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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대위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95년

주요공적

1905년 공립협회 및 1909년 대한인국민회 참여

1918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회장

1919년 대한독립선언 39인 중 1인으로 참여

1921년 구미위원부 조직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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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위

이대위 , 1878 ~1928 , 독립장 (1995)

이대위는 1910년대 미주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대위가 그 모든 일에 사사로움을 버리고 자신을 바쳐서 일하여, 누구보다도 미주 한인사회에 공적이 많았음이 여러 자료에서 확인된다.

머리말

이대위라는 독립운동가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다. 어디서 어떤 활동을 한 분이었을까. 막상 독립운동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분 가운데 이대위라는 이름을 찾아보면, 두 분이 있다. 두 분 모두 평안도 출신으로 기독교인이고, 미국에서 활동한 바 있어 혼동하기 쉽다. 우리가 찾는 이대위(李大爲, 1878-1928)는 강서 출신의 목사로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과 신한민보사 주필을 역임한 분이다. 다른 이대위(李大偉, 1896-1982)는 용천 출신으로 중국과 미국에 유학하고 일제강점기 흥사단과 YMCA에서 활동하며 기독교 사회운동을 이끌었고, 해방 이후 군정청 노동부장과 건국대학교 부총장 등을 역임한 바 있다. ‘대위’는 성경의 ‘다윗’을 뜻하는 영어의 ‘David’를 표기한 것으로, 두 분 모두 뒤에 개명한 이름이었다.

해방 직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미주 한인단체인 국민회에서는, 국민회에 공로가 큰 네 분의 사진을 회관에 걸었다. 안창호(安昌浩, 1878-1938)·송석준(宋錫峻, 1865-1907)·이대위·강영소(姜永韶, 1886-1934)가 그분들이었다. 안창호는 공립협회의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을 역임하였고, 송석준은 공립협회장을, 이대위와 강영소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을 역임하여 국민회의 초석을 놓은 지도자들이었다. 이미 사망한 초기의 지도자들을 국민회가 있게 한 공로자로 기리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대위는 1910년대 미주 본토의 한인사회를 안창호와 함께 이끈 지도자였다. 이대위는 캘리포니아대학교(버클리)의 한국인 첫 졸업생이고,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로 사망할 때까지 15년 넘게 시무하였으며, 교포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총회장으로도 여러 해 봉직하였다. 또 일시 교포언론을 주도하고, 한글타자식자기를 개발하여 국문출판에 기여한 바 있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 이대위의 활동은 건강으로 말미암아 교회활동 이외에서는 많이 드러나지 않다가, 1928년 6월 사망하고 말았다. 이대위는 1910년대에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을 놓고 해외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기독교 수용과 도미유학

이대위가 1903년 미국에 유학하기 이전 국내에서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이대위의 별세 소식을 전한 『동아일보』의 기사(1928년 7월 27일자)에 따르면, 강서 출신인 이대위는 평양에서 중학을 마치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다시 중학을 마쳤다고 한다. 이 신문기사와 몇몇 단편적인 자료를 통하여 알 수 있는 사실도 그리 많지는 않다.

우선 이대위는 평안도 강서군(江西郡) 성태면(星台面)에서, 1878년 12월 28일에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대위의 본명은 이태화(李泰化)로 미주에 온 뒤에 이대위로 개명하였다. 그리고 1903년 이전에 평양에서 중학과정을 이수하였다면, 그 학교는 숭실학당(崇實學堂)이었음이 틀림없다.

숭실학당은 북장로교 베어드(William B. Baird) 목사가 평양에서 1897년에 시작한 사랑방 교실이 1900년 중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으로, 1904년에 그 첫 졸업생 3명이 배출되었다. 『동아일보』의 기사대로라면 이대위는 숭실학당을 마치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야 하는데, 그와 관련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렇지만 미국에 가 2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대위가 바로 중학교에 편입하여 대학까지 졸업할 수 있던 것은, 국내에서 중학에 상당하는 일정한 교육을 이수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숭실학당을 졸업하기 전에 미국으로 떠났으리라 생각된다. 숭실학당에서는 성경을 비롯하여, 한국어와 한문, 수학과 과학, 역사, 그리고 음악·미술·체육 등을 교수하였다. 강사진은 한학자가 포함되었으나, 대부분이 북장로교 선교사들이었다. 그리고 숭실학당의 입학생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대위 역시 숭실학당에 입학하기 이전, 이미 1890년대 후반기에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것이다.

1903년 4월 22일, 이대위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다. 그렇다면 이대위는 1903년 3월 중에 한국을 출발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위가 미국에 도착하기까지의 배경이나 과정은 알려져 있지 않다. 먼저 이대위의 도미유학은 숭실학당이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학교나 선교사의 지원을 받은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적어도 이대위는 미국유학을 위하여 필요한 재정을 부분적으로나마 부담할 수 있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던 집안 출신이었으리라 생각된다.

