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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현천묵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3년

주요공적

1919년 북로군정서 부총재

1920년 청산리 전투 참여

1926년 임시의정원 국무원으로 임명

공훈전자사료관 이달의 독립운동가 콘텐츠 심볼

현천묵

현천묵 , 1862 ~(1928) , 독립장 (1963)

밀강(密江) 강상에 원한 잠긴 물이 흐르는데, 슬픈 물결은 목메어 울고, 수심하는 구름은 처량하게 떠돕니다. 한 마디 소리로 크게 슬퍼하니 태양도 광채가 없습니다. 보일 듯한 그 모습 빈 들보에 지는 달만 비치는데, 정령(精靈)은 어디 계신지, 옥경(玉京)이 아득하게 멉니다. 가서 상제 보좌(寶座)에 호소하소서, 한배님 계시오리다. 5계(界)는 괴롭고 어둡지만 3궁(宮)은 길하고 상서롭습니다. 이 세상 길이 떠나서 무강한 쾌락을 누리소서.

- <추도문 중 일부> -

사립보성학교를 민족교육 산실로 육성하다

현천묵 선생은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부윤동에서 1862년 4월 9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백취(白醉)이다. 아버지 현정눌(玄貞訥)과 어머니 울진 장씨(蔚珍張氏) 사이에는 모두 1남 4녀가 있었다. 아버지 현정눌과 현천묵이 관직을 지낸 경력은 없다. 집안 배경이나 어떠한 환경에서 자랐는지, 학업이나 현천묵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인물은 누구인지 등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근대 인물들의 성장 배경을 알 수 없는 바와 같다.

1909년 작성된 이력서는 학력과 경력 등을 부분적이나마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는 1909년 3월 함북 경성군의 사립함일학교(이하 함일학교)와 사립보성학교(이하 보성학교)가 함일실업학교로 통합하기 위하여 보성학교 교장이었던 선생이 직접 작성·제출하였다. 현천묵은 10세가 되던 해부터 사숙에 입학하여 22세까지 한문을 수학했다. 13년간이나 전통적인 학문을 공부한 사실은 현천묵의 집안이 교육을 매우 중시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또한 학비 걱정 없이 오로지 공부에 전념할 수 있을 정도라면 상당한 재력을 지닌 가문임을 쉽게 짐작할 수 부분이다. 현천묵은 전주 이씨와 결혼하여 아들 현기준(玄機濬)과 현학준(玄學濬)을 두었다.

교육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인생의 황금기인 40대 중반인 1906년 보성학교 학감을 맡으면서 본격적인 교육활동으로 이어졌다. 보성은 “널리 이루게 한다.”는 의미로서 곧 “널리 사람다움을 열어 이루게 한다.”는 『논어』에서 유래하였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과 국가의식 등을 일깨우려는 의도였다. 보성학교는 경성군 오촌면 이상동(梧村面 二上洞)에 설립된 민족교육 산실로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06년 3월 경성향교 유생들의 허락과 지원으로 앞 공터에 근대교육기관을 설립했다.

일제는 민족교육을 탄압하기 위하여 1908년 「사립학교령」을 공포·시행한다. 저들은 고의로 설립인가를 지연하거나 일본인 교감을 파견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이에 1909년 5월 8일 서류를 구비하여 ‘설립인가청원서’를 학부대신에게 제출하여 인가를 받았다. 당시 설립자는 최붕남(崔鵬南)이었다. 이러한 대응책은 시세변화에 부응하는 등 현천묵의 ‘개방적인’ 사고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초대 교장은 최붕남, 학감은 현천묵 등이었다. 보성학교는 함일학교와 통합하는 가운데 함북지역은 물론 대한제국기를 대표하는 민족교육의 요람지로서 자리매김하기에 이르렀다.

서울의 보성학교와 보성중학교 교주로서 활동하던 이종호(李鍾浩)는 함경지역 근대교육 활성화를 위한 시찰 길에 올랐다. 그는 보성학교를 서울의 보성학교 지교(支校)로서 인식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이종호가 경성 대성촌에 설립한 함북 보성학교에 재작일 도착하여 교황(校況)을 시찰하고 직원의 사무와 학원의 수업과 부로(父老)의 혁구(革舊)에 대하여 각별권면(各別勸勉)하고 학교의 만세를 고창(高唱)하니 일반 직원과 학원이 교주(校主) 해씨(該氏)의 백세를 삼창한 후 다과를 설행(設行)하니 당일 성황은 함북의 초유한 사(事)라고 칭송(稱頌)한다더라.

『황성신문』 1907년 7월 13일 잡보 「鏡郡普校 盛況」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임직원과 학생들은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고 나섰다. 교장을 비롯한 교사와 학생들은 적극적인 참여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발전을 거듭하던 보성학교는 일제 통감부의 식민지 노예교육에 따라 함일학교와 통합되어 실업학교가 되었다. 일제는 순종과 복종을 강요하는 ‘저급한 식민지형’ 인간을 양성하려는 의도였다. 함일실업학교도 결국 강제 병합 이후 1911년 폐교되는 비운을 맞았다.

