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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상근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8년

주요공적

1930년 상해 한국교민단 의경대 복무

1931년 한인애국단 설립에 참여

1932년 대련에서 일제 고관들 폭살 계획 중비중 피체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유상근

유상근 , (1911) ~(1945) , 독립장 (1968)

유상근 선생이 가입한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초 이후 계속된 임시정부의 대내외 곤경을 타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제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자행한 만보산사건과 9․18사변(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거쳐 결성된 특무부대였다.

- <조범래(독립기념관 학예실장)> -

만주로 이주해 부친을 도와 농사를 짓다

유상근(柳相根)은 강원도 통천군(通川郡) 순잠면(順岑面) 오유리(五柳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유춘기(柳春基)이며 어머니는 김성녀(金姓女)였다. 자필 이력서에 나타난 가족 사항을 보면 위로 4명의 형 유상덕(柳相德), 유봉준(柳鳳俊), 유덕로(柳德魯), 유상보(柳相補)와 두 명의 누이 동생 유상철(柳相哲), 유상렬(柳相烈)이 있었다.1) 둘째 형인 유봉준은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 거주하고 있어 이력서를 작성할 1932년에는 북간도 화룡현에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 상하이로 오기 전까지는 북간도 화룡현 명신사(明新社) 부흥평(富興坪) 2호에서 거주하였다.

유상근은 고향인 강원도 통천에서 6살부터 9살 때까지 한학을 배우고 10살에 통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4년간 공부하였다.2) 집안 사정으로 북간도 연길현 2도구로 이사를 하면서 국내에서는 더 이상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러나 유상근은 북간도에서도 한 곳에 오래 정착해 살 수 없었다. 연길현 2도구에서 3개월 정도를 거주하다가 봉밀구(峰密溝) 필산촌(畢山村)으로 이사하여 약 1년 반여를 거주하였다. 이 기간에 유상근은 아버지를 도와 농사 일을 거들었다. 필산촌에서 다시 용정촌으로 이사하여 1년 정도 머물며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에서 1년 정도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동흥중학교는 중국 만주 지린성(吉林省) 용정에 설립된 민족주의 학교로 대성중학, 은진중학과 더불어 용정 주변지역의 대표적인 민족교육기관이었다. 동흥중학교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천도교단에 의해서 1921년 10월 설립, 운영되었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만주지역의 많은 한인들 역시 만세시위와 무장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는 만주의 한인사회를 기반으로 1910년을 전후해 설립된 교육기관에서 전개한 민족교육운동의 결과였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한 종교단체와 종교인들은 교육기관을 설립하여 더욱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교육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1926년 일제측의 자료에 의하면, 간도 내에 한인이 설립한 학교의 숫자가 모두 191개교인데, 그 중 종교단체에서 설립한 학교가 74개교였다.

천도교 역시 1920년대에 들어 간도를 중심으로 교육기관 설립에 노력하였다. 천도교에서는 1920년 11월 청년들에게 천도교의 교리와 포교를 위해 천도교간도협성종학강습소(天道敎間島協成宗學講習所)를 설립, 운영하였다. 이 협성강습소는 천도교의 용정·연길·화룡교구에서 합동으로 설립, 운영한 것이었으나 정규 교육기관은 아니었다. 이에 따라 용정 등 3개 교구에서는 정규교육기관을 설립하기로 준비하고 용정교구를 중심으로 1921년 3월 마침내 동흥학교를 설립하였고, 4월 15일에 개교하게 되었다. 설립 목적은 ‘천도교의 발전과 민족적 교육 및 민족적 단결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동흥학교는 초등과 1, 2, 3, 4학년과 고등과 1, 2학년 과정의 학제를 계획하였으나, 설립 초기 교사 모집 등의 이유로 인해 먼저 초등과정의 소학교를 설립하고, 고등과정은 중학강습소로 대치하여 운영하다가, 1921년 10월 1일에 중학강습소를 동흥중학교로 승격, 전환하고 초등과정의 소학교는 동흥중학교의 부속학교로 체제를 바꾸었다.3)

그러나 유상근의 학업은 오래 지속할 수 없었다. 화룡현으로 다시 이주한 뒤 19살에 하얼빈으로 가서 이모부인 이종익(李鍾翊)의 집에 머물렀다. 이모부 집에서 특별한 일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던 유상근은 이모부에게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약간의 여비를 얻어 다렌(大連)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이 때가 1930년경으로 추정된다.