동시에 이대위의 도미유학이 쉽게 결정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대위는 스물다섯이었고, 한 가족의 가장이었다. 아마도 이대위는 1899년 전후 결혼하여 1900년경에 딸을, 1902년경에 아들을 둔 것 같다. 즉 이대위는 아내와 1남 1녀를 둔 가장이었다. 가장임에도 가족을 남겨두고 유학을 떠난 것으로 보아, 이대위는 몇 해 미국에서 유학한 다음 귀국할 계획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위는 누구의 도움이나 지도를 받아 미국유학을 단행할 수 있었을까?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없지만, 필자는 안창호가 이대위의 도미에 일정하게 관여하였으리라 생각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두 사람은 동갑으로 같은 동리는 아니지만 강서군 출신으로 평양에서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안창호는 마페트(Samuel Moffett) 목사가 인도한 널다리교회, 즉 뒤의 장대현교회에서 마페트 목사를 도와 선교 일을 맡고 있었는데, 이대위는 숭실학당의 재학생으로 그 교회에 출석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안창호가 이대위보다 약 4·5개월 전에 미국유학을 떠났다는 점도 기억할 일이다. 안창호는 1902년 11월 서울 제중원에서 밀러 목사의 주례로 이혜련과 결혼하고, 바로 부부가 함께 도미하였다. 이대위는 안창호와 함께 도미하지 않았지만, 유학에 관련하여 서로 상의하였을 것으로 짐작해 본다.

아무튼 이대위는 1903년 3월 중에 단신으로 한국을 출발하였을 것이고, 이민국 서류에 의하면 4월 1일 일본 고베에서 차이나호에 승선하여 4월 22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였으며, 천사도(Angel Island)를 거쳐 4월 24일 상륙허가를 받았다. 천사도는 외국인의 입국절차를 담당한 이민국이 있던 섬이었다. 이민국 기록에 나타는 'Li Tai Wha'라는 22세의 청년이 바로 이대위였다. 나이를 3살 줄였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이대위는 안창호와 만나 회포를 풀고, 장래에 대하여 상의하였을 것이다. 먼저 영어를 배웠을 것인데, 이대위의 움직임은 드러나지 않는다. 안창호가 초등학교에 일시 적을 두었듯이, 혹 이대위도 그랬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는 한인이 20여명 거주하고 있었다. 학생과 인삼상인이 각각 반 정도였다. 특히 인삼상인들은 중국 화교들을 대상으로 인삼을 거래하였는데, 각기 구역을 정하였다. 종종 상인들 사이에 싸움도 일어났다. 안창호는 한인들이 이국땅에서 작은 이익 때문에 서로 싸우는 모습에 충격을 받고, 한인들의 규합에 나섰다. 1903년 9월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의 한인들이 어려운 일에 서로 돕는, 곧 환난상부(患難相扶)를 목적으로 친목회라는 한인단체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대위 역시 이에 참여하였다.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이주하는 동포들이 늘어나면서, 친목회는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확대·개편되었다. 그리고 친목회 시절부터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렸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1905년 7월 미국감리교회에 의하여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대위 역시 샌프란시스코 도착 이후 당연히 예배에 참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대위는 공립협회의 창설 초기나 상항한인교회가 설립된 초기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이대위가 그즈음 샌프란시스코에서 상당히 떨어진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중등학교에 재학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대위는 공립협회의 회원기록에 직업을 ‘전도(傳道)’라고 적을 만큼 교회와 선교에 깊은 관심과 실천을 지니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이대위가 미국에서 궁극적으로 보인 관심과 유학의 목적은 ‘전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곧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었다.

포틀랜드중학교와 캘리포니아대학

1905년 9월 이대위는 포틀랜드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공립신보』 1906년 9월 19일자의 「정이필유성공(鄭李必有成功)」이라는 기사를 보면, 이대위가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하였고 학교에 입학하여 1년 학비를 스스로 부담할 정도의 재정적 여유가 있었으며, 미국인 교장의 추천으로 지역교육회의 장학금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대위가 이곳에 진학한 것은 공부에만 매진하기 위해서였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이대위와 함께 김병준(金炳俊)이라는 한인이 입학하였는데, 그는 1920·30년대 시카고에서 카페테리아를 운영하여 재미한인 가운데 가장 성공한 실업가로 알려지기도 한 김경(金慶)이었다. 평안도 순천 출신인 김병준은 이대위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다.

이대위가 20대 후반 미국에서 포틀랜드중학교에 재학하던 시기, 조국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입학한 그해 11월, 이른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병준은 학교를 그만두고 군사학을 배우겠다고 군사학교로 옮겨갔으나, 이대위는 감정을 억누르고 학업에 진력하였다.

30을 전후한 연령에도 미국의 중등학교에 재학하며 잘 적응한 이대위는 1908년 6월 포틀랜드중학교를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왔다. 이미 이대위는 9월에 샌프란시스코 지근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한인 가운데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입학한 것은 이대위가 처음이었다. 캘리포니아지역 뿐아니라 미국 서부에서 가장 이름 높은 이 대학에서, 이대위는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이대위의 역사학에 대한 관심은 이미 중학교에 재학할 때부터 나타났다. 예컨대 1906년 9월부터 『공립신보』에 몇 차례 「미국대통령역대기」라는 제목으로, 역대 미국 대통령을 소개하는 글을 실은 바 있었다.

