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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최용덕

훈격아이콘 훈격: 독립장
훈격아이콘 서훈년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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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

최용덕 , 1898 ~1969 , 독립장 (1962)

최용덕은 일제의 침략과 강압적인 국권피탈을 경험했고, 근대적 교육을 수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했다. 또한, 국제정세와 중국 내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정치적 상황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망국의 설움과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형성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 <오대록> -

출생과 민족의식 형성

최용덕(崔用德, 1898. 9. 19. ~ 1969. 8. 15.)은 1898년 9월 19일 서울 성북동(城北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대한제국(大韓帝國) 2등 군의관이었던 최익환(崔益煥)과 태안이씨(泰安李氏) 사이 3남으로 출생했다. 호는 창석(滄石)이었다.

1900년대 후반기 사립 봉명학교(鳳鳴學校)에 입학하여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北京)으로 건너가 2년 동안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다니며 중국어와 새로운 사상을 익히고 접했다. 1916년 원세개(袁世凱)가 설립한 육군군관학교에 입교하여 군사 훈련을 마치고 단기서(段祺瑞)군의 제2사단에서 근무하였다. 원세개 사후 육군군관학교는 군벌 단기서가 풍국장(馮國璋)을 대표로 하는 '직예(直隸) 군벌'과 장작림(張作霖)을 수장으로 하는 '봉천(奉天) 군벌'을 견제하기 위해 일제의 지원을 받아 참전군(參戰軍)을 창립하면서 '참전군군관학교'로 불리기도 하였다. 육군군관학교와 단기서군에 참여한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경험은 이후 최용덕이 전개했던 항일투쟁에 큰 자산이 되었다.

이처럼 최용덕은 일제의 침략과 강압적인 국권피탈을 경험했고, 근대적 교육을 수용함과 동시에 중국에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을 접했다. 나아가 국제정세와 중국 내에서 복잡하게 전개되었던 정치적 상황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망국의 설움과 민족의식을 자연스럽게 형성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군대를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1919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19년 3월 1일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던 한민족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는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다. 독립선언의 핵심은 한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부정한다는 것, 그리고 독립국임을 천명한 데 있었다. 이를 계기로 국내외에서는 독립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독립국, 다시 말해 '국가'와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민족의 대표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중추기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최용덕은 중국에서 3·1운동 소식을 접한 뒤 군대를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주된 활동의 근거지는 중국 북경지역이었다. 당시 북경은 1910년 경술국치와 1919년 3·1운동 이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과 유학생들이 이주하여 활동했던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최용덕 역시 북경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청년단(大韓獨立靑年團, 學生團)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독립청년단은 1919년 6월경 군사행동을 목적으로 북경·천진(天津)지역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신채호(申采浩)가 단장으로 추대되었고, 한진산(韓震山)이 부단장 및 총무·통신사장, 방석범(方錫範)이 서기, 서왈보(徐曰甫)가 군무장을 맡았다. 최용덕 역시 대한독립청년단원으로 국내외 청년 단원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독립청년단의 본부가 당시 최용덕이 거주하고 있던 북경 북성(北城) 구고루대가(舊鼓樓大街) 소석교로북(小石橋路北) 제7호에 설치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1921년 4월 19일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위임통치 청원을 비판하는 「성토문(聲討文)」에 서명자로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1919년 1월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주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는 1918년 11월 25일 대표자회의를 소집하여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한민족의 독립을 청원하기로 결정했다. 선정된 대표는 이승만과 정한경(鄭翰景) 등이었다. 하지만 미국정부로부터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참석하지 못했다.

이승만과 정한경은 1919년 2월 25일 "연합국들이 장차 한국의 완전독립을 보장하는 조건 하에 일본의 현 통치에서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하에 두는 조처를 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원서」, 다시 말해 위임통치를 주장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나아가 3월 14일 정한경은 미국의 신문기자와 회견에서 "한인들이 원하는 것은 국제연맹 회의에서 한국을 관할하되, 민주정치를 쓰는 미국이 한국 정치를 고문하여 차츰 한국의 기초를 굳건히 하고자 한다."는 취지를 전달했다.

미국에게 일본을 대신하여 한국을 통치해달라는 위임통치 청원은 3·1운동 이후 거족적으로 표출된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손상시켰다. 나아가 이 소식을 접한 신채호는 이승만과 정한경의 위임통치 청원을 매국·매족 행위로 규정한 뒤 위임통치 청원이 무효이며, 이를 주장한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공포하였다. 최용덕 역시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성토문」 서명자 54인 중 1인으로 참여했다.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중국 길림성(吉林省)에서 창립된 항일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김원봉(金元鳳)이 의열단의 최고 지휘자인 의백(義伯)으로 선임되었고, 단원은 윤세주(尹世冑)와 권준(權晙)·이성우(李成宇)·이종암(李鍾岩) 등 모두 13명이었다. 창단과 함께 조선총독 이하 고관·군부 수뇌·대만총독·매국적(賣國賊)·친일파 거두·적탐(敵探)·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 7가살(可殺), 즉 7부류의 처단 대상을 정했다.

