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914
성명
한자 李儁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계몽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1994년 0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의장(評議長)에 피선되고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반대운동을 하였으며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고 일진회(一進會)와 대항함
2. 1907년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화란(和蘭) “해그”에서 개최케 되자 광무황제(光武皇帝)의 위임장과 조서를 가지고 가서 회의참석을 간청하여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 체결되었음을 설명하고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려고 하였음
3. 그러나 열국 위원(列國委員)들이 사정은 짐작하나 공식상 처리에 곤란하다 하여 3밀사(密使)에게 퇴장을 명하자 의분을 참지 못하여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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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1권(1986년 발간)

함경남도 북청(北靑)군 속후(俗厚)면 중산(中山)리에서 태어났다. 1895년에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한성재판소의 검사보를 거쳐 검사로서 관계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11월의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에서는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에는 이상재(李商在) 민영환(閔泳煥) 이상설(李相卨) 이동휘(李東輝) 양기탁(梁起鐸)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에 가담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 일전쟁을 일으키고 일본군을 한국에 불법 상륙시켜 한국정부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데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일제가 전국의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를 반대하는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에 가입하여 그 총무의 직책을 맡고 격렬한 반대상소와 시위운동을 전개하는데 주동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때 보안회의 회장은 송수만(宋秀晩), 부회장은 원세성(元世性)이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하여 해산 당하자, 그 후속단체로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하였다. 대한협동회의 회장은 이상설, 부회장은 이준, 총무는 정운복(鄭雲復), 평의장은 이상재, 서무부장은 이동휘, 지방부장은 양기탁, 재무부장은 허 위(許蔿) 등이었다. 대한협동회는 일본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완강히 반대하여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에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를 조직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한 단체로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의 책임을 맡고 반(反)일진회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이준을 6개월의 유배형(流配刑)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귀양보내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소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침탈하자, 이준은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동지들인 전덕기(全德基) 정순만(鄭淳萬) 이동녕(李東寧) 최재학(崔在學) 계명륙(桂明陸) 김인즙(金仁 ) 옥관빈(玉觀彬) 이승길(李承吉) 차병수(車炳修) 신상민(申尙敏) 김태연(金泰淵) 표영각(表永珏) 조성환(曺成煥) 서상팔(徐相八) 이항직(李恒稙) 이희간(李喜侃) 기산도(奇山濤) 김병헌(金炳憲) 유두환(柳斗煥) 김기홍(金基弘) 김 구(金九) 등과 함께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조직하였다. 그들은 먼저 「을사조약」폐기를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회 2회로 도끼를 메고 연명으로 상소하여 죽든지 체포당하든지 몇 번이고 반복하기로 하였다. 제1회의 상소문을 이준이 짓고 최재학이 소두가 되고 다섯 명이 연명으로 서명하여 대한문 앞에 몰려가서 상소운동을 시작하였다. 일제경찰이 출동하여 상소운동을 탄압하려 하자 이준 등은 가두연설을 하여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하면서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시위운동을 탄압하고 이준 등 지도자 수십 명을 체포하였다. 국권회복운동이 장기전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음을 알게 된 이준은 1906년에 국민의 애국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에 취임하였다. 또 이 목적을 전국 각 지방에서 실현해야 한다고 하여 그의 고향인 함경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함께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지도하였다. 