또 대학교 입학한 1908년 이후 『신한민보』에 「로마역사[羅馬歷史]」를 실었고, 상항한인교회에서 발행한 『대도』에 「희랍역사(希臘歷史)」를 연재하였다. 그리고 상항한인교회 청년회(Epworth League)에서도 프랑스 역사와 포에니전쟁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 아마도 이대위가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한 경우일 것이다. 본래 이대위는 신학을 공부하고자 도미한 것으로 보이지만, 교회활동 등 실천적인 종교생활을 하면서 전공은 역사학을 택하였다. 물론 신학에 대한 이대위의 관심이 약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대위의 대학 학비는 교포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하여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학비가 부족하면 방학 중 철도역에서 노동과 사무 일을 한 적도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1910년 1월 이대위가 졸업할 때까지의 학비를 지원하기 위하여 25인이 매년 15원을 담당하기 위한 동맹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만큼 교포사회에서 이대위에게 거는 기대가 컸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아무튼 포틀랜드에서 중등학교에 재학하는 동안 이대위는 한인사회를 이끌던 공립협회와 상항한인교회의 직임을 맡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안창호는 1907년 초 귀국에 앞서 미주에서 신민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대위에게 그 책임을 맡겼던 것 같다. 1910년대 초 일제에 의하여 조작된 105인사건의 신문조서를 보면, 이대위가 미주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신민회의 조직에 직접 관여한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다만 신민회는 그 주된 활동이 미주가 아닌 국내에서 이루어졌고, 미주에서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이대위는 캘리포니아대학교에 재학하면서,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한 교포사회에 대학에 재학하고 있던 인물은 그밖에 없었던 점도 고려되었을 것이다. 이대위는 먼저 상항한인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도 선교한 경험이 있던 리드(C. F. Reid) 목사의 주관 아래 양주삼(梁柱三)이 전도사로 주재하였는데, 이대위는 1908년 하반기부터 전도사 일을 대리하기도 하고, 교회청년회의 전도국장을 거쳐 학문국장을 맡아 활동하며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신앙하였다.

또 양주삼을 주필로 하여 1908년 12월호로 상항한인감리교회가 창간한 『대도』(Korean Evangel)의 필자로 창간호부터 1909년 9월호까지 8회에 걸쳐 「희랍역사」를 연재하며, 신앙과 관련된 내용의 글과, 농학이나 자연과학에 관한 계몽적인 논설을 발표하였다. 북미 한인사회에서 이대위는 1910년 전후 교민단체의 지방회장과 한인교회의 주도적인 신자이며, 교포언론에 자주 계몽적인 논설을 발표하는 캘리포니아대학교 학생이었다. 이대위는 결국 목사 안수를 받아, 자연스럽게 교회를 중심으로 한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장로교에서 세례를 받았을 이대위가 감리교로 이적한 것은 이 시기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한인장로교회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상항한인교회가 친목회 시기부터 지역 한인교회로 있다가, 감리교회로 정착하였으므로 이대위는 일찍부터 이 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교포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로 부상

1908년 6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 이대위는 교포단체인 공립협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대위는 10월에 상항지방회 학무원을, 12월에 사법원을 맡았다. 이에 앞서 공립협회와 하와이 합성협회가 합동하여 국민회를 조직하고자 하였는데, 11월 30일자로 그 합동발기문이 발표되었다. 이대위도 미주 공립협회를 대표한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09년 2월 1일 공립협회가 국민회로 개편된 이후, 6월 이대위는 상항지방회장에 선임되었다. 이어 1910년 1월 북미지방총회 부회장으로 당선되었다. 그 직후 대동보국회가 국민회와 합동하여, 2월 1일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되었다.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겸 총무를 맡아 총회장 사무를 대리하기도 하였으나, 곧 학업을 이유로 사면을 청하여 허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1909년 12월에는 2주간 『신한민보』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학업과 사회활동의 병행이 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1910년 『신한민보』에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을 소재로 「애국자성공」이라는 소설을 연재하여, 포에니전쟁 시기 로마의 애국정신을 드러내어 교포들의 애국정신을 앙양하고자 하였다. 이대위는 『신한민보』나 『대도』에 애국과 단합을 강조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논설과, 기독교 신앙을 강조하는 논설을 발표하고 있었다. 이대위의 관심이 민족과 기독교를 통한 구원임을 드러내었고, 그리스도 복음의 전파와 진리 추구는 민족운동과 별개가 아님을 밝혔다. 바로 이대위는 기독교가 20세기에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 종교임을 확신하였던 것이다.

1910년 국내에서 일제의 강제병합이 추진되자 미주에서는 7월 전후 애국동맹단이 조직되어 그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대위도 참여하여 번역원을 맡았다. 한국과 일본 황제에게 보내는 전보를 비롯하여, 각종 선언서를 번역하는 일을 담당하였던 것 같다. 그러한 노력들에도 대한제국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고, 결국 1910년 8월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도 말았다. 이대위는 그해 10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후보로 추천되었으나, 총회장에는 문양목(文讓穆)이 선임되었다.

이처럼 샌프란시스코에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던 이대위에게 11월 말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에서 그 기관지 『신한국보』의 주필로 초빙하는 제안을 해왔다. 이대위 또한 이를 받아들여 1911년 1월부터 그 일을 맡기로 하였다. 대학에서 학업에 정진하면서 교민사회활동을 자제하고자 하던 그가 하와이의 한인신문사 주필을 맡고자 한 것은, 무엇보다도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하와이에서의 역할에 큰 기대를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대위가 1911년 2월 1일부터 양주삼과 윤병구(尹炳球)에 이어 상항한인감리교회의 제3대 전도사로 교회를 담임해야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교회를 담임하며 이대위의 활동영역은 교민단체와 교회로 더욱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위는 1912년 목사(Deacon) 안수를 받았으며, 1928년 사망할 때까지 이 교회의 목사로 시무하였다.

이대위는 교회를 부시 스트리트(Bush Street) 2123번지로 옮기고, 1910년 11월호로 정간되어 있던 『대도』 1911년 8월호부터 복간하였다. 이대위는 동포의 도덕심과 학문력을 발달시키는 것이 교회와 학교에만 있지 않고, 신문과 잡지에 있음을 강조하였다. 『대도』는 1년 동안 발간되다가 1912년 7월호로 폐간되었는데, 이대위는 매호 여러 편의 기사를 실었다. 이대위는 성경공부에서부터 설교·논설·실업·시사·찬미가 등에 이르기까지, 많을 때는 『대도』 한 호 전체 분량의 절반을 집필하였다.

