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유공자 공적조서

 

유공자정보

수형기록
관리번호 8862
성명
한자 韓龍雲
이명 萬海(法號) 성별
생년월일 사망년월일
본적
액자프레임

포상정보

수형기록
운동계열 3.1운동 포상년도 1962 훈격 대한민국장

관련정보


2019년 0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994년 0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 기미독립운동(己未獨立運動) 때 불교계대표로 33인 중 1인임
2. 3년 징역을 받았고 문학운동과 불교혁신운동에 진력하다가
3. 1944년 6월 29일 서울 성북동(城北洞) 심우장 자택에서 사망하였음
원문보기 한자보이기

 

수록정보: 독립유공자공훈록 2권(1986년 발간)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이며 불교인(佛敎人)이다.

처음에는 1894년(고종 31)의 동학혁명에 가담하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1896년(건양 1)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으로 들어갔다.

한때 만주 간도성(滿洲間島省) 등을 다니며 광복운동을 하다가, 1905년(광무 9)에 인제(麟蹄)의 백담사(百潭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그 후 출가 입산하여 백담사에 오는 애국 지사에게 조국없는 백성의 비애와 앞날의 광복운동에 대한 방책을 설득시켰다.

1910년 일제가 강제로 우리나라의 주권을 박탈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 군관학교(軍官學校)를 방문하여 격려하고,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유랑하다가 1913년 귀국하여 불교학원(佛敎學院)에서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해 범어사(梵魚寺)에 들어가 불교대전(佛敎大典)을 저술하여,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반야사상(般若思想)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참여를 주장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의 계동(桂洞)에서 월간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에 앞장서는데 힘썼고, 계속 서울에 머물면서 문화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국의 독립과 민족광복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던 1919년 2월 24일,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과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한 최린(崔麟)으로부터 독립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또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고,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해인사(海印寺)의 승려인 백용성(白龍城)에게 이 계획을 알려, 불교도로서 적극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승낙을 받고 민족대표로 서명할 인장을 위임받았다. 그는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때 독립간청서 또는 독립청원서로 명명하려 했으나, 독립선언서로 표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27일에는 다시 최린을 방문하여 스스로 민족대표자로 서명 날인하고, 백용성으로부터 위임받은 도장으로 서명 날인하여 주었다. 이튿날인 28일에는 재동(齋洞)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들과 회합하여, 다음날 거행될 독립선언에 따른 제반준비 사항에 대한 최종 협의를 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에 모인 민족대표를 대표하여 그가 인사말을 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끝내고 만세삼창을 외친 뒤,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하여,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여 저항문학에 힘썼고, 1927년에는 신간회(新幹會)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을 겸임했다. 1931년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를 조선불교청년동맹(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하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항일독립 투쟁사상 고취에 힘썼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권 135·187·338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166·262·266·576·792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10권 330·338·714·752·753·768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5권 12·15·20·23·28·40-44·50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2권 273·291·293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3권 88·239·255·1002·1717·1719면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4권 292·294·341·840·841면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88·97·100·103·147·148·174·225·238·485면
  •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96면
  • 기려수필 235·413면 ·박은식전서(상) 514면
  •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권 167·391면
  •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1권 307·309·853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2권 71·77·91·102면
  • 무장독립운동비사 21면
  • 민족독립투쟁사사료(해외편) 12면
  • 조선독립운동년감 2면 ·고등경찰요사 18·22·49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7권 644면
  •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8권 378·388·405·439·567·661·662·665·666·669·844·846·852·854·855·858·859·861-876·880-882·888·890·892·893면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도움말
한국독립운동 인명사전
순번 성명 이명 출신지 관련사건
