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개화운동 전개
1906년 1월 권병덕은 김연국, 김낙철(金洛喆), 원용일(元容馹)과 함께 단발을 하고, 손병희를 찾음으로써 천도교에 동참하였다.12) 1905년 12월 동학에서 이름을 바꾼 천도교는 보수적인 전통을 지키려는 데에서 벗어나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문명개화운동을 추진하였다. 천도교는 교헌의 제정, 교구제와 의회제의 실시, 신교리서의 발간·보급, 교인의 교육 등을 통해 천도교인에게 문명개화사상을 보급하고 교회를 근대화시키려고 하였다. 권병덕이 김연국과 함께 천도교에 들어간 것은 천도교의 문명개화운동 혹은 근대화운동에 동참하겠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이후 권병덕은 천도교의 간부로서 천도교회의 정비와 교세 신장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는 1906년 2월 천도교의 대정(大正)의 원직을 받고, 이문관(理文觀) 서적원(書籍員)에 임명되었다. 또 1906년 5월 천도교에서 실업을 장려하기 위해 조직하려 한 상업사(商業社)의 발기에 참여하였다. 1906년 10월 20일 전라도 순독(巡督)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의 교인과 교구를 관리하고 교당을 건축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다. 1907년 7월 16일 천주(薦主)가 되었고, 김연국이 대도주(大道主)가 된 직후인 1907년 9월 5일 현기사장(玄機司長)에 임명되었다.13)
천도교 간부들
그런데 1907년 12월 김연국이 손병희계 인물과 갈등을 빚고 천도교를 나와 이용구(李容九)가 이끌던 시천교(侍天敎)로 가자, 권병덕은 그와 동행하였다. 1909년 3월 그는 관도사(觀道師)의 지위에 올랐고, 얼마 후 봉도(奉道)가 되었다. 그리고 시천교인의 지침서인 『교인필지(敎人必知)』를 저술·간행하였다. 1912년 1월에는 시천교본부 종무장에 선임되었다.14)
한편 권병덕은 종교적인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사회단체에 참여하거나, 경제기관을 조직하거나, 교육활동을 통하여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였다. 권병덕은 1908년 경 대한협회에 참여하여 본회 회원으로 활동하였고,15) 시천교의 교수(敎授)로 소년입지회·부인회 등을 조직하고 소년운동과 여성운동을 지도하였다.16) 그리고 권병덕은 1910년 10월에는 박형채 등 시천교인 50명과 태인군에 농산조합을 설립하여 농민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였으며,17) 1912년 말 시천교본부 종무장을 사임하고 중앙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교육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18)
1913년 3월 송병준이 시천교의 교권을 장악하자, 권병덕은 김연국과 함께 시천교총부를 설립하교 시천교에서 분립하였다. 권병덕은 1913년 5월 시천교총부의 신도사(信道師)에 임명되었고,19) 1914년 『시의종경(是儀經政)』을 편찬하였다.20)
그런데 1914년경 시천교총부가 서도교인파와 남도교인파로 분열되었을 때 권병덕은 서도교인파를 지지하였다가 김연국과 대립하게 되었다.21) 이것이 원인이 되어 권병덕은 1915년 4월경 시천교총부로부터 출교를 당하였다.22)
독립선언에 참여
최초의 천도교 중앙총부
1916년 권병덕은 휘하의 이근상·손필규·박준관·김기태 등 30여 지도자 및 그 소속 교인과 함께 다시 천도교로 돌아왔다. 권병덕은 1917년 9월 장석승례(丈席承禮), 1918년에는 도사(道師)에 임명되어 천도교 중앙총부의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교인을 교화하고, 교세를 신장하는 활동을 하였다.23) 그러니까 1910년대 후반 권병덕은 천도교를 기반으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면서 민족운동의 역량을 신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을 전후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개조사상이 유행하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자, 일본과 중국과 노령과 미주 있는 민족운동가들은 조선을 일본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8월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져 미국의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며, 국내와의 연락을 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에서는 1919년 초 학우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2·8독립선언을 하는 한편, 중국 상해와 국내에 대표를 파견하여 민족 지도자와 연락을 취하였다. 그리고 노령과 미주의 한인들도 전로한족대회와 대한인국민회 등을 통해 독립을 이루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천도교에서는 1918년 말부터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손병희와 협의하여 조선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천도교에서는 1918년 12월 말에는 행정 자치 청원, 1919년 1월 중순에는 독립 청원, 1919년 1월 말에는 독립 선언의 방식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손병희·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은 기독교의 이승훈·함태영, 불교의 한용운 등과 협의하여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민족대표의 선정 등에 대하여 협의하여 1919년 2월 20일경 대체적인 사항을 마무리하였다.24)
이처럼 거사 계획이 수립된 직후인 1919년 2월 21일 권병덕은 동대문 밖 손병희의 집에서 손병희로부터 “이번에 조선독립선언을 하므로 여기에 가맹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러자 권병덕은 일본의 조선 병합을 반대하고, 조선의 독립을 갈망하였고, 조선인과 일본인의 대우가 상이한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후 식민지국가가 독립될 것이니 조선도 독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흔쾌히 승낙하였다.25)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서 등을 작성․서명한 김상규의 집