당시 학교 운영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칙은 37개조에 달할 만큼 학사 운영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포함한다. 목적은 남자에게 필요한 고등보통교육(중등교육) 실시에 있었다. 수용 학생은 100인으로 본과는 3년, 특별과는 1년 과정이었다. 학기는 3학기제로 운영되었다. 제1학기는 4월 1일부터 8월 31일, 제2학기는 9월 1일부터 12월 31일, 제3학기는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였다. 5개월·4개월·3개월을 단위로 학기제를 신축적으로 운영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운영경비 중 유지비는 기본재산과 수업료 등으로 충당되었다. 수업료가 부족할 경우에는 설립자가 이를 충당하도록 규정하는 등 경비 조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학과과정은 본과는 매주 26시간 이상 33시간 이하, 특별과는 28시간 이상 33시간 이하였다. 직원은 교장 1인, 교원 2인, 서기 1인 등을 두었다. 주요 교과목은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수업시간).

1학년은 수신(1)·국어와 한문(9)·일어(4)·본국역사(2)·본국지리(2)·수학(6)·박물(2)·물리와 화학(2)·도화(1)·음악(1)·체조(3) 등 33시간이었다.

2학년은 수신(1)·국어와 한문(7)·일어(4)·본국역사(2)·본국지리(2)·수학(6)·동식물(2)·물리(2)·도화(1)·음악(1)·보통체조(3)·농업(2)·상업(2)·공업(2) 등으로 편성되었다. 수의(隨意)과목은 농업·상업·공업 등이었다.

3학년은 수신(1)·국어와 한문(5)·일어(4)·본국역사(2)·본국과 외국지리(2)·수학(4)·박물(2)·물리와 화학(2)·법제와 경제(4)·도화(1)·음악(1)·체조(3)로 편성했다. 수의과목은 2학년과 동일하였다. 특별과 과정은 수신(1)·국어와 한문(2)·일어(3)·역사(3)·지리(3)·산술(4)·물리와 화학(3)·박물(3)·도화(1)·체조(3)·부기(2)·법제와 경제(5) 등 총 33시간이었다. 이를 통하여 특별과는 1년 속성과정임을 알 수 있다. 교과과정이나 수업시간은 함일학교와 똑같다. 이는 ‘의무교육’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된 사실을 보여준다.

교과용 도서는 수신, 국어·한문, 지리, 역사, 도화, 체조 등은 교과서 없이 구수(口授)에 의존하였다. 일본어는 일본 문부성에서 발간한 『초등소학독본』, 산술은 이교승의 『산술교과서』, 물리는 국민교육회의 『신찬소물리학』, 박물은 유성준·김상천 공저인 『신찬소박물학』, 부기는 임경재의 『간이상업부기학』, 법률은 주정균의 『법학통론』, 경제는 이필선의 『보통경제학』 등을 교과서로 사용했다. 수신·역사·국어·지리 등 민족의식이나 국가정신을 고취시키는 교과목은 별도로 교사에 의하여 교재를 만들었다. 이는 「사립학교령」이나 「교과서검정규칙」 등에 의하여 우리 역사·지리나 국어 등을 폄하한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의도로 주목된다. 즉 학생들에게 자국사·지리·문화 등을 통한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함이었다.

보성학교 학감으로 학교의 주요업무와 학생들을 관리·감독하던 현천묵 선생은 1909년부터 보성학교 교장이 되었다. 동시에 경성향교 직원으로 근무하며 보성학교와 경성향교를 운영하는 중심적인 인물로서 부각되었다. 경성향교와 보성학교의 직원과 교장 등을 맡은 데에는 이곳 유림들 사이에서 상당한 신임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 현천묵은 학교 운영 등을 담당하면서 경성 내에서 인맥과 사회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현천묵이 1908년 대한협회 경성지회장으로 피선은 이러한 구국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대한협회 경성지회장으로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을 이끌다

군대해산 이후 국경지대는 의병전쟁을 전개하는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되었다. 반면 일제의 대륙진출을 위한 교두보로서 군사요충지로 변화도 수반되는 분위기였다. 그런 만큼 일제침략 강화와 더불어 주민들에 대한 불법적인 수탈은 다반사로 자행되는 형국이었다. 일제는 한국강점과 대륙 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건설에 착수했다. 1907년부터 나남에 대규모 병영건설을 5개년 계획으로 추진한 사실은 이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리하여 1911년 제반 군사시설을 구축할 정도로 빠르게 추진되었다. 일본군 제19사단 주둔은 용산 제20사단 사령부와 함께 사실상 일본 침략군의 2대 거점이었다.

상황 변화는 주민들에게 배일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요인 중 하나였다. 계몽단체인 대한협회 경성지회는 1907년 12월에 조직되었다. 경성지회 설립인가 당시 임원진은 지회장 이희덕(李羲德), 부회장 최병철(崔秉哲), 총무 김영학(金永學), 평의원 이운협(李雲協)·조정국(趙鼎國), 간사원 김정구(金鼎九)·홍재웅(洪在雄), 회계 김석구·최붕남, 서기 이진규(李震珪)·손만승(孫萬承) 등이었다. 1908년 7월 통상회의에서는 지회장 현천묵, 부회장 홍재웅, 교육부장 이긍직(李肯稙), 사무장 이운협·최병철, 재무장 이양희(李陽羲), 실업부장 이희덕 등으로 교체되었다. 현천묵의 노력으로 지회원은 280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대한협회 지회 중 가장 많은 회원을 거느린 단체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회원 수 증가는 다양한 항일투쟁을 모색·전개할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었다.