또한 이 해에 일제의 완전식민지화를 저지하려면 국왕이 조약체결의 전제권을 갖지 않고 의회가 이를 심의하고 동의케하는 제도로 개혁해야 함을 주장하여 입헌제도의 연구와 개혁을 추진하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여 그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헌정연구회가 확대개편되어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가 창립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7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덕기 이회영(李會榮) 박(朴)상궁 등의 도움을 받아 황제 고종에게 이 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해서 「을사조약」이 황제의 의사에 반하여 일제가 군사적 강압을 가하여 체결된 것으로 고종은 찬동한 바 없는 조약이므로 무효임을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하였다. 고종이 이에 동의했으므로 극비리에 밀사(密使)로서 정사(正使)에 이상설, 부사(副使)에 이 준과 이위종(李瑋鍾)이 임명되고 만국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들에게 보내는 고종의 친서가 준비되었다. 이상설은 이때 이미 망명하여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있고, 이위종은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李範晋)의 아들로서 공사관의 2등참사관이 되어 페테르부르그에 있었다. 이준은 헤이그 세계평화회의의 밀사로 1907년 4월 21일 서울을 출발하였다. 그가 출발하기 직전인 4월초에 양기탁과 안창호(安昌浩)가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운동의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었으므로 신민회에 가입했으나 곧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으므로 활동은 할 수 없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이상설을 만나 밀사임명의 칙서를 전하고 함께 러시아 수도인 페테르부르그로 가서 이위종을 만나 세 특사의 진용을 갖추었다. 세 밀사는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약속 받았다. 이준 등 세 밀사는 1907년 6월 25일경 헤이그에 도착하여 평화회의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가 방해하여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밀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이를 공표하여 국제 여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이위종은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7월 9일 각국 신문 기자단의 국제 협회에서 행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밀사의 활동에 협조적이었던데 비하여,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준은 이에 분개하여 통탄하다가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한편 일제 통감부는 궐석재판에서 이준에게 종신징역을 선고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기려수필 117면
  • 매천야록 420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3권 28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권 423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0·45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177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3권 48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이준 자 : 순칠(舜七), 호 :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초명 : 성재(性在)·선재(璿在) 함남 북청(北靑) 헤이그특사사건
본문
1859년 1월 21일 함남 북청군 속후면 중산리 발영동에서 부친 병관(秉瓘)과 모친 청주 이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는 순칠(舜七)이고, 초명은 성재(性在)였으나 선재(璿在), 준(儁)으로 개명하였다. 호는 일성(一醒) ・ 해사(海史) ・ 청하(靑霞) ・ 해옥(海玉) 등을 썼다. 이성계의 맏형 완풍대군의 18대 후손이다. 완풍대군은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자 고려의 신하로서 충절을 지키고자 자결한 인물이다. 슬하에 장녀 송선(松鮮)과 장자 종승[鍾乘, 이명 용(鏞)] 등을 두었다. 장남 종승은 후에 만주 간민회 발기인, 국민회군에서 활동하였다. 세 살 되던 해인 1861년 7월 부모가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에 앞서 부친이 후사를 잇지 못한 백부(伯父)에게 양자로 갔기 때문에 부모 사망후 양할아버지 밑에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여섯 살 되던 해 양할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이후 친할아버지의 넉넉한 보살핌 속에 성장하였다. 북청에는 완풍대군의 위패가 봉안된 기형사(機形詞)가 있었는데 이곳을 종종 찾곤 하였다. 당대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조부 이명섭과 숙부 이병하에게서 한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북청에서 향시가 열리자 이에 응시하였다. 