상하이로 건너가 백범 김구를 만나다

<유상근 이력서>
<유상근 이력서>

유상근이 하얼빈의 이모부 집에서 머물다가 다렌을 거쳐 상하이로 건너간 이유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이력서나 일제의 재판기록 등에는 상하이로 간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다만 『도왜실기』에서는 ‘19세 되는 해 하얼빈으로 건너가 이모부 이종익 댁에 기거하게 되어 항상 우울하고 불쾌한 날을 보냈으니 이는 때를 만나지 못하고 불우의 환경에 있어 그의 큰 뜻을 이루어 보지 못하는 까닭이었다.’4)고 기록되어 있다. 용정에서 동흥중학을 다니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을 유상근은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음을 아마도 한탄하며 지냈을 것이며, 좀 더 큰 세상으로 나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상하이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국가보훈처 발행의 『공훈록』5)과 일제측의 자료6)를 종합해 보면 유상근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30년 7월경이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나 연고지도 전혀 없는 상하이에서 유상근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유상근은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에 도착 직후 유상근은 공동조계 오마로(五馬路)에 있는 영주여관(瀛洲旅館)에 머물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생활하기 위한 여러 정보나 상황 등에 관해서 알아보려 하였다. 그러나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에 도착한 지 한 달도 채 안된 7월 말경에 유상근은 프랑스조계 노신부로(勞神父路)에 위치하고 있던 인성학교(仁成學校)를 방문하였다. 상하이에 관련한 모든 정보를 얻고, 또 한편으로 한국인을 소개받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상하이에서 그래도 믿고 지낼 수 있고 취직도 할 수 있는 한국인을 소개받으려 인성학교를 방문한 것이다. 유상근은 인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신기섭(申基燮)을 만났고, 신기섭의 소개로 마당로 보경리 4호의 대한교민단(大韓僑民團)을 찾아가게 되었다. 마땅한 취직자리를 소개받으려는 목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상근은 김구를 만났다. 김구는 유상근을 영국인이 운영하는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취직하도록 하였고, 취직 후 거주지를 프랑스조계 마랑로 화북공우(華北公寓) 주변으로 옮겼다.

태극기 앞에 선 유상근
태극기 앞에 선 유상근

검표원으로 9개월 동안 근무했으나 유상근의 생활 형편은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 유상근의 이력서에는 ‘김 선생(김구-필자 주)님의 소개로 버스공사로 직장을 얻어 들어가서 9개월 일하는 동안 생활을 하다가 다시 생빈(生貧)하여 홍콩(香港)으로 넘어가게 되었다.’7)라고 기록되어 있어 저간의 형편을 살필 수 있다.

유상근은 상하이에서의 짧은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홍콩과 광동 등지를 두루 다니며 인삼 장사로 생활을 도모하였다. 그러던 중 1932년 1~2월경 김구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하이로 오게 되었다.

상하이에서 생활과 김구와의 만남, 이후 김구와의 관계 등에 대해서 『도왜실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대련을 경유하여 상하이에 이르렀으나 시세불리하여 역시 그의 큰 뜻을 시험해 볼 길이 없어 비탄에 빠져 있을 때 다행히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되어 선생으로부터 깊은 감화를 받고 다시 호장(豪壯)한 의기를 품게 되었으나 잠시 생활을 유지할 생각으로 김구 선생의 소개로 영국인 경영 버스공사의 인스펙터(사표원 査票員)가 되어 9개월 간이나 종무(從務)하면서 때로는 얼마 안되는 소득을 나누어 김구 선생의 용돈으로 제공해드리기도 하였다.8)

상하이라는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뜻을 펼치려 한 유상근에게 상하이는 그리 녹녹한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로운 일을 할 수 없어 좌절하고 비탄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유상근은 김구를 만났고, 김구로부터 아마도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독립운동에 관해 눈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의 생활을 위해 김구의 소개로 버스회사의 검표원으로 근무하였고, 검표원 월급의 일부를 김구에게 제공하였던 것이다.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대련의거를 준비하다