현천묵이 지회장이 되면서 경성지회는 대한협회의 목적에 부합하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대한협회의 강령은 “① 교육 보급, ② 산업 개발, ③ 생명재산 보호, ④ 행정제도 개선, ⑤ 관민폐습 교정, ⑥ 근면저축 실행, ⑦ 권리·의무·책임·복종의 사상 고취” 등이었다. 지회장에 취임한 후 교육부·재무부·실업부 신설은 본부 강령을 실행하면서 경성지회의 활동영역을 공고히 하려는 일환이었다. 이와 같은 변화는 풍부한 인적 자원 곧 지회원의 급속한 증가로 가능할 수 있었다. 특히 현천묵 선생은 본부에서 가장 중시하는 교육사업 일환으로 보성학교 교육내실화와 재정적인 확충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함일학교에 대한 지원도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일환이었다. ‘함일학교유지계’는 교육구국운동과 의병전쟁을 접목시키는 ‘연결고리’로서 활용되었다.

다른 지회와 달리 경성지회에서 나타난 특이점은 지역 유림들의 적극적인 참여였다. 더욱이 경성의병과 상호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활동을 전개한 사실도 주목할 부분임에 틀림없다. 대한협회 본부는 의병활동에 대해 대체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에 경성지회 활동은 너무나 대조적이고 특별한 경우이다. 경성지회는 보성학교와 함일학교의 후원 명목으로 받은 자금을 의병 활동비로 제공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지회원들은 경성의병에 군자금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항일전에 직접 참여하였다. 이들은 1908년 9월 경성의병과 함께 명천군(明川郡)에 주둔한 일제 군경을 기습·공격하는 데 선봉으로 나섰다. 현계갑(玄季甲)·이승원(李昇遠)·이군심(李君心)·정기창(鄭基昌) 등 경성지회의 주요 인물들은 체포되었다. 일제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었다.

금년 9월 4일 명천군을 습격한 일사(一事)가 있다. 이는 전연 동 협회원의 행위에서 나온 것으로 교묘히 병력과 재류일인(在留日人) 수를 조사하여 일거에 일인을 격퇴하려고 하였다. 당시 직접 인병(引兵) 가효(加効)한 영유(領袖)는 동 협회원 중의 중진인 현계갑(주북면 상사동)·이승원(명동사 산성)·이여욱(李汝郁, 어랑면 은동 거)·현우군(玄雨君, 동상)·정운여(鄭雲汝, 동상)·이남기(李南基, 어랑면 안교동) 등이 수괴 최덕준(崔德俊)과 협력한데서 나온 사건이다. 그리고 정운여는 이 소란에 즈음하여 동지(同地)의 호농 김자성(金自成)으로부터 돈 1만여 원을 강탈하고 가옥을 소훼하고 철퇴한 사실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대한협회 폭도 관계의 건(상보)」, 『한국독립운동사자료』 13, 1984

명천전투로 경성지회 인물들이 체포되는 등 지회가 해체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지회장으로 단체의 해산을 막기 위해 ‘친일을 가장하여’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현천묵 이하 간부 6명은 함일학교와 보성학교 학생들에게 단발시키는 등 과감한 ‘임기응변의 조처’를 취하였다. 자구책은 실효를 거두어 경성지회 해산은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경계대상에서는 벗어날 수 없어 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대종교 입교로 민족의식을 앙양하다

현천묵의 활동 중 주목할 대목은 서일(徐一)과 만남이다. 서일과 정확히 언제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천묵이 경성지회장을 맡아 함일학교·보성학교를 운영·지원하면서 함일학교를 설립한 이운협, 교장 김영학과 함께 대한협회에서 교우하였다. 서일은 자신의 아들인 현기준 또한 이운협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서일이 함일학교 전신인 유지사숙(일명 유지의숙) 졸업생이자 10여 년간 교사생활과 대한협회 경성지회원·임원으로 활동한 이곳을 대표하는 계몽활동가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현천묵과 서일 만남은 1908년에서 1909년 사이 혹은 그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일이 1881년생이고, 큰 아들 현기준은 1880년생이다. 동년배이나 이들은 사제지간이다. 서일이 1911년 중광단과 대한정의단·대한군정서 등을 조직·운영하는데 지원한 사람은 바로 현천묵이었다.

경성지역을 기반으로 구국운동에 매진하던 현천묵은 1909년 서울에서 개창된 단군교를 수용한다. 단군교는 나철(羅喆, 본명 나인영, 1863-1916)이 신교의 중광과 종도를 재천명을 목적으로 삼았다. 동양평화와 인류의 자유·평등·박애의 평화를 증진하려는 이념은 단군의 뜻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새롭게 생긴 단군교를 언제, 어떻게 현천묵 선생은 받아들였을까?