이때 선재(璿在)로 개명하였다. 문장이나 글씨가 좋아 합격하였지만 시험관들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등제(等第)시키지는 않았다. 시험관들에게 거세게 항의하기도 하고 북청 남문루에 올라 억울함을 호소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이 일로 북청에서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인물됨을 알아본 이웃 마을에 사는 주만복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1875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북청물장수들이 운영하는 수방도가(水房都家)에서 머물면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고종의 친정(親政)으로 경기 양주의 직곡산장에 머물던 흥선대원군이 운현궁으로 돌아오자 흥선대원군을 찾았고, 그 뒤 이조참판 김병시의 문객(門客)이 되어 식객들을 접대하거나 개인 사무를 처리해주곤 하였다. 이후 김병시로부터 신망을 얻어 해옥(海玉)이란 호를 받았다. 이즈음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을 두고 찬반 여론이 거세게 일자 최익현을 찾아가 이는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나 다름없다며 부국강병에 전력해야 할 때라며 역설하여 재사(才士)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병시의 아들과의 불화로 1884년 고향에 내려왔다. 1885년 장녀 송선이, 1888년에는 장자 종승이 태어났다. 1887년 가을 북청에서 열린 향시에 응시하여 장원에 급제하였고, 1889년 봄 가재를 털어 경학원을 설립하고 인재양성에 진력하였다. 그해 가을, 김병시의 부름을 받고 다시 상경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 명망가 자제들인 이회영 ・ 이시영 형제, 훗날 헤이그 특사로 같이 파견되었던 이상설 등을 알게 되면서 10년 차이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사이가 되었다. 1893년 김병시의 소개로 이화학당 출신의 이일정(李一貞)과 다시 혼인하였다. 1894년 8월 함흥의 순릉 참봉에 임명되어 첫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궁중의 의식 ・ 제사 ・ 능침(陵寢) ・ 종친 ・ 귀족 등의 사무를 맡아보던 종백부(宗伯府)가 폐지되자 법관양성소에 입학하였다. 6개월 동안 근대 법률을 배우며 1895년 11월 졸업한 뒤, 1896년 2월 동기생들 가운데서 가장 먼저 한성재판소 검사 시보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며칠 뒤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장박(張博) 등 갑오개혁 세력들과의 관계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정객 ・ 학자들과 교류하면서 국제 정세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특히 박영효의 알선으로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학교) 법과에 입학하여 법률 공부를 이어갔다. 일본인들에게 글씨를 써주며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1898년 9월 김병시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 귀국후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윤치호 ・ 이상재 등과 더불어 의회 설립과 친러 수구파의 퇴진과 내각 수립 등을 주장하였다. 1898년 10월 관민공동회 개최 당시에 총무장으로서 정부 각료와 각계각층의 인물들에게 초대장을 발송하는 한편, 연설대에 올라 러시아의 이권과 비리 관리들을 비난하였다. 이날 「헌의(獻議) 6조」가 결의되고 고종이 이를 재가하면서 의회설립운동이 급진전되었으나 수구파의 모함에 오히려 이를 주도한 독립협회 회원 17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에 독립협회 회원들을 이끌고 경무청으로 달려가 체포 해명을 요구하면서 그들의 석방에 노력하였다. 이들이 고등재판소로 옮겨진 뒤에 공개재판을 요구하는 한편 무고함을 알리며 만민공동회를 주도하여 회원 17명이 무사히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만민공동회를 계속 주도하여 독립협회의 복설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중추원에서 정부 요인을 추천하는 투표에서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와 미국의 서재필이 포함되면서 독립협회는 위기에 처하였다. 황국협회가 독립협회를 습격하자, 종로에 연설대를 마련하여 독립협회 임시대회를 열고 황국협회 타도와 정부탄핵 연설을 하였다. 이어 180여 명의 결사대를 뽑아 죽음을 무릎 쓰고 시위를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정부의 방해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결국 400여 명의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체포 ・ 구금되었다. 1902년 민영환 ・ 이상재 ・ 이상설 ・ 이동휘 ・ 양기탁 ・ 남궁억 ・ 노백린 ・ 장지연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개혁당을 조직하여 친러세력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때 서대문 밖 독립문 옆에 있는 독립회관에서 「동청사변(東淸事變)이 가져온 영일동맹(英日同盟)」이라는 국민대연설로 청중들로부터 환호를 받았다. 정부는 이를 빌미로 개혁당 사건을 조작하여 관련자들을 검거하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를 백인종과 황인종 간의 대결로 인식하고 일본의 아시아연대론에 전도되었다. 