목회로 바쁘면서도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의 여러 직임을 맡고 있었다. 1912년의 경우 북미지방총회 대의원으로 중앙총회 대표로 활동하였으며, 중앙총회장 선출을 위한 대표원회 의장직을 수행하였다. 1913년 4월 이대위는 북미지방총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본래 총회장으로 당선된 정원도(鄭源道)가 사면하여 이대위가 대신 선임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대위는 1913년 5월 14일 버클리 소재의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역사학 전공으로, 문학사(Bachelor of Letter) 학위를 받았다. 또 1912년 7월 15일 코리아호 편으로 고향에서 부인과 딸 마리아(12세), 그리고 아들 다니엘(10세)이 샌프란시스코를 통하여 미국에 입국하였다. 10년을 객지에서 혼자 생활하던 그로서는 늦게 신혼의 가정을 이룬 셈이었다. 그리고 이대위가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한 직후 1913년 5월 13일에 안창호가 주도한 흥사단이 창립되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강영소 집에서 개최된 흥사단 창립식에서 안수례로 서약식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흥사단 자체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1903년 4월 미국에 입국한 이대위는 중학과 대학을 미국에서 마쳐 미주 생활 10년 만에 한인 가운데 몇 안 되는 대학졸업자가 되었으며, 한인교회의 목사로 시무하면서 미주 한인단체의 총회장으로 미주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의 위치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제 이대위는 샌프란시스코 지역이 아닌 미주 전체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교포의 권익보호를 비롯하여, 한국민족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던 것이다.

1차 북미지방총회 총회장(1913-1915) : 교민보호와 언론활동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한 이대위는 무엇보다도 먼저 재정부족으로 1912년 12월 9일자까지 발행되고 정간된 『신한민보』의 복간을 서둘러, 1913년 6월 23일자로 신문은 복간되었다. 이대위는 5월 19일 신한민보사 주필로도 선임되었다.

1913년 6월 25일 남부 캘리포니아 리버사이드 근처의 헤미트(Hemet)에 한인들이 살구 따는 작업에 동원되었다가, 그 지역 백인노동자들에게 축출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이 일의 처리에 미국정부와 일본공사관 사이의 교섭이 진행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대위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자격으로 미국 국무장관 브라이언(William J. Bryan)에게 전보를 보냈다(6월 30일자). 재미한인이 일본에 합병되기 전에 미국에 왔으므로 일본에 복종치 않음을 천명하고, 일인과 구별해 주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브라이언은 이 전보를 보고, 7월 1일자로 한인이 일인과 무관하므로 헤미트 사건을 일본정부와 교섭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이것은 미주한인의 법적 지위, 곧 국적문제가 해결되는 매우 중요한 조치였다. 미국정부가 이대위의 견해를 수용하여, 미주한인이 일본에 합병되기 이전에 미국에 입국하였다는 이유로 일본인과는 별도로 처리하였던 것이다. 이 국적문제의 해결은 이후에도 이대위의 큰 공로로 찬양되곤 하였다.

이대위는 1913년 12월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압도적 지지로 당선되었고, 맡게 되었으며, 개인적으로는 12월 8일 득남하는 경사도 있었다. 1914년 국민회에서는 미국정부의 법인의 지위를 얻어야 교섭과 재산보호 등에 편리함이 있다고 하여,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허가를 받기로 하였다. 이를 위하여 4월 이대위 등 8명의 명의로 인허청원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청원에 대하여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곧 인허장을 발급하였다. 이제 북미지방총회는 법인체로 중국을 통해 오는 유학생들이나 동포들의 보증을 정식으로 설 수 있어 실제로는 영사관의 역할까지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대위는 도미한 교포들의 상륙과 정착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실제로 한인들이 미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만나는 인물이 이대위였다.

이처럼 이대위는 국민회의 교포보호 업무에 진력하며, 여전히 교회와 『신한민보』의 편집에도 관여하였다. 당시 이대위의 바쁜 활동은 결국 건강에 이상을 가져왔다. 이대위는 먼저 1914년 6월 신한민보사에 1개월 휴가를 내서 주필 업무를 잠시 쉬고자 하였으나, 복귀하지 못하고 백일규(白一圭)에게 주필직을 인계하였다. 그렇지만 백일규가 캘리포니아대학교에 편입하며 1915년 1월 초 신한민보사를 사임하자, 신문발행을 북미지방총회가 맡았고, 이대위는 다시 편집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한민보』의 주필로 이대위는 논설을 홍언(洪焉)과 나누어 집필하였다. 교포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글들을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 1915년 9월 2일자부터 12월 9일자까지 『신한민보』에 8회 연재된 「한국통사」가 그러한 경우였다. 박은식(朴殷植)이 중국에서 순한문으로 발행하였던 『한국통사(韓國痛史)』를 이대위가 국문으로 번역하여 실은 것이었다. 이대위는 제2편 제1장부터 제12장까지 번역한 다음, 200쪽이 넘는 이 서적을 다 번역할 수 없어 중요한 부분을 발췌 번역하고자 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한국통사』의 국문본은 1917년 하와이 국민보사에서 김병식의 번역으로 간행되었다. 아무튼 이대위는 교포들에게 애국심 고취나 실생활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영문서적이나 한문서적을 국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하곤 하였다.