『대종교중광60년사』에 따르면, 현천묵 선생은 구국운동에 매진하는 관북지역 지사로서 단군교가 중광한 직후에 봉교하였다고 한다. 1909년 2월 5일(음력 1월 15일)에 단군교는 개창되었다. 이날 나철을 비롯해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강우(姜虞)·정훈모(鄭薰謨)·김윤식(金允植) 등 수십 명은 서울 북부 재동 취운정 아래에 모였다. 이들은 초가집 북벽에 ‘단군대황조 신위’를 모셔놓고 제천대례를 올리고 ‘단군교포명서’를 공포하였다. 당시 참가한 인물들의 명단에서는 현천묵이 찾아지지 않는다. 그런데 단군교 개창할 즈음에 그는 서울에 활동하고 있었다.

함북 경성군거 현천묵씨가 유사(有事) 상경하였다가 고아원을 시찰하고 행탁(行橐)을 경(傾)하여 2원 돈을 기부하였다더라.

『대한매일신보』 1909년 2월 17일 잡보 「현씨기부」

함북 경성 거하는 현천묵씨는 본래 자선가로 유사(有事) 상경하였다가 고아원 형편을 관각(觀覺)하고 돈 2원을 기부하고 갔다더라.

『황성신문』 1909년 2월 21일 잡보 「천묵씨자선」

이처럼 단군교가 창시되던 1909년 2월 현천묵 선생은 공교롭게도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물론 다른 일로 상경하였을 가능성은 전혀 배제할 수 없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그를 함북 경성에 거주하는 자선가로 소개하면서 고아원에 기부한 사실을 알렸다. 이를 통해 단군교가 개창하던 즈음 단군교에 입교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북간도로 망명한 직후부터 적극적인 포교활동에 나선 점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결국 선생은 단군교 주요 인물들과 함께 개창에 참여하였다고 짐작된다.

단군교 개창 초기 봉교한 것으로 보아 현천묵은 이전부터 단군교 관련 인물들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천묵이 단군교에 봉교하게 된 것은 호석 강우(湖石 姜虞)와 관계를 통해서이다. 강우는 현천묵이 사망하였을 당시 대종교 교단을 대표하여 추도문을 지었다. 이는 현천묵의 단군교 입교와 밀접한 관련성을 시사하는 대목 중 하나이다. 강우는 1895년부터 1904년까지 9년간 함경도 감리(監理)를 지냈다. 러시아의 함경도 경흥조차 문제, 성주와 길주의 합군 문제 등을 해결하면서 함경도인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아마 이때 현천묵과도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전통적인 한학을 수학하여 유림으로 지역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현천묵은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보다 민족과 나라의 맥을 이어가는 단군교 개창에 함께 한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단군교에 입교하는 유림들 중 상당수는 이러한 인식에 따라 활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민족종교로서 대종교는 이러한 인식 변화와 더불어 확고한 저변을 확충할 수 있는 밑거름이었다.

현천묵 선생은 대한협회 경성지회를 이끄는 수장으로 교육과 자강을 통해 구국의 방법을 모색하였다. 경성의병을 지원하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항일전선에 앞장섰다. 일제의 탄압은 더욱 가중되면서 자신의 독립운동 방략에도 한계를 절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새로운 대안은 단군교를 통한 올바른 역사의식과 민족정체성 부활이었다. 우리 겨레와 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단군교의 이념은 다시금 독립에 대한 열망의 불씨를 되살리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민족주체성 정립이라는 시대적인 과제는 이러한 인식 변화로 새로운 계기를 맞았다. 중국 동북지역으로 망명과 대종교 포교는 현실인식 심화와 더불어 추진되었다.

한인사회에 대종교 포교와 민족교육을 실시하다

1910~1911년경에 현천묵 선생은 북간도로 망명길에 올랐다. 이유는 1910년을 전후로 더 이상 함경도에서 구국계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이 크게 작용했다. 심혈을 기울여 운영하던 보성학교와 함일학교가 함일실업학교로 통합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폐교되고 말았다. 대한협회 경성지회도 명천전투 이후 일제의 감시로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함경도 인사들은 중국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등지로 망명 대열에 동참하였다. 더욱이 1908년 후반부터 경성의병들은 일제의 탄압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근거지를 찾아 만주와 연해주 등지로 떠났다. 서일·김영학·임도준(任道準)·김성(金星) 등에게 망명은 새로운 독립운동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 긴급한 현안으로 다가왔다.

다른 이유는 대종교가 북간도지역에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하려는 계획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1910년 10월 대종교는 북간도 삼도구에 대종교 시교사를 설립한 후 1911년 7월 윤세복이 환인현에 시교당을 설치하는 등 본거지를 옮겼다. 대종교 교세가 확산되는 가운데 1914년에는 대종교의 본부를 백두산 북쪽 화룡현(和龍縣)에 마련했다. 이곳은 조선 후기부터 이주한인들에 의하여 크고 작은 한인촌이 우후죽순처럼 형성되었다. 더욱이 국경지대는 일제의 군사적 요충지로 다른 지역보다 수탈이 심했다. 이주한인들 대부분은 일제의 탄압으로 이곳에 정착하였기에 민족의식을 내세우는 대종교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현천묵 선생은 이러한 상황에서 직접 포교 활동으로 교세 확장에 성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간도지역으로 대종교인들 이주에 부응하여 현천묵 선생은 적극적으로 대종교를 전파하였다.

