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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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번호 8900
성명
한자 金佐鎭
이명 없음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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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 만주방면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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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1905년 16세 때에 호명학교를 설립하여 육영 사업(育英事業)에 종사함
2. 동년 10월 입경하여 윤치성(尹致晟), 노백린(盧伯麟) 등과 조직적 독립운동의 전개를 기도하여 홍성(洪城)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족운동에 진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함
3. 1907년 이창봉(李昌奉) 설립의 고아원 총무 및 한성신보 이사(漢城新報理事)를 역임하여 국혼 고취(國魂鼓吹)에 진력함
4. 1908년 박상진(朴尙鎭)광복단(光復團)사건으로 3년을 복역간도(間島)로 건너감
5. 3.1운동(運動) 당시(當時) 동만주(東滿洲)왕청현(旺청縣)에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조직(組織)하고 총사령(總司令)으로 활동(活動)하였으며 사관연성부(士官鍊成部)설치(設置)하여 독립군 간부양성(獨立軍幹部養成)진력(盡力)
6. 1920년 9월 동지 나중소(同志 羅中昭), 이범석(李範錫)등과 더불어 청산리 작전(靑山里作戰)참가(參加) 10배의 왜적(倭敵)대파(大破)하여 사상(死傷) 3천3백여명의 전과(戰果)를 거둠
7. 1922년 6월 중동선소분하지구(中東線小芬河地區)에서 사관양성(士官養成)주력(注力)
8. 1926년 김혁(金赫)등과 더부러 신민부(新民部)조직(組織)하여 활동(活動)
9. 1927년 중국 구국군 사령관 양우일(中國救國軍司令官楊宇一)회담(會談)하고 공동전선(共同戰線)(取)하였으며
10. 동년8월 국민당동삼성(國民黨東三省) 공작 책임자(工作責任者) 공패성장령(貢沛城將領) 악유사(岳維唆)회담(會談)하고 한중연합군(韓中聯合軍)조직(組織)하였으나 장작림(張作霖)탄압(彈壓)으로 실패(失敗)
11. 1929년 정신(鄭信), 민무등(閔武等)중동선 일대(中東線一帶)에서 한족연합회(韓族聯合會)조직(組織)하고 주석(主席)으로 활동중(活動中) 동년(陰)12월25일 고려공산청년회원(高麗共産靑年會員) 주중한인청년동맹원(駐中韓人靑年同盟員) (朴)상업(일명 김신준)의 권총 저격(拳銃狙擊) 피살(被殺)됨(향년 41(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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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4권(1987년 발간)

충남 홍성(洪城) 사람이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대한제국무관학교(大韓帝國武官學校)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가산을 팔아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고 지방 청년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켰다. 1907년 다시 상경하여 노백린(盧伯麟)·윤치성(尹致晟)등과 함께 조직적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홍성(洪城)에 대한협회지부(大韓協會支部)를 설치하고 민중의 계몽에 노력하는 한편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를 창설하여 지방에 있는 유능한 자제를 뽑아 서울에 유학케 하였다. 1908년에는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지내고 청년학우회원(靑年學友會員) 및 한성신보(漢城新報)이사로서 민족정신의 고취에 진력하였으며, 1910년에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였을 때에는 이창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집합처로 삼는 한편 남북만주와 연락하는 비밀기관으로 하였다. 1915년에는 노백린·신현대(申鉉大)·윤홍중(尹洪重)·박성태(朴性泰)·기명섭(奇明燮)·김홍두(金弘斗)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가하여 국내 각지를 통하여 항일운동에 맹렬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西大門)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하자 일경들은 또다시 그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9년초 3·1독립선언서의 전주곡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서 일(徐一)·여 준(呂準)·정 신(鄭信)·유동열(柳東說)·신팔균(申八均) 등 38인과 함께 서명하여 발표하였으며, 동년 8월 7일에는 서 일·현천묵(玄天默)·계 화(桂和)·이장녕(李章寧)·김규식(金圭植)·이범석(李範奭)·조성환(曺成煥)·박성태·정 신·김찬수(金燦洙)·박두희(朴斗熙)·홍충희(洪忠熹)·이홍해(李鴻來)·윤창현(尹昌鉉)·나중소(羅仲昭)·김 성(金星) 등과 함께 정의단(正義團)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를 편성하고 그는 북로사령부 제2연대장겸 간북총판국(墾北總辦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그후 동년 12월에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고 