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95
성명
한자 姜宇奎
이명 日愚(號), 姜燦九, 姜康寧, 姜寧一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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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의열투쟁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1999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한학에 전념하다가 만주(滿州)로 건너감
2. 다시 길림(吉林) 서백리아(西伯利亞) 연해주(沿海洲) 등지를 편답후 길림(吉林) 요하현(遼河縣)에서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함
3. 3.1 운동 당시 만주(滿州) 노령(露領)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함
4. 1919년 5월에 해삼위(海蔘威)에서 조선총독 암살을 결의하고 동부(東部) 서백리아(西伯利亞) 오소리 일소역(一小驛)에서 폭탄을 구입하여 동년 6월 원산(元山)에 상륙 8월 5일 서울에 도착하여 내외 정세 및 총독의 동정을 규찰한 후 동년(同年) 9월 2일 장곡천(長谷川)사임(辭任)재등실(齋藤實)이 부임함을 확인하자 사진을 구입하여 재등(齋藤)인상(人相)을 익히고
5. 9월 2일 조조(早朝) 폭탄을 명주 수건(明紬手巾)에 싸서 지니고 군중에 끼어있다가 오후 4시경 재등(齋藤)이 도착하여 귀빈실 입구(貴賓室入口)에서 나와 마차에 타려는 찰나 폭탄을 투척한 바 폭탄은 재등(齋藤)으로부터 7보상거(步相距)에 떠러저 재등(齋藤)무사(無事)하고 순사(巡査)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郎)파편(破片)에 맞아 9월 11일 절명(絶命)하고 대판매일신문 특파원(大阪每日新聞特派員) 2명이 사상(死傷)
6. 동년(同年) 9월 17일 가회동(嘉會洞)에서 일경(日警)주구(走狗)김태석(金泰錫)에게 피체(被逮)
7.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 형장(刑場)에서 처형되니 향년 65세임
8. 의사(義士)는 문화계몽사업에도 진력(盡力)하여 6개의 학교와 3개의 교회 및 노인단(老人團) 1개와 민회(民會) 2개를 조직운영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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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8권(1990년 발간)

평남 덕천(德川) 사람이다.

그는 소년시절에 부친을 따라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한학에 전념하다가 국운이 기울어짐을 보고 고국을 떠나 1910년 경술국치를 맞게 되자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건너갔으며 다시 길림·시베리아·연해주 등지를 편답(遍踏)하고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9년 국내의 3·1독립운동에 호응하여 만주·노령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그해 5월 노령의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에 참가하여 노인단을 대표하여 조선총독을 폭살할 계획을 품고 폭탄을 구입하여 허형(許炯)과 같이 원산을 거쳐 동년 8월 5일 목적지인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안국동 김종호(金鍾鎬) 집에서 숙식하면서 동지 허형(許炯)으로 하여금 신임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의 사진과 부임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리하여 9월 2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주읍 최준(崔浚)에게 보내는 공한을 허형(許炯)에게 건네준 후 남대문 정거장에 나가 재등실 일행이 마차를 타려는 순간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앞 십여보 지점에서 폭발하였고,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은 인새(人海)를 이루었던 군중들과 관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 한 개의 파견이 재등이 탄 마차 후면에 맞아 재등의 혁대를 스쳤을 뿐 정무총감 수야연태랑(水野鍊太郞)은 경미한 부상만을 입고 만철이사(滿鐵理事) 구보(久保)와 미국 뉴욕시장의 딸 허리슨 부인 등 37명의 부상자를 내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중 일경 말홍우이랑(末弘又二郞)만 파편이 왼쪽 엉덩이를 관통하여 9월 11일에 절명하였고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 귤(橘) 특파원은 파편이 복부로 들어가 동년 11월 1일에 사망하고 산구간남(山口諫男) 특파원은 오른쪽 어깨에 중상을 입어 팔을 절단하였다. 이 거사는 "한일합방은 한국민의 원하는 바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고 강변하면서 세계 여론을 기만하던 일제의 흉계를 폭로, 한국민의 정기를 표현하여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케 하였다.