이후 권병덕은 2월 24 ~ 25일경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의 제작과 배포,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열국 대표에게 건의서와 일본정부와 조선총독에 보내는 청원서의 날인과 제출 등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그리고 2월 26일 권병덕은 재동 김상규(金相奎)의 집에서 독립선언서, 조선총독에게 보내는 청원서, 일본 정부와 미국 대통령 및 파리강화회의의 각국 대표자에게 보내는 건의서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발표장소를 파고다공원에서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으로 변경하는 데 참여하였다.26)
독립선언식이 개최된 태화관
3월 1일 오후 1시 반경에 손병희를 따라서 오세창 등과 함께 명월관지점인 태화관에 갔다. 그리고 권병덕은 오후 2시 독립선언식을 행하고,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 3창을 행한 후 체포되었다. 체포 직후 권병덕은 서대문감옥에 수감되었다.27)
권병덕은 1919년 8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내란죄를 범한 것으로 결정되어 고등법원에 송치되었다. 그런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이 사건을 ‘내란죄’로 보지 않고, ‘보안법 위반’과 ‘출판법 위반’과 ‘제령 제7호’에 해당하는 사건으로 보아, 다시 경성지방법원에 환송되었다. 그러나 1920년 8월 9일 경성지방법원이 이 사건을 수리하지 않는 것으로 판결하자 권병덕은 경성복심법원에 송치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권병덕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2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 산입)의 형을 받았다.28)
판결 후 권병덕은 서대문감옥에서 공덕리의 경성감옥으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 1년 5일간의 그물을 짜는 징역을 행하며 옥고를 치렀다.29)
덕수궁 뒷길에서의 만세운동
권병덕은 1921년 11월 4일 오전 11시 신홍식(申洪植), 이명룡(李明龍), 양전백(梁甸伯)과 함께 만기 출옥하였다. 석방 당일 권병덕은 가장 늦게 나왔는데, 이는 옥에서 찍은 사진이 없었으므로, 사진을 찍고 출옥한 때문이었다. 출옥 당시 권병덕은 “조선 동포끼리 서로 싸우고 잡아먹고자 하는 것은 사랑(愛)이 없는 것이매 첫째 사랑이란 것이 있어야 하겠다.”라는 말로 민족의 사랑과 단결을 촉구하였다.30)
주석
1)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17쪽.
2)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18쪽.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167, 266쪽.
3)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18-319쪽.
4)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20쪽.
5) 『東學道宗繹史』, 제2편 제8장, <遺蹟刊布及降書>,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29권(사운연구소, 1996), 267쪽.
오상준, 『본교역사』.
6)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21-323쪽.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167, 266쪽.
7)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24-326쪽.
8)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30-334쪽.
9)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37-346쪽.
10)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46-367쪽.
11) 『東學史』(草稿本), 권3, <南北調和>,『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1(사운출판사, 1996), 490쪽.
12) 「淸菴權秉悳先生自敍傳」, 『한국사상』 15, 1977, 382쪽.
13) 이동초 편저, 『천도교회 종령존안』(모시는사람들, 2005), 20, 21, 76, 97, 123, 125쪽.
14) 『김낙철역사』 1909년 3월, 1911년 1월 17일.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267, 268쪽
15) 『대한협회회보』 3, 1908. 6, <회원명부>.
16) 『김낙철역사』 1909년 3월, 1911년 1월 17일.
17) 『매일신보』 1910.10. 6, 5면 2단, <농산조합의 위치>.
18)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267, 268쪽.
19)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167, 268쪽.
『김낙철역사』 1913년 음 5월 17일.
20) 권병덕 편, 『시의경정』 1-7(시천교총부, 1914).
21) 『文章峻歷史』,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 10, <포덕 55년 갑인>.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167, 268쪽.
22) 『매일신보』 1915.4.16, 4면 9단, <시천교 교인출교>.
23) 이동초 편저, 『천도교회 종령존안』(모시는사람들, 2005), 217, 479쪽.
오재식 편저, 『민족대표 삼십삼인전』(동방문화사, 1959), 267, 269쪽.
24) 조규태, 「천도교와 3.1운동-천도교의 역할과 지방독립만세운동의 특성-」, 『천도교의 민족운동 연구』(선인, 2006), 15-22쪽.
25) 「권병덕선생취조서」, 이병헌, 『삼일운동비사』(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215-224쪽.