유상근이 홍콩과 광동 등지에서 인삼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다가 김구의 지시를 받고 상하이로 돌아온 것이 1932년 1월 내지는 2월 초였다. 상하이로 돌아온 유상근은 먼저 대한교민단의 의경대(義警隊)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한교민단은 1918년 가을 상하이에서 만들어진 고려교민친목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수립 이후인 1919년 9월 고려교민친목회를 상해대한인민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의 직할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 민단이 ‘상해거류민단’(1920. 1), ‘상해대한인거류민단’(1920. 3), ‘대한교민단’(1920. 10)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대한교민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직속의 지방자치단체이자 수도행정기관의 기능과 함께 임시의정원의 출신지역별 의원을 선출하는 기능까지 갖고 있었다. 아울러 임시정부에 납부할 조세 부담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교포의 정확한 숫자를 알고 있어야 하였다. 대한교민단의 핵심 활동 중 하나인 호구조사에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대한교민단의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은 치안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상하이 한인동포사회의 치안을 확보하기 위한 경찰기구가 필요하였는데, 그 기능과 역할을 담당한 것이 바로 의경대였던 것이다. 상하이가 국제도시이면서 한인동포사회가 유동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한교민단이 한인사회를 완전히 그리고 정확하게 파악하기란 매우 어려웠다. 더구나 임시정부의 경찰이라거나 기타 여러 독립운동단체의 명의를 사칭하면서 동포들에게 금품을 강요하거나 새로 상하이에 도착하는 동포에게 사기를 치는 일까지 빈번하게 발생하자, 한인교민의 안녕과 동포사회의 질서를 확보해야 하는 대한교민단으로서는 이에 대한 예방이나 억제력이 필요하였다. 이 때문에 대한교민단은 1923년 말 자치권을 가진 의경대 조직을 만들어 운영하였다.9)

그러나 유상근이 의경대에서 활동한 기간은 한 달 남짓이었다. 1932년 2월 27일 의경대를 그만두었다. 이유는 ‘홍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10)고 청취서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종 목적지는 홍콩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홍콩은 일본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였다고 앞서의 청취서에서 밝히고 있다. 김구와의 모종의 논의를 거쳐 거사를 위해 최종 목적지인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해 먼저 사진촬영을 하는 등 한인애국단에 가입하는 모든 절차를 마친 것이다. 그리고 사흘 뒤인 2월 27일에 의경대를 사직하였다.

유상근이 상하이에 도착한 때는 1930년 6~7월경이었다. 이 시기는 김구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있으며 1920년대 초 이후 침체되어 있던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던 때였다. 이를 위해 김구는 미주지역으로 독립운동 자금의 지원을 위한 ‘편지정책’을 펴고 있었다. 그리고 가슴 속에 ‘독립운동을 위해 생색낼 만한 일’들을 구상하던 시기였다. 이런 상황이 『백범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한 가지 연구 실행한 일종(一種) 사무가 있으니 곧 편지정책이다. 사면을 돌아보아도 정부사업 발전은 고사하고 명의라도 보전할 도리가 없는데 임시정부가 해외에 있으니 같이 해외교포를 의뢰할 수밖에 없는데 …… 임시정부의 현상을 극진 설명하고 동정을 구하는 편지를 써서 …… 하와이의 안창호, 임성우 등 제씨가 편지로 묻기를 당신이 정부를 지키고 있는 것은 감사하나 당신 생각에 무슨 사업을 하여 우리 민족에 큰 생색 될 것을 하고 싶은데 거기 쓸 금전이 문제된다면 주선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회답하기를 무슨 사업을 하겠다고 말할 필요는 없으나 간절히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조용히 금전을 구취(鳩聚)하였다가 보내라는 통지가 있을 때에 보내라 하였더니 그리하마는 승낙이 있다. 나는 기시(其時)부터 민족의 생색 될 일이 무엇이며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연구하던 때라 나는 재무부장이면서 민단장을 겸임하던 때라11)

김구의 이러한 구상의 결정체가 바로 한인애국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은 1920년대 초 이후 계속된 임시정부의 대내외 곤경을 타개하고 또 한편으로는 일제가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자행한 만보산사건과 9․18사변(만주사변) 등으로 침체된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의 국무회의를 거쳐 결성된 ‘임시정부의 특무대’였다.12)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수립은 1900년대를 전후하여 30여 년간 이상 구축해 온 만주라는 독립전쟁 근거지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중국 전역에서 전개되던 우리의 항일독립운동 공간이 중국 관내지역으로 제한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더구나 만보산사건을 일제는 재만한인들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하도록 교묘하게 악용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중국 관내지역에서의 한인독립운동은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중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은 중국인들의 지원과 협조 내지는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형편이었는데, 일제가 만보산사건을 악용하여 한·중 양 민족 간의 관계를 이간시킨 것이다.