일경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 그는 서서히 걸음을 옮겨 거사 장소를 빠져나왔다. 거사장소를 빠져나온 후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허형(許炯)을 만나 재거사를 계획하면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가회동 장익규(張翊奎) 집과 간호부 탁명숙(卓明淑)의 주선으로 사직동 임승화(林承華) 집 등을 전전하다가 동년 9월 17일 누하동에서 일제의 주구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일제 검사가 "감상이 어떠냐?"고 묻자, "단두대상(斷頭台上) 유재춘풍(猶在春風) 유신무국(有身無國) 기무감상(豈無感想)"이라 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기개를 굽히지 않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을 당하니 향년 65세였다. 그는 한편으로 의열투쟁 뿐만 아니라 문화계몽사업에도 힘을 써 6개소의 학교와 3개소의 교회 및 1개소의 노인단(老人團), 민회(民會) 2개소를 조직 운영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135·13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34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2권 25·396면
  • 고등경찰요사 319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49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국사편찬위원회) 8권 298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45면
  • 기려수필 88·277-280·295·304·384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7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121·20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99·277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34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27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분책 115·134·147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10·464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80·83-86·595-610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69·70·214·389·417·421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94면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소장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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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강우규 자 찬구(燦九), 호 왈우(曰愚), 이명 영일(寧一)·강녕(康寧) 평남 덕천 남대문역 투탄의거
본문
1855년 7월 14일 평안남도 덕천군(德川郡) 무릉면(武陵面) 제남리(濟南里)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진주강씨 소감공파세보(少監公派世譜)』에는 ‘철묘십년(哲廟十年) 기미유월이일(己未六月二日)’, 1859년 (음)6월 2일생으로 되어 있다.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고, 이명은 영일(寧一)·강녕(康寧)이다. 아버지는 강재장(姜齋長)이고, 슬하에 중건(重建, 일명 鍵夏)·건형(鍵� ) 두 아들을 두었다 가난한 농부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 부모를 여읜 탓에 누나 집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나 『기려수필(騎驢隨筆)』에는 그가 스무 살 되던 해 부친이 살아계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920년 강우규의 사형이 확정된 직후 장남 중건이 『동아일보』 기자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어머니가 살아계신다고 하였다. “훤칠하고 당당한 체구에 큰 절의가 있었으며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데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므로 집안이 매우 가난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라고 한다. 10여 세에 한문을 배웠고, 이후 한방 의술을 익혀 한약방으로 생계를 꾸려나갔다. 30세 되던 1885년 함남 홍원군(洪原郡) 용원면(龍源面) 영덕리(靈德里)로 이사하였다. 홍원에서는 생업을 위해 남문 앞에서 한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하였다. 25년간 한약방과 잡화상을 경영하면서 많은 재산을 모았다. 1908년 이동휘(李東輝)가 신민회(新民會) 활동의 하나로 함경도 지역을 순회하며 기독교 선교 활동과 함께 학교 설립을 통한 구국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때 이동휘를 만나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입문하는 한편, 사재를 털어 영명학교(靈明學校)와 교회를 설립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곧바로 장남 중건 부부 등 가족들을 먼저 러시아로 이주시키고, 자신은 1911년 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처음 지린성(吉林省) 허룽현(和龍縣) 두도구(頭道溝)에 자리를 잡은 뒤, 만주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일대를 답사하며 이동휘·박은식(朴殷植)·계봉우(桂奉瑀) 등을 만나 독립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914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 당시, 계봉우가 찾아와 2개월간 기거하면서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본 뒤 안중근의 의거를 가슴속에 새기면서 후일 의거를 일으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제정 러시아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탄압하자, 이를 피해 1915년경 우수리강을 건너 지린성 라오허현(繞河縣, 현 헤이룽장성 라오허현)으로 거처를 옮겼다. 라오허현은 북만주와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였다. 