26) 「권병덕선생취조서」, 이병헌, 『삼일운동비사』(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215-224쪽.
27) 「권병덕선생취조서」, 이병헌, 『삼일운동비사』(시사시보사출판국, 1959), 215-224쪽.
2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1-41쪽.
29) 『매일신보』 1921.11. 3, 4면 12단, <19명 만기출옥, 명 4일 경성감옥에서>.
30) 『동아일보』 1921.11. 5, 3면 1단, <독립선언관계자>.
『매일신보』 1921.11. 3, 4면 12단, <19명 만기출옥, 명 4일 경성감옥에서>.
『매일신보』 1921.11. 5, 3면 1단, <악수하고 감루만 종횡, 작조 감옥에서 출옥한 십칠인>.
31) 「천도교의 내홍 급 개혁의 전말에 관한 건」(1922.3.9.),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38권 종교운동편.
32) 「천도교 신구양파의 분쟁해결」(1922.6.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38권 종교운동편.
33) 「천도교 신구양파 분쟁의 건」(1922.9.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 38권 종교운동편.
34) 村山智順, 『朝鮮の類似宗敎』(조선총독부, 1935), 244쪽.
『매일신보』 1923. 5.31, 4면 4단, <수운신사 환생이라고 허무맹랑한 괴물>.
『매일신보』 1923. 6. 1, 4면 8단, <가수운은 1주일 구류에, 남의 정신에 놀던 망령딘 노인>.
『매일신보』 1924.11.12, 4면 3단, <1주년 맞이의 수운교 기념식>.
35) 『매일신보』 1925. 7.27, 4면 5단, <양교병합와해와 시천교명 개칭>.
상제교는 1925년 6월 경 김연국이 계룡산 상제봉에서 시천교의 명칭을 바꿈으로써 탄생하였다(『朝鮮の類似宗敎』, 184쪽).
36) 『동아일보』 1925.10. 7, 2면 3단, <기미년운동과 조선의 48인>.
37) 『중외일보』 1928. 2.18, 4면 1단, <신간회 창립기념 대구서는 성황>.
38) 「천도교구파 중앙종리원 집회취체 상황 보고」(1932.12.24.), 『사상에 관한 정보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39) 『조선중앙일보』 1933. 5. 9, 3면 9단, <양성강습소 교사>.
『매일신보』 1933. 5.11, 2면 10단. <양성강습소방매문제>.
40) 권병덕, 『이조전란사』(대동사문회, 1935).
41) 「출판물 금지 요항」(1938.5.11.), 『조선출판경찰월보』 11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박제상에 대한 글은 ‘일본의 왕이 박제상에게 “만약 일본의 신하가 되면 중록(重祿)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자 박제상이 “나는 차라리 계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또 계림의 추초(箠楚, 채찍과 회초리)는 받겠지만 일본의 작록(爵祿)은 받지 않겠다.”라고 말하여 박제상이 화형을 당한’ 그런 내용이었다. 김방경에 대한 글은 ‘김방경이 원의 군대와 함께 함께 쓰시마[對馬島]와 이끼섬[壹岐島] 등에서 연전연승하여 천 여 급을 참하였다.’라는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또 을사조약의 체결에 대해 탁지부대신 이용익(李容翊)이 반대하다가 파면되고, 중추원 의장 이유인(李裕寅)등이 반대의 소를 올리고, 외부대신 이지용(李址鏞)과 동 참서관 구완희(具完喜)의 집에 폭탄이 투척된 일, 종로의 군중집회, 의정부 참정 이상설(李相卨)과 법부 주사 안병찬(安秉瓚)의 조약 취소 요청,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시종무관 민영환(閔泳煥) 등 200여명의 요청, 그리고 민영환·조병세·옥천 송산의 임병찬(林秉瓚)·전 참판 홍만식(洪萬植)·주영공사 이한응(李漢應)·학부 주사 이상철(李相哲)·평양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이 자결한 것, 궁내부 대신 이재극(李載克) 등이 관직을 버린 일 등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전 참판 민종식(閔宗植)의 홍주의병,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의 태인의병, 육군 정위 민긍호(閔肯鎬)의 강원도에서의 의병 활동, 최익현이 일본에 끌려가 불식자살(不食自殺)한 것, 나인영(羅寅永)과 김인식(金仁植)의 을사오적 처단 기도, 1907년 고종의 양위 후 의병의 봉기, 1908년 3월 23일 전명운(全明雲)·장인환(張仁煥)이 스티븐스를 사살한 것, 이또오 히로부미 피살 후 1개월 뒤 이완용도 화를 받은 것 등을 말하였다.
42) 박걸순, 『충북일보』 1915. 3.29, <충북 독립운동가 열전 – 권병덕>.
43) 『매일신보』 1943. 7.15, 1면 12단, <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