또한 5당파(當破), 다시 말해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각 경찰서·매일신보사·기타 왜적 중요기관 등을 파괴대상으로 삼았다. 일제 침략기관 파괴와 침략원흉 응징을 활동 목표로 설정한 것이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1920년부터 밀양폭탄반입사건, 부산경찰서를 폭파하고 경찰서장을 폭살시킨 박재혁(朴載赫) 의거 등 수백여 차례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경에서 의열단에 가입한 것으로 보인다. 1920년 북경 지역에는 반이승만·반임시정부 노선을 견지했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기 시작했다. 박용만(朴容萬)과 신숙(申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와 대통령으로서 지도력 부재, 임시정부의 외교방략을 비판하고 무장투쟁을 지향했다. 나아가 반이승만계 인물이었던 신채호·이회영(李會英) 등과 회합하여 1920년 9월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결집하기 위한 군사통일촉성회(軍事統一促成會)를 결성하였다.

의열단 역시 1920년 9월 박재혁 의거가 성공하자 본거지를 길림에서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의열단이 근거지를 북경으로 옮긴 이유에 대해 김영범(『한국 근대민족운동과 의열단』, 창작비평사, 1997)은 김원봉과 친분이 있었던 신숙과 장건상(張建相) 등이 상해를 떠나 북경으로 이동하면서 함께 할 것을 권유했을 가능성과 의열단이 북경지역에서 전개하고 있던 반이승만·반임시정부, 그리고 무장투쟁 노선에 공감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1921년 4월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을 규탄하는 「성토문」에 김원봉이 참여한 사실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한다고 했다. 근거지를 옮긴 의열단은 오성륜(吳成崙)과 김재희(金在喜)·정인교(鄭寅敎) 등 유능한 인재를 단원으로 확보하여 조직을 강화해 나갔고, 북경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최용덕 역시 「성토문」이 발표된 1921년 4월 이후 의열단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22년 의열단은 재차 국내에 대규모 거사를 준비하였다. 투탄의거 계획이 바로 그것이었다. 최용덕은 단장 김원봉과 함께 이러한 계획을 협의하고 제반 준비를 추진하였다. 거사 준비의 핵심은 폭탄 확보와 폭탄을 안전하게 국내로 이송하는 것, 그리고 국내로 반입된 폭탄을 안전하게 보관했다가 투탄요원에게 책임지고 전달해 줄 적임자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김원봉은 국내에서 폭탄을 보관하고 전달할 적임자로 김한(金翰)을 선정했다. 남은 것은 김한의 협조와 승낙이었다. 이를 위해 1922년 6월 최용덕은 양건호(梁建浩)와 함께 중국 천진 프랑스조계 여관에서 남녕득(南寧得, 南廷珏)에게 김한을 설득하기 위한 임무를 맡기고 서울로 파견했다. 또한 최용덕은 투탄의거에 필요한 폭탄 확보와 운반에 조력하였다.

최용덕과 의열단원들의 치밀한 거사 계획과 철저한 준비는 독립운동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데 기여했다. 의열단은 거사 준비를 진행함과 동시에 거사 실행자를 결정하였다. 실행자는 김상옥(金相玉)이었다. 그는 1890년 1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나 사립 교육기관인 동흥야학교(東興夜學校)를 설립 운영하면서 청년학관영어학교(靑年學館英語學校)에서 공부했다. 1913년 풍기광복단(豊基光復團)에 참여했고,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뒤 윤익중(尹益重) 등 9명과 함께 비밀결사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하고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혁신공보(革新公報)』를 간행하였다.

특히 1920년 8월 미국의원단의 입국을 계기로 암살단을 조직하여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제 고관의 처단을 계획했다가 아쉽게도 일경(日警)에 거사 계획이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상해로 탈출하여 임시정부 요인 이시영(李始榮)·조소앙(趙素昻) 등과 재차 거사를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다.

김상옥은 1922년 12월 1일 김원봉에게 권총 3정과 실탄 및 격문을 받아 국내에 잠입하였다. 최용덕 및 의열단이 준비한 거사용 폭탄은 별도의 경로를 통해 김한에게 전달받아 사용하기로 약속하였다. 김상옥은 서대순(徐大淳) 등 옛 동지를 만나 거사 의사를 밝히고 계획을 상의했다.

<김상옥 의사>
<김상옥 의사>

그 결과 조선총독 및 일제 고관 처단, 조선총독부 및 관공서 폭파, 행동대와 동지들을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훈련하여 전국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중 첫 번째로 착수한 것이 서울 종로경찰서 투탄의거였다.