개칭하고 진용을 정비할 때에 총사령관으로서 총재 서 일을 보필하는 한편, 왕청현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400명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다. 1920년에는 제1차 세게대전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체코」군대의 특별한 호의로 동북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노령해삼위(露領海蔘威)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완전한 무장을 갖추고 많은 군자금과 무기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탐지한 일본육군성(陸軍省)은 중국 군벌 장작림(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는 한편 「시베리아」에 출병하였다가 남하하는 일본군 제19사단과 나남(羅南) 제20사단에 명령하여 북로군정서를 협공하게 하였다. 이에 그는 장백산(長白山)중으로 들어가서 좀더 독립군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왕청현(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 청산리(靑山里)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3대대가 무산(茂山)으로부터 습격해 온다는 정보를 듣고 곧 임전태세를 갖추어 10월 18일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전방 삼림속 유리한 전투지점에 독립군을 매복시키고 일본군의 내습을 대기하고 편의대(便衣隊)로 하여금 적의 병력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한편 적진 부근의 교포를 시켜 독립군의 병력은 미약하고 투지가 없다는 정보를 흘려 적으로 하여금 독립군을 경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독립군을 2개중대로 편성하여 제1중대는 그가 직접 지휘하고 제2중대는 연성대장(鍊成隊長)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병력이 보잘 것 없다는 말을 듣고 동월 20일 의기양양하게 청산리를 3면으로 포위하고 기병대 일부를 가지고 대담하게 아무 저항도 받지않고 백운평 삼림으로 진입하였다. 이때 그는 주도면밀한 작전지휘로 백운평 전방에 매복한 독립군에게 일제 사격을 명령하여 적의 전위부대를 전멸시켰으며 계속적인 전투를 통하여 일본군 가납(加納) 연대장을 비롯하여 3,300여명을 섬멸하는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소수의 병력으로 10배가 넘는 일군을 물리친 전사상(戰史上) 보기 드문 대승리였다. 그는 이곳 주민들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부하들을 인솔하고 밀산(密山)으로 이동, 밀산에 집결한 10개의 독립운동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고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전 독립군을 인솔하고 노령(露領) 이만으로 건너갔다가 뒤에 자유시(自由市)로 다시 이동했으며 1922년에는 소련당국의 배신으로 자유시참변을 겪게 되었다. 이후 북만주 영안(寧安)으로 탈출하여 1925년 3월 15일에는 김 혁(金赫)·최 호(崔灝)·나중소(羅仲昭)·조성환·박성태·유정근(柳正根)·허 빈(許斌)·정 신·이일세(李一世) 등과 함께 전 북로군정서 정신에 입각한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으며, 그는 군사부 위원장겸 총사령에 선임되었다. 그리고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부교장으로서 교장 김 혁 등과 아울러 독립군 간부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동년 10월 10일에는 상해(上海)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그를 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에 임명하였으나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고 계속하여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며 대일 항쟁에 전력을 기울였다. 1927년 2월 신민부 본부가 일본 경찰의 급습을 받아 중앙집행위원장 김 혁 이하 12명의 간부가 체포되니, 그는 신민부를 재정비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할하는 한편 중국구국군사령관(中國救國軍司令官) 양우일(楊宇一)과 회담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한 공동전선을 취하기로 합의하고 동년 8월에 중국 국민당 동삼성공작책임자 공패성(貢沛誠)·장령(將領) 악유준(岳維峻)·사가헌(史可軒) 등과 회동하여 한·중 연합군(韓中聯合軍)을 조직하고 일본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제의 압력을 받은 장작림(張作霖)이 공패성·사가헌·악유준 등을 체포하고 탄압함으로써 좌절되었다. 1928년에는 참의부(參議府)·신민부·정의부(正義府)의 3개 단체통합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으나 각 단체의 이해 관계로 실패하고 혁신의회(革新議會)만을 구성하였다. 