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833
성명
한자 曺晩植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문화운동 포상년도 1970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1993년 0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육영 사업(育英事業), 국산장려, 언론 기타 (曺)선생의 반일 반공정신과 사업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임

이북 괴뢰(以北傀儡)에게 타격을 주는 견지에서도 육중하게 수훈(授勳)함이 가함.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6권(1988년 발간)

평안남도 강서(江西) 사람이다. 15세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여 재학중에 기독교에 입교했으며 1908년에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서 3년간 영어를 공부했다. 1910년 명치대학(明治大學) 법학부에 입학하여 1913년 졸업하였다. 1913년 귀국 후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사로 취임했고 1915년에 교장이 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 운동에 적극 참가하기 위하여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서 평양의 제2차 만세시위운동의 조직 책임자로서 독립운동을 지휘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혀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0년 1월에 가석방되었다. 출옥 후 다시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1921년에는 평양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 총무에 취임하는 한편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의 장로로 시무하였다. 1922년 7월 평양에서 김동원(金東元)·오윤선(吳胤善) 등을 비롯하여 그곳 기독교청년회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김성수(金性洙)와 동아일보(東亞日報)의 적극적 지지를 받아 1922년 12월 7일에는 동아일보가 물산장려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서울과 지방의 반응이 컸으므로 1923년 1월 21일 서울에서 중앙의 조선물산장려회(朝鮮物産奬勵會)를 창립하고 전국 각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1922년 11월에는 이상재(李商在)를 대표로 하고 조만식 등 47명이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를 발기하였다. 그는 이 교육운동을 매우 중시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 3월 29일에는 각계 대표 400명이 서울 종로 중앙청년회관에 모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를 개최하고 전국적으로 1천만원의 기금을 모집하여 재단을 구성해서 민립종합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며, 그는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2월 자치론을 비판하고 절대독립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新幹會)의 창립을 발기했으며, 신간회 평양지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이해에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의 교장에 취임했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얼마 후에 사임하였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 중앙간부들과 함께 서울역 앞에서 광주학생운동 진상보고 민중대회(民衆大會)를 개최하려다가 12월 13일 일제 경찰에 구속되었다. 1930년 평양에서 체력향상을 위하여 창립된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1년 7월 만주에서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이 일어나서 한국인 학살이 자행되자 동지들과 함께 재만동포옹호동맹(在滿同胞擁護同盟)을 중심으로 만주에 있는 동포들의 보호운동을 전개하였다. 1932년에는 조선일보(朝鮮日報)사장에 취임하여 경영난에 빠진 신문사를 수습하고 민족언론의 창달에 공헌하였다. 1934년 5월 국사·국어를 중심으로 한 국학연구단체인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으로 가입하여 이를 지원하였다. 일제 강점기간에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여러차례 군자금을 모집하여 보냈으며, 국내에서는 기독교 계통의 민족주의 독립운동을 지도하였다. 1943년 지원병(志願兵)제도가 실시되자 협조를 간청하러 온 일제의 조선군 사령관 판원(板垣)과의 면담을 거절하고 한국 청년들의 징병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일제 경찰에 일시 구속되었다. 곧 석방되었으나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가 신사참배(神社參拜)거부로 폐쇄당하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은거하다가 광복을 맞았다. 1945년 8·15광복 후에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의 위원장과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朝鮮民主黨)을 창당하고 반공노선에 입각한 신탁통치(信託統治)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소련군에 의해 평양 고려호텔에 연금, 1946년 1월에 행방불명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70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352·366·40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15·405·584·586·97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144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2·302·326·329·357·361·367·613·914면