1923년 1월 12일 김상옥은 독립운동가 탄압의 상징이자 본거지였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투탄의거 이후 일경에 의해 은신처가 발각되어 3시간 동안 치열한 총격전을 전개하다 마지막 남은 탄환으로 자결했다. 김상옥의 투탄의거는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만방에 알렸고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다

1923년 의열단을 떠나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 1920년에 들어서 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이 축소되자 정부를 일신하자는 요구가 상해를 포함한 각지에서 일어났다. 1920년 9월 임시정부의 외교방략을 비판하고 독립전쟁론을 지향했던 박용만과 신숙 등이 중심이 된 군사통일촉성회가 북경에 조직되었다. 군사통일촉성회는 1921년 4월 회의를 개최하고 그 명칭을 군사통일회의(軍事統一會議)로 명명했다. 회의에서는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만주 액목현(額穆縣)에서 여준(呂準)과 김동삼(金東三)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문제를 들어 임시정부 개조안을 결의했다.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極東人民代表會議) 역시 임시정부의 개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처럼 임시정부를 일신하자는 국민대표회의 소집 요구에 따라 1923년 국내외 각지의 독립운동가들이 상해에 모여 임시정부의 개편을 비롯한 독립운동계의 현안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었다.

국민대표회의는 1923년 1월 3일부터 5월 15일까지 약 5개월 동안 진행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신채호와 신숙 등 북경지역의 반이승만 세력과 한형권(韓馨權) 등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를 형성하여 의열단의 가담을 촉구하였다. 하지만 의열단은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체제를 개편하자는 개조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총 63회에 걸친 회의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체제를 개편하자는 개조파와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결국 합의점을 도출해 내지 못했다.

이러한 중립적인 노선에 불만을 가진 최용덕은 의열단을 탈퇴했다. 이 시기 최용덕은 임시정부 대신 새로운 대표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의열단이 중립을 선언하자 단을 탈퇴하고 창조파에 참여할 목적으로 1923년 서왈보·송호(宋虎)·김사집(金思潗) 등과 함께 북경에서 신의단(申義團, 伸義團, 信義團)을 조직하여 활동했다.

1924년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조직에 참여했다. 1923년 창조파로 활동했던 원세훈(元世勳)과 신숙 등은 국민대표회의 결렬 직후 독자적으로 국민위원회(國民委員會)를 조직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여 "민족운동의 통일적 혁명전선"을 구축하기로 협의하고, 이를 위해 「한국독립당조직안(韓國獨立黨組織案, 이하 조직안)」을 작성하였다.

「조직안」의 요지는 노동자와 농민을 주력으로 삼아 반제국주의 및 반자본주의 운동과 연대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되 임시정부를 중추기관으로 삼지 않고 새로운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전체 독립운동을 지도해 나간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코민테른과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의 반대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924년 북경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북경으로 돌아온 창조파는 지속적으로 민족유일당 조직의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최용덕은 서왈보와 북경에 체류하는 창조파, 그리고 창조파에 호의적인 인물들을 결집하여 1924년 8월 6일 북경한교동지회를 조직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중국정부의 도움을 얻어 친목과 상호부조, 회원계몽, 기념식을 통한 독립의식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나아가 민족유일당 조직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중국측의 지원 부족과 자금 결여, 회원의 분열 등으로 크게 발전하지 못했으나 1925년 3월 조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신문 『앞잡이(導報)』를 발간하여 독립운동의 외연을 확대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문 발간을 직접 담당했던 북경한교동지회는 1925년 6월 무렵 이를 전담하는 신문사를 설립하고 북경을 비롯한 중국 각지·국내·미주·유럽 등지에 배포하여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특히 민족유일당 조직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본사의 주장>

1. 한국은 절대독립을 주장함

2. 한국의 독립운동은 폭력과 저항의 수단을 취할 것

3. 한국의 독립운동자는 적에 대하여 타협 혹은 공동동작을 하지 않을 것

4. 자치·참정권운동 등 무릇 반독립운동자는 물론 불철저한 언동으로서 독립정신을 말살하고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자들은 여하한 주의의 단체와 제3국인가를 불문하고 일체 적으로 대치(對峙)하고, 독립운동자를 가장하여 이름을 조(釣)하고 리(利)를 영(營)하는 자는 일체 배척할 것

5. 상당한 주의·강령과 일정한 규율 하에 일대독립당(一大獨立黨)을 전국적으로 건설하고 독립운동의 기본단체의 조성을 고취할 것

6. 각국의 혁명사를 소개하고 한국독립운동의 방략을 연구하여 운동계에 제공할 것

7. 위기에 빈(瀕)한 아민족생존(我民族生存)의 구급책을 시시로 강구하여 제공할 것

8. 본보는 어떠한 당파에도 편의(偏倚)하지 않고 단지 이상의 주장에 비추어 비판취사(批判取捨)하고 또 과거 독립운동계의 시비(是非)를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금후 독립운동의 진행방략에 주의할 것