신문에 관여하면서 이대위가 진력한 일 가운데 하나는 라이노타이프가 발전된 인터타이프를 이용한 한글식자기의 개발이었다. 『신한민보』의 주필로도 활동한 이대위는 한글식자기를 개발하여 교포사회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5년 3월 11일자부터 『신한민보』는 174자의 인터타이프 신식활자로 발간되었는데, 이대위는 여러 활동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이를 이루어냈던 것이다. 이대위의 여러 공로 중에서도 한글식자기의 발명이 찬양되곤 하였다. 이 한글식자기를 이용하여 신문과 서적을 발간하게 되면서, 미주 한인사회의 출판문화는 활판에만 의존하던 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던 것이다.

이대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년
이대위가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912년

이대위가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있던 1914년과 1915년, 하와이지방총회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하와이지방총회 임원진의 실정(失政)과 함께, 이승만(李承晩)이 그가 운영하는 교육기관 지원과 관련하여 하와이지방총회를 장악하고자 한 시도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이 분규에 대하여 이대위는 『신한민보』에 기명논설을 실어 국민회의 유지를 위하여 이승만과 국민회 집행부 쌍방의 협조를 촉구하였으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자 신문논설 등 여러 방면으로 절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분규가 계속되자, 그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개입을 요청하여, 안창호가 8월 말 중재를 위하여 하와이로 떠나 중재활동을 벌였으나 이승만 계열을 무마하지 못하였다. 이대위는 재외한인의 최고기구인 대한인국민회의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는데, 이승만이 국민회를 전복시키고자 하는 존재라며 축출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하와이의 이승만 계열에서는 이대위를 하와이 형편도 모르며 떠든다고 비난한 바 있었다.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신한민보』의 주필 등으로 교포사회를 지도한 이대위는 여전히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직도 겸하고 있었다. 1911년 2월경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담임을 맡았던 이대위는 여름에 교회를 이전하고 8월에 『대도』를 복간하여 1년 동안 간행하였다. 1912년 6월 목사 안수를 받은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의 활동을 하면서도, 1914년에는 샌프란시스코 항구선교사(Port Missionary)로도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한인 입국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특히 상항한인감리교회는 1914년 12월 부시 스트리트의 교회를 오크 스트리트(Oak Street) 1053번지로 이전하였다. 이 건물은 국민회 북미지방총회관으로 매입한 다음, 교회가 이 건물에 입주하여 예배실과 총회 집회실을 공동으로 사용하여 경비를 부담하였던 것이다.

2차 북미지방총회 총회장(1917-1919) : 단체확장과 민족운동

1915년까지 국민회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활동한 이대위는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직을 유지하면서, 『신한민보』의 발간에 관여하는 등 일인다역으로 분주한 생활을 보냈다. 이대위의 여러 활동이 북미지방총회를 유지시킬 수 있었다. 이대위의 총회장 임기가 다해 가던 1915년 10월, 그는 “하느님의 도리를 더 연구하여 어지러운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형제들에게 도덕 교육을 펴고자”,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 in San Anselmo)에 편입하였다. 그리고 『신한민보』의 발간과 관련한 업무에서 손을 뗐고, 총회장 임기도 만료되어 강영소가 총회장을 맡았다.

그러나 이대위는 1917년 2월 1일 다시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에 취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이대위는 병중이었는데, 그해 총회장과 부회장으로 당선된 강영소와 백일규가 부인의 우환과 학업을 이유로 사면하자, 대의회에서는 그에게 총회장직을 맡아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결국 이대위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한인사회의 곤란을 의식하여 총회장에 취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위는 1918년과 1919년에도 총회장을 맡아, 결국 1913년부터 1915년까지의 3년에 이어 1917년부터 1919년 4월 사임할 때까지, 1916년을 제외한 5년여를 총회장으로 일하였다.

이대위가 2차로 맡은 총회장으로의 활동 가운데 두드러지는 일은 북미지방총회관의 대금 3,500원을 한인 552명의 기부로 완납하여, 오크 스트리트의 총회관이 완전히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의 소유가 될 수 있었다. 1917년 6월부터 전개된 가옥채(家屋債) 보상운동이 결실을 맺어, 1905년 공립협회가 조직된 이래 15년 만에 국민회가 회관을 소유하였던 것이다. 상항한인감리교회는 이대위가 사망한 뒤, 1930년 6월 파웰 스트리트(Powell Street)에 새 예배당을 지어 옮길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북미지방총회가 샌프란시스코 미국인상업회의소에 입회한 것 역시 이대위의 총회장으로 있던 1917년 6·7월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상업회의소에 입회한 뒤, 상업회의소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호프만호텔에 각국 상업가들과 함께 이대위도 초대하였다. 이대위는 태극기를 가지고 가서 상업회의소 회장에게 청하여 태극기를 게양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본대표가 항의를 하자 이대위는 적극 반론을 개진하여 태극기 게양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홍언은 이 일을 “이대위 선생의 일생 사적 가운데 가장 빛나는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또한 이대위는 인터타이프 국문식자기에 이어 1917년 4월 모노식 활자를 개발하였다. 이 활자는 기계로뿐만 아니라 개개의 활자를 문선하여 사용할 수 있게 한 것으로, 모두 196자였다. 이대위는 “국어는 한 나라 민족의 정신, 사상, 감정을 대표한 것”이라고 하며, 인터타이프 국문식자기와 함께 모노식 활자까지 개발하여, 국문활자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이대위는 총회장으로 재임하면서 재미교포의 권익뿐 아니라, 한인의 미주이민에 대해서도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미국에 입국하고자 하는 동포들에게 주의사항을 주지시키고, 입국동포들에게는 편의를 제공하였다. 예컨대 1917년 9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학생 5명이 이민국에 의하여 모두 상륙이 거절되자, 국민회가 보증에 나서 모두 상륙이 허가되었다. 그 내용을 『신한민보』를 통하여, 도미학생은 보증금과 학비를 포함하여 200원 이상을 휴대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1918년에도 총회장에 당선한 이대위는 교육사업에 진력할 것을 강조하였고, 실제 재미한인 학생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하여 버클리에도 학생양성소를 설립하고, 각 지방회에 국어학교를 상설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각 지방회에 여성들의 국민회 입회를 확대하도록 하는 공문을 보내, 남녀평등에 관한 국민회의 정신을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이대위가 총회장으로 있던 시기에 지방회의 숫자도 증가하였는데, 1918년만 하더라도 묵국연합지방회를 비롯하여, 시카고·약기마·푸에블로·와이오밍 지방회가 그것들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대위는 1918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에서 신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10월 10일에는 남감리교 지방연회에서 장로목사로 승임하였다. 문학사 학위에 이어 신학사 학위를 받고, 장로목사가 된 그는 목회자로서의 자격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고 하겠다. 그리고 1917년 12월 다뉴바에서 조직된 북미한인교회공의회의 회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이대위가 총회장으로 있던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북미지방총회는 윌슨 대통령에게 승전치하서를 보내고, 시국문제에 대한 건의서를 중앙총회에 제출하며, 시국문제 해결을 위한 경비를 준비하기 위해 일반 동포에게 특별의연을 걷기로 결정하였다.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11월 25일 중앙총회와 북미지방총회 임원, 그리고 유지인사 등 20여인과 회동하여 시국문제를 협의하고 파리평화회의와 뉴욕의 소약국민동맹회에 이승만·민찬호·정한경을 대표로 파견하는 일 등을 결정하였다.