더구나 1932년 1월 일제는 임시정부가 위치한 상하이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임시정부는 물론 많은 독립운동가와 단체들은 심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주변의 독립운동단체는 이같은 난관을 타개하고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기 위한 활로를 모색하여야 했던 상황이었다. 이것이 한인애국단이 결성된 배경이었다.13)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인독립운동진영은 일제의 만보산사건과 9․18사변으로 인해 악화된 한국인들과 중국인들 사이의 감정 등 여러 가지 문제 해결책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모임을 마당로 보경리 4호의 임시정부 청사에서 가졌다. 상하이 지역 한인독립운동진영의 이런 적극적인 움직임은 임시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1930년대 들어 계속된 난국을 타개하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방안에 대해서 협의하고, 비밀 조직으로 특무대를 만들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국무위원 김구를 책임자로 임명하고 모든 권한을 위임하기로 의결하였다. 이 특무대가 바로 한인애국단이었다.

한인애국단의 결성 목적과 과정에 대해서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에서는 하도 독립운동계가 침적(沈寂)한즉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한 것은 왜놈이 중·한 양 민족의 감정을 악화키 위하여 소위 만보산사건을 주출(做出)하여 조선에서 중국인 대학살사건이 인천, 평양, 경성, 원산 등 각지에서 한인 무뢰배가 일인의 주사를 받아가지고 중국인을 봉첩타살(逢捷打殺)하며 만주에서 9․18전쟁을 기하여 중국은 굴욕 강화하였는데 전쟁시에 한인 부랑자로 중국인에게 호가호위(狐假虎威)의 악행을 극단으로 감행하였은즉 ……

상해에서도 마로상(馬路上)에서 중·한 노동자 간에도 종종 충돌이 생기던 때라 나는 정부 국무회의에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암살파괴 등 공작을 실행하되 여하 금전 여하 인물을 사용하든지 전권 판리(辦理)하되 성공 실패의 결과는 보고하라는 특권을 득하여14)

만보산사건과 9․18사변 등으로 악화된 한·중 양 민족간의 감정을 풀고 항일독립운동의 새로운 활로를 찾기 위해서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임시정부 특무대, 즉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한인애국단의 모든 실무는 재무장이며 민단장을 겸임하고 있던 백범 김구가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서 한인애국단의 결성에 임시정부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임시정부 주변에 결성된 각종 한인독립운동단체, 예를 들면 한국노병회나 병인의용대 등의 결성에 임시정부 관계자가 참여하거나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임시정부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별도의 단체를 결성한 경우는 한인애국단이 처음이었다.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 특무대라는 이름의 단체가 구체적으로 한인애국으로 결성된 구체적인 일자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일부 자료를 통해 결성 일자를 추정할 뿐이다. 1932년 9월 28일자로 한인애국단장 김구의 명의로 발표한 「동경작안(東京炸案)의 진상(眞狀)」에서 ‘그(이봉창 의사-필자 주)가 오단(吾團-한인애국단)의 최선봉장’이라는 내용이나 ‘본단에 최선(最先) 가입한 단원’15)이라는 내용에서 이봉창이 한인애국단 최초의 단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봉창은 1931년 12월 13일자로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따라서 한인애국단은 이 때를 전후해서 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인애국단을 만든 김구는 먼저 동경의거를 위해 1931년 12월 17일 이봉창을 일본으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이와는 별도로 최흥식(崔興植)·유상근 두 명의 의사를 다렌(大連)으로 파견하였다. 일본 관동군사령관 등 일제의 고위 관료를 처단하는 의거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1931년 7월 만보산사건을 의도적으로 도발하였다. 그리고 이를 빌미삼아 9월 18일 만주를 침략하였다. 이어서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또 하나의 식민지로 만들어 만주지역을 중국으로부터 분리하여 일본이 직접 만주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이런 행동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장개석 정부는 일제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고 ‘안내양외(安內攘外)’의 무저항주의로 일관하면서 이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소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국제연맹은 중국 정부의 제소를 받아들여 릿튼(Lytton)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하기로 의결하였다. 릿튼조사단은 1932년 2월부터 7월까지 만주지역을 현지조사하기로 예정하였다. 조사단은 5월 26일부터 5월 30일까지 다렌에 머물며 조사활동을 수행한 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일정으로 다렌에 도착하였다.