북경한교동지회와 앞잡이사는 비타협적이며, 폭력과 저항의 수단으로써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일대독립당(一大獨立黨)'을 건설한다는 의지를 천명하였다. 최용덕 역시 독립운동을 정부가 아닌 '일대독립당', 즉 당(黨)에 의해 추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북경한교동지회와 앞잡이사의 민족유일당 수립 추진은 1926년 10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지역 민족유일당운동의 촉매제가 되었다.

중화민국 공군으로 일제와 맞서 싸우다

독립운동에 참여함과 동시에 중화민국 공군으로 복무하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시기는 불분명하지만 1920년대 보정항공학교(保定航空學校)에 입교하여 전투기 조종사로 성장했다. 보정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된 계기는 공군의 필요성을 몸소 체감한 서왈보의 권유와 추천에 의해서였다.

서왈보는 1886년 함경남도 원산(元山)에서 출생하여 평양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수학했다. 경술국치 이후 중국 북경으로 망명, 남원항공학교(南苑航空學校)에 입학하여 비행사가 되었다. 남원항공학교는 1913년 원세개에 의해 창립된 중국 최초의 정규 항공학교였다. 1923년 국립북경항공학교로 개칭했고 1925년 폐교되기 전까지 4기에 걸쳐 중국 항공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비행사를 배출했다. 항공학교를 나온 뒤 중국 오패부(吳佩孚) 군벌에서 공군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풍옥상(馮玉祥) 군벌에 가담하여 서북변방독판서참정공병대좌(西北邊防督辦署參政工兵大佐) 및 서북항공대(西北航空隊) 교육주임·부대장으로 활약하다 1926년 5월 비행기 추락 사고로 운명하였다.

최용덕은 서왈보와 1910년대 후반부터 깊은 사상적 교감과 유대관계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1운동 이후 줄곧 대한독립청년단과 신의단·북경한교동지회에 함께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더불어 두 사람은 오패부 군벌에서 함께 공군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보정항공학교를 수료한 후 1924년 오패부 군벌 소속으로 제2차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참여하였다. 1924년 영국과 미국의 세력을 대변하고 있던 오패부와 조곤(曹錕)의 직예 군벌과 일본의 지지를 받았던 장작림의 봉천 군벌 사이에 제2차 직봉전쟁이 일어났다. 최용덕은 직계군벌 손전방(孫傳芳)의 지휘아래 낙양항공학교(洛陽航空學校)에서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하는 한편 전투에도 직접 참여했다.

장개석(將介石)의 국민혁명군(國民革命軍)에 참여했다. 1926년 중국국민당의 장개석은 국민혁명군 총사령에 취임하여 중국 내 군벌 타도를 위한 북벌(北伐)을 단행하였다. 당시 국민혁명군 총지휘부의 소령으로 참여했던 김홍일(金弘壹)은 최용덕을 국민혁명군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최용덕 역시 이러한 요청에 응하여 국민혁명군 진영으로 합류했다.

1927년 운남항공학교(雲南航空學校) 출신 이영무(李英茂)·권기옥(權基玉), 그리고 소련비행학교 출신 장지철(張聖哲) 등과 함께 중화민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다. 1926년 국민혁명군은 상해와 남창(南昌) 등지에서 군벌들의 항공대를 흡수하여 항공대를 구성하였다. 1927년 3월 이를 근간으로 국민혁명군 총사령부항공처 항공총대(航空總隊)를 편성함과 동시에 손전방 군벌의 항공사령부를 수용하여 동로군항공사령부(東路軍航空司令部)를 설립했다. 권기옥 등과 함께 이곳에서 공군으로 활약했으며, 1928년 초 수상비행대(水上飛行隊) 부대장에 임명되어 북벌에 참여했다.

전투기 조종사로 일제와 맞서 싸웠다. 1932년 1월 일본 해군육전대와 항공부대가 중국 상해를 침공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30년 10월 국민혁명군 항공 제4대 부대장을 역임하는 등 국민혁명군 공군에서 주요한 위치에 있었던 최용덕은 전투기를 몰고 최전선에서 일제와 공중전을 벌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중국군은 일제의 공세에 밀려 상해를 내주고 말았다. 이후 1934년 중앙항공학교 교육처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후진을 양성했고, 1935년 남창총참장(南昌總站長), 1930년대 후반 성도비행대(成都飛行隊) 창장(廠長) 및 중국 공군 대령으로 활약하였다. 이처럼 최용덕은 중국 공군으로 일제와 전투에 직접 참전하여 맞서 싸웠고, 중국 공군의 확장과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에서 활약하다