大韓獨立宣言書
大韓獨立宣言書

세계대전의 종결로 국제정세가 급변하던 1919년의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으로 이대위가 다시 선임되어 1월 2일 취임하였다. 북미지방총회는 한인사회를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파리평화회의의 개최와 관련하여 중앙총회가 크게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외교문제는 중앙총회 소관이라고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북미지방총회는 국제정세의 변화보다, 외교에 소요되는 재정문제를 담당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1919년 3월 대한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3.1운동 이전부터 준비되어 중국과 미주 등 국외 독립운동계의 지도급 인물 39명이 서명한 이 선언서는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한 것이었다. 미주에서는 이승만과 안창호, 박용만(朴容萬)과 이대위 4명의 지도자들이 서명하였는데, 그가 미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이승만·안창호·박용만 등과 함께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다.

구미위원부 위원

1919년 3월 1일,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다. 미주에는 상하이에서 현순(玄楯)이 그 사실을 안창호에게 보낸 전보가 3월 9일 오전 11시경에 도착하였고, 안창호는 국민회 대의원회 임시의장 백일규와 독립선언에 대한 후원방침을 협의하여 이 소식을 지도자들과 각지 지방회에 전보로 알렸다. 이어 중앙총회 임시협의회를 개최하여 평화회의 대표파견을 비롯하여 미국의 종교계와 단체와의 교섭, 국기 제작 등에 관한 내용을 결정하였다.

북미지방총회는 동포들에게 독립의 소식을 속히 알리고자 『신한민보』를 1주에 3회씩 발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대위는 『신한민보』 1919년 3월 22일자에 「성공은 합력에 있음」이라는 논설에서 일제에 항거한 젊은 누이들이 살육당하는 국내 상황을 전하며, 미주 교포들의 단결로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데 중앙총회에서는 독립선언 이후의 업무가 증가하고 안창호가 상하이로 떠나게 되자 전담 사무장직을 설치하고, 4월 초 이대위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이대위는 사무장직을 수락하고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직의 사면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북미지방총회 대의원회에서는 그의 사면과 부회장 임정구의 총회장 인계를 결정하였다. 이대위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면서 외교문제가 주가 된 중앙총회의 전반적인 사무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북미지방총회를 여러 차례 지도력을 가지고 이끌었으며, 동포들을 많이 알고 영어에 능통한 이대위와 같은 인물이 상하이로 떠난 안창호를 대리하는 위치에 필요하였다. 역시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역임한 강영소가 사무원으로 활동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사무장으로 독립의연금 모집이나 인구등록 등을 지휘하고, 또 미주와 해외의 연락이나 보도도 관리하였던 것 같다.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선임된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자임하며, 임시정부와 줄다리는 교섭을 진행 중이었다. 이 시기에 이대위는 대한인국민회를 대표하는 위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대위는 이승만과 하와이국민회 문제로 이미 깊은 간극이 있어온 터였다.

7월 25일 이대위는 워싱턴의 이승만과 필라델피아의 서재필을 만나 독립운동과 관련된 시국문제를 상의하고자 샌프란시스코를 떠났다. 재미민단의 통일과 정부통일 협의가 주목적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을 만난 이대위는 8월 1일 국민회 중앙총회 총회장 대리인 백일규에게, 이승만이 재정위원 3인을 두고 국민회가 임시정부의 지시로 모집하고 있던 애국금 대신에 국채표를 팔라고 한다면서, 그 자신은 이승만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전보를 보내왔다. 그리고 같은 날 이승만에게서 온 전보는 국민회에 재정위원의 추천을 요구하며, 이대위의 추천을 부탁하고 있었다. 국민회에서는 사태를 알기 전에는 재정위원의 추천을 보류한다고 답전을 하였으나, 이대위는 몇 달 워싱턴에 있어야겠다며 허락을 청원하였다.