  • 동아일보(1932. 8. 2)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15·242·34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214·676·682·698·700·720·752·753·768·770·773·907·915·1042·1059·1089면
  • 기려수필 88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92·440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391·447·633·646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4면
  • 고등경찰요사 46·4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6·8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28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76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조만식 - 평남 평양(平壤) 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신간회운동, 동우회사건,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 반대운동
본문
1883년 2월 1일 평남 평양부(平壤府) 진향리(眞香里)에서 창녕 조씨(昌寧曺氏) 조경학(曺景學)과 경주 김씨(慶州金氏) 김경건(金敬虔) 사이의 1남 2녀 중 독자로 태어났다. 호는 고당(古堂), 어릴 때 별명은 조장손(曺長孫)이며, NULL조선의 간디'라 불리기도 한다. 부친 조경학은 창녕 조씨 집성촌인 평남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石面) 반일리 안골의 서당에서 글을 가르치던 향반(鄕班) 출신으로, 평양으로 이주한 후 상점에 고용되어 회계장부를 정리하다가 위탁판매업자인 물산객주(物産客主)로 독립하였다. 1888~1896년 평양 관후리(館後里)의 서당에서 평생의 동지인 김동원(金東元) ・ 한정교(韓鼎敎) 등과 함께 장정봉(張正鳳)에게서 한문을 수학하였다. 1895년 두 살 연상의 박씨(朴氏)와 결혼하였다. 1897년부터 평양 종로에서 백목전(白木廛)을 운영하였으며, 이후 한정교와 지물상(紙物商)을 동업하면서 재산을 축적하였다. 1902년 부인 박씨와 사별하고 전주 이씨(全州李氏) 이의식(李義植)과 재혼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대동강 중류의 베기섬 벽도지리(碧島只里)로 이주하였다. 이 무렵 한정교의 권유로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 출석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에 입학하였으며, 이후 교장인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의 지도를 받으며 근대적 학문을 수학하였다. 베어드는 다른 선교사들과 달리 내세에서의 영혼 구원보다는 현세에서의 사회 구원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1907년에는 안창호(安昌浩)와 안태국(安泰國)의 강연을 듣고 감화를 받아 민족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1908년 봄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東京)의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하였다. 1909년 도쿄한인교회가 설립되자 김정식(金貞植) ・ 오순형(吳舜炯) 등과 함께 영수(領袖)로 활동하였으며, 도쿄한인기독교청년회YMCA 회장도 역임하였다. 1910년 4월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유학 시절 인도의 독립운동가 마하트마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의 전기를 읽고 그의 민족주의와 비폭력 ・ 무저항주의에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11년 장로교 교단 소속이었던 도쿄한인교회를 김영섭(金永燮) ・ 백남훈(白南薰) 등과 함께 장로교 ・ 감리교 연합 한인교회로 새롭게 개편하여 설립하였다. 같은 해 송진우(宋鎭禹) ・ 안재홍(安在鴻) 등과 함께 조선유학생친목회를 창립하였다. 친목회는 1912년 일본 당국으로부터 강제 해산당하였다. 1912년 메이지대학 전문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13년 4월 평북 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지리 ・ 역사 ・ 영어 등을 가르쳤다. 오산학교는 1907년 12월 이승훈(李昇薰)이 설립한 학교이다. 1915년 5월에는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919년 2월 사임하였다. 사임 이유는 같은 달 이승훈의 소개로 상하이(上海)에서 파견된 선우혁(鮮于爀)을 해주에서 만나 협조를 요청받은 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같은 해 3월 평양에서 도인권(都寅權)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시도하다 강동군 열패에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 일로 이른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언도 받고 평양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 1월 형기 2개월을 남기고 가석방으로 출감하고 그해 4월 평양 금주동맹회 회장에 선임된 데 이어, 8월에는 평양 교육협회발기회 회장으로 위촉되고, 평양 조선물산장려회 창립을 주도하였다. 같은 달 평양을 방문하는 미국의원단에게 진정서를 제출하려 한다는 혐의로 변인서(邊麟瑞) ・ 박치록(朴致錄) 등과 함께 일시 검속(檢束) 되었으며, 9월에는 선천경찰서 폭파사건에 관련자로 의심받아 김형직(金亨稷)과 함께 잠시 구금되기도 하였다. 같은 달 다시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3 ・ 1운동 때 민족대표로서 수감된 이승훈을 대신하여 학교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1921년 3월 평양 기독교청년회YMCA가 창립되자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총무로 취임하였다. 같은 해 10월 평양 고아구제회와 평양고아원, 12월 평양 실업저금조합 등을 설립하였고, 1922년 6월 창립된 평양조선물산장려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이 무렵부터 '조선의 간디'라 불렸다고 하며, 12월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장로가 되었다. 1923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 겸 지방순회위원으로 선임되어 이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강연하였다. 