1929년에는 정 신·민 무(閔武)·김종진(金宗鎭)·이을규(李乙奎)·유운초(劉雲樵)·한규범(韓奎範)·이종주(李鍾柱)·조각산(趙覺山)·이 달(李達) 등과 함께 중동선(中東線) 일대에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주석(主席)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영안현 일대의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중동선 산시역(山市驛) 부근에 정미소를 설치하고 동년(음) 12월 25일 정미소에서 작업을 하던 중 공산주의자로 전향한 종전의 부하이며 일제 고등경찰에게 포섭되었던 김일성(金一星)의 교사를 받은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청년회원이며 재중청년동맹원(在中靑年同盟員)인 박상실(朴尙實)이 등뒤에서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 ···"이 민족의 큰 별이던 그는 이 뼈아픈 한마디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분하고도 원통한 일이었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권 28·34·181·187·364·368·409·451·62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770·82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53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33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권 104·322·72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112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권 451·460·465·486·962·966·968·1028·1049·1050·1052·1053·1055·1056·1059·1063·1078~1083·1088면
  • 조선민족운동년감 92·93·115·117·203·206·215면
  • 고등경찰요사 113·114·117·120·121·125·127·175·205면
  • 북만신민부(임강)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90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338·694·742면
  •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407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56·157·276·298·338·546·652·693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55·78·79·80·86·98·99·100·106·107·108·111·112·139·147·151·156·19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91·92·274·275·308·310·313·314·319~325·327·392·435·438·463·477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93면
  • 기려수필 316~319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72·73·80·8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9권 735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권 11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3권 67·170·251·317~320·322·328·339·369·382·383·396·402·403·498·504·50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258·545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774·778·779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김좌진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대한광복회, 성동사관학교, 청산리전투, 경신대학살, 자유시참변, 민족유일당운동
본문
1889년 11월 24일(음력) 충청남도 홍주군 고남하도면 행촌리(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이다.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소년기에는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4년 뜻한 바 있어 대대로 내려오던 토지를 집안에 남아 있는 노복들에게 나누어주고 상경하였다. 1905년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1907년 졸업하고 대한제국 육군 장교에 임관되었다. 그 직후 일제가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해산을 자행하자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참가하여 구국활동을 시작하였다. 1908년 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고, 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한성연회(漢城聯會) 간부로 활동하였다. 일제가 고종황제 양위 반대운동을 주도한 대한자강회를 강제 해산하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설립하고 각 지방 학회를 설립하여 대응하였다. 이때 대한협회 지부를 홍성에 설치함과 동시에 1908년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성지회 창립에 참여하는 등 지방의 구국교육운동을 선도하였다. 1908년 자택을 교사로 제공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하여 학교운영경비로 충당하게 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망하자, 독립군 무장 항쟁으로 국권을 회복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군자금 모금활동을 시작하였다. 활동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서울 관수동에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상점을 운영하였다. 