이 무렵 하바롭스크에서 가족과 재회하였다 한다. 라오허현에서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한 결과, 처음 몇 호에 불과하던 마을이 100여 호에 달하자 신흥동(新興洞)이라 이름 지었다. 1917년 봄 신흥동에 광동학교(光東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외에도 30년간 홍원에 영명학교와 교회, 러시아 이만에 협성학교(協成學校)와 조선민회(朝鮮民會), 만주 라오허현 신흥동에 조선민회, 블라디보스토크에 교회와 노인단, ‘밋가루시카’에 학교 6개, 교회 3개, 민회 2개를 설립하여 전도와 민족 교육에 힘썼다. 1919년 3월경 국내의 만세 시위 소식을 접하자, 라오허현 신흥동 동포 400~500명을 모아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다. 4~5월경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에 가입하고 라오허현 지부 책임자가 되었다. 노인동맹단은 3·1운동 직후인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 김치보(金致寶)의 집에서 조직한 단체다. 노인동맹단은 독립운동 청년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결성된 단체였던 까닭에 회원의 나이를 46~70세로 연령 제한을 두었다. 단장 김치보, 총무 김순약(金舜若), 의장 이일(李逸), 서기 서상구(徐相矩), 의원 이륜(李崙)·박희평(朴凞平)·한승우(韓承羽)·이득만(李得萬)·윤여옥(尹餘玉)·주우점(朱于漸)·강석기(姜錫基)·서상구(徐相矩)·정치윤(鄭致允)·이일·박대동(朴大同) 등을 선출하였다. 노인동맹단은 발족 이후 전단위원(傳團委員)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여 단원을 모집하였다. 4월 2일 유태순(劉泰純)이 사오수이펀(小綏芬, 일명 小秋豊)과 포크라니치나야 지방을 향해 출발한 것을 시작으로 4월 3일 차대유(車大有)는 스찬(水淸, 일명 蘇城, 현재의 파르티잔스크), 최시종(崔侍從)은 이만으로 각기 출발하였고, 4일에는 이륜·김영학(金永學)이 수이푼(秋豐) 니콜리스크(蘇王嶺, 일명 雙城子) 방면으로 출발하였다. 이때 라오허현 인근 이만 지역으로 온 최시종을 만나게 되자, 노인동맹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1919년 5월경 정세를 살피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갔다가 이동휘의 부친 이승교(李承喬, 일명 李發)를 만나 그의 소개로 가입하였다는 설도 있다. 노인동맹단은 5월 말 이승교 등 단원들을 국내로 파견하여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때 이승교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하였다. 일제는 이승교 등을 체포하였으나 이승교·정치윤은 노령(老齡)이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하고, 윤여옥 등 다른 단원들만 이른바 「정치범처벌령(政治犯處罰令)」 위반으로 처벌하였다. 추방된 이승교·정치윤 등이 6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하자, 노인동맹단은 환영회를 베풀고 향후 독립운동 계획을 논의하였다. 6월 말 노인동맹단은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명의로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한국독립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활동을 하였다. 이즈음 국내 정세를 파악하려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으로 건너갔다. 신한촌에서 이승교 등의 환영식 소식과 2대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곧 경질될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신임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자신이 살던 신흥동 근처 청룡(靑龍)에서 러시아인에게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였다. 문제는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은 폭탄을 부녀자의 월경대처럼 바짓가랑이에 차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6월 11일 일본 기선 에치고마루(越後丸)라는 배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14일 함남 원산(元山)에 도착하자 최자남(崔子南)을 찾아갔다. 최자남은 1915년 니콜리스크에 거주할 당시 4개월간 머물게 해주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자신의 집을 제공할 정도로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 한 달간 최자남의 집에 머물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때 최자남의 소개로 허형(許炯)·한은철(韓殷哲)을 소개받기도 하였다. 허형은 평남 안주(安州) 출신으로 3·1운동 직후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던 인물로, 당시 러시아로 건너가기 위해 최자남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7월 5일 3·1운동의 책임을 지고 하세가와가 도쿄(東京)로 물러나자 곧 신임 총독이 부임할 것을 예견하고 8월 5일 허형·한은철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 도착 후 허형의 주선으로 안국동(安國洞) 김종호의 집에 머물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정보를 탐문하였다. 그러던 중, 8월 12일 일본 정부는 예비역 해군대장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하였고, 언론에서는 신임 총독의 시정 방침과 함께 사진까지 공개하며 대서특필하였다. 언론을 통해 이 소식을 확인한 뒤, 신문에 실린 사이토의 사진을 지니고 다니면서 얼굴을 익히는 한편, 거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8월 28일 거사 장소인 서울 남대문역(현 서울역) 근처 박영근의 집으로 숙소를 옮기고, 매일 남대문역 앞을 찾아 지형을 면밀히 살피며 여러 차례 현장 상황을 점검하였다. 8월 29일 도쿄에서 출발한 사이토 총독 일행은 9월 1일 부산에 도착하였고, 9월 2일 오후 5시 서울 남대문역에 도착하였다. 이날 군 당국은 신임 총독 환영식을 위해 기병 1개 중대의 의장대와 보병 제78연대 소속 보병 2개 대대를 배치하였다. 이외에도 경찰을 동원하여 탐문과 삼엄한 경계를 하였다. 9월 2일 아침, 폭탄을 명주 수건에 싼 뒤 허리에 묶고 그 위에 저고리와 두루마기를 입었다. 이어 허형과 남대문 밖 중국요리점에서 같이 점심을 한 후 거사 장소로 향하였다. 총독 도착 1시간 전, 거사를 하기에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였다. 