이 문제는 미주에서의 애국금 모집을 국민회에 대리케 한 임시정부의 방침과는 달리, 이승만이 공채를 발행하여 미주에서의 재정을 장악하고자 시도였다. 따라서 국민회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공채를 모집하여 그 판매가를 모두 워싱턴에 보낸다면, 국민회의 존재가 유명무실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한 문제에 이대위가 이승만을 지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 국민회와 이대위 사이에 전보가 오가면서, 이대위는 국민회에서 애국금과 공채표를 함께 시행하는 의견을 냈지만, 이승만은 임시집정관 총재 명의로 ‘국채표에 대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국채표를 발매하며 재무위원부를 설치하고 원동에서 온 김규식(金奎植)과, 하와이의 송헌주(宋憲澍), 미주의 이대위를 위원으로 선정하였다는 내용이었다. 8월 25일자로 이승만은 ‘임시정부행정령’ 제2호로 ‘한국위원회’를 공포하는데, 그 위원회는 결국 재정의 수입과 지출에 권한을 갖는 기관이었다.

한국위원부가 개명한 구미주차위원부에서는 9월 8일에 애국금을 폐지하고, 9월 12일자로 ‘공고서’를 공포하여 공채 발행을 지시하였다. 그러나 국민회에서는 임시의정원에서 구미위원부에 관한 사항이 통과되지 않음을 이유로 하여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구미위원부에서는 공채 발행이 의정원의 위임사항이라며 애국금의 폐지를 강조하였는데, 국민회에서는 계속 공채와 애국금의 병행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10월 9일 임시정부에서 애국금을 계속 시행하라는 전보가 도착하자, 국민회는 이를 즉각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이에 10월 10일 임시정부의 통보에 반발하며 구미위원부만이 재정을 관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전보를 보냈던 것이다. 아무튼 애국금 문제는 1920년 2월 24일자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의 명의로 된 ‘재무부 포고 제1호’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대한인국민회와 구미위원부 사이에 애국금과 공채에 갈등이 계속되던 시기에 이대위는 국민회를 대표한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이대위는 이승만에 의하여 재정위원, 곧 구미위원부 위원에 임명된 이후, 이승만의 공채 발행에 찬동하여 국민회와 갈등이 없지 않았으며, 그 절충안으로 애국금과 공채를 함께 시행하는 안을 제시하였다. 1910년대 하와이지방총회 문제로 이승만을 크게 비판하던 그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울러 국민회를 대표하던 그가 국민회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애국금 수납보다, 이승만에게 유리한 공채 발행을 지지한 것 또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튼 이대위는 임시정부의 수반인 이승만을 중심으로 미주사회가 단결하는 방안을 모색하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이대위의 절충안을 구미위원부에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이대위는 9월 23일 위원직을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이대위는 양측으로부터 배척된 셈이었다.

구미위원 활동으로 국민회의 지지를 잃은 이대위는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짐작된다. 곧이어 열린 중앙총회장 선거에서 이대위는 이승만을 지지하던 하와이는 물론, 북미지방총회의 지지도 줄어 윤병구에게 큰 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다. 1920년 3월경 그는 서양인이 경영하던 식품점을 인수하여 운영하였다. 공직활동으로 많은 괴로움을 받은 이대위가 생활문제와 피곤을 해결하는 방안으로 상점을 운영하였던 것이었다. 물론 상항한인감리교회의 목사직은 계속 유지하였다. 이대위는 이 식품점을 확대하여 잡화를 포함한 상점으로 영업하였는데, 1923년 9월 말까지 운영하다가 중국인에게 팔았다. 그 이후에 이대위는 새로 세탁소를 개업하여 운영하였는데, 이대위의 사망 이후에도 부인 이대안이 1940년대까지 직접 운영하였다.

말년과 평가

이대위가 북미지방총회의 일선에서 물러난 시기를 전후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위상이나 활동은 그 이전에 비하여 축소되는 침체기를 맞고 있었다. 이미 1920년 7월 1일자로 중앙총회 총회장 윤병구는 7월 5일부터 중앙총회의 업무를 중지한다고 공고하였으며, 1921년 3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가 임시정부의 ‘교민단령’에 의거하여 대한인교민단으로 변경되기에 이르렀다. 이승만이 주도하던 국민회가 교민단으로 개칭된 것은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간섭을 벗어나고, 이승만의 위상에 도전하는 세력을 배제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아울러 1921년 7월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대한인동지회를 결성하였다. 결국 중앙총회 산하에는 북미지방총회만이 남았다. 이미 원동의 지방총회는 유명무실하였으며, 하와이지방총회까지 분리된 상황에서 중앙총회의 존재는 의미가 없게 되었다. 1922년 12월 북미지방총회에서는 제14차 대의원회에서 중앙총회를 폐지하고 북미지방총회를 ‘대한인국민회 총회’로 개칭하며, 조직을 총회·지방회·예비지방회로 구성하였고, 미주와 멕시코, 쿠바를 관할하는 조직으로 축소되었던 것이다.

이대위는 국민회의 대의원으로 중요 행사에 참여하며, 국민회 창립기념일이나 3·1절 기념식, 서재필 박사 등 한인명사의 환영회, 여자애국단 창립기념식 등 여러 행사에 원로로 참여하여 연설이나 강연으로 회원들을 격려하는 것처럼 상징적인 일에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이대위는 1923년 6월 상업중학을 마친 첫딸 마리아가 결혼을 한 뒤, 1925년 12월 급서하는 불행을 겪었다. 이대위의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국민회나 동포를 위한 일에는 앞장서고 있었다. 이대위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국민회 업무로 지방 심방을 하였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이대위의 명망이 여전하였던 것은 건강을 이유로 사퇴하지만, 1926년도 국민회 총회장 후보로 천거되는 사실에서도 짐작된다.