…(상략)…“지금 서양의 사조가 크게 동탕하여 선비들마다 도를 달리하고 사람들마다 논의를 달리 하지만, 오직 단군교로 명분을 삼는 자들만이 조국의 사상을 가지고 있다. 당신의 생각은 어떠신가요?” 내가 그 취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현씨가 대답하기를, “이 교는 오늘날 이른바 무슨 회 무슨 교라고 하는 것들과 비견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조국의 정신을 고무시켜 외부적인 교설을 갖춤으로 국혼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단군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군주이자 만백성의 종조(宗祖)이시다. 그러므로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자식이 자식답고 형이 형답고 동생이 동생다우며 남편이 남편답고 아내가 아내답게 되는 도리가 주된 취지입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은 백성들이 두발을 따서 두건을 쓴 다음에 복장은 흰색을 입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두발을 보존하고 흰옷을 입는 것이 이 교의 형식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정말 노장(老丈)께서 하신 말씀과 같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유도(儒道)의 가르침이고 내가 평생 주의를 기울인 것입니다. 비록 그렇다 해도 말을 다 믿을 수는 없으니 훗날을 기다려 옳은지 따져봅시다.” 그러자 현씨가 말했다. “그대가 만일 입교하여 그대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게 있다면 스스로 탈퇴하십시오.” 내가 말하길, “그런데 노장께서 저에게 입교를 권하시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현씨가 말했다. “그대는 지금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존경하는 중인(中人)입니다. 한번 그대의 이름을 빌릴 수 있다면 단지 교단 안의 자랑이 될 뿐만 아니라 먼데서나 가까운 데서 좋은 소문이 날 것입니다.”…(하략)…

1912년 1월 김정규(金鼎奎)가 현천묵으로부터 대종교를 권유받은 상황에 대한 일기이다. 김정규는 1881년생으로 현천묵과 같은 고향 출신이다. 그는 성리학을 공부하여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하던 한학자였다. 1908년부터 경성지역 의병에 참여하여 참모장으로도 활동했다. 1909년 7월 이후 북간도로 망명하여 1912년 현천묵을 만나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현천묵 선생은 김정규에게 대종교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조국의 정신을 고무시켜 외부적인 교설을 갖춤으로 국혼을 잃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설파하는 데 앞장섰다. 대종교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국혼을 잃지 않게 하는 종교임을 재삼 강조하려는 의도와 맞물려 있었다. 단군은 우리나라 최초의 군주이자 종조(宗祖)라면서 강인한 민족성을 특별히 내세웠다. 이는 당시 현천묵이 대종교에 대해 자신의 견해와 대종교 포교에 열성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1912년 10월 3일은 대종교가 북간도에 지사를 설치한 뒤 처음으로 맞이하는 개천대경절일이었다. 나철은 개식원도를 하고 경하사는 현천묵이 맡았다. 나철 다음으로 현천묵이 경하사를 맡았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다. 당시 북간도에는 많은 함경도인들 이주와 함경도 의병들도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다. 경성의병과 개화인사들 사이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진 현천묵의 대종교 지도자로서 역할은 빛을 발하는 순간을 맞았다. 함경도지역에 기반이 적었던 나철에 비해 대중적인 기반 확충은 대종교 지도자로서 위상을 가늠하는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현천묵 선생은 대종교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의 교장을 맡아 이전부터 추구해온 민족교육을 계속 이어갔다. 1912년 9월에는 대종교의 북도본사가 위치한 화룡현 삼도구 청파호에 청일학교(靑一學校), 10월에는 화룡현 명신사 이도구에 동일학교(東一學校)를 각각 설립하였다. 청일학교는 한문·산술·습자·창가·체조 등의 기초교육, 동일학교는 중국·역사·한문·지리·산술·체조·창가·일본어·중국어 등을 중심으로 가르쳤다. 동일학교는 1920년 대한군정서의 훈련을 견학할 정도로 문무쌍전에 의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초석이었다.

졸업생들은 이후 대한군정서의 독립군으로 성장했음을 가늠할 수 있는 대목임에 틀림없다. 현천묵 선생은 학교 운영을 통하여 이주한인 자녀들에게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 조성과 아울러 자연스럽게 대종교를 포교할 기반을 구축했다. 이리하여 현천묵 선생은 자신의 지역적 기반과 경성지역에서 학교운영 경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대종교의 북간도로 본부 이전과 포교, 민족교육에서 핵심적인 역할은 현천묵의 시대적인 사명이나 마찬가지였다.

대한군정서에서 활약하다

북간도로 망명한 뒤 현천묵 선생은 서일과 함께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하여 대종교 포교와 이주한인들을 규합·보호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물론 자신의 의도대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대종교는 1914년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였으나 1915년 10월 조선총독부령의 「종교통제안」에 의해 해산을 명령받았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해 8월 15일 교주 나철이 구월산에서 유서를 남긴 채 자결하는 등 외우내환에 직면했다.