이때 선재 대신에 준(儁)으로 개명하고 정순만 등과 적십자사를 설립하여 부상당한 일본 병사들을 돕고자 일본 적십자사에 휼병비(恤兵費)를 보내자는 모금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러일전쟁에 중립노선을 견지하던 정부 정책에 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한성감옥에 투옥되고 말았다. 그곳에 투옥된 독립협회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애쓰던 상동교회의 전덕기와 인연을 맺기도 하였다. 평리원에서 열린 적십자사 사건 재판에서 장(杖) 80을 선고받고 5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석방후 일제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기 위하여 이상설 ・ 송수만 ・ 원세성 등과 함께 보안회(일명 보민회)를 조직하여 격렬한 반대 상소와 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한때 아시아연대론에 경도되기도 했지만 일제의 속셈을 알게되면서 반일 활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보안회 총무로서 황무지 개척권을 일제에 넘겨주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과 같다며, 이를 저지시키고 이에 동참한 국내 인사들을 성토하자고 호소하였다. 이를 기회로 당시 안창호 ・ 이상재와 함께 연설과 웅변의 대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당하자, 대한협동회(회장 이상설)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서 황무지개척권반대운동을 계속해 나갔고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데 성공하였다. 1904년 8월 송병준 등 친일파들이 일진회를 조직하여 매국 활동을 벌이자, 12월 12일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윤하영・양한묵 등과 함께 공진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회장으로서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였지만 오히려 반정부 단체로 내몰려 탄압을 받아 황해 황주(黃州) 철도에 유배되었다. 민영환 등의 간청과 알선으로 특별히 석방되었다. 1905년 3월 유배에서 풀려난 뒤 동대문 안에 있던 연동교회에 입교한 뒤에 국민교육회에 참여하였다. 국민교육회는 연동교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1904년 8월 설립된 계몽운동단체였다. 국민교육회를 기독교 정신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국민 대다수가 참여하는 정치 단체로 키워나가고자 하였다. 더불어 1905년 5월 공진회 회원이었던 윤효정 ・ 양한묵 등과 더불어 헌정연구회를 설립하였다. 일진회의 친일 행각에 맞서고 국권 유지의 방책을 모색하는 정치단체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헌정연구회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10년 이내에 흠정헌법을 실시하여 군주의 통치권과 내각의 시정권, 국민참정권 등을 실현시키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헌정연구회는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기울자 활동이 지지부진해지면서 해산되고 말았다. 한편, 포츠머스조약 체결 전후로 일제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삼으려한다는 설이 파다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미국 루스벨트의 딸인 앨리스가 방한했을 때 성대하게 대접하였다. 또한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대한정책을 확인하고는, 이를 국제사회에 알려 여론은 환기시키기 위해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헐버트를 통해 일제가 한국을 보호국으로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리도록 하였다. 하지만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민영환이 자결한 뒤에 상하이에서 급거 귀국하였다. 귀국 후 전덕기가 이끌고 있던 상동청년회의 준회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상동교회 엡윗회 대표로서 조약 폐기를 주장하는 상소문과 「오적격토문」을 작성하여 상소운동에 적극 나섰다. 이때 무장한 일본헌병들이 몰려오자,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주권을 죽음으로 지키는 일뿐이다”라는 연설을 하고 시민들과 함께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였다. 상동청년회가 해산된 이후 국민교육회에 힘을 쏟았다. 1906년 3월 회장으로 선출된 이후 각 방면의 인사들을 영입하였고 교과서 편찬하거나 연설회를 개최하는 등 국민 계몽을 위한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또한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국민사범학교를 적극 지원하였고 야간제 보광학교 교장을 겸임하여 노동청년 ・ 상공청년들을 계몽하였다. 이후 보광학교를 주간제 고등보통학교로 개편하였다. 나아가 1906년 12월에는 을사늑약에 반대해 자결한 ‘7충신’ 추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국민교육회를 이끌고 있을 때인 1906년 6월 을사늑약에 반대하였던 법부대신 이하영(李夏榮)의 추천으로 평리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이때 오상규 ・ 유진호 ・ 설태희 등과 함께 1906년 10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하여 평의원으로서 함경도 지방의 계몽운동과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계기를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평리원 검사로서 황태자비 관례를 축하하기 위해 공포된 은사령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를 기회로 을사오적을 처단하려다 체포된 김인식 ・ 나인영 ・ 오기호 ・ 기산도 등을 풀어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형사국장 김낙헌 등이 이를 무시하고 무고죄인인 중범들을 석방하였다. 