그러던 중 총독이 귀빈실을 거쳐 간다는 사실을 알고는 귀빈실 근처로 자리를 옮겨 총독의 도착을 기다렸다. 총독을 태운 특별열차는 오후 5시 정각에 플랫폼에 들어섰다. 사이토 총독은 열차에서 내려 1,000여 명의 환영객이 운집한 곳으로 가 악수를 하고는 남대문역 광장으로 향하였다. 그곳에는 총독 내외와 정무총감 내외가 탈 마차가 각각 준비되어 있었다. 총독이 마차에 오르자, 수류탄을 힘껏 던졌다. 폭탄은 마차에서 약 12~13m 떨어진 곳에서 폭발하였다. 폭발과 함께 사방으로 튄 파편 몇 조각은 총독의 혁대에 박혔으나 총독은 무사하였다. 다만, 현장에 있던 신문기자와 경찰, 철도 및 차량 관계자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중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경성특파원 다치바나(橘香橘)와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末弘又二郞) 등 2명은 며칠 뒤 사망하였다. 의거 직후 담담한 자세로 체포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그를 체포하지 않자 숙소로 돌아와서 허형과 재차 거사를 계획하는 한편, 안국동·가회동(嘉會洞)·사직동(社稷洞)에 사는 지인의 집을 오가며 은신하였다. 그러나 거사를 일으킨 지 16일 만인 9월 17일 누하동에서 한국인 경찰 김태석(金泰錫)의 불심검문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김태석은 당시 경기도 경찰부 고등과 소속 경부(警部)로, 후일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되었고,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약칭 반민특위)에 체포된 대표적 친일 경찰이었다. 체포 소식은 사건 발생 20여 일이 지나서야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1920년 2월 25일 경성지방법원은 강우규에게 사형, 최자남에게 징역 3년 형을 허형에게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하였다. 이 판결에 대해 허형은 항소를 제기하지 않고 옥고를 겪었다. 판결 후 곧바로 항소하였다. 이유는 자신의 사형을 면하기 위함이 아니라 거사를 도와준 동지 최자남을 변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4월 26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이어 5월 27일 고등법원(高等法院, 오늘날 대법원에 해당)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사형이 확정되었다. 3심이 진행되는 동안,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따라서, 상고취지서도 직접 작성하였다. 상고이유서에 보면 총독을 처단하고자 한 것은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동양 평화를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상고 기각 후 6개월 뒤인 11월 26일 경성복심법원은 서대문형무소로 사형 집행 명령서를 발송하였다. 사형 일자는 3일 뒤인 11월 29일이었다. 29일 오전 9시 30분, 서대문형무소 측은 종로구치감에 갇혀 있던 그를 데려왔고, 10시 30분 오카모토(岡本) 검사가 입회한 가운데 사형을 집행하였다. 이때 세상을 떠나며 시를 남겼다. 이른바 사세시(辭世詩)이다. 단두대에 서니 斷頭臺上 오히려 봄바람이 이는구나 猶在春風 몸은 있으되 나라가 없으니 有身無國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 豈無感想 처형 직전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만주에서 온 장남 중건이 마련해준 한복 두루마기를 입었다. 일제는 사형 집행 당일, 장남 중건을 경찰서 유치장에 잡아 가두었다가 사형 집행이 끝난 후에 풀어주었다. 그러고는 오후 3시 반경 중건에게 아버지의 시신을 인도하였다. 감옥 시체실에서 중건에게 내어준 사각형 궤짝 속에는 강우규의 시신이 앉은 채로 입관되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상고심에서 강우규의 사형 결정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진주강씨종친회는 문중 차원에서 시신을 수습하여 선산에 안장하기로 결정하는 한편, 비를 세워 공적을 새기기로 하였다. 그러나 시신을 선산에 안장할 경우, 조선인의 민심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빈소도, 조문도, 장례 행렬도, 조객도 없이 장남 중건과 몇몇 지인만이 유해를 운구하여 서대문형무소 공동묘지였던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신사리(현 서울 은평구 신사동)에 가매장하였다. 일본 경찰이 유해가 운구되는 동안에도 쫓아오며 감시를 하자, 화가 난 중건은 돌을 던지며 “네놈들은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감시해야만 속이 시원하냐!”라고 외쳤다 한다. 1956년 10월 유지들의 발의로 수유리 산109번지로 묘지를 이장하였다가 반세기가 다 된 1967년 6월에야 비로소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강우규의 남대문역 투탄 사건은 3·1운동 이후 개인이 단독으로 감행한 최초의 의열 투쟁이었다. 이 의거는 의열단(義烈團)으로 계승되면서 1920년대 의열 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자리 잡는 역할을 하였다. 2006년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가 출범하여 『남대문역두의 투혼 의사 강우규』를 출간하였고, 동상 건립 기금 모금 운동을 비롯해 각종 기념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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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폭발물취체벌칙위반 사형 경성지방법원 1920-02-25 국가기록원
2 판결문 폭발물취체벌칙위반 사형(원판결중 피고에 관한부분 취소) 경성복심법원 1920-04-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폭발물취체벌칙위반 상고 기각 고등법원형사부 1920-05-27 국가기록원
4 인물카드 보안법범 - -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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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국립묘지 서울현충원 서울특별시 동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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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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