제2대 교주 김교헌은 항일운동을 위한 교세 확장과 난관을 극복하는 데 진력하였다. 1919년 2월 김교헌 등 39인은 만주 길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선포했다. 여기에는 다수의 대종교인들이 참여·서명했다. 선언서 선포 이후 3·1운동의 열기는 한인사회로 급속하게 파급되었다. 현천묵도 3·1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독립신문』 기사에 의하면, 현천묵은 1919년 3월 24일 연길현 이도구에서 주민 800여 명과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3·1운동은 한민족 열망과 달리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막을 내렸다. 이후 현천묵 선생은 서일을 비롯한 대종교 인사들은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이제 종교단체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무장투쟁과 독립전쟁을 위한 단체 조직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순간을 맞았다. 이들은 김좌진(金左鎭)과 대한제국 장교출신인 나중소(羅仲昭) 등을 영입하여 무장투쟁단체로 변모를 꾀했다. 결과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조직으로 귀결되었다. 그 해 10월 대한군정부로 이름을 바꾸고 임시정부의 허가를 신청했다.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바꿀 것을 제안한 후 임시정부 국무원포고로 인정하였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태극기와 장총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 태극기와 장총

대한군정서는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좌진 등이었다. 이들은 군사 양성과 아울러 무기를 구입하는 등 독립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50대 후반에 현천묵이 무장투쟁단체에서 부총재를 맡은 사실은 주목된다. 현천묵은 계몽운동과 민족교육으로 구국운동을 모색하였다. 대종교를 수용한 후 만주로 망명하여 한민족의 대동단결로 일제에 저항하는 데 앞장섰다.

고령에 무장투쟁단체 부총재로서 활동은 서일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그동안 구국활동으로 맺어진 인적 기반은 무장투쟁 활성화를 꾀하는 에너지원이었다. 단체의 비밀유지를 위하여 일본인 밀정을 총살하는 등 과감한 행동도 불사하였다. 대종교인으로서 본분도 잃지 않았다. 주목되는 부분은 대한군정서 본부 안에 수도실을 마련한 사실이다. 현천묵 선생은 수도실에서 기도를 올리며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1920년 6월 홍범도(洪範圖) 부대의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훈춘사건 등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일제 압력에 중국군은 독립단체들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군정서원들은 삼도구 청산리로 이동했다. 일본군 공격에 대비하여 이도구에 주둔한 홍범도 연합부대와 연합작전을 모색하였다.

제2차 일본군대의 삼도구 동신장(同信場, 上村)에의 도착 전일, 묘령(廟嶺)에서 현천묵·계화(桂和)·이범석(李範奭)·안희(安熙)·이학근(李學根)·홍범도·박영희(朴永熙) 등 군정서 측 및 홍범도 측의 수뇌가 회합하여 일본군대응책에 대해 토의하였다. 전투할 것인가 회피할 것인가의 양파 의론이 백출(百出)하였으나 결국 현천묵 등이 주창하는 다음의 논지에 기초하여 당분간 일본군의 공세를 회피할 것을 결의하였다.

혼춘사변에 의해 드디어 일본군대가 출동하여 아작전(我作戰)에 장애를 가져온 것이 심대하다. 이제 간도에서 일본군대와 교전하면 그 승패는 미지수에 속할지라도 그 때문에 지나(중국-필자주) 측의 감정을 해(害)하고 일본 측은 다대의 병원(兵員)을 증파하기에 이를 것이다. 아단체(我團體)는 실로 내외독립의 조아(爪牙)로서 역시 광복의 맹아이다. 구전(舊戰)의 호기는 멀지 않았다. 시하 은인자중(隱忍自重)을 요한다.

「不逞鮮人の行動(1920.10.29.)」, 『현대사자료』28, みすず書房, 1972, 381쪽

청산리 전투도
청산리 전투도

1920년 10월 19일 연합회의에서 현천묵·계화·홍범도 등은 일본군 대응책과 관련해 봉오동전투에 이어 다시 전투를 재개할 것인지, 이번에는 전투를 피할 것인지 논의했다. 현천묵 선생은 당분간 일본군에 대한 공격을 피할 것을 주장한다. 그의 피전책은 결국 받아들여졌다. 일본군은 이곳에 침입해 한국인 민가·학교·교회 등에 대한 방화와 학살을 자행하자, 대한군정서와 홍범도부대는 교전을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독립군이 승리했다.

청산리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패전을 설욕할 군대를 증파하여 한인들을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끔찍한 ‘피의 복수’가 시작되었다. 대한군정서와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은 대한의용군총사령부(일명 대한총군부)로 재조직되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이 맡았다. 1921년 4월 대한의용군총사령부는 독립단대회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에서 홍범도로 바뀌었다. 대한독립단은 대한군정서를 확대하여 여러 독립군단체를 통합한 체제로 편성했다. 이는 만주지역 독립운동단체의 군사통일이라는 염원을 실현시킨 결과였다.