1 한용운 자 : 정옥(貞玉), 속명 : 유천(裕天), 계명 : 봉완(奉玩), 법호 : 만해(萬海) 충남 홍성(洪城) 3.1운동
본문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洪城郡) 결성면(結城面) 성곡리(城谷里) 491번지에서 아버지 한응준(韓應俊)과 어머니 온양 방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정옥(貞玉), 속명은 유천(裕天), 계명은 봉완(奉玩), 법호는 만해(萬海)이다. 그의 가문에서는 이름있는 무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부친 응준은 종5품의 충훈부(忠勳府) 도사(都事)와 선략장군행충무위부사용(宣略將軍行忠武威副司勇)을 지냈고, 조부 영호(永祜)는 종4품의 선략장군행훈련원첨정(宣略將軍行訓練院僉正)을 지냈으며, 증조 광후(光厚)는 종2품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와 가선대부행용양위호군(嘉善大夫行龍驤衛護軍)을 지냈다. 그가 태어날 무렵 집안은 얼마간의 경제적 실력과 유교적 교양을 지닌 농촌중산층 정도였다. 부친 응준은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을 진압하는 행목사(行牧使)에 임명되었다. 일설에는 응준이 동학에 참여하였고, 그의 형 윤경(允敬)이 1906년 민종식 의병에 참여하였다고 하나 사실과 다르다. 어릴 적 몸은 작았으나 힘이 세고 모험심이 강하였으며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당찬 아이였다. 6세경 마을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9세 때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通鑑)』을 해득하였다고 한다. 또한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를 통달하였고, 『대학(大學)』에 있는 정자(程子)의 주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책에 먹칠을 하였다는 일화도 전한다. 1892년 부친의 뜻에 따라 향리에서 전정숙(全貞淑)과 혼인하였다. 이후 동리 서당의 숙사(塾師)로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역사상 빛나는 의인과 걸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과 같이 되고자 결심하였다. 그러던 1896년 홍성에서 김복한 · 이설 등이 의병을 일으키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해 노자도 한 푼 없이 무작정 서울을 향해 집을 나섰다. 상경 도중 마음을 바꿔 입산을 결심하였다. 승려가 되려 한 것은 종교적 신앙심 때문이 아니라 불교계를 통해 무엇인가를 해보고자 한 때문이었다. 보은 속리사를 거쳐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며 불목하니와 동냥중 생활을 하였다. 잠시 고향을 다녀 온 뒤 1904년경 완전히 속세와 인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1905년경부터 본격적인 불교 수학을 시작하였다. 그해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로부터 득도하였고 전영제사(全泳濟師)로부터 수계하였으며,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서 기신론 · 능엄경 · 원각경 등의 강의를 받았다. 1907년에는 강원도 건봉사(乾鳳寺)에서 최초의 선(禪) 수업인 수선안거(首禪安居)를 하고, 1908년에는 유점사(楡岾寺)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로부터 화엄경을, 건봉사에서 이학암사로부터 반야경 등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승려가 되었음에도 철저한 도승이 되지는 못하였다. 청나라 쉬지위(徐繼畬)가 세계지리를 정리한 『영환지략(瀛環志略)』을 읽고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알게 되자,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905년경 먼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였다. 배를 타기 위해 원산으로 가던 중 두 명의 승려를 만나 일행이 되어 함께 여행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여 부두 근방에 숙소를 정하였으나, 그들을 일진회원으로 오인한 교포 청년에 의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동포간의 반목과 살육에 크게 낙담한 그는 실의에 빠져 귀국하였다. 백담사에서 불경 연구에 전력하던 중,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實文集)』을 접하고 근대 서구의 자유 평등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908년 4월, 불교문화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운이 일고 있는 일본을 돌아보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조동종(曹洞宗) 종무원을 찾아가 대표자인 히로쓰 세쓰조(弘津說三)와 교유하였고, 그의 주선으로 조동종대학에서 일본어와 불교를 배웠다. 여기에서 유학 중이던 최린(崔麟) 등을 만나게 되었는데, 훗날 3·1운동에 참여하고 주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08년 10월 귀국하여 범어사(梵魚寺)와 지리산 일대 사찰을 돌며 불교의 대중화와 개혁운동에 노력하였다. 한편, 1908년 3월 이회광(李晦光)을 비롯한 전국 승려대표 52인이 원흥사(元興寺)에 모여 1906년 조직된 불교연구회(佛敎硏究會)를 변형시켜 종명을 원융무애(圓融無碍)와 선교원수(禪敎圓修)를 의미하는 원종(圓宗)으로 결정 · 선포하였다. 원종 종무원 대종정(大宗正)으로는 해인사 주지 이회광을 추대하였다. 원종은 8개 부서까지 둔 한국 불교의 통일기관이었으나, 일진회장 이용구의 추천으로 일본 조동종 승려 다케다 한시(武田範之)를 고문으로 맞이하는 등 성격이 변질되었다. 이회광은 경술국치 직후인 1910년 10월 6일 불교 확장이란 미명 아래 일본으로 건너가 조동종 관장 이시카와 소도(石川素童)를 만나 원종과 조동종의 연합을 맹약하고 종무 대표자 히로쓰 세쓰조와 7개항을 합의하였다. 이 합의를 통해 한국 불교는 원종 종무원의 인가를 일본 조동종에 의뢰하였고, 일본 조동종은 한국의 사찰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곧 이회광 일파의 책동은 한국 불교를 일본에 예속시켜 조동종화 하려는 친일매불(親日買佛), 개종역조(改宗易祖) 행위였다. 이에 1911년 1월 15일 박헌영(朴漢永) 등과 함께 호남 일대에서 기치를 내세우고 순천 송광사(松廣寺)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이회광을 종문난적(宗門亂賊)으로 규정하고 원종에 대응하여 임제종(臨濟宗)을 창립하고, 임제종 종무원 관장에 추대되어 불교자주화운동, 종지수호운동을 주도하였다. 임제종은 송광사에 종무원을 두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얻었다. 1911년 가을, 동포들을 만나 망국의 설움을 나누고 조국의 장래를 논의하고자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박은식 · 이시영 · 윤세복 등의 민족지도자들을 만나 조국이 처한 문제를 협의하였다. 