최용덕은 중화민국 공군으로 활약하면서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32년 중국 남경(南京)에서 윤기섭(尹琦燮)·성주식(成周寔)·신익희(申翼熙)·김홍일과 함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결성에 참여했고, 주요간부로서 활동하였다. 한국혁명당은 독립운동의 정당으로서 사상 정화와 한인독립운동 진영의 대동단결을 목표로 조직되었다. 위원장 윤기섭을 중심으로 중국국민당 정부와 연합전선을 도모했고, 산하에 안재환(安載煥)을 단장으로 하는 비밀결사 철혈단(鐵血團)을 두고 의열투쟁을 추진하였다. 또한 중국과 중한연합의용군(中韓聯合義勇軍) 조직을 계획하기도 했다.

특히 민족유일당운동을 잇는 독립운동 진영의 통합운동이 일어나자 1932년 11월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단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 그리고 미주지역 대한인국민회 등과 함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韓國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한 협동전선운동 단체였다. 최용덕은 1935년까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을 추진했다. 1920년대 북경한교동지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일대독립당(一大獨立黨)'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던 최용덕이 독립운동 세력의 통일을 목적으로 결성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여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신한독립당은 한국혁명당과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재만)이 합당하여 조직한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 홍진(洪震)과 신숙 등을 중심으로 북만주에서 창립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당군(黨軍)으로 이청천(李靑天)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고 대전자령전투 등 각종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한국독립당(재만)은 근거지 이동에 따른 새로운 활동기반을 구축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를 위해 조직 확대와 독립운동의 역량 강화를 도모하고 있던 한국혁명당과 합당을 추진하게 되었다. 결국 양 당은 서로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34년 2월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신한독립당의 결성은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과 중국 관내 세력이 처음으로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나아가 임시정부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상해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김원봉을 주축으로 한 의열단과 함께 중국 관내 독립운동의 주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최용덕 역시 한국혁명당원으로서 신한독립당 창당에 참여했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임시정부의 국군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되어 활동하던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尹奉吉) 의거 직후 상해를 떠나 항주(杭州)로 이전하였다. 이후 중일전쟁(中日戰爭)이 발발하고 일본군의 점령지역이 확대되자 이를 피해 진강(鎭江) → 광주(廣州) → 유주(柳州) → 기강(綦江) 등지로 옮겨다니면서 정부를 유지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0년 중국국민당(中國國民黨) 정부가 있던 중경(重慶)에 정착하였다. 임시정부는 중경에 정착하면서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군대를 편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1919년 12월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制)」와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大韓民國陸軍臨時軍區制)」·「육군무관학교조례(陸軍武官學校條例)」 등의 법령을 마련하여 군대의 편성과 군사정책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활동 침체와 인적·재정적 어려움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중경에 정착함과 동시에 이러한 군사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먼저 중국정부를 상대로 교섭을 전개하여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이와 함께 이청천·유동열(柳東悅)·이범석(李範奭) 등 군사전문가들로 구성된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韓國光復軍創設委員會)를 조직하여 창립을 추진하였다.

모든 준비가 갖추어지자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주석 김구(金九)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韓國光復軍宣言文)」을 발표하고 한국광복군 창립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창군을 선언한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중경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成立典禮式)을 거행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1940년 10월 현재 한국광복군의 부대편제와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총사령 : 이청천

참모장 : 이범석, 비서처 : 최용덕

참모처 : 채원개(蔡元凱), 부관처 : 황학수(黃學秀)

정훈처 : 조소앙(趙素昻), 편련처 : 송호성(宋浩成)

경리처 : 조경한(趙擎韓), 위생처 : 류진동(劉振東)

관리처, 포병공처, 군법처, 특무대, 헌병대

부(附)특무대 및 노사령(路司令)

제1지대장 : 이준식(李俊植), 제2지대장 : 김학규(金學奎)

제3지대장 : 공진원(公震遠), 제4지대장 : 금동산(金東山)

1935년 2월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집행위원직을 사임하고 중국 공군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최용덕은 한국광복군 비서처 업무를 관장하면서 총사령 이청천을 보좌했다. 1942년과 1943년 총사령부의 편제가 개편되면서 각각 총무처장(總務處長)과 참모처장(參謀處長)으로 임명되어 한국광복군의 운영과 실무를 총괄하였다.

한국광복군의 편제상 조직은 아니었지만 총사령부가 편성하여 관할했던 토교대(土橋隊) 대장으로 선임되었다. 토교대는 일본군 탈출병과 한국광복군 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 출신 및 중국군에 포로가 된 한적사병(韓籍士兵) 등을 중경 토교에 수용하여 편성한 일종의 보충대였다. 토교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이 거주하던 장소였다.