일제의 보복 충격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련이 찾아왔다. 1921년 6월 28일 자유시참변(일명 黑河事變)이었다. 독립군과 박일리아부대, 박그리고리부대는 소비에트혁명군 편에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와중에 독립군은 흑하에서 러시아 한인부대와 군권쟁탈전을 벌였다. 결과로 대한의용군은 극동군 29부대에게 무장해제 되기에 이르렀다. 많은 독립군은 체포·감금되는 등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자유시참변으로 군사통일은 요원하게 멀어졌다. 현천묵 선생은 서일·김좌진·조성환·나중소 등과 자유시에서 탈출하여 북간도로 되돌아왔다. 와중에 중국 마적단 습격으로 많은 독립군도 잃었다. 서일은 책임을 통감하고 1921년 음력 8월 27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일의 사망은 현천묵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北軍政署總選擧
北軍政署總選擧

서일 사망으로 충격을 받은 대한군정서는 일시 해산을 고민하였다. 현천묵을 비롯한 간부들은 회의를 소집하여 군정서의 존속 여부를 논의했다. 논의가 분분한 가운데 단체를 존속하기로 결정하였다. 현천묵 선생은 대한군정서를 재정비하여 총재가 되었다. 총재가 된 배경은 61세 고령으로 무장항쟁을 이끄는 풍부한 경험이 주요한 밑거름이었다.

대종교 부흥과 독립운동단체 통합에 나서다

서일의 사망 이후 현천묵이 대한군정서를 이끌면서 독립운동노선은 이전과 다른 형태를 나타났다. 교육과 종교를 중시해온 현천묵이 총재를 맡게 됨에 따라 대한군정서는 일제에 대한 직접적인 투쟁보다 대종교 포교와 한인들의 교육, 독립운동단체 통합을 통해 만주지역 한인들의 역량을 하나로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이는 현천묵이 독립운동에 이바지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를 맡은 뒤 가장 먼저 본부를 이동시켰다. 김혁(金赫)과 논의하여 대종교의 종교적 부흥과 대한군정서의 재기를 위하여 본부를 밀산현에서 대종교 본당이 있는 영고탑으로 옮겼다. 김교헌은 대한군정서의 영고탑으로 이전에 적극 찬성하였다. 당시 만주지역의 대종교 교세는 서일이 사망한 후 위축되는 상황이었다. 선생은 본부를 영고탑으로 옮김과 동시에 대종교 포교를 위해 각지에 학교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각지 동포들에게 대종교창기문(大倧敎創起文)을 배포했다. 김교헌과 함께 해림·하얼빈 등지에 포교기관도 세웠다. 그에게 대한군정서는 대종교와 직결되는 중대한 문제로서 인식했다.

1922년 대한군정서를 재정비와 동시에 현천묵 선생은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나섰다. 1925년 신민부가 만들어지기까지 이러한 활동은 계속되었다. 1923년 초 김좌진이 개최한 조선독립단대회에 대한군정서 대표로서 통합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기진회(期進會)라는 예비조직에서 현천묵은 김좌진·김규식 등과 독립군단체 통일을 논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각 지역에 지부 설치도 시도하는 등 통합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1923년 9월 독립운동단체 통합 결과로 군정서·의군부 등 9개의 단체로 대한독립군단이 재조직되었다. 현천묵은 이범윤을 임시 단장으로 적극 추대했다. 북만주지역은 물론 남만주와 러시아 방면의 각 단체까지도 통합하려는 의도였다. 현천묵 선생은 이범윤에게 군사통일을 실현하자는 서신까지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말았다.

북간도의 대종교인들과 한인들을 위한 교육활동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현천묵은 동양학원(東洋學院)에서 부원장으로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원장은 김혁, 학감은 양백헌(梁白憲), 계화와 이범석이 교원을 맡았다. 영안현에 위치한 이 학교는 학생은 80여 명 정도였다. 동양학원은 김교헌의 장남인 김정기(金正琪)가 설립한 남녀공학제로 중등교육기관이었다. 1923년 5월 동양학원의 학생들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것을 탐지한 일제가 7월 김정기 등 12명을 체포하면서 폐교 직전에 이르렀다. 김정기는 청진형무소에 투옥되고, 이후 김혁과 현천묵 등은 학교 운영을 맡았다.

대한독립군단 결렬에 1924년 3월 현천묵 선생은 대한군정서를 재조직한다. 총재 현천묵, 군사부장 조성환, 서무부장 나중소, 재무부장 계화, 참모 조성환·나중소·김규식·이장녕·김혁 등이었다. 현천묵은 단순히 재조직에만 만족하지 않고 대한군정서와 고려혁명군 통합을 추진하였다. 총사령관 김규식과 교섭하여 두 단체의 통일도 모색했다. 교섭 끝에 영고탑 대종교당에서 조선독립당군정서연합회총회는 개최되었다. 총재 현천묵, 사령관 김규식을 중심으로 고려혁명군과 대한군정서 요원들로 간부진을 개편·강화하였다. 군정서 재건 일환으로 1924년 5월부터는 하얼빈·동녕현과 북간도 방면에서 무기 구입과 흑룡강성에 사관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1925년 1월에는 길림성 목릉현에서 개최된 부여족통일회의(扶餘族統一會議)에 참석하여 북만주 독립운동단체 통일에 뜻을 모았다. 대한독립군단과 중동선교육회 및 16개 지역 민선대표, 10개의 국내단체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3월 10일 신민부(新民府) 조직에 동의하였다. 신민부는 1923년 참의부(參議府), 1924년 정의부(正義府) 조직에 이어 북만주지역의 무장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운동단체 통일을 의미한다. 신민부로 통합을 위해 현천묵 선생은 대한군정서 본부를 신민부 본거지로 결정된 영안현으로 옮겼다.