이듬해 1월부터 안승구(安承龜) · 민병옥(閔丙玉) · 조형원(趙亨元) · 남정면(南廷冕) · 이영렬 · 박종원(朴鍾元) 등과 직접 자금모집에 나섰다. 군자금 모금 활동 중 서울에서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 생활 중 백범 김구(金九)와의 만남은 항일투쟁을 위한 새로운 인연으로 작용하였다. 1913년 출감 후 고향에서 정양을 취하던 중 박상진(朴尙鎭) · 채기중(蔡基中) 등이 1915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창설하자 이후 만주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광복회 일원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1917년 3월 이기필(李起弼) · 감익룡(甘翼龍) · 신효범(申孝範) 등 7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기필 · 감익룡 · 신효범은 기소되었고, 최익환(崔益煥) 등 4명과 함께 면소판정을 받고 풀려났다. 곧바로 위조화폐를 발행하여 군자금 모집에 착수하였다. 일본 경찰이 단서를 잡고 추적하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19년 2월 해외 독립운동가들이 「대한독립서(大韓獨立書)」를 발표할 때, 서일(徐一) · 여준(呂準) 등 38명과 함께 서명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투쟁에 나섰다. 「대한독립서」는 국내 3·1독립선언서보다 몇 주 앞서 공표되어 국내외 독립운동을 고취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 대종교측에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을 창설하자 총재 서일의 요청을 받고 대한정의단 군사책임자가 되었다. 서일 등 대종교 신도들은 만주에서 1911년 중광단(重光團)을 조직했다가 3·1운동 직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강화를 위해 유교 신도단체 공교회(孔敎會)와 합작하여 1919년 5월 대한정의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북간도 각지에 5개 분단(分團)과 70여 개 지단(支團)을 설치하고, 공식적으로 순한글 신문인 『민보(民報)』와 『신국보(新國報)』를 발행하였다. 또한 독립군 편성 준비로 극비리에 결사대원을 모집하여 1,037명의 청년자원자를 확보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독립군 편성 장정과 군자금 준비가 갖추어지자 1919년 8월 독립군단체로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를 조직하였다. 실제로 군사훈련과 독립군 편성 과제가 절박하게 대두되자, 대한정의단은 이 과제를 신민회 계통 무관을 초빙하여 해결하였다. 이때 조성환(曺成煥) · 이장녕(李章寧) 등과 함께 초빙되어 1919년 8월부터 대한정의단의 군정회를 맡게 되고, 장정들의 군사훈련과 독립군편성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다. 신민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공화주의자(共和主義者)들이었던 반면에 공교회 계통 민족주의자들은 군주제(君主制)를 지지하는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들이었기 때문에 공교회 계통의 지도자들은 반발하여 이탈하였다. 김성극(金星極) 등은 복벽파의 독립군단체로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을 새로 조직하고, 이규(李珪) · 강수희(姜受禧) 등은 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를 조직하였다. 1919년 10월 서일 등과 함께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를 조직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총재는 대종교의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玄天黙)이었고, 사령부의 사령관을 맡았다. 즉 대한군정부의 독립군을 전적으로 책임지고 창설 지휘하였다. 대한군정부는 성립과 동시에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성립을 보고하고, 산하 군사기관으로서의 공인을 신청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 12월 국무원 제205호로서, 대한군정부의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명칭변경을 조건으로 내건 이유는 대한군정부도 ‘정부’(政府)의 이름을 갖게 되면 임시정부의 ‘정부’와 혼동되어 마치 동격의 2개 정부가 존재하는 것으로 오해될 소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한군정부는 임시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로 개칭하였다. 임시정부는 이 무렵 서간도에서 한족회(韓族會) ·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중심이 되어 편성한 독립군단체에게 이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라는 명칭을 보내었으므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는 이와 대비하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별칭을 지어 애용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세간에서는 ‘대한군정서’라는 공식명칭보다 ‘북로군정서’라는 별명이 더 널리 애용되고 유명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 사령관을 맡자 곧바로 왕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 근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 편성작업 시작과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졸업생 장교 박영희(朴寧熙) · 김훈(金勳) 등 다수 훈련 장교들 및 각종 교재를 공급받았다. 