김구는 국제연맹의 릿튼조사단이 다렌에 도착하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준비하였다. 릿튼조사단의 움직임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또 이들 조사단이 도착할 때 일본 관동군사령관 등 고위관료나 주요 인물들이 반드시 환영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일제의 고위 인사들을 처단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 거사를 결행할 인물로 대한교민단 산하의 의경대 대원이었던 유상근과 최흥식을 선발하여 한인애국단원으로 다렌에 파견한 것이다.

다렌의거를 유상근과 함께 결행하기 위해 먼저 다렌으로 파견된 인물은 최흥식이였다. 최흥식은 서울 황금정(黃金町) 이정목(二丁目) 22번지에서 부친 최한조(崔漢朝)와 모친 나씨(羅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팔경(八慶)이었다. 최흥식은 모친의 나이 44세에 태어났다. 난산이었고, 산후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모친은 최흥식을 낳은 후 3개월도 못되어 사망하였다. 최흥식의 부친은 72살 때 최흥식을 얻었고, 비교적 부유한 집안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7살 때 부친이 사망한 후 최흥식은 형 광식에게 의탁하여 살면서 글을 깨쳤고, 11살 때 서울의 수하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4살에 가정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인쇄소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도모하여야 했다. 하지만 인쇄소 견습생의 월급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꾸려 나갈 수 없어 3개월 만에 사직하고 15살이 되던 해 겨울에 새로운 생활방도를 찾아 집을 나섰다.

19살까지 5년간 인천, 충청, 전라,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각종 행상은 물론 만두장사까지 하면서 생계를 꾸렸으나 여의치 않았다. 최흥식은 이 기간에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만 생령을 고통과 압박 속에서 구해 낼 생각’16)을 갖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하기 위해 평양에 이르렀을 때 형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다시 서울 집으로 돌아와 형의 장례를 치른 후 1931년 4월 펑티엔(奉天)을 거쳐 다렌에 도착하였다. 다렌에서 11월까지 약 7개월 간 일본인이 경영하는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을 하면서 여비를 마련한 유상근은 배편으로 상하이에 도착하였다.17)

태극기 앞에 선 최흥식
태극기 앞에 선 최흥식

1931년 11월 상하이에 도착한 최흥식은 먼저 윤봉길이 취직해 있던 종품공사에 취직하여 프랑스조계 살파새로(薩坡賽路) 188번지 2층에서 생활하였다. 이 기간에 최흥식은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게 되었다. 최흥식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한 일자는 1932년 2월 24일이었다. 장소는 프랑스조계 패륵로(貝勒路) 신천상리(新天祥里) 20호 안공근의 집이었다. 모두 세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 최흥식 혼자 촬영한 사진, 또 하나는 입단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한 손에 권총을, 또 한손에는 놋쇠로 만든 타원형 폭탄을 들고 찍은 사진 등 모두 세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최흥식은 이 날 이외에 3월 24일, 또는 25일에 다시 사진을 촬영하였다. 이봉창이나 윤봉길과는 달리 중국식 복장을 하고 사진을 촬영하였고, 오른손에 든 권총은 브로우닝 2호형이었다.

최흥식은 김구로부터 다렌으로 가서 만주국의 일본 주요인물을 처단하라는 비밀지령을 받고 1932년 3월 27일 오전 10시 영국인이 경영하는 태고기선회사(太古汽船會社) 소유의 통주환(通洲丸) 편으로 상하이를 출발하여 4월 1일 다렌에 도착하였다. 유상근보다 앞서 상하이를 출발한 것이다.

유상근은 1932년 2월 24일에 한인애국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다른 단원들과 마찬가지로 입단선서문을 쓰고, 세 장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패륵로 신천상리 20호 안공근의 집에서였다. 1932년 2월 초 의경대에 가입한 지 채 한 달도 안되어 의경대를 사직하기 사흘 전인 2월 24일자로 한인애국단에 가입한 것이다. 유상근이 의경대를 한 달도 안되어 그만둔 이유에 대해서 일경에 잡힌 후 밝힌 청취서에서 ‘홍콩을 경유해 일본으로 건너갈’18) 목적으로 사직하였다고 밝혔다. 김구는 유상근에게 모종의 지시를 내렸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선서문의 요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군괴(軍魁)를 폭살’19)한다는 것이었다. 유상근은 일본으로 가기 위해 홍콩으로 출발하면서 놋쇠로 만든 타원형 폭탄 2개, 권총과 25발의 탄환을 함께 갖고 갔다.