간도 동녕현에 본부를 두고 수다한 부하를 간도 각지에 파견하여 조선독립을 주창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야오던 조선독립단총사령관(朝鮮獨立團總司令官) 선생은 금번 고려혁명군총사령장(高麗革命軍總司令將) 김규식으로 더불어 무슨 비밀 결의를 한 후 본부를 동녕현으로부터 영안현에 이전하고 다시 부하를 많이 모집한 후에 다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야 광활한 토지를 매수하고 조선동포들의 빈민을 모두 그곳으로 이주케 한다더라.

총재 현천묵 선생은 고려혁명군 총사령장 김규식과 비밀논의를 한 후 이를 실행에 옮겼다. 동시에 군자금 모집과 영안현 주변의 토지를 매수하여 한인들 이주도 지원했다.

國務員을 選任
國務員을 選任

현천묵 선생은 신민부 일원으로서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신민부의 중앙집행위원과 사법기관인 검사원의 검사원장을 맡아 신민부 핵심세력으로서 활동했다. 무관학도를 양성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상룡(李相龍)은 임시정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무장투쟁가들을 대거 선임하였다. 현천묵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원에 두 번 선임되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해임되었다. 이는 만주지역 통합운동 실현에 중점을 둔 사실을 보여준다.

1926년 초에는 신민부 대표로 이범윤과 함께 연해주 신한촌에서 열린 재만조선동포간부회의에 참여하였다. 임시정부·고려공산당·정의부·의열단·대한통의부 대표들과 함께 독립운동방략을 논의했다. 3월 중순에는 김좌진과 함께 신민부 대표로 정의부 김동삼(金東三)·이탁(李鐸), 참의부 오동진(吳東振) 등과 전만주의 통일을 계획하고 군사기관 확장에 관하여 협의하였다.

1927년 1월 15일 현천묵 선생은 대종교 정교가대형호(正敎加大兄號)로 승질(陞秩)되어 대종교 지도자로서 공적을 인정받았다. 1926년 말부터 그의 행적은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이때부터 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병고 끝에 1928년 66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오랜 지인인 강우는 현천묵 업적을 기리며 추도문을 올렸다.

현백취 천묵(玄白醉 天默)을 추도하는 글(1928)

아아, 슬픈지고, 백취선생. 산천이 정기를 모아, 생장하신 고장은 함경도에서도 북쪽 경성의 남방이었읍니다. 자질은 영웅 호매(豪邁)하고 인품은 순수 선량하였읍니다. 특출한 기개, 활달한 마음에, 의협스러운 높은 기풍, 개결(介潔)한 맑은 지조였습니다. 세상이 소란해지자 마음속으로 분발하여 학교와 서당을 건설하며 사방으로 분주하니 끓어오르는 더운 피로 언제나 교육장에서 울었습니다. 대교(大教)를 숭앙하여 받드는데 게으르고 폐지하는 일이 없이 10년을 한결 같은 정성이었습니다. 청파호 교당에서 신고(神誥)를 크게 읽고 한검 교리 널리 펴니, 상교(尙教)는 천직이요, 부전(副典)은 인망(人望)이었습니다.

북관(北關)의 호걸이요, 동도(東道)의 문장으로 흰 머리를 흩날리며 청년들을 격려 지도하시었습니다. 오래도록 독실이 믿고 늙으면서 더욱 건강하시니, 백세는 누리리라고 생각하였는데 신병이 어인 일이었소. 풍진 세상에 표박(漂泊)하는 생활, 집과 나라 황량해지니 세상을 개탄하며 오래도록 병석에 누었다가 끝내 저 세상을 가시었습니다. 밀강(密江) 강상에 원한 잠긴 물이 흐르는데, 슬픈 물결은 목메어 울고, 수심하는 구름은 처량하게 떠돕니다. 한 마디 소리로 크게 슬퍼하니 태양도 광채가 없습니다.

보일 듯한 그 모습 빈 들보에 지는 달만 비치는데, 정령(精靈)은 어디 계신지, 옥경(玉京)이 아득하게 멉니다. 가서 상제 보좌(寶座)에 호소하소서, 한배님 계시오리다. 5계(界)는 괴롭고 어둡지만 3궁(宮)은 길하고 상서롭습니다. 이 세상 길이 떠나서 무강한 쾌락을 누리소서. 천전(天殿)을 우러러 뵈오니 내 마음 비감하와, 멀리서 추도의 의식을 올리며 술을 드리옵니다. 신령이 와서 느끼시면 복록을 반드시 내리오리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추도 현백취천묵문」, 『호석선생문집;독립운동사자료집』 12(문화투쟁사자료집), 1977, 461~462쪽

현천묵 선생은 대종교인으로 왕성한 저술활동과 신앙활동에 뛰어난 서일처럼 특출한 인물은 아니었으나, 홍범도나 김좌진 같이 군사적인 풍부한 능력이 지닌 인물은 더더욱 아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중국 동북지역에서 대종교인을 표방하면서 조국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장기간 견지한 사실은 분명 현천묵에게 어떠한 힘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1900년대 초 함경도지역에서 의병과 개화인사들을 아울렀던 세력을 북간도지역한인사회로 옮겨와 이들과 동고동락하였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소통에 의한 대동단결을 실천한 현천묵에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부는 현천묵 선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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