<한국광복군 정보3분처 훈련모습>
<한국광복군 정보3분처 훈련모습>

이들 청년들은 토교에서 일정기간 수용되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부터 교육과 훈련을 받은 뒤 총사령부·광복군 지대(支隊)·경위대(警衛隊) 등으로 배치되었다. 토교대는 모두 3차례에 걸쳐 편성되었다. 1945년 2월 한국광복군 훈련반 졸업생 등을 포함한 51명으로 구성된 토교대의 대장으로 부임하여 같은 해 4월 토교대원들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광복군 등에 배속이 완료될 때까지 토교대의 관리를 맡았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관병소비합작사(官兵消費合作社)를 결성하고 운영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한국광복군의 생활개선을 도모하고 복리를 증진하기 위한 관병소비합작사 조직을 추진하였다. 창립회의에서 "이사회 주석은 한국광복군 총무처장이 겸하도록 한다"는 결의에 따라 당시 총무처장이었던 최용덕은 관병소비합작사의 창립과 운영을 책임졌다. 먼저 조직대강과 규정에 따라 「장정(章程)」을 마련하고 창립회의를 열어 이사와 감사를 선출했고, 조직에 필요한 자본은 주식을 발행하여 준비하였다. 주주로 참여한 인원은 총 115명이었다. 설립 준비를 마친 뒤 중국군사위원회(中國軍事委員會)와 협조를 통해 중경시사회국(重慶市社會局) 및 경제부일용필수품관리처(經濟部日用必需品管理處)로부터 등기 허가와 물자 공급을 약속 받았다.

공군 창설 계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 「대한민국임시관제(大韓民國臨時官制)」를 통해 공군 창설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1919년 상해에서 안창호(安昌浩)를 중심으로 비행기 구입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비행사 양성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Willows)에 비행사양성소를 설치·운영하기도 했다. 1920년대 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비행사를 양성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자 중국 군벌 및 중국국민당 산하 항공학교에 위탁 및 자원의 방식을 통해 한인비행사들이 배출되기 시작했다. 1932년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던 김구는 공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비행기 구입과 인력 양성을 위한 중국국민당 정부의 협조와 지원을 타진하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잠행관제(大韓民國臨時政府暫行官制)」를 공포하여 처음으로 공군에 관한 규정을 설정했다. 이 과정에서 최용덕은 1943년 임시정부 국무위원회에 비행대 창설을 건의했고, 건의를 받아들은 임시정부는 국무회의를 통해 1943년 8월 군무부(軍務部) 직할로 공군설계위원회(空軍設計委員會)를 설치하고 공군 창설 준비를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최용덕은 윤기섭·김철남(金鐵男)·이영무·김진일(金震一)·권기옥·이연호(李然皓) 등과 함께 설계위원을 맡았다. 특히 실질적인 총책임자였던 부주임에 선임되어 공군 창설 준비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44년 공군 창설 및 작전 계획이 구체적으로 수립되었다.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과 작전계획(作戰計劃)」이 바로 그것으로 이중 제9장에 공군 창설 및 작전 계획이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九. 한국광복군 비행대(飛行隊)의 편성과 작전

1. 중국 경내와 태평양지구에서 각각 한국광복군 비행대(飛行隊)를 조직하여 각지에 연락·운수(運輸) 및 맹공군(盟空軍)과 배합(配合)·작전(作戰)함

2. 중국 경내의 한국광복군 비행대는 현재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는 한적비행인원(韓籍飛行人員)을 기초로 조직하고, 먼저 연락용 운수기 수가(運輸機 數架)를 조차(租借)하여 한국광복군 소재 각지 연락과 병원(兵員) 수송을 담임(擔任)함

3. 비행인원의 양성은 중(中)·미(美) 양방(兩方)과 협상하여 양국 항공학교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보증하는 청년을 입학시켜 훈련하도록 함

4. 항공인원의 양성에 따라 중(中)·미(美) 양국 정부로부터 각종 비행기를 조득(租得)한 후 한국광복군 비행대를 정식으로 조직하야 맹공군(盟空軍)과 배합(配合)·작전(作戰)케 하되 적 점령구 및 한국 경내의 선전과 지하군간(地下軍間)의 연락원조를 주로 담임(擔任)케 함. 또 광복군 비행대의 실력이 독립작전을 수행키 불능한 시(時)까지는 맹군(盟軍) 비행대에 소속하야 그 지휘를 수(受)하며, 행동하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수요하는 공중연락과 병원(兵員) 수송에 관하여 맹국(盟國) 공군이 이를 수응(需應)할 것

5. 태평양구 한국광복군 파견 사령부 소속 비행대의 조직은 재미한적비행인원(在美韓籍飛行人員)을 기초로 하여 이상 각항에 비조(比照)하야 행(行)함