그런데 그를 일제의 첩자로 오인한 독립군이 미행하다 총격을 가하였다. 다행히 중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였으나, 이때 당한 총상의 후유증으로 병적으로 머리가 저절로 흔들리는 체머리를 평생 앓아야 했다. 또한 불교계의 혁신과 불교의 대중화운동에도 주력하여 불교계의 폐단을 제거하고 예전의 번성했던 모습을 되찾고자 하였고, 타락하고 변질된 불교의 종교적 순수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1910년 백담사에서 탈고하고 1913년 불교서관(佛敎書館)에서 발행한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은 그 같은 필요성에서 저술한 것이다. 이 책은 당시 조선 불교의 현상을 비판하고 당면 과제를 지적하며, 자유와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개혁안을 제시한 실천적 지침서이다. 다만, 불교적 평등은 인정하면서도 민족적 평등을 도외시한 채 승려의 결혼문제를 일본 총독에게 청원하는 등 민족이 당면한 현실 문제를 간파하지 못한 점은 흠으로 지적된다. 불교 대중화를 위한 방편으로는 불경을 주석 간행하는 작업에 노력하였다. 『조선불교유신론』 간행을 전후하여 승려교육을 위한 교재로서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佛敎敎育 佛敎漢文讀本)』을 간행하였고, 1914년에는 방대한 고려대장경을 독파하고 현대적 감각에 맞도록 요약 정리한 『불교대전(佛敎大典)』을 간행하였다. 이 책은 9개의 품(品)으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독창적 시각으로 불교를 간이화 · 실용화하여 승려교육과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1917년에는 승려와 일반인의 교양교재로 『정선강의 채근담(精選講義 採根譚)』을 간행하였고, 1918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불교 수양잡지 『유심(維心)』를 간행하였다. 1925년에는 오세암에서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를 탈고하여 이듬해 간행하는 등 불경의 연구와 주해는 3·1운동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19년 1월말 경, 일본에 갔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최린을 만나 시국담을 나누다가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고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는 등 우리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독립운동을 하기로 뜻을 모았다. 이후 최린은 물론 오세창 등 천도교측 인사들과 수시로 만나 만세운동을 협의하였다. 대중화 · 일원화 · 비폭력화의 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서는 최린의 주관 아래 최남선이 작성하여 2월 11일경 초고를 완료하고 15일 최린에게 넘겨주었다. 최린은 이 초고를 일시 보관하였다가 손병희 · 권동진 · 오세창 등 천도교측 주도 인사들에게 보여 동의를 얻고, 기독교측 연락대표인 함태영에게 건네주어 기독교측의 동의도 구하였다. 당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 외에 미국 대통령과 세계 각국 대표, 일본 귀족원(貴族院) · 중의원(衆議院) 양원(兩院)에게 보내는 탄원서와 조선총독에게 보낼 통고문도 기초하였다. 이때 그는 독립선언서 작성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민족대표로 서명하지도 않은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는 것은 부당하니 자신이 짓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요구는 독립선언서 작성 책임자였던 최린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만 최린은 독립선언서 외에 최남선이 기초한 문서를 맡기며 한 부를 정서하도록 부탁하였다. 이에 최남선이 기초한 초고를 정서하며 자신의 의견과 다른 부분은 일부 수정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만해의 독립선언서 공약3장 추가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만세운동 추진과정에서 승려임에도 유림계의 포섭을 담당하였다. 먼저 경남 거창으로 영남 유림을 대표하는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을 만나러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2월 24일 상경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유림대표가 민족대표로서 참여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에 유림들은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통해 그들의 자주독립의사를 밝혔다. 또한 범어사를 다녀오는 등 불교계의 포섭에도 나섰으나, 시일이 촉박하고 사찰이 산간에 위치하여 연락이 불편한 관계로 많은 불교계 인사를 가입시키지는 못하고 해인사 승려 백용성(白龍成, 일명 白相奎)을 참여키는 데 그쳤다. 민족대표는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 등 33인으로 구성되었다. 2월 27일 밤, 최린의 집에서 이승훈 · 이필주 · 함태영 · 최남선 등과 회합하여 민족대표 서명자의 배열 순서를 협의하였다. 28일 밤에는 손병희의 집에서 다른 민족대표 23명과 만나 최종 결의를 다졌다. 이 자리에서 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하면 혹시 일본 군경과 충돌할 불상사가 우려된다는 손병희의 제안에 따라 독립선언 장소를 당초 파고다공원(현재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또한 일본 경찰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숨김없이 정정당당하게 말하고 행동을 통일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때 그는 다른 민족대표들에게 일제에 체포된다 하더라도 변호사를 선임하지 말고, 사식(私食)을 취하지 말며, 병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대 행동원칙을 제시하였다. 한편 그는 독립선언서의 배포 책임도 맡았다.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李鍾一)의 주도하에 비밀리에 인쇄되었다. 독립선언서 배포 총책임자는 오세창이었고, 실무는 이종일이 맡았는데, 천도교는 인종익(印宗益), 기독교는 김창준(金昌俊), 학생계는 이갑성(李甲成)이 맡았고, 불교계는 그가 책임을 맡았다. 28일 밤 이종일로부터 3천여 매의 독립선언서를 인수하자, 그날 밤 자정 무렵 자신의 집에 대기하고 있던 중앙학림(中央學林) 학생 정병헌(鄭秉憲) · 김상헌(金尙憲) 등에게 독립선언서를 건네주며 3월 1일 오후 2시 이후 시내 일원에 배포하도록 당부하였다. 