5월 창립된 평양 금연흥산조합(平壤禁煙興産組合) 부조합장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2월 평양에서 관서체육회(關西體育會)를 창립하였으며, 오산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였다. 11월 오산학교는 5년제 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1926년 6 ・ 10만세운동 직후인 8월 교장을 다시 사임하고 9월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강사로 법제와 경제 등을 강의하였다. 10월 김능수(金能秀) ・ 김병연(金炳淵) ・ 한근조(韓根祖) 등과 함께 평양 절약저금식산조합을 창립하였고, 12월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연합회 도시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평양 숭인중학교(崇仁中學校) 교장에 취임하였으며, 5월 평양자선회 이사에 선임되었고, 12월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新幹會)의 평양지회가 창립될 때 지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9월 숭인중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12월 김동원 ・ 오윤선(吳胤善) ・ 김성업(金性業) 등과 함께 평양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1929년 5월 평양 백선행기념관(白善行紀念館) 개관을 주도하였으며, 서울에서 조병옥(趙炳玉)을 중심으로 창립된 기독신우회(基督信友會)에 발기인과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6월 숭실학교 출신인 배민수(裵敏洙) ・ 유재기(劉載奇) ・ 최문식(崔文植) 등과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하였으며, 8월 평양소비조합의 창립을 주도하였다. 1929년 10월 조선어사전편찬회 설립 발기인, 12월 평양 차가인동맹(借家人同盟)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0년 3월 평양협동저금조합을 조직하였고, 4월 숭인중학교를 숭인상업학교로 변경하고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9월 재단법인으로 인가받은 백선행기념관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1931년 3월 평양유도청년회후원회(平壤柔道靑年會後援會)를 조직한 데 이어 관서체육회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4월 김병연 ・ 오윤선 등과 함께 관서협동조합경리사(關西協同組合經理社)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5월 신간회 평양지회 정기대회 집행위원장으로서 '해소(解消)'에 반대하였지만 좌절되었다. 6월 평양한글연구회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7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에 격분한 평양 군중이 중국인 가옥과 상점을 공격하자 각 단체들과 연합성명을 발표하고 사태 수습을 주도하였다. 12월 김인정(金仁貞)의 희사로 인정도서관(仁貞圖書舘)을 개관하는 데 관여하였다. 1932년 5월 평양에서 조직된 조선기독교절제운동회(朝鮮基督敎節制運動會)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 창립 때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조선이료회(朝鮮理療會) 설립에도 관여하였다. 같은 해 10월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를 사임하고 11월 서울 조선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다. 1933년 2월 조직된 이화여자전문학교후원회(梨花女子專門學校後援會)와 6월 조직된 정신여학교후원회(貞信女學校後援會)에 참여하였다. 같은 달 조선일보사가 주식회사로 전환되자 7월 사장을 사임하고 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며, 과학지식보급회(科學知識普及會) 창립 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9월 조선광업주식회사 설립을 주도하였다. 1934년 8월 김동원이 평양기독교청년회 회장에 선출되면서 명예총무로 추대되었다. 1935년 2월 평양을 방문한 안창호를 영접하고 김성업 ・ 한근조 등과 함께 환영회를 준비하였으나 당국의 저지로 무산되었다. 3월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記念圖書出版館) 설립이 논의될 때 감사로 선임되었고, 10월 대동(大同)에서 개원한 송산고등농사학원(松山高等農事學院) 이사로 선임되었다. 12월 부인 이의식이 별세하였다. 1936년 5월 평양에서 창립된 을지문덕묘산수보회(乙支文德墓山守保會)의 회장에 취임하였고, 같은 달 백선행기념관이 동명학원(東明學院)으로 전환되자 원장으로 선임되었다. 1937년 1월 서울에서 개성 호수돈여학교(好壽敦女學校) 교사 전선애(田善愛)와 재혼하였다. 4월 평양경찰서로부터 조선물산장려회 ・ 관서체육회·을지문덕묘산수보회 등을 해산하라는 압력을 받았으며, 6월 동우회사건(同友會事件)에 연루되어 평양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이송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9월 관서체육회 회장을 사임하였다. 10월 신사참배 문제로 숭실전문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이자 숭전존속기성위원(崇專存續期成委員)과 숭전교우회(崇專校友會) 실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8년 3월 안창호가 사망하자 장의위원장(葬儀委員長)을 맡아 장례식을 주관하였으며, 6월 조선기독교청년연맹의 세계기독교청년연맹 탈퇴 및 일본기독교청년연맹 가입을 위한 위원회의 평양 대표로 선임되었다. 1938년 2월 산정현교회 담임목사이자 오산학교 제자인 주기철(朱基徹)이 수감되고 일제가 신사참배(神社參拜)와 창씨개명(創氏改名) 등을 강요하자 1939년 10월 김동원 ・ 오윤선 등과 함께 산정현교회 장로를 사퇴하였다. 1940년 3월 교회는 폐쇄되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 민족의 지도자인 그를 회유하여 시국 선전에 활용하기 위한 일제의 회유와 탄압이 계속되었다. 