계획안에 따르면 공군 창설은 중국 공군에서 복무하는 한적비행사로 조직하기로 했다. 임무는 전투보다는 연락 및 수송에 중점을 두었다. 공군 양성에 대한 계획도 마련되었다. 중국·미국의 협조를 통해 한인청년을 양국의 항공학교에서 교육시킨다는 내용이 그것이다. 이와 함께 해외에 한국 공군훈련소 설립과 한국항공대(韓國航空隊) 편성 후 미국 공군과 연합작전을 실행한다는 「한국(韓國) 현단계(現段階) 공군건설개시공작(空軍建設開始工作)을 미군(美軍)과 합작(合作)하는 계획(計劃)」도 함께 수립하여 공군 창설을 추진하였다.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참여하였다.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운영하는 기초 세력이자 여당으로 역할 하던 독립운동 정당이었다. 한국독립당의 조직과 체제는 여러 차례 변화를 겪었다. 1930년 임시정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옹호·유지하기 위해 결성된 이래 1935년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으로 이어졌다.

한국독립당은 우익진영의 3개 정당이 통일을 이루어 결성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 우익진영은 김구가 주도하는 한국국민당, 조소앙과 홍진이 주도하는 한국독립당(재건), 이청천이 주도하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등 3개의 정당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3당은 중경에 정착하기 직전 기강에서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와 통일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1939년 8월 좌익진영의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조선혁명자연맹(朝鮮革命者聯盟)·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과 단일당을 결성하자는 목표 아래 '7당통일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주도권 문제와 당원자격 문제, 다시 말해 통일의 방법과 정치적 이념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7당통일회의'가 결렬된 후 우익진영 3당은 통일을 추진하였다. 3당의 통일은 각자의 조직체를 완전히 해체하고 새로운 조직체를 결성하는 것으로 진행되었다. 통일을 위한 회의는 1939년 10월부터 '3당통일회의'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회의에서는 3당 통일로 결성될 새로운 당의 당명(黨名)·당의(黨義)·당강(黨綱)·당책(黨策)을 비롯하여 조직과 인선 등 신당창립에 대한 구체적인 문제와 절차들을 협의하였다. 이러한 문제와 절차가 마무리되자 3당은 1940년 5월 9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기 위한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한국독립당의 대표는 김구가 선임되었다. 김구는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로 무정부상태에 빠져있던 임시정부를 유지·운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통일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되었다. 한국독립당의 성격과 기능·역할은 다양했지만, 그 중에서도 임시정부와 표리일체의 관계를 이루며 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기초세력으로 기능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단체이자 정당이었고,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정부의 여당으로 역할 했다.

한국독립당의 유일당 체제는 곧 다당체제로 전환되었다. 중국 내 우익정당의 합동으로 정당 통합을 이룬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의 유일무이한 기초세력이었다. 1941년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임시정부 참여를 표명한 이후 1942년과 1944년 각각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이로써 한국독립당 일당체제가 다당체제로 변화되었다. 더불어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역할을 담당했다.

임시정부의 세력 기반이자 여당으로 역할하고 있던 한국독립당은 변화를 겪었다. 주도세력이 바뀌고 탈당하는 세력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한국독립당 내에는 크게 두 세력이 존재했다. 김구·조완구(趙琬九)·박찬익(朴贊翊) 등 통합 이전 한국국민당에서 활동했던 세력이 주류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조소앙·홍진·이청천 등의 한국독립당(재건) 및 조선혁명당 세력이 있었다. 3당 합당 초기에는 김구를 비롯한 주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943년 5월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조소앙을 비롯한 비주류 세력이 주도권을 획득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 : 조소앙

중앙상무위원 : 최동오, 김의한(金毅漢), 조경한, 송면수(宋冕秀), 양우조(楊宇朝)

중앙집행위원 : 조소앙, 홍진, 최동오, 송면수, 조시원(趙時元), 채원개, 유동렬, 조완구, 박찬익, 김의한, 양우조, 조경한, 이준식, 김구, 이청천