3월 1일, 오후 1시경 태화관으로 갔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중 4인을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은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는 것으로 낭독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최린의 부탁으로 그가 식사(式辭)를 하게 되자,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기 위한 것으로 자못 영광스런 날이며, 우리는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을 하는 책임이 막중하니 앞으로 공동 협심하여 독립을 이뤄내자”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만세삼창을 선창하였다. 독립선언식이 거의 끝날 무렵 미리 연락을 받고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민족대표들과 함께 일본 경찰이 준비한 차에 태워져 경찰서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때 어린 학생들이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게 제지당해 개천으로 굴러 떨어졌다가 마침내 붙잡히는 것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그 광경을 평생 잊지 못할 상처로 새겨두었다. 경찰서에 연행된 이후 의연하고 당당하게 옥중투쟁을 전개하였다. 일부 겁에 질려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민족대표들을 질타하였고, 일본 경찰, 검사, 판사의 심문에 대해서는 시종 꿋꿋한 기개와 정연한 논리로 응대하였다. 당일인 3월 1일 경무총감부에서 열린 심문에서는 일본인 검사에게 민족자결주의 제창 등 세계정세의 변화를 설명하고, 앞으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할 것임을 분명히 밝혔다. 한동안은 일본인의 심문에 무응답으로 대응하였다. 그 까닭을 묻자, “조선인이 조선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백번 말해 마땅한 일인데, 감히 일본인이 무슨 재판이냐”며 준엄하게 꾸짖었다. 그해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글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이 글은 종이 노끈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형무소에서 외부로 내보내는 옷 속에 끼워 밖으로 유출되었고, 그 내용 전문이 1919년 11월 4일자 『독립신문(獨立新聞)』에 실리며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글은 3·1운동 직후 한민족의 독립선언의 동기와 이유를 논리정연하게 정리한 최고의 논설로 평가된다.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출판법」 위반, 「소요죄」로 징역 3년(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산입)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1년 12월 22일 가출옥 형식으로 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다방면에서 활동을 펼쳤다. 불교혁신운동은 활동 초기부터 주력했던 분야였다. 불교개혁은 단순한 불교계의 개혁일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개혁과 연관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민족운동의 일환이었다. 그가 추구한 불교혁신운동은 스스로 정의한 독창적인 ‘불교사회주의(佛敎社會主義)’였다. 불교사회주의는 불교를 바탕으로 사회의 자유와 정의를 실현하고자 한 사상체계로서 불교도들의 절대적 신임을 받으며 혁신운동을 추진하였다. 1922년 3월에는 대장경 국역 사업을 위해 법보회(法寶會)를 발기하였고, 이듬해 1월에는 조선불교청년회(朝鮮佛敎靑年會)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조선불교청년회는 1931년 조선불교청년총동맹(朝鮮佛敎靑年總同盟)으로 개편되었는데, 그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의 활동은 주목된다. 만당은 1930년 5월경 김법린(金法麟) · 최범술(崔凡述) 등 20여명의 청년 불교도들이 다솔사(多率寺)를 근거지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만당의 당수로 추대되어 이들의 활동을 지도하였으나, 겉으로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가장하였다. 1938년 만당이 일제에 발각되어 회원들이 검거되자, 대구와 진주 등지로 당원들을 면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1931년에는 불교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불교대중화와 민중계몽운동을 펼쳤다. 출옥 이후 일제와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고 철저히 비타협주의를 고수하였다. 또한 독립운동 세력의 이념과 노선 통합을 역설하면서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7년 좌우합작 단체로 결성된 신간회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에 신간회 발기인, 중앙집행위원, 경성지회장으로 추대되어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증폭시키기 위한 민중대회에 참여하였고, 식민지 교육제도인 한일공학제도를 반대하고 조선인본위교육을 주장하였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집행위원, 상무위원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민족과 국가 간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며 이를 남녀관계에도 적용하여 여성해방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 중반에는 신문 연재소설 「흑풍(黑風)」을 통해 여성해방운동의 이론과 강령을 제시하였다. 이와 함께 소작쟁의 등 농민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30년대 들어 경제적 불평등의 실체를 이해하고 이를 타개할 구체적 해결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특히 근대적 경제개념에 입각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운동 제시는 탁월한 사회사상이었다. 1926년 발표한 「님의 침묵」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최초의 근대시인, 최고의 시민문인, 저항시인으로 위치하게 하였다. 그는 불교개혁을 통한 사회개혁과 독립투쟁을 병행하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나 독일의 반나치 문학보다 한 차원 승화된 것으로 평가된다. 1930년대 후반기에는 「후회」, 「철혈미인」, 「박명」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노년에 일제의 삼엄한 감시와 경제적 고난 속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면서도 창씨개명 반대와 학병 출전 반대운동을 펼치며 꿋꿋한 지조와 절개로 ‘풍란화의 매운 향내’를 잃지 않았다. 1944년 6월 29일 성북동 심우장에서 66세로 서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수형기록