법부(法部)에 은사전의 불공평성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청원하였지만 거부되었다. 이에 항의하는 표시로 형사국장을 법부에 고소하였다. 이렇듯 은사안의 부당함을 계속 논박하자 동료인 평리원 검사에 의해 기소되었으나, 『대한매일신보』 등 언론에 보도되고 사회 여론이 비등해지면서 하루 만에 보석으로 풀려났다. 1907년 2월 26일 우리나라 최초의 변호사로 기록된 이면우(李冕宇)의 변론으로 첫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가 태(笞) 100대를 구형하였으나, 재판이 사회문제화되자 재판소장이 사직하기도 하였다. 3월 2일 재판이 속계되어 태형 100대를 최종 선고받았다. 고종에 의해 태형 70으로 감형되어 검사로 복직되었으나 끝내 파면되고 말았다. 평리원 검사직을 떠난 후 대한자강회 평의원으로 활동을 재개하는 한편 당시 전국적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우선 서울의 남북촌 부인들에게 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케 하고 국채 보상 취지와 겸하여 강연을 하였다. 또한 1907년 4월 1일 국채보상기성회 전국연합운동의 제1회 임시회합을 가진 뒤, 국채보상연합회의소를 조직하여 소장에 선출되었다. 기존에 조직된 지원금총합소는 의연금을 수합 ・ 관리하고 국채보상연합회는 국채보상운동의 지도, 권장 업무를 총괄하기도 하였다. 한편, 1907년 3월 경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덕기 ・ 안창호 ・ 이회영 ・ 이동휘 ・ 이갑 ・ 이승훈 ・ 김구 등과 함께 논의 끝에 황제의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에 이루어졌고 결코 한국 황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음을 세계만방에 알려 이를 무효화시키고자 하였다. 이때 그를 비롯하여 1906년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차 한국을 떠났다가 갑자기 무효가 되어 중국 룽징(龍井)에 머물고 있던 이상설과 전 러시아 공사관 참서관 이위종을 통역관으로 대동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만국평화회의가 6월 15일에 개최되는 만큼 4월 20일에 한국을 출발하기로 하였다. 고종에게 위임장을 받기 위해 비밀리에 경운궁(현 덕수궁) 중명전에 머물고 있던 고종을 만나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에 대해 윤허를 받았다. 그 뒤 고종에게 특사 파견에 따른 신임장과 다른 나라에 보낸 친서, 평화회의에 제출할 공고사(控告詞) 등을 비밀리에 건네받았다. 1907년 4월 20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기에 앞서 대한자강회 주최로 열린 연설회에서 「생존경쟁」이란 주제로 마지막 연설을 하였다. 4월 21일 저녁 안창호 ・ 이갑 ・ 이종호 등이 모인 가운데 조촐한 작별 인사를 나눴고, 4월 22일 아침 가족들에게 “부산에 볼일이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섰다. 부산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배편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1907년 5월 9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이상설을 만났다. 5월 21일 오전, 헤이그특사 준비를 마치고 이동녕 ・ 정순만 ・ 윤일병 ・ 김현토 등의 배웅을 받으며 이상설과 함께 시베리아 횡단 기차에 몸을 실고 헤이그로 출발하여 6월 4일 러시아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전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인 이위종을 만나 대책을 논의하였다. 먼저 주한러시아공사를 지낸 베베르와 상하이에서 귀국한 파블로프의 주선으로 러시아 외무대신과 황제 니콜라이 2세를 만났다. 이들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고 힘껏 돕겠다는 언약을 받았다. 이곳에서 머물면서 이위종의 도움으로 장서(長書)와 공고사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만국평화회의 참석 준비를 하던 중, 돌연 러시아 외무부로부터 회의 참석이 어렵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에도 6월 19일 헤이그로 출발하여 가는 길에 독일 베를린에 들러 장서를 인쇄하고 6월 25일에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도착 즉시 바겐 스트라트(Wagen Straat) 124번지의 융호텔(Hotel De Jong)에 숙소를 정하고, 호텔 옥상에 태극기를 높이 내걸고 공개적으로 행동하였다. 곧장 평화회의 의장에 선출된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백작을 만나 러시아황제가 준 친서와 외무대신의 소개장을 건네주었다. 넬리도프는 힘이 미치는 데까지 돕겠다는 약속을 하면서도 주최국인 네덜란드 외무대신과 협의하라며 소극적으로 대했다. 이에 외무대신과 접촉하였으나, “포츠머스조약에서 을사늑약을 승인하였기 때문에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넘겨진 상태이고, 각국이 이를 인정하여 2년간 단교 중이기 때문에, 회의 통첩을 발부하기 어렵고 단독으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특사들의 회의 입장을 거부하였다. 이에 만국평화회의 일정이나 각 분과위원회의 활동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밝히고자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에 포기하지 않고 6월 28일 장서와 그 부속문서인 『일인불법행위(日人不法行爲)』 책자를 40여 참가국 위원들에게 보냈다. 