그러나 유상근의 홍콩 경유, 일본행은 곧 취소되었다. 김구가 다시 유상근을 상하이로 불렀다. 최흥식을 이미 다렌으로 파견한 김구는 유상근도 다렌으로 파견할 목적에서 홍콩에 가 있던 유상근을 상하이로 다시 부른 것이다. 1932년 3월 27일 이전 홍콩에서 상하이로 되돌아 온 유상근은 김구와 다렌의거에 관한 모종의 지시를 받고 4월 27일 상하이를 출발하였다.

유상근은 상하이를 출발하기 이틀 전인 4월 25일 마당로 보경리 4호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윤봉길이 훙커우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모양의 수통형 폭탄과 도시락 형태의 폭탄 1개 등 2개의 폭탄을 건네 받았다. 그 중 수통형 폭탄 1개만을 사용하겠다고 하여 도시락 형태의 폭탄을 김구에게 다시 돌려 주었다. 수통형 폭탄을 자신의 거주지인 살파새로 188호 3층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 폭탄을 갖고 1932년 4월 27일 상하이를 출발해 5월 4일에 다렌에 도착한 것이다.20)

유상근보다 한 달 먼저 상하이를 출발하여 배편으로 다렌에 도착한 최흥식은 북대산통(北大山通) 5호 한인어부조합 내 김정순(金正順)의 집에서 거주하며 다렌의 여러 상황을 조사하고 있었다. 최흥식은 상하이를 출발할 때 김구에게서 다렌의 상황을 확인하고 폭탄이나 권총으로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本庄繁), 남만주철도 총재 우치다 고사이(內田康裁), 관동청장관 야마오카(山岡萬之助) 등을 처단하라는 특명을 받았다. 구체적인 처단 방법 등에 대해서는 혼조 시게루 등이 열차를 이용하여 움직일 때나 열차를 타고 내릴 때를 이용하여 폭탄을 던지거나 권총으로 처단하라고 하였다. 폭탄 등 거사에 필요한 물품은 일본 요인을 처단할 적당한 기회가 결정되면 편지 등의 통신을 이용하여 다렌에서 직접 수령하던지, 혹은 상하이로 와서 폭탄을 수령하던지 편리한 대로 하라고 지시하였다.

유상근은 4월 27일 윤봉길이 훙커우공원 의거에 사용한 것과 같은 수통형 폭탄을 김구에게 받아서 다렌으로 출발하였다. 다렌에 도착 후 아옥정(兒玉町) 만철기숙사 아옥요(兒玉寮)에 거주하면서 현지의 상황을 파악하였다. 다렌에서 최흥식을 만난 유상근은 김구의 밀명을 실행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고, 구체적인 준비를 위해 다렌에 거주하고 있는 이성원(李盛元)·이성발(李盛發) 형제에게 협조를 구하였다. 유상근은 상하이를 출발 시 이미 다렌에 최흥식이 파견되어 있으니 다렌 현지의 상황에 맞추어 함께 거사를 도모하라는 김구의 지시를 받았다. 김구는 처단 대상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만주사변 조사를 위해 국제연맹의 릿튼조사단이 다렌에 도착하면, 일본의 요인들이 영접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혼조 시게루 등을 처단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유상근과 최흥식은 각각 별도로 김구의 지시를 받고 한 달의 차이를 두고 상하이를 떠나 다렌에 도착하였다. 유상근이 다렌에 도착한 후 함께 만나서 만주국의 일본 요인을 처단할 것을 협의한 것이다. 유상근은 국제연맹 조사단의 도착과 관련한 일본 요인들의 동정을 사전 조사하기 위해 다렌에 도착한 직후 바로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최흥식에게는 하얼빈에 사는 누이를 만나러 간다고 말하고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유상근이 하얼빈에 도착한 1~2일 뒤 조사단 일행이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유상근은 이들에 대한 경비 상황과 일본 요인들 중에서 누가 마중을 나가고 영접하는지 등을 살펴보고 다렌에서 최종 거사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유는 다렌이 일본의 영토나 다름없는 조차지였기 때문에 다렌에서 거사를 결행하면 일본의 책임 소재와 함께 국제적인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유상근은 두 가지 방법을 구상하였다. 하나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을 맞이하기 위하여 일본의 주요인물들이 다렌역으로 마중을 나올 것이 분명하므로 이들 일본의 주요인물들이 다렌역에 도착하였을 때 폭탄을 던져 처단하는 방법이었고, 또 하나는 일본의 주요 인사들이 국제연맹 조사단을 방문하는 장소에게 의거를 결행하는 방안이었다. 이를 위해서 유상근은 현지에서 발행되는 각종 신문 등을 통해 조사단과 일본 주요인물들과의 회견장소와 시간 등을 파악하는 등 사전 준비를 진행하였다. 유상근과 최흥식의 거사를 지원할 이성원·이성발 형제는 의거에 사용할 무기의 운반 책임을 담당하였다. 폭탄과 권총을 상하이에서 중국 선박편으로 영구(營口)를 거쳐 다렌으로 운반하여 유상근에게 인계하였고, 유상근은 이를 커다란 가죽가방에 넣어 보관하였다.