이대위의 건강은 일시 좋아지기도 하였으나, 1920년대 계속 좋지 않았다. 이대위가 사망하였을 때 『신한민보』는 그가 8·9년 전부터 신병이 있었다고 밝혔다. 이대위는 그러한 건강에서도 상항한인감리교회 목사로 시무하며, 국민회 상항지방회의 대의원으로 총회 대의원회에는 계속 참여하여 직무를 다하였다. 1928년 1월 말 이대위는 샌프란시스코 병원에 입원하여 일시 차도가 있었으나, 결국 6월 17일 오후 7시 50분 운명하였다. 병원에만 4개월 넘게 입원하다가 만 49세 6개월을 일기로 사망한 것이었다. 부인과 아들 4형제, 외손자가 임종을 지켰다. 이대위는 “우리 동포들이 다 평안한지요? 아이고 보고 싶어! 아이들도 참말 보고 싶어!”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李大爲氏 長逝, 민족에 바친 그의 일생 桑港에서 傳하는 悲報
李大爲氏 長逝, 민족에 바친 그의 일생 桑港에서 傳하는 悲報

이대위의 장례는 장례위원회가 조직되고 국민회와 한인 남감리교회, 그리고 스탁톤 공제회 등이 공동으로 주관한 사회장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6월 22일 이대위는 사이프러스 묘지에 묻혔는데, 여러 기관에서 경비와 화환을 기부하였다. 7월 1일에는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앤젤레스, 멕시코시티에서 추도회가 있었으며, 7월 5일에는 뉴욕에서도 추도회가 개최되었다. 이대위가 남긴 재산은 서적이나 책상과 같은 집기 정도였다. 이러한 장례와 추도는 이후 1930년 장인환, 1938년 안창호가 사망하였을 때 있지만, 미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대위는 일과 관련하여 대인관계가 원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이대위는 성격이 급한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 호·불호가 명확하여 그를 따르는 이들도 적지 않았겠지만, 비판적인 이들 역시 적지 않았다. 강영승(康永昇)이 추도회에서 이대위와 함께 일하기 전에는 ‘괴벽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돈독한 신자요 동족을 위하야 무엇이던지 희생한 동족애가 참으로 풍부한 이인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의 성품을 알려주는 예가 아닌가 한다. 보이는 외형과는 달리 견실하고 자애로운 성품이었던 것이다. 곽림대(郭林大)는 이대위의 인격을 강직과 청렴으로 평하면서, 대의를 위해서는 사사로움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회고하였다. 이대위는 원칙적이며 엄격하고 강직한 성격이지만, 일을 추진하면서 그러한 성격이 득이 되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이대위는 그 스스로가 포용심과 인내심이 부족함을 밝힌 바 있었다. 홍언은 그것을 경쟁의식과 일에 대한 책임감으로 평가한 바 있다. “매양 일에 임하여 정론이 많았다.”는 표현에서 짐작되듯이, 사심에 얽매이지 않은 옳은 주장이 많았던 것이다. 개인의 이익보다 동족의 권익을 우선시하였던 이대위는 그로 비롯된 인간관계를 고민하곤 하였다. 일을 추진하면서 개인적인 갈등은 있을 수 있었지만, 인간관계 자체가 벌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타인뿐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성품이었다.

이대위가 한인사회의 지도자들과 원만하지 않으면서도 북미지방총회 총회장을 5년 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치보다 실무에 밝았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리고 1910년대 미국에 입국한 학생이나 사진신부 상당수가 그의 도움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한인사회의 상당한 지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대위는 스스로가 대표적인 엘리트였지만, 개인의 이익보다 한인사회 전체의 공익을 앞세우고 실천하였다.

맺음말

이대위는 1910년대 미주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이대위는 숭실학당을 거쳐 도미하여 캘리포니아대학교 역사학과를 졸업한 지식인이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을 마친 목사로 상항한인감리교회에서 15년 넘게 시무한 목회자였다. 동시에 교민단체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를 여러 해 이끈 지도자이며, 『대도』와 『신한민보』의 주필로 재직한 언론인이었고, 또 국문식자기를 발명한 발명가이기도 하였다. 이대위가 북미지방총회 총회장 재임시절에 총회관을 마련하고, 국민회를 법인체로 등록하였으며, 사진신부들과 여권 없는 학생들의 미국 입국을 도왔다. 이대위가 그 모든 일에 사사로움을 버리고 자신을 바쳐서 일하여, 누구보다도 미주 한인사회에 공적이 많았음은 여러 측면에서 확인된다. 공사를 구별하고 희생과 봉사에 앞장선 모습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주 한인사회에 기여한 이대위의 공헌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이 이대위의 성격과도 관련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이대위가 야심 있는 정치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대위와 함께 미주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알려진 안창호나 이승만, 박용만 등은 정치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미주 한인사회에서 일정한 세력을 형성하였다. 그들은 각기 국민회, 동지회, 대조선독립단 등의 지지 세력을 기반으로 자금이나 인력 등을 동원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나 미주와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하여 이대위는 지도력에 한계가 있었으며, 지지 세력을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이대위는 목회자였고 야심 없이 공익을 위하여 봉사한 지도자였다. 그리고 다른 지도자들과 같은 야심과 정치력, 카리스마가 없었다. 이대위와 같이 드러나지 않는 지도자가 민족 전체에게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미주 한인사회에서는 오히려 대들보의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부는 이대위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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