한 이수흥이 활동하기에는 최적의 독립군단이었다.
참의부 참변과 순국
그런데 참의부는 출범한지 약 1년이 채 못 된 1925년 3월 16일 큰 참변을 당하고 말았다. 한국의 초산 대안인 집안현 고마령(古馬嶺)에서 5개 중대의 간부를 비롯한 대원들이 모여 군사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참의부의 주요인사들이 대부분 모인 회의였다. 이 회의를 밀정 이죽파(李竹坡)란 자가 일제의 초산경찰대에 밀고하였다. 첩보를 입수한 초산 일본경찰대는 대병력을 침입시켜 참의부 회의장소를 기습 공격했다. 일본군이 기습해 오자 참의부 측도 대항해 공방전을 펼쳤지만, 역부족이 되어 참의장 최석순(崔碩淳) 등 29명이 전사하고, 많은 인원이 부상을 입고 피신해야 했다.
채상덕 참의부 활동 보도기사
이수흥도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했으나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 사실을 스승인 채상덕에게 알렸다. 그 많은 부하가 전사하고 중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채상덕은 비탄에 빠졌다. 우선 자식 같은 제자 이수흥을 병원에 입원시켰다. 약 한 달간 치료를 받은 이수흥은 몸이 완쾌되지는 않았으나 어느 정도 회복되어 돌아왔다.
아직까지 비통함에 젖어있던 채상덕은 제자를 앞에 앉혀놓고 “너는 아직 나이는 어리되 의지는 굳은 청년이니 ○○○○○○○○○○(조선의 독립운동을 할 수 – 필자 주) 있는 터라 내 일찍부터 내 뜻을 본받을 사람을 구하였으되 아직 얻지 못하였다가 너를 보매 버릴 수 없으니 ○○○○○○(독립군이 되어 – 필자 주)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이어 “기회를 엿보아 거사를 하되 조선인의 결함인 단체적 훈련의 부족과 배반자의 속출로 단체적 행동은 할 수가 없으니 언제든지 안○○(중근 – 필자 주)을 본받아 개인적 행동을 하여 ○○○○○○○(나라를 독립하라 – 필자 주)”는 훈계를 하였다.
部下의 慘禍를 引責한 義軍府總裁, 蔡相德 長嘆 一聲에 飮毒自決, 부하들이 죽엇는데 나 혼자 살아갈 면목이 업다고 리수흥을 불러안치고 최총재는 음독자살로 인책
그리고 통화현(通化縣) 강산이도구 회당촌(崗山二道溝會堂村) 김운용(金運用)에게 맡겨 두었던 권총 두 자루를 찾아 쓰도록 했다. 이 말을 마치고 한참을 통곡한 채상덕은 “내 부하가 다 죽었으니 나 혼자 살아있을 면목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독약을 마시고 자결 순국하였다.
스승인 채상덕이 운명하자 이수흥은 주변의 가장 양지바른 터를 골라 장사를 지냈다. 그리고 남아있는 스승의 가족을 약 1년간 보살피다가 1926년 4월 중순 김운용에게 권총 두 자루와 탄약 980발을 받아가지고 국내로 진입해, 서울 동소문파출소, 이천 백사면사무소 및 주재소 등을 기습 공격하는 유격전을 펼쳤다.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이 같은 활동을 벌여 침략자 일제를 응징한 이수흥은 1926년 11월 6일 피체되어 사형을 언도 받고 1929년 2월 27일 순국했다.
심호 채상덕은 일제가 무력을 앞세워 조국을 침략해오자 의병이 되어 맞섰고, 망국 후에는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가 침략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광활한 대지를 누빈 항일무장투쟁의 표상이다. 대한민국정부는 1995년 심호 채상덕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ㆍ「大韓統義府中央議會議決文公布」(臨時報 第79號), 大正 12年 2月 21日
ㆍ「不逞鮮人ニ關スル報告ノ件」, 大正 12年 3月 26日
ㆍ「大韓義軍府職員簿」(臨時報第260號), 大正 12年 5月 28日
ㆍ「南滿統一派ノ通告文配布ニ關スル件」, 大正 12年 7月 23日
ㆍ「大韓統義府ノ現勢ト在住鮮人ニ對スル對策」, 大正 12年 10月 4日
ㆍ「樺甸縣ニ於ケル南北滿洲不逞鮮人團統一大會經過報告ノ件」, 大正 12年 12月 29日
ㆍ「不逞鮮人ノ行動ニ關スル件」, 大正 13年 1月 28日
ㆍ「吉林附近ノ鮮人情報」, 大正 13年 1月 30日
ㆍ「不逞鮮人逮捕ニ關スル件」, 大正 13年 2月 8日
ㆍ「大韓義軍府總長蔡相德及仝軍事部長全德元裁判」, 大正 13年 3月 5日
ㆍ「統義府ノ現狀及寬甸地方不良鮮人名簿ニ關スル件」, 大正 14年 1月 12日
ㆍ「風塵中의 22年, 豪膽不敵李壽興」(1, 2, 3), 동아일보 1926. 11. 18, 11. 19, 11. 20
ㆍ「이수흥 신문조서」(제 2회)(제 3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ㆍ박민영, 「敬菴 郭漢紹의 생애와 항일투쟁 – 崔益鉉擧義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 『한국근현대사연구』 77집, 2016년 여름호.
각주
1) 이수흥은 1920년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사형 순국하였다. 2016년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었다.
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72839주소복사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