이들 4명의 한인애국단원은 국제연맹 조사단 일행이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에 다렌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현지 발행 신문 등을 통해 알게 되었다. 유상근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의거를 결행하기로 결심하였다. 다렌역으로 조사단을 마중하러 오는 혼조 시게루 등을 처단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조사단 일행이 다렌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출발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30분에 거사를 결행하기로 하였다. 거사를 결행한 다음에는 일경에게 절대 붙잡히지 않기 위해 미리 준비한 권총으로 자결할 것까지 계획하였다.21)

4115-00-00(도왜실기)
4115-00-00(도왜실기)

유상근 등 한인애국단원 4명은 그러나 불행히도 다렌의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김구와 주고 받은 편지로 인해 일본 군경에 붙잡히게 되었다. 최흥식이 김구에게 발송한 전보가 그 단초였다. 최흥식은 5월 1일에 대련전신국에서 ‘부족한 70원을 발송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김구에게 보냈다.

주소지는 안공근이 거주하는 상하이 프랑스조계 패륵로 신천상리 20호였다. 수취인은 김구의 암호명인 ‘곽윤(郭潤)’이었다. 안공근의 거주지는 독립운동가들의 통신용으로 이용하는 주소였으나, 김구와 안공근 등이 윤봉길이 훙커우공원 의거 직후 모두 피신한 상태여서 이 전보를 수취하지 못하고 며칠이 지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5월 19일 상하이 일본전신국에 ‘배달불능 전보’로 통보되었다. 이 전보의 수취인 주소를 확인한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는 5월 19일자로 관동청에 발신인의 체포를 지시하였다. 결국 최흥식이 다렌의거를 결행하기 2일 전인 5월 24일 새벽에 붙잡혔고, 일제는 혹독한 고문과 심문으로 유상근의 거처를 알아내었다. 유상근 역시 5월 24일 아옥요에서 붙잡혔고, 이성원·이성발 형제는 다음 날인 5월 25일 일경에 붙잡히게 되었다.22)

광복을 하루 앞두고 옥중 순국하다

일제는 유상근 등 4명의 한인애국단원을 붙잡아 혹독하게 조사한 후 한인애국단에서 만주사변을 조사하기 위해 다렌에 도착한 국제연맹 조사단 일행을 폭사시키려고 준비하였고, 이를 사전에 붙잡은 것이라고 왜곡, 보도하였다. 이에 대해서 한인애국단장 김구는 1932년 8월 10일자로 <한인애국단선언>을 발표하여 일제의 간악한 흉계를 밝히고 대련의거의 분명한 목적을 밝혔다. 유상근 등 4명의 의사는 일본 관동군사령관 혼조 시게루 등 중국 동북지역을 침략한 군수뇌부 등 주요 인물을 처단하려는 것이었고 결코 국제연맹 조사단을 해하려는 것이 아니었음과 한인애국단의 ‘폭렬한 행동’은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위한 것이며 일제에게 자유를 빼앗긴 우리 민족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임을 분명히 강조하였다.

일제에 붙잡힌 유상근은 대련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폭발물취체규직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뤼순감옥으로 이감되었고 광복을 하루 앞둔 1945년 8월 14일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유상근의 독립운동사 공훈을 기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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