1920년 3월 초 십리평으로부터 약 30리 떨어진 삼림지대 안에 사관연성소를 설립하고, 소장을 겸임하였다. 약 500명의 장정을 뽑아 독립군을 창설하고, 뒤이어 다시 600여 명의 장정을 뽑아 병력을 보충했으며, 나머지 장정들은 대기하면서 경호 병력이 되게 하였다. 입대한 병사들에게 사격술과 총검술을 비롯한 총기사용 훈련과 학과훈련을 철저히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현재 사관연성소에서 훈련을 끝낸 독립군 사병이 약 600명이었고, 장래 독립군 사관이 되기 위하여 상등병의 견장을 붙이고 철저한 군사훈련과 전략전술을 교육받고 있는 사관생도가 약 300명이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사관연성소에서 철저한 군사훈련교육을 받은 연성대(硏成隊)를 가졌으며, 대종교의 군자금 조달로 무기를 잘 공급하여 독립군부대들 중에서 무장이 가장 잘 갖추어진 부대였다. 대체로 독립군부대들의 무기는 소총이었으며, 기관총을 1정이라도 갖춘 부대는 드물었다. 이에 비하여 북로군정서는 중무기에도 큰 비중을 두어 기관총과 함께 야포도 구입하였다. 일제는 1920년 6월 7일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 독립군에게 대패하자, 만주군벌 장쭤린(張作霖)에게 압력을 가하여 일본군의 지도하에 중국군을 출동시켜서 독립군을 ‘토벌’하려 함과 동시에 8월에는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間島地方 不逞鮮人 剿討計劃)’을 세워 일본군이 직접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중국군이 출동하게 되자, 멍푸더(孟富德)의 중국군측과 한국 독립군측은 일본측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삼림지대로 근거지 이동을 단행하기로 밀약을 맺었다. 이에 따라 지린성(吉林省)의 옌지현(延吉縣) · 훈춘현(琿春縣) · 왕칭현(汪淸縣) · 허룽현(和龍縣)의 4현에 근거지를 설치하였던 독립군부대들은 1920년 8월 하순부터 근거지 대이동을 시작하였다. 명월구(明月溝)에 있던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이 1920년 8월 하순 제일 먼저 근거지를 이동하여 9월 21일경 허룽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漁郞村) 부근에 도착하였다. 뒤이어 국민회군(國民會軍) · 의군부(義軍部) · 신민단(新民團) · 광복단(光復團) · 의민단(義民團) 등도 이도구로 이동하였다. 봉오동에 있던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 독립군은 북방 이동하여 9월 말경 나자구(羅子溝)에 도착하였다. 왕칭현 서대파에 있던 북로군정서는 마지막으로 1920년 9월 17일~18일에 근거지 이동을 시작하여 1920년 10월 12일~13일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부근에 도착하였다. 일제는 중국군을 동원한 한국 독립군 ‘토벌’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자, ‘간도불령선인 초토계획’에 의거하여 일본군이 직접 간도에 ‘출병’해서 독립군 ‘토벌’작전을 시작하였다. 일제가 간도침입에 동원한 일본군 병력은 나남(羅南)의 제19사단 전부와 용산(龍山)의 제20사단으로부터 1개 대대 및 기타 보조병력을 차출 첨가하고, 시베리아 주둔 11사단 · 13사단 · 14사단의 일부를 차출하여 모두 5개 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에 달하였다. 여기에 측면 지원으로 관동군 일부와 비행기까지 동원한 엄청난 규모였다. 일본군은 이 거대한 병력을 3개 지대로 나누어 독립군을 이중 포위해서 ‘섬멸’하려는 계획이었다. 일본군 작전 목표는 제1단계에서 1개월 이내에 독립군 무장대를 철저히 반복 ‘토벌’해서 독립군을 전원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이내에 촌락에 잠복하고 있는 민간인 독립운동가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독립군 무장운동은 물론 비무장 독립운동까지 뿌리 뽑겠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작전목표에 따라 아즈마(東)지대가 10월 15일 용정(龍井)에 도착한 후 10월 18일 삼도구에 있는 북로군정서와 이도구에 있는 홍범도연합부대를 찾아서 출발하였다. 일본군 아즈마지대는 기병과 포병을 포함한 약 5,000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연합부대를 포위하여 10월 20일을 기해서 총공격 ‘섬멸’하라고 명령하였다. 북로군정서는 1920년 10월 21일 오전 9시 일본군 선발대 야마다보병연대(山田步兵聯隊)가 삼도구 청산리 골짜기에 진입하자 백운평(白雲坪) 부근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일본군 선발부대를 섬멸해 버렸다. 이것이 ‘백운평전투’이다. ‘백운평전투’에서부터 청산리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백운평 전투에서 대승한 후 이도구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여 주둔했을 때 일본군 1개 기병대가 천수평(泉水坪, 샘물골) 마을에 들어가서 주둔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북로군정서 지휘부는 작전회의를 열고 천수평의 일본 기병대를 먼저 기습 섬멸하기로 결정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22일 새벽 5시 30분경 이범석 지휘의 연성대가 앞장서서 일본군 기병중대가 잠자고 있는 촌락과 말을 매어 놓은 토성 안으로 기습 공격하였다. 