1940년 일제가 국민총력조선연맹을 결성하고 평남지부 고문을 제의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1943년 지원병제에 대한 협조도 거부하였고, 1944년 학병 권유 시국강연을 강요받자 평양기독병원에 입원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일제의 감시와 압박이 계속되자 선대의 고향인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안골로 이주하여 해방까지 은거하였다. 한편 1941년 12월 성금(誠金)과 유기(鍮器)를 평양경찰서에 헌납하였으며, 1943년 11월 조선청년들에게 학병 지원을 권유하라고 기고(寄稿)하였고, 차남 조연창(曺然昶)도 자원 입대하였다는 기사 등이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每日新報)』에 실렸다. 하지만 해방 이후 이 기고와 기사는 당시 매일신보사 평양지사장 고영한(高永翰)이 조작한 것으로 밝혀졌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평양으로 귀환하였고,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결성 때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평남 건준은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의 연합 조직이었으나 대체로 민족주의계열이 우세하였다. 이 단체는 정식으로 행정권과 치안권을 인계받지 못한 상태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으나,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10여일 만에 해체되었다. 이어 소련군정의 권유로 현준혁(玄俊爀)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과 함께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를 결성하고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인민정치위원회는 행정권과 치안권을 확보하였지만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자주 갈등을 빚었고, 사회주의계열이 우세하였다. 9월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에 재정부장으로 발표되었으며, 10월 미군정청이 임명한 고문 11명의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같은 달 북조선5도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으며, 김일성(金日成) 환영대회 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11월 평양에서 조선민주당을 창립하고 당수에 취임하였으며, 부당수는 이윤영(李允榮) ・ 최용건(崔鏞健)이 선출되었다. 조선민주당은 민족독립 ・ 남북통일 ・ 민주주의 확립의 3대 원칙을 표방하고 광주학생운동 기념일인 11월 3일 창당대회를 열어 발기인 105인과 상임집행위원 33인을 선정하였다. 105인과 33인 선정은 105인사건과 민족대표 33인을 기념하여 선정한 것이었다. 12월 조선군사후원회 ・ 한국광복군후원회 ・ 광복군군사후원회 등이 대한민국 군사후원회로 통합되면서 고문으로 추대 되었다. 하지만 같은 달 한반도에 대한 미국 ・ 영국 ・ 중국 ・ 소련의 신탁통치를 골자로 하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알려지면서 정국이 급변하였다. 1946년 1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고, 평남인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반대하자 소련군정청은 차남 조연창과 사위 강의홍(康義弘) 등과 함께 그를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하였다. 2월 개최된 조선민주당 열성자협의회에서는 조만식을 규탄하는 선언문이 채택되고 최용건의 주도로 김일성의 인척인 강양욱(康良煜)이 임시당수로 선출되었다. 같은 달 연금 상태에서도 헌법급선거법수정위원회(憲法及選擧法修正委員會) 위원 및 조선수상연맹(朝鮮水上聯盟) 고문으로 선임되었으며, 3월 전조선문필가협회결성준비위원회 명예회원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5월 부당수 이윤영 등이 상경하여 남한에서 조선민주당을 재건하고 그를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9월 이후 그의 시베리아 이송설(移送說)이 유포되기도 하였다. 1947년 6월 평양을 방문한 미소공동위원회 미국측 대표 브라운(W. G. Brown)과 열차에서 잠시 면담하였으나 감금은 계속되었다. 1948년 11월 부인 전선애와 자녀들이 월남하였다. 1950년 6월 북한은 남한에서 간첩으로 활동하다 체포된 김삼룡(金三龍) ・ 이주하(李舟河)와 그를 교환하자고 제의하였다. 이 무렵 고려호텔이 아닌 평양교외의 치안국 청사에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교환에 대한 양측의 논의가 진행되던 중 북한이 남침하였다. 북한은 그의 석방을 남침 위장의 도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0월 국군의 평양 탈환을 앞두고 북한 인민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 10월 18일 김일성의 지시로 처형하여 대동강 인근에 매장하였다는 박길룡(朴吉龍) 전 북한외무성 제1부상의 증언에 따라 매년 그날 추모식이 거행되고 있다. 1976년 1월 사단법인 고당조만식선생 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으며, 1984년 6월 고당기념관이 건립되었다. 1991년 11월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제2묘역에 안장되었다. 유해는 부인 전선애가 남편에게 건네받은 머리카락으로 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0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 1919-07-03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자 찾기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비석 독립유공자 추모비 서울특별시 동작구
2 동상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경기도 파주시
3 동상 고당 조만식선생 동상 서울특별시 광진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조만식(관리번호:9833)
*오류 제목
*오류 유형
*오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