도움말
수형기록
순번 종류 죄명 처분(주문) 판결기관 판결일 제공
1 판결문 출판법위반, 보안법위반 피고 등에 대한 본건을 관할위로한다(담당할수없음) 경성지방법원 1919-08-01 국가기록원
2 판결문 내란 경성지방법원을 본건의 관할재판소로 지정 고등법원 1920-03-22 국가기록원
3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본건 공소를 수리하지 않음 경성지방법원 1920-08-09 국가기록원
4 판결문 보안법위반, 출판법위반, 소요 징역 3년(원판결 취소), 공소불수리(公訴不受理) 신청은 각하(却下)함, 미결구류일수 360일 본형에 산입 경성복심법원 1920-10-30 국가기록원
5 인물카드 보안법범 - - - 국사편찬위원회
6 인물카드 치안유지법위반 - - - 국사편찬위원회

묘소정보

도움말
묘소정보 1
묘소구분 묘소명 소재지
합동묘역 망우역사문화공원(애국선열묘역) 서울특별시 중랑구
국립묘지 안장자 위치정보 시스템 바로가기

관련 현충시설 정보

도움말
관련 현충시설 정보
순번 종류 시설명 소재지
1 생가 만해한용운선생생가 충청남도 홍성군
2 3·1독립선언 기념탑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3 기념관 만해 기념관 경기도 광주시
4 비석 황극단 전라북도 전주시
5 동상 만해한용운선생동상 충청남도 홍성군
6 기념관 한용운선생 기념관 강원도 인제군
7 3·1독립운동 기념탑 서울특별시 중구
8 기타 한용운 처소( 심우장) 서울특별시 성북구

감사의 글 Total 0
목록 개수

  • 본 사이트 자료 중 잘못된 정보를 발견하거나 사용 중 불편한 사항이 있을 경우 알려주십시오.
  • 이용자의 참여가 사이트 가치 향상에 큰 도움이 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조서는 정부포상 결정당시의 ‘공적조서’를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 독립유공자 공훈록은 공적조서상 근거정보를 기본바탕으로 전문가의 원고집필을 통해 발간된 책을 온라인으로 제공하는 것입니다.
  • 따라서, ‘공적개요(공적조서)과 공적내용(공훈록)’은 원칙적으로 수정불가하며,
  • 다만, 온라인으로 제공되는 기본정보(성명, 생몰일자, 본적지)에 대한 사항은 ‘오류신고’를 통해 신청 가능합니다.
  • 하단의 '오류신고목록'을 이용하시면 신고 내용의 적용여부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오류 신고 시, 개인정보 입력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페이지 별 오류신고
화면(사료)위치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 한용운(관리번호:8862)
*오류 제목
*오류 유형
*오류 내용