이 공격으로 4명은 탈출하고 나머지 일본군 기병 제27연대 소속 전초기병중대 116명은 전원 몰살당하였다. 북로군정서의 피해는 전사 2명과 부상 17명으로 경미하였다. 이것이 일본군 1개 기병중대를 섬멸한 대승리의 ‘천수평전투’였다. 뒤이어 ‘어랑촌(漁郞村)전투’가 전개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이 ‘어랑촌 서남단 874고지’를 선점하고 전투태세에 들어갔을 때에, 10월 22일 오전 9시 일본군도 고지를 선점하려고 달려왔다. 일본군은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6배가 넘는 우세한 병력과 화력만 믿고 고지 독립군을 아래에서 포위하여 오전 9시경부터 공격을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지형이 유리했기 때문에 우세한 화력으로 돌격해 올라오는 일본군을 내려다보면서 소총과 기관총을 퍼부어 수많은 적을 살상하였다. 그러나 병력과 화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일본군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북로군정서 독립군을 고지 아래서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과 일본군은 해가 져서 고지에 어둠이 내릴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했으나, 일본군은 막대한 희생만 낸 채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당황망조(唐慌罔措)하여 결국 패퇴하였다. 독립군은 이 치열한 전투에서도 승리했으므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안투현(安圖縣) 방면으로 이동함으로써 ‘어랑촌전투’는 일단 종결되었다.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은 크게 패하여 기병연대장 가노(加納) 대좌를 비롯해서 300명의 전사자를 내었다. 한편 독립군측도 어랑촌전투에서의 피해가 가장 컸다. 북로군정서 연성대장 이범석에 의하면, 북로군정서의 전사자와 부상자도 1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보고서마다 독립군을 패배시켰다고 하면서도 어랑촌전투에서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을 시인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어랑촌전투도 결국 독립군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어랑촌전투에서 승리한 다음날인 10월 23일부터 소부대를 편성해서 서북방으로 이동하면서 일본군 부대들과 조우할 때마다 소규모 전투로서 ‘맹개골(萬麒溝)전투’ ‘쉬구(溝)전투’ ‘천보산(天寶山)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북로군정서는 10월 29일경에 안투현 황구령촌(黃口嶺村)에 도착하여 다른 부대들과 합류했다가 그 해 12월에 다시 북방으로 이동하여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청산리독립전쟁’의 결과를 보면,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신문』은 ‘김좌진씨 부하 600명과 홍범도씨 부하 300여 명은 대소전쟁 10여 회에 왜병을 격살한 자가 1,200여 명’이라고 하여, 일본군 전사자를 약 1,200여 명으로 계산하였다.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이 임시정부에 제출한 정식 보고서에서는 ① 일본군 전사자가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 기타 장교 이하 사병 1,254명이며, ② 부상자가 장교 이하 200여 명이라고 하였다. 한편 당시 중국의 『요동일일신문(遼東日日新聞)』은 일본군 전사자를 2,000명으로 추정하였다. 북로군정서가 주력이 되어 승리한 ‘청산리독립전쟁’은 일제가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수립한 ‘간도지방 불령선인 초토계획’과 작전을 완전히 붕괴시켜 버렸다. 일본군 2만 5,000명의 병력으로 제1단계에서 무장독립군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에서 비무장 독립운동세력까지 뿌리 뽑아 한민족 독립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고자 했었는데, 일제는 이 목표를 달성하기는커녕 1단계에서조차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청산리독립전쟁’에서 패배하여 그들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하였다. 북로군정서를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들의 ‘청산리독립전쟁’ 대승리는 만주지역 한민족 독립운동을 보위하고,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까지도 보위했으며,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쟁취하려는 한민족의 독립정신과 독립투쟁을 한층 더 고양시켜 주었다. 1920년 12월 미산에 집합한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여기서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간부 등의 요청과 안내를 받아 다른 독립부대들과 함께 흑룡강을 건너 노령(露領) 이만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독립군의 통합과 무기 공급을 받아 대작전을 감행할 계획이었다. 1921년 3월 이만에서 북로군정서 · 대한독립군 · 국민회군 · 의군부 · 군무도독부 · 혈성단 등 만주에서 건너온 독립군 부대들과 청룡대 · 사하린부대(박일리아 부대) · 이만부대(박그레고리 부대) 등을 통합하여 대한의용군총사령부(大韓義勇軍總司令部)(후에 대한독립단으로 개칭) 를 조직하였다. 이 통합독립군은 약 3,000명의 병력으로서 총재 서일과 부총재 김좌진 · 홍범도 등이 지휘하였다. 