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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유관순

훈격아이콘 훈격: 대한민국장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2019년 (1962)

주요공적

1919년 학생으로 서울 만세시위 참여

1919년 천안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

1920년 3.1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옥중 만세시위 주도

1920년 고문으로 옥중 순국

2019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가 서훈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유관순

유관순 , 1902 ~1920 , 대한민국장 (2019) , 독립장 (1962)

선생은 1902년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 (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한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다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가친척이 모두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조상에 대한 의무 때문에 혼자서 제사 지내며 전통의 풍습을 지켜냈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이나 장남 유우석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막지 않고 아이들을 신식학교에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이러한 아버지 아래서 선생은 조상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도 받아들였고, 한편으로 교회에 다니며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사상의 영향도 받았던 것이다. 숙부가 지령리 교회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선생도 5세를 전후해 개신교를 접하였고, 이후 선생에게 교회가 배움터요, 놀이터가 되었다.

오빠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동생은 지기 싫어하고 고집스러우며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특히 어린 시절 선생이 잘 불렀던 노래는 당시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우국창가로 “무쇠골격 돌주먹 청년 남아야...” “샘물이 돌고 돌아 ...” 란 가사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 4월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자 1907년 8월 유중권, 유중무 등이 중심이 되어 목천 이동면 교인 82명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집안과 향리의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선생의 의식 속에는 민족, 국가, 헌신 등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배어 들고 있었다.

선생은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서울의 이화학당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년 3월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근대 선진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난 잔 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선생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 이어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선생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초 우리 민족은 이 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승전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고, 다음 해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갔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혼연일체가 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따라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경술국치 이래 민족운동을 모색해 왔던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 등이 수차 회합하여 논의한 결과, 1919년 1월 중순 대중화·일원화·비 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기독교 측에서도 1919년 1월 말 2월 초순경 상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로 들어와 이승훈(李昇薰)·양전백(梁甸伯) 등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들을 만나 국제정세를 전하고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이로써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1919년 1월 하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2월 초순 천도교 측의 요구에 의해 이승훈이 상경하여 연합 전선 형성 문제를 협의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이 문제는 논의 과정에서 난관은 있었으나, 2월 24일 민족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두 종교계는 교단과 종파의 이질성을 초월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할 것에 동의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 때 거사일, 독립선언서 및 각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의 담당,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에 보낼 통고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에게 보낼 청원서의 송부방법, 독립선언서의 서울과 지방 배포의 역할 분담, 민족대표의 선정,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韓龍雲)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되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 대연합 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 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 열사와 학우들ⓒ독립기념관(뒷줄 맨 오른쪽이 유관순 열사
이화학당 시절 유관순 열사와 학우들ⓒ독립기념관(뒷줄 맨 오른쪽이 유관순 열사

선생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김분옥 김희자, 국현숙 등 4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선생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3월 5일 선생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선생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선생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 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선생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선생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지령리(지렁이골, 현 용두리)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의 각 면·각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선생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선생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선생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날 3천여 장꾼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선생과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면서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선생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 때 선생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선생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고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고 윽박질렀다. 선생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 을 죽이느냐”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선생과 유중무, 조인원·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선생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선생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우석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선생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오빠 유우석도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판결문ⓒ독립기념관
판결문ⓒ독립기념관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 선생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5월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선생은 여기에서도 아침 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선생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다. 함께 재판받았던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주도자들은 재판결과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유관순 열사의 수형자 기록표ⓒ국사편찬위원회

이후에도 선생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선생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선생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10월 12일에서야 선생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 인수하였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3․1운동의 상징으로 국민에게 한민족의 독립정신을 일깨웠던 유관순 열사는 광복이후에도 국민들의 올바른 역사관 확립과 애국심 함양의 표상이 되어 민족정기에 공헌하고 비폭력·평화·민주·인권의 가치를 드높이는 등 국가의 기초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공적으로 2019.3.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가로 서훈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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