중앙감찰위원 : 차리석(車利錫), 금자동(金紫東), 이복원(李復源), 이상만(李象萬), 최용덕

비서부 : 최동오

조직부 : 김의한

선전부 : 송면수

훈련부 : 조경한

재무부 : 양우조

최용덕은 제3차 전당대표대회에서 중앙감찰위원 5인 중 1인으로 선출되었다. 자료 부족으로 한국독립당 입당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전당대회 이전부터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청천·이복원과 함께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회에 당(黨)의 군사정책과 한국광복군 확대강화 계획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1945년 3월 17일 제출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군사정책(軍事政策)에 대한 건의(建議)」가 바로 그것이었다. 작성자 최용덕 등 3인은 만주와 중국 내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한국광복군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군사전문가였다. 이들은 일본의 패배가 명백해지는 시점에서 한국독립당이 추진해야 할 군사계획을 마련했다. 핵심 내용은 한국광복군을 중심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등 해외 각지에 산재해 있는 한인 무장세력의 통일 추진, 미국 등 동맹국과 연합작전 체결, 군사력 강화를 위한 한적사병의 확보, 현대화된 특종 군사기술간부 및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해방 직전 한국독립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한국독립당은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당(黨)의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조직 개편은 전당대표대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1945년 7월 제4차 한국독립당 전당대표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최용덕은 중앙상무위원이자 훈련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구, 중앙집행위원회 부위원장 조소앙 등이 전당대표대회를 통해 선임됐다. 이후 한국독립당은 중앙집행위원장 김구체제로 해방을 맞게 되었다.

대한민국 공군을 창설하다

해방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화대표단(大韓民國 臨時政府 駐華代表團, 이하 주화대표단)에서 활동했다. 주화대표단은 임시정부가 환국한 이후 우방국이었던 중국과의 관계 유지와 중국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교포들의 재산과 생명 보호 등 제반 문제 처리를 중국정부와 협의·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기구였다. 주화대표단은 중국측의 승인에 따라 1945년 11월 1일 정식으로 발족했다. 이전에는 1945년 10월 조직된 한교선무단(韓僑宣撫團)이 이러한 역할을 맡았다.

주화대표단은 크게 중앙부처와 산하기구로 조직되었다. 산하기구는 다시 교무(僑務)를 관장했던 각 지역 한교선무단과 군무(軍務)를 맡고 있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교무조는 교포의 조사와 등기를, 군무조는 광복군 훈련준비와 중국 각지 수용소 한적사병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최용덕은 북경에 조직된 북경한교선무단(華北韓僑宣撫團), 그 중에서도 군사조장으로서 군무(軍務)를 총괄했다.

북평잠편지대(北平暫編支隊) 지대장(支隊長)으로 한국광복군 확군활동에 기여했다. 한국광복군은 해방을 맞으면서 그 임무와 역할이 전환되었다. 한국의 국토를 방위하는 창군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진 것이다. 이는 한국광복군을 개편하고 확대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확대는 중국 내 한적사병과 중국군에 투항하거나 포로가 된 한인청년들을 한국광복군으로 흡수·편입하는 방향으로 추진하였다. 흡수·편입된 인원들을 중심으로 각 지역별로 잠편지대(暫編支隊)를 편성하였다.

최용덕은 해방 직후 북경지역에서 확군사업을 수행했고, 1945년 10월 말 북평잠편지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45년 말에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북경판사처와 제3지대의 북경지구 특파단을 통합한 주북평판사처(駐北平辦事處)의 처장에 임명되어 화북지역 업무를 총괄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산하에 신설된 주진판사처(駐津辦事處)의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북경한교선무단이 1945년 12월 독립된 민족국가 건립을 위한 간부양성 위해 조직한 건국간부훈련반(建國幹部訓練班)의 명예부이사장으로 선임되어 운영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韓國獨立黨 중앙간부부서
韓國獨立黨 중앙간부부서

국내로 환국하여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1946년 5월 16일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한국광복군복원선언(韓國光復軍復員宣言)」을 통해 임무가 종료되었음을 선언했다. 최용덕은 1946년 7월에 꿈에 그리던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이후 얼마간 한국독립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한국독립당은 1946년 4월 신한민족당 등과 연합하여 통합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환국 전이었지만 통합된 한국독립당의 중앙상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8월 귀국 이후에는 국방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줄곧 군인으로서 공군 창설에 노력했다. 환국 직후 최용덕의 귀국을 계기로 난립해 있던 항공관련 단체들이 연합하여 항공단체통합주비위원회(航空團體統合籌備委員會, 이하 주비회)를 결성하였다. 최용덕은 주비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이영무·김정열(金貞烈) 등과 함께 공군 창설을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연설하는 최용덕 공군참모총장>
<연설하는 최용덕 공군참모총장>

그 일환으로 1947년 대전항공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공군 창설의 인적 기반을 확보해 나갔다. 미군정이 조선경비대(朝鮮警備隊) 내에 항공부대 창설을 추진하자 1948년 4월 미국식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소위로 조선경비대에 임관했고, 동시에 신설된 항공부대로 편입되었다. 같은 해 6월 조선경비대 항공처장 및 통위부 항공총감으로 부대장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국방부 차관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공군 준장으로 공군사관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이후 공군 참모부장, 제2대 공군 참모총장을 지낸 후 1956년 공군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1960년 체신부장관, 1961년 주중화민국(駐中華民國) 대사로 2년간 활동했다. 1969년 8월 15일 광복절 숙환인 고혈압으로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정부는 최용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서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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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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