그러나 이 통합독립군이 대작전을 전개하기 전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가 1921년 3월 긴급하게 임시고려혁명군정회의(臨時高麗革命軍政會議)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에 오하묵(吳夏黙)을 임명한 후 통합독립군을 그 산하 군대로 개편하려고 하였다. 이때 소련군의 독립군 지휘를 거부하고 다시 만주로 건너왔다. 그 직후 1921년 6월 박일리아부대(사하린부대) 등이 고려혁명군정회의에의 편입에 거부반응을 보이자 갈란다라시윌린 등은 러시아 적군 제29연대를 동원하여 사할린부대 등을 공격케 함으로써 독립군은 사망 272명, 익사 37명, 행방불명 250여 명, 포로 917명의 참혹한 희생을 내었다. 이것이 이른바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북만주에 돌아오자 다시 독립군 재건에 진력하였다. 1925년 3월 닝안현(寧安縣)에서 호응하는 이전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의 옛 동지 김혁(金赫) · 조성환 · 정신(鄭信) · 남성극(南星極) · 박두희(朴斗熙) · 최호(崔灝) · 유현(劉賢) 등과 함께 신민부(新民府)를 조직하였다. 중앙집행위원장은 김혁이 맡았다.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아 즉시 목릉현(穆陵縣) 소추풍(小秋風)에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하고, 장정들을 모집해서 연 2기의 속성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졸업생이 500여 명에 달하자 약 530명의 병력으로 신민부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일제는 만주군벌과 이른바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체결하여 만주에서의 한국인 무장활동을 만주군벌이 금지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1928년 1월 일본 경찰과 중국군 1개 중대를 파견하여 신민부 본부를 습격해서 다수 간부를 체포하였다. 신민부는 타격을 입고, 독립운동은 독립군 군사 활동보다는 교육 · 민생 활동에 역점을 두자는 최호 등의 ‘민정파’가 대두하였다. 이에 신민부를 재건하여 직접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위원장을 맡고 독립군 활동 중심의 신민부(군정파)를 운영하였다. ‘둔전제’를 실시하여 독립군 군량과 경비조달을 보조하도록 하고, 국내에도 비밀리에 요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국내에 강(姜)모 요원 등을 파견하여 조선총독부 기습작전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신민부 통치하의 북만주 일대 동포들에게 100호 이상의 마을에는 반드시 1개 소학교를 설립하고, 그 밖에 노동강습소를 설립하여 일반교육과 함께 독립사상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도록 하였다. 신민부(군정파)는 1928년 2월 3일 닝안현에서 개최된 민족유일당운동(民族唯一黨運動)에 참가하였다. 이어서 그해 12월에는 남만주의 참의부 간부들과 함께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일시 이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민족주의 계통 단체들과 공산주의 계통 단체들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심하여 성공하지 못하였다. 1929년 봄 비밀결사 생육사(生育社)를 조직하는 한편, 동년 7월에는 김종진(金宗鎭) · 이을규(李乙奎) 등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세력도 포섭하여 북만주지역의 민족유일당으로서 한족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창립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주석으로서 농촌자치조직을 강조하고, 동포들의 경제적 손실을 막기 위해 1929년 10월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 운영하는 등 실업운동을 실행하였다. 또한 북만동포의 중등교육을 위한 북만중학(北滿中學) 설립을 추진하여 토지를 확보하였다. 한족총연합회 사업 활동의 하나인 산시참 정미소 사업격려 도중에 노령 고려공산당 산하 재중공산청년동맹에서 파견한 박상실(朴尙實)이 등 뒤에서 쏜 총을 맞고, 1930년 1월 24일 장엄한 일생을 마쳐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한국독립운동을 발본색원하겠다고 간도에 침입해 들어온 5개 사단 차출 2만 5,000명 병력의 막강한 일본군을 청산리독립전쟁에서 독립군의 적은 병력으로도 탁월한 작전과 과감한 기습 선제공격으로 참패시켜 독립군의 대승리를 쟁취해서 한국독립운동을 보위한 무장독립운동의 영원불멸의 영웅으로 평가되고 있다.

수형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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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보안법위반 방면, 보안법위반공소사실은 면소 경성지방법원 1917-03-28 국가기록원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소재지
국내산재 충청남도 보령시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공원 대한광복단 기념공원 경상북도 영주시
2 기타 여래사 순국선열봉안소 및 순국선열위령탑 서울특별시 성북구
3 동상 김좌진장군동상 충청남도 홍성군
4 기념관 김좌진장군기념관 충청남도 홍성군
5 비석 백야김좌진장군추모비 충청남도 홍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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