다음날에는 의장 넬리도프를 방문하여 일본의 한국 주권 침해를 설명하며 직권으로 회의 참석을 요청하였지만 네덜란드 정부의 소개장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하였다. 부회장인 네덜란드 전 외무대신 뽀포로를 방문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였고, 이어 네덜란드 외무대신 테츠(M. Van Tets)에게 서한을 급송하여 면회를 요청하였으나 평화회의에서의 발언은 어렵다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물러서지 않고 6월 30일에는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각국 대표들을 접촉하였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미 일본 측에서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각국 대표자들에게 한국 특사들은 대표성이 없다며 회의 참석을 거부할 것을 요청한 상태였고 노골적인 방해공작을 펼쳤기 때문이다. 특사들은 끝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특사들은 일제의 방해에 굴하지 않고 한국의 입장과 일본의 부당성을 웅변으로 호소하였다. 사방으로 애쓰는 특사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기자들을 움직였다. 각국 신문기자들이 모여들자 그들에게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설명하였다. 특히 국제협회 회장인 윌리암 스테드(william T. Stead)의 후원을 얻어 『평회회의보(Courrier de la Conference)』에 장서의 전문을 게재하였다. 또한 1907년 6월 30일자에 「무슨 이유로 한국을 제외하였는가?」라는 논설을 실어 특사들의 활동을 자세히 소개하였다. 7월 9일에는 협회 회합에 귀빈으로 초대되어 이위종이 프랑스어로 「한국의 호소(Plea for Korea)」라는 주제로 열변을 토하였다. 이위종의 호소는 각국의 언론인은 물론 평화회의의 각국 대표 및 수행원들까지도 감명을 주어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 의결하기도 하였다. 그 뒤 각국 신문에서 매일 같이 한국의 사정을 알려 한국을 돕자는 여론이 일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각국 대표들이 공례를 빙자하여 한국의 청원을 눈 감아버리고 무시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음식을 끊기에 이르렀고, 1907년 7월 14일 돌연 순국하였다. 네덜란드 대표 언론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는 1907년 7월 17일자에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반면, 국내의 『대한매일신보』는 7월 18일자에 호외를 발간하여 “이준 씨는 분격을 이기지 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자처(割剖自處)하였다”라고 그의 순국 소식을 전하였다. 정례는 순국한 지 3일이 지난 1907년 7월 16일 거행되어 헤이그의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 뒤 9월 5일 이상설 ・ 이위종이 구미열강을 순방 외교하던 중에 윤병구와 이준의 사촌동생 이운을 대동하고 다시 헤이그에 들러 가묘장한 묘를 뉘애크 엔다운 시립묘지에 정식으로 안장하였다. 비문에 이상설이 ‘이준(李儁)’이라 이름자를 썼고 이위종이 영문으로 “1859년 한국 북청에서 출생하여 1907년 화란(和蘭) 공화국 헤이그에서 순절하다”라고 썼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추모사업이 본격화되어 1946년 5월 이준열사추념대회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그해 7월 14일 순국 39주년을 맞아 이준열사 추도식이 이승만과 김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천도교당에서 거행되었다. 1947년 8월 체신부는 순국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기념우표를 발행하였고 그해 9월에는 일성이준선생기념사업협회가 결성되었다. 이후 유해 봉환문제가 본격화되어 서울 수유리에 있는 해공 신익희 묘소 옆에 4,600평의 대지를 마련하였다. 1963년 9월 26일 헤이그 묘소의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유해는 그해 9월 30일 순국 55년 만에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1963년 10월 4일 국민장(國民葬)을 치른 뒤 수유리 선열 묘지에 안장되었다.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묘소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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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서울 수유 국가관리묘역 서울특별시 강북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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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오열사 충혼탑 전라북도 고창군
2 사당 충렬사 전라북도 익산시
3 사당 충렬사(대전시) 대전광역시 유성구
4 기타 상동교회 서울특별시 중구
5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6 사당 대한이산 묘 전라북도 진안군
7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8 동상 일성 이준열사 동상 서울특별시 중구
9 사적지 독립협회창립총회 터 서울특별시 종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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